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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만남-1


 “그건 걱정하지 마. 나는 이 학교에서 가장 안전한 남자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유라는 소리를 확 지르고 자신의 몸을 지키듯 감싸 안았다. 그 모습에 재신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깊은 한 숨을 내쉬고는 담담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잘 안 서.”

그가 한 말은 남자로서의 자존심 상실을 의미했다.

“안, 안 선다는 건?”

유라는 안절부절 못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 그대로야.”

재신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그 부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에 맞춰 유라의 시선 또한 [그 부분]으로 이동했다.

재신의 [그 부분]은 그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하고 평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라가 보기에는 변하는 점이 없다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기에 재신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유라는 강렬한 의심의 눈초리로 재신을 쏘아 보았다. 불신감이 역력했다.

그 눈빛은 만약 도M인 사람이 보다면 [그 부분]은 반응하고도 남을 정도의 경멸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신은 M성향이 조금 있지만 그런 눈빛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말하고 있는 [진실]에 일말의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당당하게 엄지와 검지 사이에 바지춤 껴놓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딱 5분간 보여준다면 믿을 거야?”

“돼..됐어요!”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진 유라는 머리를 좌우로 연신 흔들며 극구 거부했다. 그 반응을 재신은 재미있다는 듯이 보며 웃었다.

“푸하하핫…… 아 웃음 참느라 혼났네. 미안, 미안 반응이 재밌어서 좀 놀려봤어. 농담이야.”

재신은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춤에서 손을 뗐다.

그 직후 유라는 재신에게 성큼 성큼 다가가 ‘콱’ 하고 있는 힘껏 그의 오른발을 밟았다.

재신은 그 충격에 바로 괴성을 지르며 발을 들어 올렸다.

“뭐하는 짓이야!”

유라는 혐오감 가득한 목소리로 “놀린 벌인데 무슨 불만이라도?” 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유라였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재신은 거듭 사과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분위기가 풀어졌을 쯤에 재신은 다시 한 번 입을 놀렸다.

“그래도 잘 안 선다는 건 사실이야.”

“또……”라고 말하면서 유라는 화를 내려고 했다. 다만 뒤를 돌아 재신의 표정을 봤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그의 표정은 마치 더 이상 서지 않는 심영과도 같은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

“…….”

“왜 그렇게 됐냐고 물어봐도 될까요?”

둘 사이에서 흐르는 고요한 정적을 깬 사람은 유라였다.

재신은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사적인 이유야. 묻지 말아줘. 슬퍼지니까.”

유라는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애초에 선배가 먼저 말하셨잖아요.”

“아니지, 네가 먼저 죄 없는 나를 변태라고 불렀잖아. 그게 나 같은 남자한테 얼마나 실례되는 말인지 알아?”

“선배 같은 남자가 뭔데요?”

재신은 곰곰이 생각하다 “일편단심 민들레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순수한 사람” 라고 말했다.

“순수하긴 뭐가 순수해요! 제 가…… 가슴 만졌잖아요!”

유라는 자신의 가슴을 양 팔로 가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불만을 토했다.

“아니지 그건! 네 몸으로 만졌으니까 노카운트지!”

재신 또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며 불만을 토했다.

“어쨌든 만졌잖아요! 네? 그 점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잖아요!”

확실히 반박할 수 없었다. 설령 자신의 몸이 만지지 않았더라도 재신의 머리는 유라의 가슴을 만진 촉감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재신은 초조함에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가 분기점이다. 여기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변태가 되거나 평범하고 평범한 선배가 된다. 그렇게 생각한 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으리라.

“사춘기 남학생으로써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고 생각해!”

어떻게 보면 재신의 말은 명안 이였지만 현 상황에서는 유라의 도화선의 불을 붙이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재신은 이 날, 말을 생각 없이 휙, 휙 내뱉으면 어떻게 되는지 유라의 주먹 덕분에 알게 되었다.

재신은 ‘도대체 왜 내가 처음 만난 후배에게 이렇게 열렬한 환영인사를 받아야하지.’라고 생각하며 어제의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어제, 정확하게 4월 6일 목요일, 이 날은 재신에게 있어 참으로 기묘한 날이 아닐 수 가 없었다.

지각이라는 단어가 사전에 없는 재신은 그 날 난생 처음으로 지각을 경험했고 뿐만 아니라 지각생이 많기로 유명한 재신의 반에 재신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지각하지 않아 재신은 종례가 끝나고 나서 혼자 교실에 남아 벌청소를 해야만했다.

“왜 아무도 지각을 안 한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청소를 끝마치고 있던 중 도저히 좋다고 느낄 수 없는 꽃샘추위의 바람이 교실 창문을 통해 들어와 교실 뒤편에 모아 두었던 쓰레기들을 날려 보냈다.

그 광경을 보고 재신은 ‘아차’ 싶어 서둘러 열려 있던 교실 창문을 모두 닫았다. 그리고 한 숨을 크게 내쉬며 학생 한 명 없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듯한 교실을 묵묵히 다시 쓸었다.

청소를 끝마치고 뒷정리를 시작하려든 찰나에 교실 앞문이 ‘드륵륵’ 하고 열렸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들어와 교실을 훑어보고는 하는 말이……

“아무도 없네.”

“선생님, 한 명 있거든요.

그 사람은 그제야 눈치 챘다는 듯이 재신을 바라보고는 헤프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머, 어머 신이 아니니. 미안하다. 눈치를 못 챘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머리에 작게 꿀밤을 때리고는 “데헷”하며 혀를 쌜쭉 내밀었다.

순간, 꽃샘추위 보다 더 차가운 냉기가 재신의 뼈 속 깊은 곳 까지 침입했다. 소름 돋았다.

“선생님, 학생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이셔도 괜찮은 건가요?”

재신은 반쯤 죽은 눈으로 말했다.

선생님은 그런 재신에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살며시 다가갔다.

“뭐 어때 우리 사이에.”

“선생님, 제가 아무리 연상 취향이기는 하지만 사촌이면서 30대 초반인 여성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 오해를 부르는 표현은 제가 아닌 남자 친구한테 하세요. 아, 헤어졌지…….”

재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화는 빠르게 재신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악​!​!​!​”​ 재신의 뇌가 흔들릴 정도였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끔찍한 일을 기억나게 하는 거야!”

선화의 눈이 뱅글 뱅글 돌고 있었다.

‘이 선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 하지 않으면……. 이러니 남자가 도망칠 만도 하지 아니 애초에 어떻게 선생이 된 거야.’

만31세, 수곡중학교 3학년 11반, 재신의 담임선생님인 이선화는 어깨춤까지 내려오는 연갈색의 세미 롱 헤어, 보드라운 분위기에 흰색 니트와 얇디얇은 다리를 강조시켜주는 새파란 청바지로 학교에서도 과감하게 패션센스를 과시해 평소 수곡중의 얼굴마담이라고 많은 학생들에게 불린다.

그러나 본모습을 아는 재신의 입장에서는 선화에게 환상을 품은 학생들이 안쓰럽기만 했다. 물론, 선화가 치마를 입었을 때 내보이는 희고 고운 다리의 파괴력이 장난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선화는 곧 제정신을 찾아가는지 재신을 흔드는 속도를 점차 줄였다. 이내 선화는 재신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신아 청소 다 끝냈으면 같이 가자. 데려다 줄게.

“싫어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왜! 밥도 사줄게!”

재신은 머리를 긁적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선생님 저녁은 집에서 재연이랑 먹기로 했는데요.”

선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걱정 마, 재연이에게 문자해뒀으니까.” 라고 말하며 바지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조작하더니 재신의 쌍둥이 여동생인 재연이와의 문자 기록을 보여줬다.

{선화: 재연아 오늘 재신이 좀 빌릴게.}

{재연: 맛있는 거 챙겨서 보내주세요.}

{선화: 오케이 ^^}

재신은 눈앞에 보이는 문자기록을 확인하고는 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선생님 어차피 쓰잘데기 없는 전 남친 뒷담화 하실 거잖아요.”

선화는 손을 저으며 “아니야. 다른 얘기 할 거야.” 라고 말하면서 재신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당기면서 교실에서 나갔다.

재신은 질질 끌려가면서 말했다.

“선생님 잠깐만요! 가방이요! 가방!”

“빨리 준비해.”

 

그 후 , 그 둘은 선화의 자동차에 타서 구미교에서 좌회전, 무지개 사거리에서 쭉 직진한 후 용인에 들어섰다.

차 안에서 바깥 풍경만 보고도 재신은 어느 식당으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영업정신이 너무 투철하신 거 아니에요?”

“미안, 미안. 그래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거니까 우리 가게가 좋잖아.”

그렇게 말하고는 사거리에서 급하게 좌회전을 했다.

조수석에 앉아서 그런지 재신에게 급커브의 진동이 재신에게 직격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안전운전 좀요!”

“네이, 네이”

선화는 일체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오히려 재신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런 선화에게 열 받아 재신이 궁시렁, 궁시렁 거리기를 몇 분, 차는 어느새 한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차에서 나와 가게를 보니 작은 나무 팻말에 [화란] 이라고 적혀 있었다.

선화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중국 요리 전문점 [화란]은 평소에 싸고 맛있다는 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확장을 하지 않고 소규모로 운영하기 때문에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가게였다.

다만, 선화와 동행하게 된다면 선화가 독립하기 전에 사용했던 방으로 가 선화의 부모님이 짬을 내서 미리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선화가 부모님에게 미리 연락을 드리지만 폐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재신이 이 곳에 오는 건 이번이 세 번째이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 선화는 학교에서 가져온 가죽 백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다 재신의 시선을 눈치 채고는 얼굴을 붉히며 방안에 들어갔다.

선화는 방구석에서 방석을 꺼내 먼지를 털고 재신에게 줬다. 재신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깔고 앉았다.

“선생님 설마 저번처럼 성적 얘기 하시려는 건 아니죠?”

선화는 손을 저으며 “아니야.” 라고 말하더니 가죽 백에서 어떤 종이를 꺼내 식탁으로 위에 올려놨다.

그 종이에는 [진로 희망 조사서]라고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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