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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세계


투고 |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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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 저들이었소. 미첼과 램버트라는 사람들이었지. 생존자였습니까? 네? 생존자였냐구요. 그는 내 질문에 어리둥절하며 대답을 미루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폈다. 지저분하지만 정리되어있는 침대와 서랍들이 있었다. 왼쪽에 있는 책상 벽면에는 가장 큰 과거의 지도가 걸려져 있었다. 지도는 낡고 색이 바랬지만 아직 선명했다. 나는 아이가 상처를 봐주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 누굽니까? 그는 부어오른 얼굴을 내게 돌리며 말했다. 밀수꾼. 사실, 식량을 받는 대가로 총알 같은걸 공급해주는 거래상일 뿐이오. 그들에게 맞은 이유가 있었군. 그렇소, 나는 그들이 원하는 총알을 공급해주지 못했지. .40 S&W과 9mm 탄이었소. 그들이 원한건 한 박스씩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세 발씩 갖고 있었다오. 그는 아쉬운 듯 말했다. 그 아쉬움은 내가 죽여버린 그들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그 표정에서 고개를 돌려 좀 더 자세히 오두막 안을 살폈다. 침대는 두 개였고 지하로 가는 작은 문이 있었다. 나는 잠궈놓은 자물쇠를 총의 개머리판으로 쳐서 뜯어냈다. 불안한 감정이 문득 스쳐들었다. 저택에 있었던 것 처럼 이 안에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까 얻어맞은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당연하게도, 이 안에는 식량이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아이를 불러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무슨 일인지 모르는 듯 했다. 나는 아이의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처음 본 아이의 눈동자는 에메랄드 색이었고, 잿빛의 세상에서 유독 밝게 빛나는 듯 했다. 무슨 일이예요? 아이가 묻자 나는 조용히 하라고 하고 품에서 리볼버를 꺼내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저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들든 쏴버리렴. 알겠니? 하지만 저 사람은 좋아 보이는 걸요. 좋은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나쁜 사람일 수도 있지, 안 그렇니? 그치만요. 그래, 네 마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게 만약을 대비한 대비책이란다. 알겠니? 알겠어요.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가 들려준 리볼버를 만지작 거리더니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마 그건 내 행동을 흉내낸 것이 틀림 없었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으며 머릴 쓰다듬어줬다. 아이는 비니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여 있었다. 나와 아이는 다시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고, 남자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이 안에 식량이 있을 것 같군요. 남자는 밝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나는 어깨에 매어뒀던 라이플을 다시 손에 쥐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약실에 남은 단 한 발이 끝임을 상기하면서. 짙은 땅의 흙내음과 먼지 내음이 묵어 섞여있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도록 내버려둔 후 라이플을 단단히 쥐고 총구를 앞으로 내밀며 계단을 내려갔다. 섬뜩했다. 몇 일전 저택에서 본 그들이 다시 이 지하에서도 기어나올 것만 같았다. 계단을 전부 내려가자 흐릿하게 보이는 앞에는 등유 램프가 있었다. 그걸 키자 순식간에 환해졌고, 천국 비스무리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순간 놀랐다. 한 열 두개 정도 되어보이는 통조림과 탄약 상자들이 좁은 지하실 안에 잘 정리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살펴보았다. 토마토 통조림과 돼지고기 조림 통조림도 있었다. 콘은 물론이고 생수도. 나는 묻은 먼지들을 닦아내면서 라이플을 매고 황급히 그것들을 모두 가방 안에 담았다. 한 열 개쯤 들어가자 가방이 빵빵해졌다. 이걸로 6일 쯤은 버틸 수 있겠군. 나는 씩 웃었다. 엄청난 횡재였다. 그리고 가장 구석진 곳에 군용색으로 도색된 나무 탄약상자가 있었다. 오래되어보이는 상자를 열자 30구경 탄약들이 쌓여있었다. 한 수십발은 될 것 처럼 먼지 묻지 않은 황동색 탄약들이 그 자태를 뽐냈다. 나는 맨 라이플의 탄창을 빼내 그 탄약들을 담았다. 그리고 품에 담아둔 빈 탄창에도 다섯 발을 쑤셔넣고 자릴 떴다.
 다시 올라가자 아이와 남자는 그 사이에 친해져 있었다. 나는 순간 그에게 식량을 넘겨줄까 고민했다. 두 개면 하루. 6일을 버틸 수 있는 양에서 5일로 줄어든다. 하지만 그의 목숨을 구했고, 한 번 더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듯 했다. 나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밝은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오, 지하는 어떻습니까? 30구경 탄약들이 넘쳐나더군요. 가져가시오, 나는 충분히 챙겼으니. 그러면서 나는 가방에서 토마토 통조림과 콘 통조림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당신이 전부 가져가도 될텐데. 그건 올바르지 않으니까. 나는 대답했다. 남자는 싱긋 웃으며 통조림들을 그가 앉은 침대 뒤로 두었다. 난 그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총과, 자신과, 아이였으니까. 당신 아이입니까? 남자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 아이죠? 어느 죽은 여자. 나는 간결하게 대답하고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남자가 찾아준 듯한 장난감을 쥐고 놀고있었다. 나는 순간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아들이 만약 있었다면 아이와 함께 놀아도 됐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들이 서로 지탱하며 커가는 것을 상상했고, 나는 곧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아내와 아들은 죽은 사람이었다. 죽은 세상에서 죽어버린 사람들일 뿐이었고 아직 그의 기억 속에서는 살아있었지만 죽어있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지하실로 가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나는 아이의 놀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일어서서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제 열 발 남았군. 꽉 찬 다섯 발의 탄창과 약실에 남은 한 발과 네 발 남은 탄창. 나는 탄창을 꽉 채우지 않고 한 발을 빼두었다. 약실에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어가는 땅에 아까 내가 죽인 남자가 눈을 뜬 채로 엎드려 죽어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하늘을 보도록 돌린 후에 뜬 눈을 감겨주었다. 흑인은 이미 머리가 깨져 죽어있었기 때문에, 잔인할 정도로 뇌장과 뇌수와 피가 섞여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나는 한 명씩 그들의 다리를 잡고 숲속으로 밀어 죽은 나무들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주었다. 기분이 미묘했다. 담배가 있었다면 지금쯤 한 대 태우고 있겠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다만, 흑인을 끌때 질질 흘려진 피와 뇌수가 길을 그리고 있었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자 활짝 웃은 남자가 탄약 상자를 내려두고 싱글벙글 웃고있었다. 아, 정말이죠. 나는 여기에 서너번 오면서 이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는 마치 크리스마스때 산타에게 깜짝 선물을 받은 아이마냥 웃고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는 내게 다가왔다. 왜 나가셨어요? 아까 죽인 사람들을 묻어주기 위해서. 묻어줬어요? 응. 삽이 없어서 깊게는 못 묻어줬지만. 아이는 편안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남자는 어느새 상자들을 들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와 나는 그에게 왜 떠나는지 물었다. 남자는 이 근처의 생존자들을 찾아가 볼 생각이라고, 저 위에 있는 마을로 간다고 대답하고 떠났다. 아마 우리가 지나쳐온 마을이리라.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여기서 하룻밤 묵겠니? 아이는 끄덕였다. 그래, 묵자꾸나. 맨 가방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안쪽 침대로 옮겼다. 그쪽이 더 편하다고 해서였다. 나는 가방에서 오늘 건진 전리품을 건져들었다. 돼지고기 통조림. 나는 이걸 어디서 데울까 고민했지만, 데울만한 난로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먹도록 했다. 먼지 없는 책상에 아이를 앉혀놓고 통조림을 까서 아이에게 수저와 함께 주었다. 아이는 이게 뭔지 물었다. 뭐예요? 돼지고기. 엄청 맛있는거. 코카 콜라처럼요? 아이는 맛있는 것이라는 단어에 눈을 반짝였다. 아니, 달지는 않단다. 하지만 맛있지. 음, 알았어요. 아이는 단념하고 조심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이의 옆에 앉아서 아이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리볼버를 쥐고 만지작 거렸다. 실린더 안에 든 다섯 발을 확인했고, 총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멀쩡했다. 아마 총신에 파인 강선도 아직은 날카울 것이었다. 날카롭지 않으면 탄도가 멀쩡하지 않을테니, 문제가 생길 여지가 충분했다. 청소를 해주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청소는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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