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은 바보라는 평판이 있다. 정말로 놈이 바보라면 이 칼로 찔러라."
"하지만, 이 칼이 할아버님을 찌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칼이 할아버님을 찌를 수도 있습니다."
백작의 비상(飛上) 1화 종막의 시작
"숙부님을 몰아내겠다고…?"
그 용어는 별로 생소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뇌리에 깊이 남아 울렸다. 그 용어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그 누구도 아닌 카인. C. 하그리브스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율리시스 율리티아드는 순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커다란 진남색 눈을 깜박였다. 유난히도 맑은 오후였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햇볕이 따스했다.
"사람들이 네놈을 두고 바보라 수군거려도 헛소리로 치부했는데, 이젠 정말 바보가 되기라도 한 거냐!"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난 정신 멀쩡해."
마치 그가 처음 말을 꺼낸지 한 시간은 흐른 것 같다고, 율리시스는 생각했다. 그 시간은 실제로 10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말의 내용이 지극히도 부담스러운 것이었던 까닭이다. 율리시스의 표정은 창백한 사색이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혀끝에서 붉은 쇠 맛이 느껴졌다. 미친 놈, 돌아버린 놈, 어떻게 너는, 너라는 놈은…
"승산이 없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건 설득이 아닌 체념과 자조였다. 카인이 말을 꺼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예정된 미래를 그려 볼 수 있었다. 신에 의해 만들어진 운명은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는 운명은 있다. 율리시스에게 있어서 그건 카인이였고,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었고, 한없이 물러 터진 자기 마음의 내면이었다. 이건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고 제 발등에 도끼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아무리 자신에게 되뇌어도, 언제나 카인. C. 하그리브스는 율리시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우였다. 심지어는 그 자신보다도 친우의 일이 우선이었다. 정말, 눈물 나도록 끔찍한 일이었다.
"승산이 없다니?"
그의 친우는 붉은빛보단 파란빛에 가까운 그 입술을 살짝 말아 올려 쿡쿡, 하고 웃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위험해 보여서 율리시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봄날의 햇볕보다 따스하고, 한없이 공허하다. 깊다. 심연의 나락보다 새카맣고, 한없이 아름다웠다. 카인이 품 안을 뒤적이더니 얇은 종이쪽지를 꺼내 들고 웃었다. 이게 뭐지? 이게 뭐라고 생각하나 율르? 율리시스가 눈을 깜박였다. 종이의 맨하단, 그 무엇보다 선명한 머리가 두 개인 뱀 인장.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라면… 설마, 지드 살리드?!"
"게다가 내 약혼녀의 조부이시기도 하지. 헬베카로트 백작은 서서히 건드려 봐야겠고, 예스거 후작은 포기해야겠군. 그는 숙부님의 편이니까. 난 자네에게 말하지 않은 수많은 생각과 사람이 있고, 손에 넣은 힘이 있어. 승산은 충분해, 자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왠지 모르게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간만에 그의 입에서 여러 마디의 단어가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카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내리비추는 환한 햇살에 부유하는 먼지가 선명했다. 그러더니 카인은 은근슬쩍 율리시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카인의 짙은 암갈색 눈은 웃고 있었다.
"율르, 난 자네가 결국에는 내 손을 잡게 되리라 생각하네."
그 순간 카인은 과하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순간 가해지는 아픔에 눈이 찌푸려졌다. 그걸 눈치챈 카인은 미안한 기색없이 힘을 풀었다. 그는 손을 뻗어 카인의 짧게 굽이치는 흑갈색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교활하다. 다정하다. 봄날의 저 햇살처럼. 마음의 약한 부분을 꿰뚫고 들어와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며 부서뜨린다. 그는 매정하지 않다. 그는 약하다.
"나에겐 자네가 필요해."
"…정말로 끈질기군."
율리시스는 요동치는 속내를 억지로 삼키고는 굳은 얼굴로 그의 어깨를 잡은 카인을 밀쳐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웃는 눈. 목적을 달성한 눈. 천연덕스럽게 미소 지으며 나지막이 묻는다.
"나와 함께 해줄 건가?"
율리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애꿎은 홍차만 휘저었다. 그리고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갑자기 티스푼을 내던지고 식어빠진 홍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기분 탓인지 뒷맛이 굉장히 쓰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슬픈 일이지만, 그는 나를 위해서… 아니, 나와 자네를 위해 무너져야만 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절대로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처참하게 말이지."
그는 카인이 원래 이런 목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구나 생각했다. 뭔가 이렇게 될거란 걸 예상한 듯 움직이잖아? 처음부터 포섭할 요령으로 왔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밀며 생글생글 웃는 낯짝이라니. 확실히 저 얼굴은 아둔한 바보라기엔 너무 천연덕스럽다고 생각한 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되었다며 쓰게 웃고는 친우의 손을 잡았다.
"착각하지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서 왕궁으로 끌려가는 네놈 모습이 보기 싫은 것뿐이니까."
* * *
따사로운 햇볕과 어린아이들의 광채는 같은 것.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며, 가장 찬란한 것. 그것은 한쪽 벽면을 모조리 메운 유리창을 넘어, 어머니의 미소처럼 부드러운 병아리 빛 노랑 커튼을 지나, 보드라운 원목 바닥을 두 남자의 발끝을 맴돌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이었다. 빛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마치 어떠한 거대한 암흑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예크뷔흐 후작은 차 테이블에 놓여 있던 티 포트를 잡아 내동댕이쳤다. 청보랏빛 붓꽃이 이지러지진다. 붉은 차는 양탄자가 삼켰다. 그 날카롭고 새된 소리에 수행원은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튀어 오른 티 포트의 날카로운 파편이 발목 부근에 깊숙이 박혔다. 주저앉았다. 얇은 입술은 찢어져 피가 배어나고 하얀 셔츠 소매 사이로 붉은 멍 자국이 얼핏 비친다. 연한 회색 눈은 초점이 흐렸다.
"카인, 어떻게 네가…!"
분을 못 이긴 중년 남자의 화를 담은 노성에 얇은 유리창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남자의 진한 회색 눈에서는 광기가 엿보였다. 곳곳에 굳은살이 배긴 크고 강인한 손이 다가와서 풀어진 머리채를 휘어잡아 조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체크 메이트입니다, 숙부님."
카인. C. 하그리브스는 엷게 미소 지으며 얇은 손끝으로 숙부의 백색 왕을 밀어 넘어뜨렸다. 백색 진영의 군주가 흑백의 피로 얼룩진 차가운 체스판을 굴러 어두운 톤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테이블의 시커먼 그림자 속으로 삼켜지는 모습을 두 사람은 똑똑히 보았다. 백의 군주가 사라진 판에서 흑색 진영의 군주와 그의 가신들은 웃었다. 카인은 아직 판 안에 남아 있는 백색 여왕을 보았다. 카인의 체스 실력은 그 숙부인 로쿨리무스 보다 확실히 뛰어나서, 백색 여왕은 흑색 진영의 가신들에게 둘러싸여 오직 홀로였다. 카인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역시 밀어 넘어뜨렸다.
"킹이 무너진 이상, 체스판이 끝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가 너 같은 놈에게 이런 수치를 당하다니…!!"
"그러니 제가 분명 충고해드렸을 텐데요. 남은 자존심이나마 지키고 싶다면 순순히 물러나시라고."
카인은 제 앞에 놓인 홍차 잔을 들어 입술을 살짝 적셨다. 뒤로 쓸어 넘긴 긴 흑갈색 머리칼은 어두운 조명 속에서 일견 검은색으로 보였다. 아니, 외모의 문제를 뒤로 젖혀 놓고 본다 하더라도 밀라노라는 커다란 체스판 안에서 그는 흑색 진영의 군주였다. 그는 그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남은 건 숙부님께서 결단을 내리시는 것뿐입니다."
로쿨리무스의 굵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왼손에 들려 있던 고풍스러운 금박 장식의 편지지를 구겼다. 그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흰 손가락은 파르르 떨렸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는 길 잃은 혼돈이 자리하고 굳게 다물린 얇은 입술에서는 핏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심한 눈빛을 하고 팔짱을 낀 채 그를 응시하던 카인의 입술이 열렸다.
"설마 제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제 뒤엔 살리드 경이 계십니다."
"…그 뱀 혓바닥 같은 늙은이까지 끌어들였다고? 네가 정녕 미쳐버린 게로구나."
로쿨리무스의 목소리는 하얀 노기를 띠고 있었다. 귀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수의 권력 집단 안에서만 핏줄을 이으려 하다 보면 그 핏줄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키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중에서도 밀라노 안에서 실세인 다섯 백작가는 굉장히 머리 터지게 복잡한 이해관계와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예크뷔흐 로쿨리무스의 두 조카가 각각 카인 C 하인그리브스와 율리시스 율리티아드라는 사실이다. 카인과 율리티아드는 서로 외사촌 관계이며 두 사람에게 로쿨리무스 후작은 외숙부 되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어떤 말인가를 내뱉으려던 듯 살짝 벌어진 후작의 입술은 차마 다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숙부님, 잊으셨습니까? 체스판 안에서 존재하는 것은 그리 따뜻하지 않습니다."
정치판 안에서 혈연관계의 따뜻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 로쿨리무스가 카인과 손을 잡은 것 역시 혈연의 정 때문이 아니라 눈에 뻔히 보이는 실리 때문이었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은 일에 불과했지만.
"저와의 약속대로 이제 그만 영주 자리에서 물러나 주시지요."
"………."
파드득 경련을 일으키던 로쿨리무스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검은 눈 안에서 방황하던 혼돈은 붉고 푸른 분노와 경악으로 바뀌어 서로 뒤엉켜 춤을 추었다. 이건 협상이 아니라 협박이겠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구겨진 종이는 조각조각 찢겨 하얀 깃털처럼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카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 편지에도 적혀 있듯이 숙부님께서 빠져나갈 구멍은 없습니다."
사실 율리시스 자작─그의 외조카라는 또 다른 키워드가 있긴 하지만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를 아끼는 로쿨리무스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와 죄의식을 안겨 줄 필요는 없다. 계속해서 테이블 그늘만을 내려다보던 로쿨리무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의 모든 한탄과 근심을 그러모아 압축해 놓은 듯한, 심해의 밑바닥처럼 깊고 세상의 끝처럼 먼 그런 한숨이었다. 카인. C. 하그리브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뒷일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숙부님. 비리는 밝혀지겠지만, 죄는 숙부님 한 분으로 끝날 테니까요."
* * *
사각사각
조용한 집무실에는 그저 펜을 놀리는 소리만이 지속해서 들려왔다.
펜을 잡고 있는 것은 검을 잡거나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손가락을 혹사하는 행위였고, 그것은 검보다 가볍고 건반보다 쉽게 놀릴 수 있음에도 그 둘에 비해 더 많은 피로를 안겨주었다.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아침 식사를 포기하고 피아노 치는 시간도 줄였건만 카인은 겨우겨우 그날의 분량을 맞출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기대도 할 수 없었다.
-후작 부인께
먼저 축하 인사에 감사드립니다.
과거 친분이 있으셨다던 어머님을 대신해 현 하그리브스가의 가주인 제가 대신 서신에 답하는 것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
귀중한 선물을 보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가지고 있게 된다면, 제값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무례를 무릅쓰고 감히 돌려보냅니다.
부디 저의 행동에 기분이 상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Kain C Hargreaves
카인은 편지의 끝 부분에 자신의 서명을 넣는 것으로 마지막 편지의 작성까지 마쳤다. 작은 한숨과 함께 펜대를 놓은 시각은 아침 여섯 시. 새로운 영주에 임명된 것을 축하하고자 귀족 가에서 들어온 선물에 대한 감사와 거절의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 저녁부터였으니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었다.
"…꼭 군무성의 업무를 처리하는 것 같단 말이야."
귀족들의 자존심은 강하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이들의 선물을 섣불리 돌려보냈다가는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동봉하게 될 서신에는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 앞에 쓰게 되는 편지의 내용은 두어 장을 가볍게 넘겼고,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비슷한 내용을 나열한다 할지라도 하루가 꼬박 걸릴 수밖에 없었다.
백작이라는 작위는 결코 높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대로 충실하게 왕을 섬겨온 가문의 역사와 젊은 나이에 영주를 맡게된 하그리브스가의 가주에게는 그 이상으로 올라갈 '가능성'과, 고위귀족들과의 '연줄'이 있었다.
작은 친분이라도 쌓아둔다면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면식이 없고, 도움을 주거나 받은 적도 없는 이에게 선물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선물을 받는 행위가 자칫 뇌물을 받는 것 같아 꺼림칙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 정도의 선물은 귀족 가에서 으레 주고받는 하는 정도였고, 그것을 받는다 해도 아무런 흉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돌려보낸다면 그것을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불쾌해하는 귀족이 다수였다. 그저, 그것은 그의 고집일 뿐이다. 다른 일에 대해서는 최대의 유연성을 발휘하는 카인이 고집하는 단 한 가지였다.
사람을 시켜 선물들을 전부 내보낸 후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해 방안을 가볍게 두어 바퀴 걸은 그는 신세를 졌던 사람들에게 보낼 선물에 동봉할 편지의 작성을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사이셰어를 위해서는 몇 권의 책과 향이 좋은 차를, 레페른에게도 책을, 세렌느에게는 민트 초콜릿과 쿠키를, 델류즈에겐 일 년 생산량이 제한 되어 있다던 담배를─그가 골랐다기보다는 부모님이 보내신 것이었지만─, 나스네아에게는 건강에 좋다는 아로마 제품을, 크리스에게는 단순한 디자인의 머그잔을, 클로드에게는 티 세트를─율리시스가 알았다면 명백한 업무방해라고 길길이 뛰겠지만─, 율리시스에게는 불같은 성질을 가라앉히기 위한 옥수수 수염차를.
모두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을 텐데.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펜을 집으려던 그의 눈에, 잉크병 옆에 놓여 있는 작은 상자가 눈에 띄었다.
"아까 내보낸 선물에서 빠진 건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상자를 집어들었다.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조그마한 상자는 화려한 일색이었던 다른 선물들과 대비될 정도로 단순했다. 그리고,
"발신인이 없군."
화려한 금박으로 보내는 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던 다른 선물과는 달리 발신인을 짐작하게 해주는 어떤 것도 적혀 있지 않아 카인을 곤란하게 했다. 상자를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누가 보낸 것인지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상자를 열어보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곧 상대방이 보낸 물건을 받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뜯지 않으면 상자가 원주인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
수십 통의 편지에 시달려서 조금 지쳐있던 그는, 답지 않게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상자를 열었다.
단순했던 상자와 마찬가지로, 상자 안에는 탁한 푸른 빛을 띤 돌 하나만이 들어 있었다. 가공하기 전의 조그마한 원석. 상자 안에도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은 거지? 친분을 위한 것이든, 단순한 호의든 선물을 준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드는 것이 보통인데. 어째서 누군지 모를 이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이 원석만을 보낸 것일까.
탁한 푸른색. 그가 가진 지식의 범주에서 이런 빛을 띤 보석은 본 적이 없었다. 흔치 않은 건가? 국내에서는 채굴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가 이것을? 이 정도 사고도 못 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손이 그의 생각과는 별개로, 무심코 보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들어 올려진 덕에 빛이 닿은 보석에, 일순간 반짝임이 깃들었다.
"아…"
그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빛을 받은 원석은 예의 탁한 빛을 온데간데없이, 하늘과 같은 혹은 남국의 바다와 같은 푸름을, 깊으면서도 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어지던 사고를 멈추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그러나 그리움과는 거리가 먼 청아함. 그는 한참 후에야 그것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발신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처음의 의아함은 호기심과 호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차피 돌려드릴 수 없는 물건, 잠시 맡아도 괜찮겠지.
이름 모를 상대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며, 카인은 펜을 들었다.
-익명의 수신인께.
보내주신 선물 감사합니다.
이렇게 귀한 선물을 보내주신 분의 얼굴을 언젠가 꼭 뵙고 싶습니다.
그는 원석을 앞에 둔 채, 받는 이가 적히지 않은 감사의 편지를 써내려갔다. 자신이 처음으로 '타인'이 건네는 물건을 받았으며 그것이 자신에게 미칠 영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는 조금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그때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