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난 마음을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범아, 어디가는 거야?”
“4구역에 가볼 거야.”
“뭐?”
가연의 반응에 사태를 모르는 나호와 석도가 어리둥절했다.
“4구역? 그게 어딘데?”
석도가 굽힌 다리에 팔을 얹은 거만한 자세로 물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생명유지 보존실로 5구역이야. 아마도 지하 5층인 거 같은데 정확한 건 모르겠어. 안 그래도 모두에게 말하려고 그랬거든. 이곳의 비상식량은 기껏해야 몇 달을 버티기 어려워. 즉, 이곳에 영원히 있을 순 없다는 뜻이지.”
“응?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왜 너희는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밖에 나가볼 생각은 해보지 않은 거야?”
석도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모두를 둘러봤다.
“나호는 방금 전에 깨어났기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몰라. 현재 우리를 제외하고 인큐베이터 안의 생존자는 단 한명이야.”
“네?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저렇게 인큐베이터가 많은데 어째서…….”
이 이야기만큼은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말하는 게 났다.
“생존자는 우리를 포함한 인큐베이터 안에 남은 한 명까지 총 5명. 나머지 25명은…… 전부 죽었어.”
나호의 동공이 확 커졌다. 석도는 경악한 듯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눈이 날카로워졌다.
“원인은?”
“영양분 공급 탱크가 당했어. 운 좋게도 우리 4명은 유일하게 영양분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진 제2탱크 덕분에 죽지 않을 수 있었지.”
“30명…… 영양분 공급 탱크가 총 6개였단 말이네. 너희는 문제를 직감하고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는 거고.”
내가 몇 시간동안 생각했던 부분을 단 몇 초도 안 돼서 당도했다. 석도의 통찰력에 제법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다고 여겼지만, 반대로 적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야. 나하고 가연이는 너희가 깨어나기 전에 위층에 올라가봤어. 4구역은…… 살상지대하고 같았지.”
“무슨 뜻이에요? 사, 살상지대라니…….”
나호가 푸르르 떨며 물었다.
“나도 잘 몰라. 단지, 아주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었다는 것만 인지할 수 있었어. 남은 하나의 인큐베이터 개폐 프로시저까지는 앞으로 50분가량 남았어. 거의 1시간 남짓하네. ……너만 좋다면 위에 가서 나름대로 조사해 보고 싶은데…….”
난 그렇게 말하고 머뭇거렸다.
“흠……. 아직 날 못 믿겠다는 건가? 하긴 여자들은 제외하고 둘만 가게 되면 기습에 노출되겠지? 근데 그건 걱정하지 마. 나도 너하고 같은 조건선상에 있어. 괜히 여기서 희생자를 늘려봐야 좋을 건 없어. ……그래도 걱정된다면 모두 같이 올라가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건 싫어. 그, 그런 곳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가연이 거칠게 내뱉었다. 나 역시 그런 피범벅이 공간에 들어가는 건 두 번 다시 사양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확인해야 된다.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해. 누군가는 나머지 깨어날 사람을 지키고 있어야 돼. 너를 신뢰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은 잠시 휴전하는 게 어떨까?”
난 용기를 내 석도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흠. 약속은 원래 깨라고 있는 거야. 얼마나 이 관계가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는 나를 실망시키는 행동은 되도록 삼가주길 바라지.”
그렇게 말한 석도가 내 배려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난 척은……’
정말 귀염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그렇게 까지 우리를 경계해야 될 이유가 있는 걸까? 그보다 아직 석도는 자신에 대해 전부 말하지 않았다. 방금 그 공격기술들. 평범한 길거리 패싸움이 아니다. 전문적인 훈련으로 거듭 연습한 자세였다.
내가 먼저 앞장서 보존실 입구로 향했다.
“태범아…… 꼭 돌아와야 해.”
“벌써부터 죽음 플래그 세울 필요는 없잖아? 걱정 마. 잠깐 확인만 하고 오는 거니까…….”
난 짐짓 미소를 짓고 문을 잡아당겼다.
나하고 석도는 주위를 살피며 덩굴이 만연한 복도를 걸어갔다. 그 순간, 상층에서 발생한 것 같은 진동이 5구역에 전해졌다. 격하진 않았지만, 고요한 적막에 감싸인 5구역에서 충분히 감지되었다.
“이 진동은 뭐야?”
석도가 처음 느낀 진동에 자연스레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모르겠어. 아까도 이런 진동이 몇 차례 있었거든. 아무래도 자연현상은 아닌 거 같아.”
“자연 현상이 아니라고? 네 말대로라면 여긴 지하5층이야. 웬만한 충격은 이곳까지 전해지지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걸 확인하려고 4구역에 가는 거잖아. 이쪽이야.”
난 그렇게 말하며 녹슨 비상문을 열어젖혔다. 난간과 벽, 계단을 타고 자란 덩굴들이 정글 같은 풍경을 연상케 했다. 어두운 층계참을 감각에만 의지한 채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나는 한 번 올라와본 경험이 있어 크게 어려움은 없었지만, 석도는 발을 디딜 때마다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보기보단 참을성이 없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벽과 난간에 손을 짚어가며 우여곡절 끝에 4구역 비상문 앞에 도착했다.
“이 문이야?”
석도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난 말없이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한 무리의 날파리 떼가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석도는 눈살을 찌푸리며 검붉은 선혈이 흩뿌려진 4구역 복도와 마주했다.
“이거 참상인데. 살육전이라도 벌어졌던 건가?”
입과 코를 가린 석도가 먼저 4구역 복도로 들어갔다. 난 헛구역질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조심스럽게 석도를 따랐다.
“너…… 아무렇지도 않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
“흠. 그래봐야 이미 죽은 녀석들이잖아. 죽은 녀석들한테 겁먹을 이유가 없어.”
‘그런 의미가 아닌데…….’
난 내벽을 올려다봤다.
5구역보다도 내벽에 손상이 심각했고, 갈라진 벽면을 비집고 침투한 덩굴과 잎사귀들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하에서 벌어진 사태라 햇빛에 의해 색 바래지 않은 붉은 핏자국은 당시의 참혹했던 광경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시체는 보이지 않지만, 옷가지와 꾀죄죄한 하얀 가운들이 난무하는 걸 봐선 희생자 대부분은 이곳을 관리하는 연구원들이었을 걸로 추정됐다.
“이건 심한데?”
그때 폐쇄된 엘리베이터 앞에서 석도가 태연하게 들어 올린 갈색 뼛조각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시체가 썩어 뼛조각만 남은 거 같은데, 대부분 골밀도가 떨어져 손에 닿는 즉시 부서져버렸다.
“이 참상이 발생한 시각부터 세월이 많이 흐른 거 같아. 이정도면 적어도 수년은 족히 흘렀을까? 나일론 소재의 옷가지들은 햇빛이나 습기가 없으니 그대로 남은 거 같아. 거기다 이 뼈들……. 잘려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그게 크게 중요한 거야?”
비범한 관찰력을 보인 석도가 다시 보였지만, 그게 중요한 건지는 모르겠다.
“당연히 중요하지. 생각해봐. 내가 마지막으로 학교에 있었던 시간은 2102년이었어.”
“아! 그러고 보니……”
그때서야 나도 떠올랐다. 확실히 난 2102년을 맞아 고등학교에서 첫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생명유지시스템에 의해 잠든 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리 시대에선 이런 자상이 남을 리가 없잖아. 날붙이가 멸족한 건 우리 시대에서 약 20년 전의 구석기 시대 이야기야.”
우리 시대의 무기는 화약을 이용한 방식보다 중량은 가볍고 사거리도 높아졌다. 이러한 이점을 살린 탄환을 ‘초전극탄환’이라 불렀다.
“초전극탄환을 이용한 총의 도입으로 보다 정확한 사격과 원거리 공격이 가능해졌지. 하지만, 이 뼈들을 자세히 보면 초전극탄환을 이용한 전투방식이 아닌 구형 날붙이를 이용한 전투장면을 예상할 수 있어. 뼈마디가 완전히 잘려나갔잖아. 거기다 뼛조각 단면도 매끄럽지 않아.”
그때 석도가 덩굴 사이에 꽂혀있던 ‘초전극 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총은 많이 낡아 작동하지 않을 것 같지만, 이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럼, 누군가 구형무기를 가지고 전투를 벌였다는 거야?”
“내 생각에는 그리 많은 인원이 투입되지는 않은 거 같아. 이 4구역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 치고, 초전극 총은 많이 발견되지만, 날붙이로 보이는 건 없어. 전문 암살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
난 4구역 복도 저편까지 펼쳐진 핏자국과 굴러다니는 뼛조각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날붙이로 뼈를 절단할 근력이 인간에게 있을까?”
“보통은 불가능하지. 하지만, 근육촉진제를 먹었다면 일시적으로 나무를 반 토막 낼 힘을 낼 수는 있어. 물론 실제로 이 뼈들이 근육촉진제에 의한 누군가의 근력이 작용한 거라면, 그 암살자의 몸이 성치 않았겠지. 데미지는 고스란히 누적될 테니까.”
“자, 잠깐만 근육촉진제라면 과다한 피로와 마약제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2088년에 생산이 중지된 거잖아.”
“맞아. 이 전투가 발생할 때까지 근육촉진제를 소유하고 경찰의 감시망을 피할 줄이야. 그런 암살자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하지만 이 뼈들의 상흔과 초전극 총을 상대로 암살자가 살아남았다면, 근육촉진제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관찰력을 넘어 웬만한 탐정이 울고 갈 추리에 난 오히려 눈이 가늘어졌다.
“이봐. 강석도. ……어떻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는 거지?”
“배운 만큼 아는 거 아니겠어?”
“아니…… 그건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자주 봐온 듯한…… 경험자의 말투야. 아까 그 기술들도 마치…… 훈련을 받은 듯한…….”
그때 석도가 날렵하게 움직이며 나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쿵!
눈 깜짝할 새라 난 대응도 하지 못했다. 석도가 차가운 눈을 하고선 총구를 내 이마에 들이댔다.
“그 이상 입을 놀리면, 휴전이고 나발이고 없어.”
난 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석도를 노려봤다.
“그 초전극 총. 탄환 없어.”
“탄환이 없어도, 이걸로 내리찍으면 두개골이 쪼개져. 이해되지?”
살을 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 후 석도가 총구를 때며 벌레 보듯 날 내려다봤다.
“흠. 눈빛은 강하네. ……이 이상 나에 대해 참견하지 마. 휴전하는 동안은 친구로 지내면 좋잖아?”
석도의 눈빛은 완전 맹수 그 자체였다. 도대체 어떤 과거가 있던 걸까? 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지금 녀석을 적으로 돌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악수니까.
“그보다…… 이건 도대체 누구의 짓일까?”
“나이트메어.”
난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던 단어를 무심코 내뱉었다. 석도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본다.
“나이트메어가 암살자라는 뜻인가?”
“확실하지 않지만…… 넌 나이트메어가 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두려워했어. 그 정도로 위험한 게 있다면, 이런 상황도 대략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즉, 나이트메어는 인간이고 암살자나, 살인을 전문적으로 맡은 자들의 통칭? 마피아 집단 같은 느낌이네. 흐음…… 일리 있어…….”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석도가 4구역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으로 향할수록 나이트메어에 의한 살육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드문드문 보이던 뼛조각과 핏자국 빈도가 높아졌고, 심지어는 덩굴이 파묻힐 정도로 뼈가 쌓인 곳도 있었다. 뼈가 쌓인 곳은 시체더미가 있던 곳일까? 이 수많은 뼛조각이라면 족히 수십 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의미다. 난 알 수 없는 한기에 온몸을 떨며 석도의 뒤를 따랐다.
역시 가연과 나호를 두고 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녀들이 이 복도와 마주했으면 이미 졸도했으리라.
나와 석도는 수상해 보이는 철문 앞에 섰다. 만지기조차 껄끄러운 피 묻은 손잡이를 돌리고 방안을 둘러봤다. 5구역에 비해 평은 적었지만, 딱 봐도 무슨 작전실처럼 보였다. 정면에 자리 잡은 금간 2D스크린과 간격을 두고 일자로 정렬된 작업 모니터들. 책상 위에는 갖가지 문서와 필기구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다녔다. 혼잡했던 당시 상황을 상상했지만, 다행히도 이 방안엔 참상의 흔적은 엿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