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조롱박 모양의 신 이토모리 호수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그런 기억을 떠올렸다.
희미한 아침 안개 속에서 햇살을 반사하는 그 모습은 한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웠으며, 3년 전 그런 참극이 일어난 무대였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3년 전에 도쿄의 하늘에서 본 혜성이 이것을 만들었다는 것도 왠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바위만 나뒹구는 산 정상에 나는 혼자 서 있다.
잠에서 깨어나니 여기에 있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무심코 오른 손을 바라본다. 손바닥에는 쓰다 만 글씨처럼 보이는 선이 하나 있었다.
“이게, 뭐야……?”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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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오고 나서 도쿄에 도착한 것은 늦은 시간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말자 아빠가 소리를 지른다.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는 것까진 이야기했었지만 전화기가 방전된 것 때문에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을 하셨던 모양이다. 우리 아빠,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나?
그렇게 생각하고 깜빡하고 보조배터리를 챙기는 것을 잊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한 다음, 적당히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아빠는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예, 선생님. 예. 아들 녀석은 무사히 집에 돌아왔습니다. 괜히 선생님에게 민폐를 끼칠, 아. 아닙니다. 걱정 마십시오. 네, 선생님. 바쁘신데 죄송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전화를 끊은 아빠는 거실 소파에 축 늘어져 계시다가 샤워를 마친 나를 보더니 한숨을 크게 내쉬셨다.
“그 정 없던 아들놈이 최근 살갑게 굴 때 이럴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뭔 소리야?”
“타키, 아빠는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어릴 때부터 방치플레이의 달인이었던 주제에.
그렇게 말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소파로 걸어가 아빠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부자가 이렇게 한 소파에 앉아있는 게 얼마만이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아빠, 조금 전의 사람은?”
“응? 아… 너 히다로 간다고 했잖냐? 히다에 아는 분이 계시거든. 음, 너도 어릴 때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날지 모르겠구나.”
“어릴 때?”
아빠의 일 특성상 어릴 때 아빠 지인이라고 만난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다 기억해? 하고 말하니, 그건 그렇지 하고 흠 고개를 끄덕인 아빠는.
“언젠가 밤에 널 데리고 그분을 만나 뵈러 간적도 있었지.”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 같았기에 나는 가만히 아빠의 말을 들으며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어릴 적, 언젠가.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기 전에 아빠가 홧김에 밤중에 날 데리고 집을 나갔던 때.
어디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한참을 잘 졸다가 슬쩍 아빠의 차 창문 너머로 달빛에 비친 아름다운 호수를 보았던 것 같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 너 사모님이랑 잘 놀고 있었잖냐?”
“응?”
“왜, 그러고 보니 너 1년 전인가, 갑자기 나한테 사모님에 대해서 묻지 않았나?”
그런 일이 있었어?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아빠가 하여튼 머리 나쁜 건 누굴 닮았는지. 하고 혀를 차시더니.
“그때 네 녀석 꽤 꼬치꼬치 캐물었었지. 아줌마, 아줌마 거리면서 말이야. 이름도 그때 분명히 말해주지 않았었냐?”
이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나는 무심코 오른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이름.
일一?
“사모님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해줬을 때 너 충격을 받았었던 거 같은데. 그것 때문에 잊고 있었던 거 아냐?”
“뭐?”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에 대해 캐묻자 아빠는 코웃음을 치며 그 날의 기억을 소상히 되새겨 주었다. 1년 인가 전, 아빠가 갑작스럽게 야근을 하게 되었던 때. 겨우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갑자기 아빠에게 어릴 때 만났던 아줌마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이유는 모른다. 어째서 수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아줌마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아니, 지금 떠올리려고 해도 전혀 떠오르지 않지만.
어째서?
어릴 때 딱 두 번 만났다는 그 아줌마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긴, 아마도 긴 검은 머리의.
…….
“미야미즈 선생님도 참 안됐지. 뭐 내가 사돈 남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미야미즈 선생님?”
내가 되묻자 아빠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아빠 은사님이라고 말해 줬잖냐, 전에.”
“이토모리의 미야미즈 신사?”
희미하게 되살아나는 기억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며 보았던 것들을 떠올렸다. 이토모리 호수, 미야미즈 신사, 그리고…….
“그러고 보니 미츠하양 최근에 다시 도쿄로 건너온 모양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타키?”
아빠가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발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는 아직 세탁기에 넣지 않은, 타츠카미(龍神)산에서 입고 잤던 옷가지들이 침대 위에 놓여있다. 정신없이 옷가지들을 뒤졌다.
없다.
아무리 뒤져봐도 없다.
뭐가, 뭐가 없지?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언가, 무언가를 잊고 있다.
나는 지금 본능처럼 무언가를 찾고 있다.
무엇을? 무엇을 찾고 있어?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았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았다.
안 된다.
잊어서는 안 된다.
떠올려야 해.
그 녀석을,
그 녀석의 이름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 시선은 책상과 그 아래의 방바닥으로 향했다.
무언가, 이곳에서.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어이, 타키. 괜찮냐?”
등 뒤로 열린 문 사이로 아빠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어본다.
나는 괜찮다고 말한 다음.
호흡을 진정시키고 아빠에게 물었다.
“전에 말했던, 그 아저씨 딸. 이 주변에 산다고 했었지?”
“응? 뭐, 미츠하 양 말이냐?”
아빠는 별일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갑자기 미츠하양은 왜? 너 관심도 없었잖냐.”
…확인해봐야 해.
“아마 아직 스가초쪽에 있었던 것 같은… 야, 타키!”
아빠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미 집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10월 말의 선선한 날씨가 나를 반겨주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대로 격렬한 속도로 맨션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질주했다.
익숙한 거리를 달려 기억 속에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래, 기억 속에 있는 곳.
어째선지 나는 당신을 기억하는 것을 주저하고 말았지만.
분명히, 거기에는 가본 적이 있었어.
거리의 네온사인이, 막 지나친 요츠야 역 인근으로 불빛들이 아련하게 빛난다.
그런 밤거리를 나는 반팔을 입은 체 전력 질주했다.
아닐 수도 있다.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결국 스가초까지 도착하고 말았다.
침착하게 기억을 떠올려가며 맨션을 찾는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잊어서는 안 될, 얼마 되지 않은 기억.
“네가, 또 내가 알기 전에… 나를 만나러 왔던, 그곳.”
그렇게 서로 알기 전에 만나러 오지 말라고 했건만.
너는,
무심코 웃음을 지으며 나는 결국 어느 맨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는 2년 전,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아마도, 너와도 마주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땐 알아보지 못했지만.
침착하게 그녀의 방에 불이 들어와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대로 걸어가 문 앞에 선다.
스가초의 작은 맨션, 202호.
문 앞에 붙어있는 명패는, 미야미즈(宮水).
너와 만나는 것은, 하루 만일까?
삼년만일까?
아니면, 일 년? 이년만? 도대체 얼마만일까?
무수한 일들이 있었다.
그것을 모두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누고 싶었다.
너와 있었던, 너와 나누었던 그 짧으면서도 긴 추억에 대해서.
문을 두들겼다.
정다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하고 문을 연 너에게 나는.
“좋아해.”
-너의 이름은. SS. The blank of 3 years.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