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재킷 1화
'간단하게 조사해 본 바로는 너는 그 세 배 이상을 죽였어.‘
-긍정.
난 수많은 자들을 이 손으로 죽였다.
‘이유가 뭘까. 그런데도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잖아. 카나메 양에게도. 100명 이상이나 사람을 죽인 네가. 그런 걸 다들 알면서 너를 대하는 걸까...... 이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긍정.
내 정체를 모르기에, 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난 언제라도 내가 용병이라고, 살인자라고 모두에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왜냐.
결국 난, 두려웠던 거다.
“역시 무리라고 생각해. 순순히 항복하는 게 제일 나아......”
‘그 세계’를 상징하는 카나메가,
모든 희망을 잃은 모습을 보는 것을.
자, 상황을 정리해 보자.
15분 전, 공원에서 아말감과 접전을 벌이며 카나메에게 진짜 전장의 모습을 보였다.
5분 전, 카나메는 소스케가 적과 마찬가지로 무섭다고 말했다.
3분 전, 폭탄에 결박된 토키와 쿄코의 사진이 카나메의 핸드폰에 전송되었다.
1분 전, 소스케는 카나메에게 ‘나와 너라면 모두를 구할 수 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대답은 나왔다.
“……………”
카나메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소스케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쿄코의 몸에 폭탄이 묶여진 사진이 휴대폰으로 전송된 직후, 카나메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방금 그가 카나메에게 했던 말은, 형태는 달라도 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사이자 사립 진다이 고교의 학생으로서, 그는 모든 것을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자신의 세계도, 카나메의 세계도. 카나메가 옆에 있다면, 여태까지처럼 그녀가 자신을 지지해 준다면,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죽은 눈동자를 바라본 소스케는 그것이 낙타 등에 얹은 지푸라기였음을 깨달았다. 극한의 궁지에 몰린 그녀는 과거 홍콩까지 날아와 소스케를 걷어찼던 그 패기를 완전히 잃고 있었다.
그때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은 건 인정한다. 지금은 쿄코가, 더 나아가 진다이 고교 전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소스케 하나만 건사하면 되었던 홍콩에서와는 규모가 다르다. 지원군은 깨끗이 섬멸당했고, 본부와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문득 소스케는 고군분투하고 있을 또 한 명의 소녀를 떠올렸다. 애시 블론드를 출렁이며 바쁘게 전투 지시를 내리고 있을 작은 소녀. 그녀라면 지금의 자신에게 뭔가 조언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급조된 천재인 카나메와 달리, 훈련받은 천재인 그녀는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해 줄 것이다. 매서운 표정으로 모든 지시를 내리고 상황을 무사히 종료시킨 후, 그제야 어깨의 힘을 풀고 소스케에게 살짝 어리광을 부리겠지.
하지만 그녀는 지금 여기에 없다.
소스케는 고개를 흔들어 그녀의 이미지를 쫓은 후, 최대한 냉철하게 생각해 보았다.
99명의 사람과 그 99명만큼이나 중요한,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한 사람.
이 둘 중 하나를 지금 선택해야 한다.
현실은 그러할진대, 머릿속에선 자꾸만 유혹이 속삭였다.
-둘 다 구할 수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모두를 구한다? 그가 방금 전 카나메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때의 그는 실낱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카나메가 무너진 이상, 그는 더 이상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냉철한 이성을 기분 좋게 마비시켜주던 그녀가, 이제 와서야 그를 다시 냉혹한 현실에 내팽개쳤으므로.
그래, 지독하게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맞다. 그는 전장에서도, 진다이 고교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접했다.
그렇지만.
과연 그들을 탓할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소스케는 탓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무언가를 두려워했던 그들의 감정을
바로 지금, 한꺼번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자신도, 결국 동류로 전락해 버린 것인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자신은 평생 이때의 선택을 후회하리라고,
소스케는 예감했다.
“시간이 없어. 가자......”
치도리는 힘없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과 하루 전의 그녀였다면, 자신만만하게 쿄코를 구하고 진다이 고교에서 악당들을 물리치자고 외쳤을 것이다. 그리고 위스퍼드다운 빠른 상황판단으로 소스케를 물심양면으로 백업해줄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저 인질 이상의 가치가 없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런 그녀가 그 자리에 간다 한들, 쿄코에 이은 인질이 되는 것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겠지.
“기다려라, 카나메.”
소스케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잠깐 동안 그는 카나메의 쥘부채가 날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아니, 차라리 홍콩에서처럼 그를 내팽개치고 ‘이건 내 영혼의 고통이야!’라고 울부짖으며 주먹을 휘둘러도 좋았다. 그때 그는 그녀를 냉정하게 쳐냈지만, 그녀는 고작 그 정도로 자신을 용서해주고 힘을 주지 않았던가. ‘얼른 가서 정리하고 와!’라며 등을 밀어 주었기에, 그는 그 절망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팔 안에서 소녀의 육체는 무력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의 진짜 이유를, 소스케는 잠시 후에야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다시 한번 구원받길 바랐던 것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절망에 빠진 카나메에게?
아, 그런 것이었나.
소스케는 그 순간 그녀에 대한 기대를 깨끗하게 접을 수 있었다.
덕분에 결단은 신속했다.
그가 품에서 꺼낸 스턴건이 카나메의 복부를 찌르자, 그녀는 곧 침묵했다.
그녀에게 진정 효과가 있는 약물을 주사하고, 그녀의 호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카나메를 건물 옥상에 눕혀두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녀를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길 시간 따윈 없었다. 카나메를 잠시 바라보다 등을 돌린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자신의 기체, <아바레스트>에 올라탔다.
“가자, 알.”
그의 애기는 움직이는 대신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중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미스 치도리는 여기에 방치합니까?>
“그렇다. 잊어도 좋아. 우린 진다이 고교로 간다. 기체의 센서로 교내의 폭탄을 찾아 제거한다. 그리고…… 아니, 됐다.”
‘토키와를 구한다.’는 말을 그는 속으로 삼켰다. 한없이 불합리하고 어리석을 그 선택을 지금 입밖에 낼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간절한 소망이라 해도.
하지만 아바레스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불합리한 선택입니다. 재고를 제안합니다.>
“기각한다.”
<폭발물을 무력화해봤자 적은 같은 일을 반복할 겁니다.>
폭탄 따위 신경쓰지 말고 적을 전멸시켜라. 앞서 죽어간 동료들의 복수다. 잠시 알게 된 토키와보다 그들과의 인연이 더욱 깊지 않았나. 비전투원의 사상이란 늘상 있는 일이다. 게다가 여기까지 와서 학교로 돌아갈 생각 따위 할 수 있겠나. 전사로서의 자신이 냉철하게 조언을 내렸지만 그는 이를 외면했다.
“……그땐 적을 저지한다.”
<불가능합니다.>
“가능하다.”
<불가능합니다.>
“더는 방법이 없다.”
마지막 말은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이를 알았는지 알은 침묵했다.
소스케는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건물 뒤에 기체를 숨긴 후 불가시 모드를 해제하고 카나메의 휴대전화를 조작했다. 기체 조종보다 메일의 내용을 생각해내는 쪽이 몇 배는 더 어려웠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끝에 그는 결국 메일을 완성했다. 진다이 고교의 인간이 얼마나 죽든 자신은 임무를 더 우선시하며, 치도리 카나메가 너희에게 넘어갈 위험이 생기면 그녀를 사살하란 명령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구역질이 나는 내용에 덧붙여, 3분 안에 답이 오지 않으면 ‘명령’을 실천하겠다는 협박을 끼워넣었다.
송신.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곧 귀여운 벨소리가 기체에 퍼졌다. 학교에서, 그녀의 집에서, 자신의 집에서 걸핏하면 들었던 그리운 소리였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그 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전화를 받자 전자음으로 가공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의 요구는 뭔가.”
“내 몸의 안전, 그리고 도주 경로 확보다. 그쪽에서 말한 대로 한다면 내 안전을 보장할 길이 없으니까.”
미리 시뮬레이션해둔 대로 침착하게 말했다. 비굴한 어투를 섞는 걸 잊지 않았다.
“뭘 모르나 보군. 폭탄을 하나 터뜨려 볼까.”
소스케의 예상대로였다. 처음 접하는 상대였지만, 대응 가능한 반응을 해 줬다는 점에선 감사할 정도였다. 물론 저 자가 폭탄을 터뜨리지 못할 만큼 실행력이 떨어진다고 단정지은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스케는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교섭 결렬이다. 좋을 대로 해라.”
말을 하기가 무섭게 전화를 끊었다. 잠깐 사이 엄지손가락에 땀이 배어, 하마터면 버튼을 잘못 누를 뻔했다.
적 또한 자신처럼 초조하겠지. 아무리 거대한 조직이라도 일본처럼 치안이 안정된 나라의 한복판에서 학교를 점거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이들은 카나메를 받는 즉시 퇴각할 계획으로 왔을 것이다. 전면전은 이들에게도 최악의 선택이 될 터였다. 그러니 학교 안에서 모든 걸 종결지어야 한다.
다행히 그에겐 아직 도움을 청할 만한 조력자가 학교 안에 있었다. 곧 올 전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전화를 하는 대신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전송했다. 한 사람에게,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또 한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 둘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당연히 그들에게도 위험이 따르겠지만, 그들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작전을 성공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넣은 그는 신속하게 <아바레스트>에 명령어를 입력했다. 그의 조종 없이 <아바레스트>가 진다이 고교 근처까지 은밀하게 이동하는 게 포인트였다. 그동안 거짓 항복 등의 수단으로 교섭 시간을 늘리고, 저들을 방심시킨다. 이후 소스케는 진다이 고교 주변의 감시자들을 척살하고, 이어서 <아바레스트>의 전파 방해 장치를 최대 가동한다. 그로 인해 폭탄을 쓸 수 없게 된다면 최우선 표적은 자신이 아니라 <아바레스트>가 되겠지. 그렇게 적들의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그 사이 토키와를 구한다는 게 그의 작전이었다. 급히 짠 작전은 <아바레스트>의 심대한 출혈을 강요하는 것이었지만, 더 좋은 작전을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약속한다, 카나메. 반드시 토키와를 구해 네게 돌아가겠다.”
핏발 선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며 소스케는 나직하게 결의했다.
하지만.
클러머란 남자가 자신의 이해 밖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어찌 알았으리오.
누군가 하늘에서 진다이 고교의 옥상을 보았다면 ‘레옹이 있어!’라며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손가락질을 받은 클러머는 무심히 총을 들어 그 자를 격추했을 것이다. 레옹을 닮은 건 인정하지만, 그딴 이유로 손가락질받는 건 그의 프라이드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고등학교 하나를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것은 작전 책임자인 클러머의 권한을 벗어나지 않는 행위였다. 버튼을 누르면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실에서 쾌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학교를 무너뜨리거나 말거나, 이는 그에게 별 의미 없는 행위였다. 그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행위는 오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나치는 과정들 뿐이었다.
마조히스트도, 휴머니스트도 아닌 클러머였기에, 그는 지금 막 끊어진 전화를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곧 판단했다.
이건 허세다.
소스케가 역전의 용병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홍콩 사건 당시, 마지막으로 한 말이 아말감의 기록에 남아 있었다. 진다이 고교의 쓰레기통 담당이라고 당당히 선언한 그 자가 아무 망설임 없이 친구를 저버릴 리 없었다. 그렇다면 노림수는 무엇인가. 아마 자신을 방심시킨 후 기습을 가하려는 목적이겠지. 혹시 내친김에 폭탄을 둘둘 감고 있는 저 여자아이 - 폭탄을 두른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쿄코 - 를 구할 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부하를 그렇게 많이 죽였으면서도 여자아이 하나를 구하러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온다니, 농담도 이 정도면 불쾌했다.
무엇보다, 그는 소스케를 흔들어놓을 최적의 방법을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클러머는 전화기를 들어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전화기를 스피커폰 모드로 바꾼 후, 쿄코의 얼굴에 가져갔다.
한참의 신호음이 지난 후에야 저쪽에서 받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말해라.”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냉정한 목소리를 듣고, 애써 침착을 유지하던 쿄코가 눈물을 왈칵 쏟으며 외쳤다.
“소스케! 도와줘!”
“……!”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소스케는 하마터면 크게 외칠 뻔했던 자신을 간신히 억제할 수 있었다. 지금 대답을 하면 흔들리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노출되어 버린다. 쿄코가 도와달라고 몇 번이나 외쳤지만,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카나메를 데려오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이윽고 쿄코의 외침이 조금 멀어졌다. 소스케는 피가 줄줄 흐르는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클러머의 말을 기다렸다.
“방금 전화를 끊은 건 꽤 불쾌했다. 게다가 가련한 아가씨의 외침에도 반응하지 않는군. 네놈은 교섭인으로서도, 남자로서도 실패한 녀석이다.”
“말싸움하는 취미는 없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알았다. 그 전에 유익한 충고를 하나 하겠다, 사가라 소스케.”
보이지 않았지만, 질척한 죽음의 기운이 소스케가 든 전화기 너머에서 전해졌다.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역으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까, 라는 망설임. 이는 고작 1초 가량 소스케의 사고를 멈추게 했다.
그래, 고작 1초에 불과했다.
“진다이 고교에는 아직 인질 후보가 많이 있지.”
클러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퍽!’하는 소리가 났다. 묵직하고 둔중한, 그러면서도 최대한 억제된 파괴의 소리. 바로 출력을 최소화한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소녀의 비명이 한순간 그 속에서 발해지고, 곧 스러졌다.
소스케의 머릿속에서 그간 쥐어짜낸 전략들이 모조리 날아갔다.
“토키와!”
소스케는 전화기를 움켜쥐며 절박하게 외쳤다. 전장에서라면 일어날 수 없는 행위였다. 군인으로서 오랜 세월 받아온 훈련과 습관은, 그간 어떤 상황에서도 ‘전술적으로 불리한 행동’을 막아 주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 그는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충격은 그런 훈련과 습관마저 별 것 아닌 것처럼 날려 버렸다. 아니, 오히려 쿄코가 눈앞에서 당했다면 냉정을 유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으로 보지 못했기에, 그래서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그가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처음부터 인정했어야 했다. 쿄코는 인질이었고, 목숨을 저당잡혀 있었다. 그런 그녀를 혼자서 구출해내는 작전을 짜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카나메를 숨긴 후 자신이 대신 인질로 잡히고 시간을 끌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녀석의 살기를 눈치챈 순간 작전을 급히 변경했어야 했다. 그럴 여유는 찰나였지만 분명 존재했다. 소스케는 도저히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돌연 가슴에 격통이 느껴졌다. 심장이 여느 때와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아바레스트>를 끌고 쳐들어가고 싶은 욕구와, 그랬다간 진다이 고교 전체를 날려버릴지도 모른다는 자제심이 심장 언저리에서 충돌을 거듭했다.
“토키와! 내 말 들리나? 토키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소스케는 몇 번이고 쿄코의 이름을 외쳤다. 무엇이든 입 밖으로 토해내지 않으면 내부에서부터 몸 전체가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친우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느낌이 어때?
이제는 전화를 끊지 않겠지, 사가라 소스케?”
수화기로 돌아온 것은 탁한 전자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