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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ffee, Please


3 “그건 저로서는 운이 좋았네요.”


  “꺅!”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탈의실 문을 닫으며 뒷걸음질로 도망친 여자아이는, 잠깐뿐인 인상이지만 꽤 미인이었다. 아니, 미소녀라고 부르는 게 더 맞으려나. 연령적으로도, 분위기로도. 그러나 나이대에 걸맞지 않게 몸매는 굴곡이 뚜렷해, 배스타올 정도로는 감춰지지 않은 바디라인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건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보다 옆방, 세 나갔었나. 언제 나간건가. 그보다 왜 여자애지?
  아무튼 이런 대치상황을 계속해봐야 이득은 없다. 난 탈의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일단 전 제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계속 그 안에 계실 수도 없으니까요.”
  책이나 마저 읽을까.

  30분 정도가 지났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까지 전라로 목욕탕에 남아있지는 않겠지, 싶어서 다시 책을 덮고 거실로 향했다.
부엌의 불을 켜고, 적당히 스크램블 에그를 만든다. “이걸론 부족할 것 같으니, 이따 저녁을 다시 먹어야겠는데.” 하면서 우선 쌀을 씻어둔다. 베이컨을 구워 스크램블 에그와 함께 담는다. 뭔가 아침식사처럼 돼버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베이컨을 우물거리며 머리를 굴린다. 아까 그 여자애는 누구일까. 뭐 이건 다시 생각해도 세입자겠지. 빈집털이범일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보통 빈집털이범이라면 느긋하게 목욕이나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세입자라면 어쩔 수 없지. 아니,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넘길 게 아니다. 한 지붕 아래에 가족도 아닌 동년배 여자아이랑 살라니, 비상식도 정도가 있다. 부모님은 알고 계신 건가? 그녀는 옆방에 남자가 살고 있다는 걸 알고 들어온 건가. 아니, 알고 있다면 저렇게 무방비한 모습으로 나오진 않았겠지. 애초에 언제 들어왔지?
  생각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이 멋대로 뒤엉킨다. 본인에게 물어보면 그만인 일일 텐데. 아니, 그 전에 본인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긴 있나? 설마 성희롱이나 성추행으로 신고 당하는 건 아니겠지. 자기 집에서 밥을 먹으려고 했을 뿐인데 성추행범이 되다니, 웃지 못할 농담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얌전히 배를 채웠다.
  음, 결국 맛있었는지 맛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왼쪽 방 문을 노크하려고 손을 가져다 댄 순간, 문이 열렸다.
  “아.” “어?”
  목소리가 겹친다. 이상한 상황이라 할 말을 잃었다. 뭐야 아까부터 타이밍이 왜 이런거야. 난 혹시 세계에 미움받고 있나?
  “저, 저기 우선 말이죠.”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
  “커피, 마실래요?”

  손수 내린 커피를 두 잔. 상대 취향을 모르니까 일단 나랑 똑같이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커피메이커로 내리고 말겠는데, 아무래도 커피가 내려오는 시간 동안 마주보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다 커피메이커로 내린 커피는 그냥 구정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고. 난 그 정도로 결벽적인 건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냥 카페인 중독일지도 모르겠다. 인스턴트 커피도 그 나름대로는 좋아하는 편이고. 홍차도 녹차도 딱히 주저하지는 않는다. 음, 역시 카페인 중독이 맞다.
난 대체 무슨 고찰을 하고 있는거야.... 다선의식이란 건 말차에만 적용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면 커피도 비슷한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실 지금 방금 생각했다.
  머그 두 잔에 커피를 따라낸다. 쟁반까진 필요 없겠지. 그대로 손에 머그를 들고 식탁으로 향했다. 여자아이는(이름을 모르니까 불편하군) 자기 방과 가까운 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각설탕을 두 개 넣고 젓는다. 단 걸 좋아하는 편이다. 여자아이도 머그에 담긴 커피 양을 보더니 똑같이 각설탕을 두 개 넣는다. 취향이 맞았다고 보면 될까.
  이렇게 보니 머리가 꽤 길다. 염색도 하지 않은 긴 흑발이 청초한 인상을 준다. 콧대가 약간 높은, 전형적인 미인상이지만 약간 큰 눈 탓인지 앳된 느낌이 더 강하다. 표정은 서로 긴장한 상황이라 읽기 힘들지만, 큰 눈동자에서 의외의 장난기가 보일 것 같기도 한다.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흰 티셔츠와 검은 트레이닝복 바지에 후드 점퍼를 덧입고 있는데, 토끼 귀가 달려있는 후드 점퍼라니 저런 거 실제로는 처음 봤어. 거기다 티셔츠 밑에 속옷이 약간 비쳐 보이는 것 같다. 눈에 독이다.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잔만 계속 보게 된다. 말없이 커피만 홀짝거린다.
  아무튼 입을 열어야 한다.
  “음, 저는 그게, 오른쪽 방에 살고 있는데요.”
굳이 말 안 해도 저쪽도 알고 있을 것 같은 이야기다.
  “왼쪽 방에, 이사오신 거죠?”
뻔한 얘기를 물어봐서 어쩌지.
“네, 네에.”
상대도 대답할 말이 빈곤한 모양이다. 커피를 홀짝 마신다.
  대체 이게 뭐야.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만 드는데.
  “커피, 맛있네요.”
쥐 잡은 건가?
  “저는 오늘 이사 와서요.”
  그녀는 입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옆방에 누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했지만, 음, 그게 남자분이란 얘기는 못 들었거든요. 아니 애초에 누가 살고 있다는 얘기 자체를 못 들어서, 신경 안 써도 되겠구나 싶어서.”
  “저도, 옆방에 누가 이사 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네요. 아니 뭐, 원래 그런 부분은 어머니가 전부 부동산에 맡겨버리고 가시긴 했는데.”
  “그래서 그냥 아무도 없겠구나 싶어서 목욕탕에서 나왔거든요. 근데 갑자기, 그, 문에서 나오셔서, 좀, 많이 놀라서요.”
  “아, 아아. 죄송합니다.”
  근데 이거 이야기가 전혀 진행이 안 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잡은 건 쥐가 아니라 지렁이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이대로 계속 이야기를 루프 시킬 수는 없다. 루프물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런 소설을 읽어나갈 수 있는 건 언젠가 해결이 될 거란 걸 믿기 때문이다.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한데, 옆방에 남자가 산다는 건 아무래도 좀 불편하실 것 같은데요.”
  “그, 그런가요?”
그렇잖아 보통은?
  “그런데 저는, 부모님이 다 해외에 나가 계시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옮기기가 힘들어서요. 거기다 이 집이 부모님 집이라 얹혀있는 거라서, 방 뺀다고 당장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구요.”
미안한 얘기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실제로 돈이 없는데 내가 방을 뺄 수는 없다. 미성년자인 나로서는 대리인도 없이 부동산 계약을 할 수도 없고.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다른 곳을 알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옆방 주민에 대한 얘기를 하면 부동산도 별 말 없지 않을까요? 사실 이런 경우엔 남자인 제가 배려를 하는 게 맞겠지만, 아무래도 돈 문제가.”
  “저도 부모님이 해외에 나가 계셔서요.”
  어라?
  “저 혼자 계약을 해지할 수가 없어요. 당장 살 곳도 없고. 입학식은 코앞이고? 올해 입학이라 이 근처에 친구도 없구요?”
  그건, 곤란한 상황이다. 곤란하다는 수준을 넘어서 명백히 나쁜 상황이었다. 이런 우연이란 게 있는 건가? 역시 세계에 미움받고 있는 게 분명하다. 누구야 이런 멍청한 시나리오를 쓰는 건.
  “그러니까, 저기,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이 아가씨는 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거야? 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서로 방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안 된다면,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여도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고등학생인데 동거라니, 그다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죠.”
우선 작게 저항해본다.
  “괜찮잖아요 이정도. 같은 방에서 자는 것도 아니고?”
  “하아.”
  한심하게도 작게 한숨을 쉰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체념은 빠른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고들 한다.

  방금 전까지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책을 덮었을 때에는 이미 오후 7시를 넘어 있었다. 저녁을 먹어야겠군, 하고 책상에서 일어났더니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 직후에-아마 잠긴 문을 열려 했을 것이다-똑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려고 하기 전에 노크를 먼저 하라고 말해둬야 하지 않을까.
  “저기, 우선 저녁 드실래요?”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문을 열자 앞치마를 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문 너머로 약간 짭쪼름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운이 좋았다.
  “네, 마침 배가 고팠어요.”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방금 막 한듯한 고기감자조림과 밥, 김치가 올라와 있었다. 여자아이가 손수 만든 요리를 앞에 두고 약간 감동하더라도 이상한 사람 취급 받지는 않겠지. 참고로 여자아이는 동생이랑은 별개다.
  “아, 냉장고에 있던 거 마음대로 써서 죄송해요.”
  “아뇨, 밥 해주신 건데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고기감자조림은 간이 절묘하군. 좋은 신부가 되겠어. 입 밖으로 꺼냈다간 성희롱이 될지도 모를 말을 씹어 삼켰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라 정말 맛있는데.
  “요리, 잘하시네요.”
  “입에 맞으셨나봐요? 다행이다.”
혼자 있으면 아무래도 수고가 가는 요리는 잘 안 하게 된다. 아예 안 한다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혼자 먹을 거니까 그냥 간단하게,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제대로 된 가정식은 꽤 오랜만이었다. 학교 급식은 예외다. 우리학교 급식은 학원도시 내에 위치한 자율형 공립 고등학교라는 점도 있어서 꽤 잘 나오는 편이지만, 그래도 급식과 가정식은 느낌이 다르다.
  “잘 먹었습니다.”
  “변변치 못했습니다?”
  말꼬리를 약간 올리며 의문형 같은 어조로 말하는 건 아무래도 습관인 모양이다. 설거지만은 내가 하겠다고 나섰지만 거절당했다. 왠지 부려먹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하는김에, 라고 해야 하나? 한가하니까요.”
  “그건 저로서는 운이 좋았네요.”
아무튼 절세미소녀의 수제 요리니까 말이지.
  방으로 돌아와 우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몸이 따뜻해지니 긴장감이 좀 풀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우선 머리를 비우자. 너무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좋을 건 없다. 어차피 엎어진 물이고.
  “그런데 왜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샤워 룸에서 나와 물기를 닦고,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으니 아까 읽었던 소설의 속편을 읽기로 했다.
  “그런데!”
  “으악!”
  뭐야, 문을 안 잠궜었나? 당돌하게 문을 열고 말을 거는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 보인다. 조금은 조심성을 가져 주면 좋겠는데.
“왜 그러시죠?”
  “저는 예서린이라고 하는데요?”
그 순간 나는 방금 전에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현은형입니다. 저기, 앞으론 들어오기 전에 노크를 좀.”
  “안 잊어버리면요?”
그러니까 그 안 잊어버리게 부탁한다는 얘기였는데.
  이렇게, 신학기를 앞두고 뜬금없이 시작된 (1살 연하의 미소녀와의) 동거 첫째날 밤은 깊어가는 것이었다.
우선 프롤로그는 여기까지입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셔벗 파쿠리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네. 그야 충동적으로 지른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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