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미탄식
오랜 여름방학도 끝나, 학교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2학기에 들어서면 체육제, 학원 축제, 수학여행 등 큰 이벤트가 연이어 있고 거기에 더해 릴리안의 학원 축제를 돕기도 해야 해서, 학생회로선 쉴 틈도 없는 실정이다.
이리도 바쁜 상황에서 서로의 학교를 오가며 논의를 하는 건 당연히 무리다보니, 연락에는 전화나 편지 등을 쓸 때가 많다. 지금도 유키는 무선 전화기를 앞에 두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다.
유키의 경우, 같은 집에 유미가 살고 있으니 그렇게 정보를 나눠도 괜찮긴 하지만, 릴리안 학생회에 있어 장미님이라 함은 어디까지나 오가사와라 사치코이자, 시마즈 레이이자, 토도 시마코인 거다.
그 사람들이 그런 걸 그리 신경 쓰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예절은 제대로 지켜야 한다는 게 유키의, 나아가선 하나데라의 생각이며, 연락할 때는 장미님, 그 중에서도 최상급생인 사치코나 레이 중 한 명에게 하기로 했다.
유키는 전화기를 들고 한 번 심호흡을 쉰 뒤, 손가락을 버튼으로 뻗는다. 단축번호로 등록되어 있어서 바로 벨소리가 들린다.
프린트를 앞에 두고, 전해야 할 말을 머릿속으로 되새긴다.
이윽고.
『――예, 오가사와라입니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서 들려왔다.
연락사항 전달을 얼추 마치고 잠시간의 잡담도 끝나, 슬슬 끊어야 할 타이밍이라고 느끼고 그 말을 꺼내려 했을 때였다.
사치코가 한 번 망설이는 듯이 숨을 들이쉬고, 지금까지와는 미묘하게 다른 음색으로 이야기를 이어왔다.
『저기, 유키 군. 전에 있었던 일 말인데요.』
"예?"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무슨 이야긴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공통의 화제 같은 건 거의 없으니까 아마 어느 쪽인가의 학원축제에 관련된 거리란 예상은 되지만, 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건지 짚이는 곳이 없다.
『저어,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미안한 것 같아서 슬슬……아, 그래도 전화로 대답하는 것도 실례겠네요.』
가만히 있으니, 사치코가 혼자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죄송합니다만, 내일 방과후에 조금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을까요?』
유키 입장에선 특별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날짜가 바뀌어, 다음 날.
수업이 끝나고, 유키는 어제 전화로 들은 대로 릴리안 여학원을 방문했다. 명목은 학원 축제의 협의였지만, 이미 협의할 건 거의 남지 않았다보니 실제론 사치코가 호출한 용무 뿐이었다.
약속시간에 교문에 도착하자, 이미 사치코는 그 자리에서 유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려가서 기다리게 한 걸 사과한 뒤 교내에 발을 디딘다. 평소대로 장미관에 데려가는 건가 싶었지만, 길이 달랐다. 눈치챘을 땐 주위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아, 서서히 조용해져가고 있다.
이윽고 보이기 시작한 건, 조금 낡아보이는 온실. 앞서간 사치코의 뒤를 따라 안에 들어가자, 결코 쾌적하다고 하기 힘든 뜨거운 공기에 휘감긴다.
"이런 곳이라 미안해요. 그래도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들을 걱정이 없는 곳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유키의 표정이 바뀐걸 빠르게 깨닫곤, 고개를 숙인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이야기라니……."
본론을 꺼내자, 그때까지 태연했던 사치코의 태도가 묘하게 바뀌었다. 고개를 돌리고 온실 안의 식물을 관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정면을 피하는 듯한 위치로 이동한다.
"예, 저, 이전의 이야기 말인데요."
"이전……의?"
"예. 답변, 아직이었지요."
그 말을 듣고 무언가 이런 대화를 나눴었던 걸 떠올린다. 하지만 유키는 그때, 사치코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분명 선물한 꽃에 대한 이야기나, 오가사와라 집안 이야기라거나 답변이 어떻다거나 하긴 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 불명이었다. 사치코 혼자선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은 나지만.
"저기, 뭐에 대한 대답, 이었죠?"
뭔지 모르기에, 솔직하게 물어본다. 모르는 채로 대답이라며 이야기를 들어도, 어떡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번의, 그 건이에요."
사치코의 뺨이, 뜨겁게 상기된 듯 분홍빛으로 물든다.
"유키 군이, 제게……그, 고백한 거 말이에요."
"아아, 그것 말인가요……에, 에에에엣?!"
수긍하다가, 무슨 소린지 다시 생각한 뒤, 유키의 입에서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자, 잠깐 기다려 주세요. 고백이라니."
"예, 그 때의."
"아니, 그게 아니라, 저, 고백같은 걸 한 기억은 없는데요?!"
"―――에."
사치코의 표정이 바뀌었다.
하지만, 급작스런 전개에 당황하고 있던 유키는 그 변화를 깨닫지 못했다.
"기어익, 없어……?"
"예, 그도 그럴게, 고백이라니 그런 걸, 제가 말인가요??"
"그런, 걸……?"
사치코의 눈썹이 움찔 움직인다.
눈초리가 서서히 날카로워져 간다.
여기까지 와서 간신히 사치코의 변화를 깨달은 유키는, 자신이 말해선 안 되는 걸 말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모양인지.
"그러면……저, 저를 놀린 거였나요?!"
사치코가, 폭발했다.
눈썹을 치켜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꽉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분노섞인 표정으로 유키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사치코 씨……"
"그, 그만큼 고민하고, 생각하고, 괴로워 했는데!"
반론하려 했지만, 상대는 이미 이야길 들을 상태가 아니었다.
"저를, 놀렸던 거죠?!"
아니,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초에 고백 자체를 떠올릴 수 없었으니 할 수 있는 말도 없고.
분노로 붉게 물든 옆모습을, 오직 말 없이 지켜볼 수 밖에 없어서.
"……그럼, 가겠어요."
얼음덩어리처럼 한 마디를 내뱉고 온실을 떠나간 사치코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건 유키치가 잘못했네."
말을 끝내자마자 딱 잘라 말했다.
눈앞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는 잘 생긴 남자는, 하나데라 학원의 선배이자 전 학생회장인 카시와기 스구루.
여름방학부터 전날까지 사치코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로 그녀가 왜 화냈는지, 애초에 서로에게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를 이해하고 싶어서 수수께끼를 풀어줄만한 사람을 고민했을 때 떠오른 게 스구루였다.
일어난 일 들을 끝까지 들은 스구루가 꺼낸 이야기가 아까 저 말이다. 대체, 뭘 잘못했다는 걸까.
"그도 그럴게, 너, 선물 했잖아. 호접란을."
끄덕인다.
"꽃말의 의미도 알고 있잖아?"
다시 한 번 끄덕인다.
"예, '행복이 날아온다'였지요."
"그건 노란 호접란일 때. 유키치가 선물한 건 분홍이었잖아."
"그런데요……에?"
같은 꽃이라도 색이 바뀌면 의미가 달라질 줄은 몰랐던 유키는, 저도 모르게 말을 잃는다. 그렇다면, 자기가 산 건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
"분홍 호접란의 꽃말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라서."
"사랑……으에익?!"
얼이 나갔다.
지금, 스구루는 뭐라고 했는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렇다는 건, 자신은 사치코에게 사랑 고백을 했었다는 건가. 믿기 힘들지만, 그렇다면 납득되긴 한다. 사치코의 말, 태도, 표정, 왜 갑자기 분노했는지. 자신의 언동과 맞춰 보면, 모든게 합치된다.
꽃말 같은 걸 애초에 몰랐다면 이렇게는 안 되었을 텐데. 하지만 어중간하게 알아버린 탓에 어긋나 버렸다. 어떡하면 좋을지, 바로 답을 떠올리지 못해 머리를 감싸쥔다.
"뭐어, 그렇게 침울해하지 마. 그리고, 의외로 가능성 있을지도 모른다고."
"……에?"
"삿짱이 화내는 건 이해하지만……유키치의 이야기를 들으면, 삿짱의 태도를 보기에 진지하게 좋은 방향으로 생각했던 게 아니려나."
"뭘 말인가요?"
"그러니까, 유키치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걸 말야."
시원스레 말을 꺼낸다.
"서, 설마, 사치코 씨가 그럴 리가."
"어떠려나. 적어도 유키치를 싫어하지 않았던 건 확실해. 그쯤은 느낄 수 있잖아?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오가사와라 사치코가, 평범한 학생인 자신을 받아들여줄 거라니.
"단지, 그 전에 화내게 해 버린 모양이지만."
그랬다.
애매하고 물명확한 것 보다, 사치코가 화를 낸 걸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오해를 풀면 돼잖아?"
"그, 그렇지만, 어떻게……."
"간단하잖아. 유키치의 진심을 전하면 돼."
"진심……이라니."
사치코의 얼굴을 떠올린다. 길고 아름다운 흑발, 하얗고 매끈한 피부, 섬세한 손가락, 강함과 상냥함을 함께 가지는 아름다운 여성. 지금까지 의식한 적은 없었지만, 말을 듣고 고민하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한 미소녀다. 특별히 용모에만 얽매일 생각은 없지만, 아무 생각도 없을 린 없다.
하지만, 자신의 진심이라니.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연애대상으로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여성은 그리 많지 않겠지.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곁에 있을 때 어울릴 것 같지가 않다.
"어울리나, 안 어울리나 문제가 아니잖아. 서로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지."
"그래도, 선배는 괜찮으세요? 그"
"응? 아아, 약혼 말인가.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는 이미 그럴 생각은 없어서. 오호, 그걸 신경 쓴다는 건 그럴 마음이 들었단 소릴까? OK. 그럼 삿짱을 불러 볼까."
"으앗, 잠깐 기다려 주세요. 그, 그만두세요."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곤 버튼을 누르려 하는 스구루를 허둥지둥 멈춘다. 불만스런 표정으로 스구루는 눈썹을 찌푸린다.
"오해는 빨리 푸는 편이 좋다고."
"그, 그럴지도 모르겠지만……스, 스스로도 연락 쯤은 할 수 있으니까."
"그런가. 그럼, 자."
휴대폰을 건네받는다.
"아니, 그래도, 마음의 준비가."
"덧붙여서, 이미 통화 버튼은 눌러 뒀으니까."
"에엣?!"
전화를 귀에 대자, 확실히 호출음이 들려왔다. 마음을 정리할 틈도 없이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예, 오가사와라입니다만.』
"저저저저저저기! 그, 나, 아니 저, 후쿠자와라고 하는데요."
눈 앞에서 스구루가 쓴웃음을 짓고 있지만, 신경 쓸 여유도 없다.
『어머, 유키 군? 격조했어요. 저, 사야코예요. 건강한가요?』
"아, 네, 안녕하세요. 예, 덕분에 건강해요."
『그건 잘 됐네요. 오늘은 대체, 어떤 용무로……아, 묻는 것도 촌스럽겠네. 사치코죠? 잠깐 기다려 줘요, 우후후.』
왠지 사야코는 묘하게 기쁜듯한 말투로 응대하곤, 그대로 사치코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아무래도 대기상태로 놓는 걸 잊은 모양이라, 잘 들리는 수준까진 아니지만, 저편의 소리가 들려온다.
『……사치코, 안 들리니? 유키 군에게서, 전화야.』
『…………어요。그렇게 몇 번이나……해도』
사야코의 소리는 잘 들리지만, 거리가 먼 탓도 있는지 사치코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대화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다.
『기다리게 하고 있으니까, 빨리.』
『……안 받으면, 안 되…………라는 걸로.』
『뭘 부끄러워 하는 거니…………잖니?』
『아니……부끄러워 하거나……으』
『자, 자, 빨리. 잘 됐네. 벌써 서로 전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 거구나.』
『그러니까 아니에요! 아직 그런 관곈 안 안 됐어요!』
전화에 귀를 대면서, 굉장히 들뜬 말투의 사야코와 분노섞인 말투인 사치코가 굉장히 대비된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스구루가 흥미가 있는건지 없는건지 느긋하게 카푸치노를 새로 주문하고 있다. 마음도 편해 보인다.
『……정말 참……에에, 대기 버튼……』
그리고, 거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대기로 안 돌려 뒀잖아요!!』
『어머나, 그럼 다 들렸을까?』
『뭐……저기, 여보세요……유키 군?』
"아―아니 그, 안 들렸으니까요."
『…………으!!』
아무래도 답을 잘못 고른 모양이었다.
『저……아니에요. 별로 유키 군하고 이야기하는게 싫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 조금 컨디션이 나빴어서.』
『어머, 사치코, 아까까지 RL의 와플을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컨디션 나빴었니?』
『어, 어머니!!』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화내는 사치코의 표정을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한 걸 참는다.
『……저기, 그래서 유키 군. 오늘의 용건이라는건 뭔가요?』
"아, 예."
이번엔 유키가 동요할 차례였다.
그도 그럴게, 갑자기 준비도 없이 전화한 거니까, 뭘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도 전혀 감이 없는 상태다.
그래서, 사치코가 용건을 물어봐도 바로 대답도 못하고.
『――저기, 유키 군?』
조용히 있는 유키를 상대로, 당황스런 듯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온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한다. 그런데 뭐라고 하면 되는 걸까. 머릿속에 사치코의 모습이 떠올라, 자신을 바라본다.
자신의 마음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 우선, 꼭 해야 하는 건―――
"아, 저기, 사치코 씨."
『예……?』
숨을 들이쉰다.
"저, 사치코 씨를 만나고 싶어요!"
휴대폰을 스구루에게 돌려줄 때가 돼서야 가까스로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빠졌다. 안도한 것 같은 한숨도 내쉬었지만, 그런 유키의 모습을 스구루는 즐거운 듯이 바라봤다.
"역시 유미 짱의 남동생이구나. 성성, 딱 맞잖아."
"……남 일이다 싶어서, 즐기고 있는 거죠?"
"남 일이라니. 삿짱은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고, 유키치도 사랑스런 후배야. 따스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해 주면 좋겠는데."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즐기고 있는 부분도 다분히 있어 보인다.
다시 주문했던 카푸치노 컵을 들고, 남은 걸 단숨에 마셔서 표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태도를 보면 안다.
"뭐가 어찌됐든, 축하해."
"축하……할 일인가요?"
"그야 당연하지. 여하튼, 그 남성혐오증인 삿짱이랑……."
그랬다, 지금은 좀 더 중요한걸 생각해야 한다.
그도 그럴게―――
그건 굉장히 곧은 말이었다. 한순간 그가 자신에게 했던 처사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전화기도 해서 동요했던 거겠지.
그래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시원스레 승낙해 버렸다.
"――알았어요, 그럼――이번 일요일도 괜찮은가요?"
스케줄을 한 순간에 파악해서, 비어있는 걸 확인하고.
그런 말을 해 버린 거다.
전화를 끊은 뒤, 한동안 얼이 나간 것 처럼 멍하니 서있던 사치코.
일요일에, 유키 군과, 둘이서 만난다.
그건 즉.
"어머, 잘 됐네. 유키 군과 데이트?"
"어머니, 다른 사람 전화를 훔쳐듣지 말아 주시겠어요?!"
"훔쳐듣기라니, 말이 심해. 싫어도 들려왔어."
"…………."
일단, 사야코는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지금은 그보다 우선해서 신경써야 할 게 있다.
대체, 어떡하면 좋은 걸까.
사치코를 놀리고 있는 건지, 그게 아닌 건지,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치코는, 긴 흑발을 흔들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