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게임은 좋아하세요?]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따분했다. 어느 동네에나 한 두개쯤은 있을법한 평범한 국공립 인문계 고등학교. 가현 고등학교의 2학년 4반에 재학중인 한영욱은 책상에 턱을 괸 채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했다.
"으하―아암."
토요일의 4교시. 일주일의 마지막 수업도 막 지나가고 있었다. 수업 종료를 9분 정도 앞둔 채, 착 가라앉아 있는 교실의 분위기는 마치 손님 없는 장례식장을 연상케 만들 정도였다. 학생들의 태반은 공포 영화에나 등장하는 좀비라도 되는 것처럼 책상위에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도 몰래 숨켜둔 소설이나 만화책을 읽고 있거나, 귀에 MP3의 이어폰을 꽂은 채 고개를 까딱거리며 음악감상 중. 하지만 그런 절망적인 수업 참여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탁 앞에 서 있는 중년의 남자. 38세 독신. 가현 고등학교의 악명높은 수면의 마술사. 한자 교과를 담당하고 있는 김혁주는 담담하게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교과서 43페이지. 아래서 두 번째 줄에 밑줄을 긋도록, 이 부분은 중간 고사때 시험문제로 낼 테니까."
영욱은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샤프로 교과서에 밑줄을 지익 그었다. 교과서 대로의 수업은 지루하고 교실의 분위기가 이래서야 의욕적으로 공부를 할 마음이 들 리가 없다. 교과서에 밑줄을 치는 행동 역시 그냥 형식적인 것 뿐으로, 교실 앞쪽의 칠판에는 필기를 해야 할 내용들이 꽤나 적혀 있었지만 교과서 옆에 펴 있는 노트의 페이지는 마치 새로 산 것처럼 깨끗했다.
"빨리 안 끝나나. 집에 가서 어제 하던 거 마저 끝내야 되는데."
영욱의 바로 앞 자리, 빨랫줄에 걸린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던 남학생이 중얼거렸다. 아마도 얼마 전 구입했다고 하는 게임의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째깍 째깍 하고 시간이 지나간다. 수업 종료까지 6분 그리고 5분. 약속된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학생들은 마치 사령술사(네크로맨서)가 불러일으킨 언데드 몬스터들처럼 불규칙적으로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런 광경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흝어보며, 혁주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
"선생님!"
그 때 조용했던 교실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교실에 울려퍼졌다. 자연스레 교실의 시선이 순식간에 한 점으로 쏠린다. 영욱도 슬쩍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살짝 치켜올라간 눈매에 조금 경박해 보이는 외모를 가진 남학생이 교실 천장에 구멍을 뚫을 기세로 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손을 들고 있는 학생은 현욱도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조금 소란스럽고 사고뭉치지만 그래도 미움받지 않는, 어디를 가나 한 명 정도씩은 존재하는, 요컨데 분위기 메이커라는 녀석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름이―
"질문이라도 있나? 최용일."
최용일이라 불린 학생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뭔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결의로 가득 찬 표정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조금만 일찍 끝내주시면 안 되요?"
"일찍 끝내주시면 안 되요?"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처럼 교실의 학생들이 따라 말한다. 방금까지만 해도 죽은 것처럼 조용하던 녀석들이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되자 활기를 되찾은 모습을 보며, 혁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헛' 하고 작게 소리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싸!"
"우랏차차차!"
"잇힝!"
교실에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용일은 우쭐한 표정으로 기뻐하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손으로 슬쩍 V자를 그려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담임이 개인적인 사정 떄문에 출근을 하지 못했다던 모양이다. 다시 말해 그 귀찮은 종례가 없다는 이야기. 그래서 평소 수업을 일찍 끝내줬을 때 보다도 더 들뜬 것 같았다.
"너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쁘구나."
책상 위에 꺼내져 있는 교과서를 정리하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훈훈한 미소의 혁주가 말했다.
"하지만 난 수업을 끝낸다고는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럼 이어서 교과서 44페이지, 아래서 둘째…."
학생들의 야유소리에도 불구하고 혁주는 수업을 묵묵히 진행했다.
결국 마지막 4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수업은 계속되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의 숙제와 함께 혁주는 학생들의 원망이 섞인 수근거림을 뒤로 한 채, 앞문을 통해 교실을 빠져나갔다. 혁주가 빠져나가자 반의 아이들은 제각기 모여서 집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욱도 책상 위의 교과서와 공책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이, 벌써 돌아가는거냐?"
"응?"
고개를 들자 눈 앞에는 키가 껑충한 남학생이 가방을 어깨에 대충 걸쳐맨 채 영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인 조민혁이다. 중학교 부 활동에서 처음 만난 녀석으로, 남자 치고는 선이 가늘고 기가 약한편인 영욱과는 생김새도 성격도 전혀 닮은 곳이라곤 없었지만, 어찌저찌 마음이 맞아 아직까지도 절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아마도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과, 취미가 겹치는 것도 그 이유중 하나일것이다. 170cm도 안되는 조그만 영욱으로써는 180cm에 가까운 민혁을 보기 위해선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이미 익숙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올려다보기에 불편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영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민혁은 맥이 빠진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는거야. 토요일이라고? 이런 날은 함께 VR룸이라도 놀러가야 되는 거잖아."
"VR룸?"
버츄어 리얼리티 룸(Virtual Reality)이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다들 그냥 VR룸이라고 짧게 줄여서 부르는 듯 했다. 몇 년 전부터 상용화되기 시작한 가상 현실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게임이나 서비스등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시설이었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많은 PC방들이 유행을 따라 VR룸을 병행하거나 아예 VR룸으로 전향해 버리면서 어느 동네에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단말기의 가격때문에 집에서 VR을 즐기기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학생들에게 특히 인기만점…이라는 모양이다.
그래도 PC방에 비해 비싼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돈 없으면 빌려줄게. 응? 안 갚아도 상관없어. 예전에 빌렸던 것도 있고…."
물론 가고 싶긴 하다.
주머니에 돈은 없었지만 빌려준다고 하면 굳이 거절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영욱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 나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바로 돌아가봐야 될 것 같아."
"뭐야, 약속? 그럼 별 수 없지만…, 헤― 그나저나 이런 주말에 무슨 약속이야? 재주도 좋지. 말하기 곤란한 게 아니라면 내게만 살짝 알려 줄 수 있어?"
입을 헤벌쭉 벌리는 민혁을 보며, 영욱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기대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별로 대단한 건 아냐. 그냥 동생이랑 같이 장 보기로 했거든. 마트 시간제 할인한다고."
민혁은 조금 맥이 빠진듯한 표정으로 혀를 내밀었다.
"그런건가― 정말 '별로 대단' 한 일은 아니네."
"응, 그러니까 VR룸은 나중에 가자. 나 먼저 돌아갈게?"
가방을 어깨에 매며 의자를 정리하는 영욱을 보며 민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구랴. 너, 정말 동생한테 잡혀 사는구나."
몸을 돌려 교실의 뒷문을 향해 걸어가던 영욱은, 슬쩍 고개를 돌려 민혁을 바라보았다. 손을 휘적휘적 흔들고 있는 민혁을 향해 살짝 손을 들어 마주 인사하며,
"어쩔 수 없잖아. 동생인걸."
"이 시스콘 녀석!"
"어째서!?"
비비비― ―
비비비비― ―
교복 바지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던 것은 교문을 막 나설 때였다. 문자가 와 있었다. 발신자는 낯선 전화번호. 영욱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보는 번호에서 문자가 왔다는 것은,
"또 스팸 문자인가. 요즘들어 특히 심하네. 차단이라도 해 둘까―."
꾹 꾹 버튼을 눌러 문자를 확인한 영욱은 고개를 살짝 갸웃였다. 예상하고 있었던 성인 사이트나 대출 회사의 스팸 문자가 아니었다. 핸드폰의 액정 위에 떠올라 있는 사각의 텍스트 박스 안에는 '축하합니다☆' 라는 인사말로 시작하는 짧은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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