4화
“여기는 보존실이야. 너도, 우리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생명유지시스템에 보존된 인물이고. 깨어난 걸 축하해.”
가연이의 따가운 눈초리를 예상했지만, 그녀는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니 괜히 숨길 필요를 못 느낀 걸까?
“보존된 인물이요? 제가 왜 보존된 거죠?”
나와 가연이 서로 마주봤다.
“나호야. 혹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니?”
“예? 으…… 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하,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있던 남자들이 교실로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저를 끌고……. 으… 그 다음은 전혀 모르겠어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잖아…….’
방금 그 말대로라면 나도 가연이도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는 뜻일까? 우리 반은 아니겠지만, 수업시간이었다면 같은 시간대에 끌려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끌려왔단 말인가? 이런 생명유지시스템에 보호를 받기위한 중대한 사태라도 벌어졌단 말인가? 위 4구역 사태만 봐도 우리가 놓인 상황은 필시 상상을 초월하리라 생각된다.
“후우…… 아무튼 이걸로 3번째 생존자도 확보됐네. 남은 건…….”
난 다음으로 열릴 인큐베이터를 쏘아봤다. 나호와 비슷한 시간대에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약 10분 후면 열릴 거다.
“아, 내 이름을 말 안했네. 난 홍가연이야. 같은 1학년이고 저 녀석하고 같은 반이지.”
“그럼 저희 모두 같은 나이란 말이네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런데 걸을 수 있어? 배는 안 고파? 어디 아픈 데는?”
가연이 다짜고짜 나호의 몸 상태를 묻기 시작했다. 같은 여학생이라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 걸까? 가연의 표정이 생기가 돋아 일단은 안심할 수 있었다.
“가연아. 나호를 데리고 대기소에 들어가 있어.”
가연은 내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두 명의 생존자가 남았지만, 두 명의 죽은 자들도 남아있다. 되도록 나호에게 충격적인 장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연과 나호가 들어간 후 5분 뒤, 죽은 시체가 담긴 인큐베이터가 전개됐고, 다시 처참한 장면에 오장육부가 뒤집어질 뻔했다.
난 대기소를 살피며 인큐베이터를 그대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5분 뒤. 드디어 4번째 생존자가 든 인큐베이터가 개폐 프로시저로 이행됐다. 뿌연 수증기 속을 들려다봤다. 그리고 텅 빈 가슴이 먼저 보이자마자 난 환호를 지를 뻔했다. 남자였다. 그것도 아주 건장한 남학생이었다. 난 유리커버를 여는 것도 잊은 채 바로 대기소로 달렸다. 대기소 안에는 가연과 나호가 이것저것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4번째 생존자가 나왔어.”
“정말이야?!”
가연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나호도 근육이 정상적으로 움직여지는지 헐레벌떡 일어났다.
“아. 잠깐 기다려. 이번에는 남자라서…….”
“아…… 응.”
난 주의를 주고 탈의실에서 환자복을 꺼내 황급히 대기소 문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 복부로 날아든 펀치에,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뒤로 자빠져버렸다.
“악!”
“꺅!”
가연과 나호의 짧은 비명이 들린 뒤,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내 목을 압박하는 두 손에 숨이 턱 막혔다.
“뭐하는 거예요?! 그 손 놔요!”
소리치며 남자의 무쇠 팔뚝을 붙잡은 건 가연이었다. 나호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대로 굳어버린 듯하다.
난 눈을 찬찬히 뜨며 나체 차림의 남자를 바라봤다. 날카로운 두 눈빛에 살기가 담겨있다.
‘큭! 이 녀석…… 뭐야! 젠장…… 숨이……’
깨어나자마자 바로 걸을 수 있을 줄이야. 너무 방심했다. 이 녀석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이다.
“너희 뭐지? 여긴 어디고?”
두터운 녀석의 목소리에 가연이 겁먹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얼른 말해! 아니면 이 녀석 여기서 죽어.”
매서운 눈빛으로 단번에 가연과 나호를 제압해 버린다. 이런데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다. 난 필사적으로 녀석의 양팔을 붙잡았다.
‘이 녀석 무슨 힘이 이렇게 세…… 믿을 수 없는 악력이야.’
“호오. 아직도 정신이 남아있나?”
“이… 자식…… 이게… 무슨…….”
“너희, 나이트메어인가?”
녀석이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이트메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나이트메어란 뭘 의미하는 걸까? 아무튼 이 녀석은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를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뻣뻣하게 굳어 수그리고 있던 의지가 용솟음쳤다.
“이 자식… 적당히 하라고!”
악을 쓰며 녀석의 복부를 있는 힘껏 밀어버리자, 녀석의 중심이 흐트러지며 그대로 내 뒤로 넘어가버렸다. 재빨리 일어나 목을 매만지며 대자로 누워버린 녀석을 노려봤다.
가연과 나호는 빨개진 얼굴로 식겁하며 눈을 가렸다.
녀석이 머리를 붙잡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힘겹게 일어났다. 아직 근육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리라.
“이 변태자식아.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야?!”
“뭐 변태? 이게 누굴 보고 헛소리야?”
“그럼 뭐 좀 입고 말하지 그래?”
“안 그래도 입을 생각이야. 너부터 처리하고!”
녀석의 총알 같은 주먹이 돌진했다. 난 재빨리 녀석의 주먹을 피해 그대로 오른팔을 꺾어버렸다.
“악!”
“적당히 하라고 했을 텐데.”
녀석이 자유롭지 못할 때 제압하는 게 순서다. 그대로 어깨를 내려찍고 다리를 걷어찼다.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벌러덩 고꾸라진 녀석이 나를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너. 그 기술……. 뭐하는 놈이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아까 나이트메어라고 그랬는데… 그게 뭐지?”
“쳇! 계집애처럼 생긴 게 힘 좀 쓸 줄 아네?”
내 질문에 답할 생각이 없는지 일말에 주저도 없이 달려들었다. 측면으로 날아든 주먹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차츰 녀석의 몸이 적응하기 시작한 거다.
‘이대로는 오래 못 버텨. 왜 깨어나자마자 이 난리야?’
그때 연신 주먹질을 피하던 몸의 중심이 뒤로 쏠렸다.
“이런!”
“흠!”
입꼬리를 들어 올린 녀석이 온몸을 던졌다. 난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빠졌다. 가연과 나호는 여전히 손을 쓰지 못하고 안절부절 거릴 뿐이었다.
“야! 너희들 그러지 말고 어떻게 좀 해봐.”
“그, 그치만…… 뭘 어쩌라는 거야?”
“뭐든지!”
가연은 얼굴이 새빨개져 망설였다.
“나, 남자 거기…… 처음 봐버렸어요……. 어, 어떡하지…….”
뭐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건지 나호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구석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다음 공격에 대비해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녀석의 팔이 다시금 내 목을 뒤에서 감쌌다. 설마 뒤에서 공략할 줄이야.
“큭!”
내 목을 비틀 기세로 붙잡은 녀석은 결코 놓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난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힘이 점차 빠져나갔다.
그때였다. 어느새 내 앞에 선 가연이 나와 녀석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줘…….”
핏기가 가시는 느낌에 팔까지 저려왔다.
“흠. 너희들 정체부터 말해. 아니면 이번엔 진짜 이 녀석 죽어.”
“하아…… 태범아. 정말 미안해.”
가연이 매섭게 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응? 무슨 소리하는 거야? 이 녀석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가연이 고개를 슬쩍 숙이더니 이를 악물었다.
“미안해. 태범아… 용서해 줄 거지?”
“……뭐?”
그때 가연의 오른발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난 가연의 오른 다리가 향하는 방향을 보고 한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과 뒤이은 무차별적인 고통. ‘으득’소리가 가랑이 사이에서 물밀 듯 퍼져나갔다.
“아아악───!”
나와 녀석의 비명이 동시에 대기소를 뒤흔들었고, 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나호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바닥을 뒹구는 우리를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왜… 나까지…….”
아무리 절체절명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나보다 먼저 바닥을 짚고 일어난 녀석이 가연을 노려봤다.
“이 년이…… 이런 굴욕을……”
녀석의 분한 목청이 알 수 없는 괴성을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나이트메어인지 뭔지가 아니라고. 알아들었겠지?”
“거, 거짓말이야!”
“아니라니까.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 생명유지시스템에 보호를 받아 방금 눈을 뜬 생존자들이라고.”
“뭐? 그, 그럴 리가…….”
눈물을 찔끔 흘린 녀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들었으면 이 옷이나 입어. 변태자식!”
고통이 진정될 무렵. 녀석이 다시 덤벼드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됐지만, 녀석은 더 이상 공격의 의사가 없는 모양이다. 옷을 입고 거북한 듯 분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있었다.
“너 말이야! 그렇다고 나까지 찰 건 없잖아!”
살아있다는 황홀한 기분에 휩싸인 난 가연이한테 소리쳤다.
“네가 아무거나 해보라며. 그 상황에선 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단 말이야. 아무튼 저쪽도 진정된 거 같으니 오케이잖아.”
“뭐가 오케이야?! 난 죽을 뻔했다고!”
“남자가 돼서 자꾸 쪼잔하게 굴래?”
난 허탈감에 긴 한숨을 내뿜으며 녀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거기 너. 이름이 뭐지?”
녀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와 가연을 쓱 훑어보더니 말했다.
“왜 내가 너희한테 이름을 말해야 하지?”
“정말 꽉 막힌 협조성이네…….”
“저기…… 저… 저 학생 알아요……. 강석도라고…… 청운고등학교 1학년 7반일 거예요. 아마……”
그때 나호가 녀석의 이름을 말해버렸다. 서로 아는 사이일까?
“니가 뭔데 남의 이름을 함부로 말해? 너, 나 알아?”
나호가 약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말 좀 부드럽게 할 수 없는 거야? 나호가 떨잖아.”
가연이 몸집이 작은 나호를 쓰다듬으며 화냈다.
“쳇! 이래서 여자들이란…… 아무튼 저 년이 말한 대로야.”
“너도 청운고등학교 학생이었다는 거네? 거기다 나이도 같아.”
가연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반응했다.
“그럼 너희도 청운고등학교 학생인가?”
석도가 경계하는 눈초리를 빛냈다.
“난, 홍가연. 청운고등학교 1학년 5반이야.”
“저, 저는 유나호예요. 청운고등학교 1학년 3반이에요.”
나호가 떨리는 음색으로 말했다.
“아, 쟤도 나하고 같은 반. 정태범이야.”
가연이 내 소개를 대신 해줬다.
전부 같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다. 이 인원이 배치된 것도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난 그보다 석도가 말한 나이트메어가 뭔지 점점 궁금해졌다.
“이봐. 석도라고 불러도 되겠지? 아까도 물었는데 나이트메어가 뭐지? 그리고 니 정체도 궁금하고. 아까 깨어나자마자 움직였던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흠.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아무리 근육이 마비된 상황이라도 난 전력으로 덤볐어. 너야말로 그런 기술은 어디서 배운 거지?”
난 무심코 머뭇거렸다.
“굳이 감출 필요는 없잖아. 태범아……. 이 녀석 생긴 거는 이래도, 학교 다닐 때는 좀 질 나쁜 애들에 속해 있었거든.”
가연이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말했다. 사실 숨길이유는 없다.
“뭐, 경험이 바탕이 됐다고 보면 되려나?”
“흠. 그런 거였나? 이런 놈을 상대로 이 내가 고전하다니. 나도 많이 물러진 건가?”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을 줄이야. 중2병 자식!’
석도의 도발에 분노를 느꼈다.
“미안하지만 난 변태자식을 상대로 지고 싶지는 않거든.”
“누가 변태라는 거야? 애초부터 옷이 없었던 걸 어쩌라고.”
난 앞날이 막막해졌다. 남자가 생존자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건만, 하필 나와도 이런 놈이 튀어나오다니. 아무래도 이 녀석하고는 그리 좋은 사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벌써부터 그렇게 친해지신 거예요? 부러워요…….”
“,“뭐어──!!!!”,”
나호의 악의 없는 말에 나와 석도가 동시에 발끈했다.
“히익…….”
“이 꼬맹이가! 너, 나에 대해선 어떻게 알고 있던 거야?”
“……하, 학교에서…… 봐서…… 그래서……”
“똑바로 말해. 입이 없어?”
“자, 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아까 말한 나이트메어가 뭔지 부터 말해봐. 너는 우리보다 기억이 남아있는 거 같은데. 알고 있는 게 있다면 가르쳐줘.”
가연이 석도를 재주껏 말리며 물었다.
우리의 눈길이 석도한테 쏠리자 그도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단지 알고 있는 기억은 나이트메어란 존재가 무서울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뿐이야.”
“그럼, 뭔지도 모르면서 공격한 거야?!”
“눈을 뜨자마자 요상한 실험실 같은 공간이길래 잠시 이성을 잃었어. 그거에 대해선 사과하도록 하지. 아무튼 나이트메어가 뭔지는 명확하지 않아.”
“무서울 정도로 위험하다……. 나 참, 뭔지도 모르면서 죽이려들다니.”
난 툴툴거리며 한탄했지만 방금 전, 석도의 공허한 살기는 진심이었다. 두렵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덤볐다. 나이트메어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주는 위압감은 여실히 전해졌다.
혹시 4구역 복도에서 벌어진 홍련의 사태도 그 나이트메어란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