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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 ◆GULJi96aoSzS 2013/10/26(土) 19:48:24.61 ID:t4lG1/uao
그 후 3, 4학년생이 전원 모인 시점에 지도교수님도 오셔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신기하게도 교양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던 3・4학년은 아무도 나를 「히키타니」라고 틀리게 부르지 않았다.
유키노시타의 덕에 내 지명도가 올라간 듯하다.
그건 그렇고 내가 매일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공부한 끝에 간신히 기어들어온 대학에 다니는 치들답다.
내 이름을 정확히 인식하다니 꽤 기억력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지도교수님만은 내 이름을 틀리게 불렀다.
ㄱ 역시 중세일본사 전공 교수님이다.
「히키타니」 같이 굴욕적인 이름이 아닌 예전 가마쿠라의 고지명인 「히키가야츠」와 헷갈리셨다.
아무래도 가마쿠라 막부 연구가 전문인 교수님이신 듯하다.
참고로 츠루오카 ‘하치만’궁은 가마쿠라 시 ‘유키노시타’에 있다.
이거 깨알정보라고.
유키노에게 이걸 알려줬다간 좋아 죽을 거 같아서 말 안했지만.
그리고 다음날쯤에 혼인신고서를 가지고 와 압박할 것 같아 무섭다.
며느리를 맞는 게 아니라 사위로 맞아들이겠다면 대환영이지만 유키노는 그런 일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지.
936: ◆GULJi96aoSzS 2013/10/26(土) 19:50:04.16 ID:t4lG1/uao
× × × ×
7월이 되었다.
시험기간이 한창이다.
변함없이 친구가 없다는 점에서는 외톨이라면 외톨이다.
하지만 완전히 고독한 외톨이인 것은 아니다.
지금은 비는 시간을 하나 사이에 두고 다음 시험시간까지 연구실에서 쉬고 있는 중이다.
여태까지의 나라면 절대로 이런 곳에서 있지 않았겠지.
이 연구실에는 골수 역사 마니아가 모여 있다.
나도 그중 하나다.
특정한 친구는 없지만 역사담화에는 자연히 시간가는 줄 모른다.
「우에스기 겐신이 10년을 더 살았다면 오다 노부나가를 멸했을까?」
「시마즈 4형제가 20년 빨리 태어났다면 어디까지 제압했을까?」
이와 같은 마니악한 화제를 차례차례로 생각해내서 매일 질리지도 않고 논의했다.
나도 그렇지만 취미=전문이 돼버린 치들뿐이라 모두들 대화는 어렵지 않다.
분명히 지금까지 모두 이런 마니악한 대화를 할 상대가 없었던 거겠지.
그래서 그 반동으로 연구실 안이 이런 분위기가 된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외톨이 마이스터인 내가 한 수 접고 들어갈 외톨이 스킬을 가진 이가 몇 명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전업주부를 목표로 삼고 있는지는 불명이다.
하지만 그런 건 어찌되든 상관없다.
상호불간섭, 상호불가침이 외톨이의 철칙이다.
역시 외톨이는 외톨이와 외톨이로 지내는 게 제일이다.
결국 이런 말이다.
── 외톨이 최고! 아니, 최강!
937: ◆GULJi96aoSzS 2013/10/26(土) 19:51:51.70 ID:t4lG1/uao
「자, 다 됐다!」
프린터에서 나온 A4 용지를 히죽거리며 바라보았다.
오늘 오전에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바로 자택에 돌아와 기분 좋게 전기 마지막 과제를 처리하고 있었다.
마침 거의 다 끝나서 이다음은 프린트한 이 문서의 내용을 체크해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면 된다.
이걸로 나도 여름방학에 돌입한다.
다음으로 가정교사 아르바이트가 있어 조금 귀찮지만 그래도 여름방학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마음이 설렌다.
문서 내용 체크도 마쳤다.
어디보자, ……송신 전에 여정을 확정했어야 하는데.
숙소와 비행기 예약을 마친 다음에 송신해야지…….
시간을 보니 예상 외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슬슬 아르바이트 하러 나가야 한다.
남은 건 돌아와서 작업하면 되니 오늘 중에는 교수님께 메일 드릴 수 있을 거 같다.
막 다 읽은 A4지를 책상 위에 두고 코마치한테 말을 건 다음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938: ◆GULJi96aoSzS 2013/10/26(土) 19:54:03.50 ID:t4lG1/uao
「하치만,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아르바이를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불쾌 오러를 전개하고 있는 유키노가 날 맞았다.
현관에 인왕처럼 우뚝 서 있다니, 너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냐?
돌연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입을 여나 싶더니, 얼려버릴 것 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움츠러들게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지, 이거. 혼자서 아형(阿形)이나 음형(吽形) 역이라도 연기하는 거냐?
무서워서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은데.
「너, 나한테 몰래 재밌는 일 하려고 하는 거지.」
남편에게 바람핀 증거를 들이미는 아내와 같이 A4 용지를 내 눈앞에 치켜든다.
「그거냐……. 여름방학 숙제 기획서인데……」
「……좋아. 일단은, 들어와.」
아니, 여기 우리집인데.
939: ◆GULJi96aoSzS 2013/10/26(土) 19:56:48.98 ID:t4lG1/uao
「……3박4일 시코쿠 여행이라니 아주 잘나셨네. 부럽기 짝이 없어.」
아까부터 몇 번이고 반복하는 이 대사.
말할 때마다 목소리에 가시가 더 돋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게다가 유키노는 해외여행뿐만 아니라 유학 경험까지 있다.
그러면서 시코쿠 여행 정도로 왜 이렇게 깐족대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교수님이 내주신 숙제라니까……」
이쪽은 말할 때마다 움츠러든다.
유키노의 집념에는 정말이지 손을 들게 된다.
「이 여행은 대체 누구랑 가는 걸까?」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나와 같이 여행가고 싶다고 말할 법한 이성이라면 코마치 정도밖에 없는데.
유이도 지금은 남자친구가 있고, 만약 같이 가자고 한들 기분 나쁘단 말밖에 못 들을 거 같은데.
「그러니까, 혼자 간다니까……」
아까도 이렇게 대답했다.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냐, 이 무한루프는…….
코마치가 만들어준 스튜가 식어버렸는데.
「뭐?! 누구랑?」
네 귀는 내 눈보다 훨씬 부패가 진행된 것 같구나.
「그러니까 혼자라고!」
조금 짜증이 나서 큰소리로 받아쳐 버렸다.
이런, 너무 심했나?
유키노가 풀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딱 귀신같은 형상으로 노려본다.
이젠 싫다.
940: ◆GULJi96aoSzS 2013/10/26(土) 19:58:34.01 ID:t4lG1/uao
「왜……, 혼자인 걸까……」
이젠 또 뭐라는 거지.
아니, 공포스러운 목소리다.
그것도 아니면 두려운 목소리?
「아니, 그러니까 대학의……」
코마치가 무엇인가 나에게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 앞에서 휘휘 흔들고 있다.
「왜, 혼자인 걸까」
코마치의 사인으로 겨우 유키노의 의도를 이해했다.
아, 할 수 없네…….
「유키노……, 괜찮다면 나와 함께 시코쿠에 가지 않을래?」
「응, 물론이야, 하치만……」
갑자기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유화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 녀석 얼굴이 몇 개냐고?
십일면 관세음이나 그런 온화한 게 아니라 아수라 같은 종류잖아, 너.
「모처럼의 권유를 거절하면 하치만이 불쌍하잖아. 나 이외에 너와 여행가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여성 따위 따로 아무도 없지」
그렇게 말하고 윙크를 하며 고개를 기울여 온다.
내가 가장 약한 몸짓을 숙지하고 있는 만큼 못됐다.
난 항상 이 몸짓에 넘어 가네…….
여기까지 알고 있으면서 유키노의 포로가 되어있는 나.
아마 앞으로의 인생에는 「히키가야 하치만 하인 엔딩」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렇네……, 이야에 간다면 역시 카즈라바시지. 그리고 오보케 코보케에서 유람선도 타고 싶고……」
그렇다면 일정을 하루, 이틀 늘려서 여행계획을 재검토하는 게 나을지도.
즐겁게 혼자 불타올라 떠드는 유키노를 보고 나와 코마치는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