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플랑, 495년의 역사 (전)
누가 왔어. 내 방에 누가 왔어.
얼굴이 인형같이 예쁜, 인형같은 언니.
“누우구?”
내가 있는 걸 알게 되고, 언니는 마법을 썼어.
알고 있어. 나는 그 마법을 알고 있어.
언니의 친구가 나랑 만날 때 쓰는 마법.
자기 앞에 자기 환상을 만들어서, 내게 “눈”을 안 보이게 하는 마법.
“언니는, 누우구?”
파체의 지인이야?
그래도, 그녀에게선 파체의 냄새는 안 나.
이번엔 그녀의 주위에서 인형이 여럿 나타났어.
인형 같은 언니는 인형사 언니였어.
왠지 우스워.
파체 대신에 풍겨오는 건――“바깥”의 냄새.
한 번도 나간 적 없지만,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이야기와 냄새만이라면 알고 있어.
메이링이 자주 예쁜 꽃을 가져와 주니까.
언니나 사쿠야가 자주 “바깥”의 이야기를 해 주니까.
그래도, 이 언니에게선 그 사람들의 냄새도 안 나.
그런데도, 내가 모르는 언니는 분명 날 알고 있어.
내가 모르는 언니는, 날 알고 있는 언니는, 그래도 나를 만나러 와 줬어.
저기, 언니――언니라면――.
“나는 플랑드르. 플랑드르 스칼릿이야. 언니, 이름을 가르쳐 줄래?”
나를 부숴 줄 수 있을까?
◇
어이, 유카리.
나랑 플랑드르의 상성이 어떻게 좋은지, 세 줄 요약해줘봐.
혹시나, 레이무와 내가 친한 걸로 질투한 결과, 여기서 나를 죽여버리려는 꼼순가?!
마음속으로 허둥대며,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시점에서 나는 어떤 마법을 발동시켰어.
환영 마법의 일종으로, 만들어낸 한 장의 얇은 벽에 임의의 영상을 비추는 마법이야. 나는 그 마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내 정면에 비춰냈어.
플랑드르의 능력은 치트야.
“온갖 것들을 파괴할 정도의 능력”. 회피도 방어도 불가능한, 일격즉사의 절대공격. 하지만 이 능력에도 대부분의 능력이 그렇듯 결점이 있어.
그녀――플랑드르는 물질 안에서 제일 긴장된 “눈”이라 불리는 부분을 볼 수 있고, 거기에 힘을 줘서 시원스레 박살 낼 수도 있다고 해. 그걸 자기 손으로 옮겨서 쥐어 부수는 걸로 대상을 파괴하는 거야.
흔히 말하는 “꾸욱 해서 냥!” 이라는 거지.
즉, 전제조건으로 파괴할 것의 “눈”이 보이지 않으면 능력은 발동할 수 없어.
따라서 나는 나와 플랑 사이에 한 장의 벽을 끼워넣어 나를 직접 볼 수 없는 환경을 만든 거야.
유카리를 추궁하는 건 이 뒤야. 무슨 생각으로 나랑 플랑드르를 붙였는진 모르겠지만, 요괴의 현자에겐 깊은 생각이 있는 거겠지.
지금은 쓸데없는 건 생각하지 말고 이 자리서 살아남는데 전력을 써야 해.
나는 추가로, 전송마법으로 집에서 인형들을 주위로 불러왔어.
상해, 봉래를 필두로 쌍검, 창, 손도끼, 방패, 방패. 그 몸에 지팡이랑 비슷한 무기를 들려준 그 외 셋, 총 다섯 인형이 나를 지키려는 듯 포진했어.
일단 여기서부턴 자기소개와 대화로 시간을 벌어볼 테스트부터.
“처음뵙겠어. 나는 앨리스 마가트로이드. 환상향에 사는 마법사야.”
“파체 외의 마법사는 처음으로 봤어. 환상향이라는 건 뭐어야?”
“귀하들이 전이해 온, 이 땅의 이름이야.”
“흐응.”
마음이 없는 대답을 하면서 입가에 손가락을 대곤 고개를 돌리는 플랑드르.
그녀는 원작에서 조금 마음이 정상이 아닌 듯이 표현되어 있지만, 지극히 평범한 반응이야.
이건 혹시나, 전투를 피하는 것도 꿈이 아닐지도 몰라.
“나 말야, 계속 여기에 갇혀 있어.”
알고 있어.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플랑드르는 495년간 이 지하실에 유폐되어 있었던 걸로 되어 있어.
원작에서 495년이라면 레이무가 어릴 무렵은 몇 년이 되는 걸까.
중화 사천년처럼, 계속 495년인 채인 걸까?
그런 얼빠진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앞에서, 플랑드르가 갑자기 부르르르 떨기 시작했어.
“왜 그――”
“아하하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전언 철회. 이 애 꽤 맛이 갔어.
말을 걸려던 나를 막고, 배꼽을 잡고 허리를 젖히면서 말 그대로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한 플랑드르. 솔직히 말해서 무진장 무서워.
“나, 앨리스로·놀래!”
플랑드르의 광기를 담은 두 홍안이 곧게 나를 비췄어.
전투 불가피. 그렇다면, 선수 필승!
“빛이여! 한줄기 눈부신 섬광이 되어 심연 속의 어둠을 물리쳐라――“에르메키아 란스”!”
영창 뒤, 내 손바닥에서 빛의 파동으로 된 창이 출현해 플랑드르에게 돌격했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안 순간 나는 환희했어.
판타지 라이트 노블이라는 개념을 내게 알게 해 준 걸작. 내 “성전(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의 주문을 나 자신이 쓸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영창을 외울 정도로 푹 빠졌던 그 멋진 작품의 기술을 자신의 손으로 펼쳐내고 싶어.
“최하위 주문은 통째로 외워 읊는 것 만으로도 발동한다”는 원작의 기술에 의존해서 내 손바닥에 밝은 구슬을 출현시킨 순간, 나는 이 마법을 끝까지 파고들 결의를 굳혔어.
내 집에 있던 마도서의 기술과 서로 맞춰보고, 영창으로 읊는 단어의 의미를 모두 이해해, 발동시켜, 다음 주문의 연구로 옮겨가. 그 뒤엔 이를 계속 되풀이했어.
원작에서 나왔던 상위존재의 힘을 빌린 마법이 발동된 시점에서, 나는 원작세계를 포함한 평행세계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어.
어설프게라도 이론을 파악하고 발동까지의 순서를 이해하고 있는데다 읊어야 할 영창까지 알고 있어.
이미 완성된 답이 있는 거야. 나는 내가 가진 지식과 새롭게 얻은 마법의 지식을 써서 역산해 가기만 할 뿐.
쉬웠다곤 할 수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오리무중 속에서 처음부터 더듬어가며 연습해 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빠른 기간에 기술의 숙련도를 높여나갈 수 있어.
원작 지식이라는 사전 정보를 밑에 깔고, 연구를 거듭하길 1년 반. 결과는 보시는 대로.
여기는 환상향. 잊힌, 부정된 것들이 모이는 세계.
말을 빌려서 설명하자면, 여기는 현세에서 종이 한 장 떨어진 세계. 다른 세계에 종이 한장치 가까운 세계.
그러니까 다른 세계의 이론도 환상향에 닿았어.
이런 건 픽션이야.
이런 세계가 있을 리 없어.
그런 사람들의 개념은 신앙에 가까운 결정이 되어, 이 잊힌 모형정원에서 현실이 되어 모습을 드러내.
“읏!”
짧은 비명과 함께, 플랑드르의 어깨에 직격한 빛의 창이 그 부위를 지워날렸어.
원래 정신세계면이라 불리는, 우리가 지금 있는 세계의 거울 같으면서도 연장선상에 있는 우리들의 혼이나 정신이 존재하는 곳에 간섭하여 상대의 정신에만 대미지를 줘야 할 공격이지만, 인간과는 다르게 다른 존재들의 공포나 개념을 기반으로 몸이 만들어진 요괴에게는 이런 직접적인 파괴 효과를 발휘해.
인간이라면 지독한 허탈감에 휩싸이고 조무라기 요괴들이라면 한 방에 박살날 내 마법은, 그녀에게도 제대로 통했어.
할 수 있어.
“아파아……보답이야!”
확신을 얻은 날 상대로 플랑드르는 바로 어깨를 재생시키곤, 소리치며 탄막을 흩뿌렸어.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 탄막놀이용 비살상 마법같은 게 아닌, 요기를 대량으로 담은 완벽한 격멸용 탄막.
무기를 든 인형 셋을 산개시켜, 방패를 든 둘을 내 앞에 위아래로 전개. 인형들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거대한 방패로 그녀가 쏜 탄막을 받아내.
인형들의 무기나 방어구의 작성도 “성전”의 지식에 따라.
연구를 통해 정신세계면을 지각할 수 있게 된 나는, 그쪽에서 마족이라 불리는 정신생명체에 가까운 감각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보통 때는 정신세계면에 몸을 둬서 물리적인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고, 정신세계면에서의 공격――요는 정신적인 공격에만 대미지를 입는 꽤 극악한 생태를 가진 그 종족들은, 환상향의 인외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아무리 나라도 그들처럼 “자신을 쪼개서 무기나 부하를 만드는” 식의 슬라임 같은 짓은 못 했지만, 현실보다도 정신세계면쪽을 강화하는 걸로 정신적, 개념적인 힘인 마력이나 요기, 영기 등에 강한 소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어.
계획대로 플랑드르의 탄막은 인형의 방패에 막혀 내겐 닿지 않았어.
자, 다음은 이거야!
“영원과 무한을 넘나드는 모든 마음의 근원이여. 내게 모여 힘이 되어라――“아스트랄 바인”!”
처음 내쏜 “에르메키아 란스”와 같은 효과를 무기에 부여하는 주문.
산개해 있던 인형 셋이 일제히 플랑드르를 덮쳤어.
“갸아악!”
상해의 검으로 오른팔을 잘려, 아까보다도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젖히는 플랑드르.
“이, 갸악?!”
남은 왼손으로 상해를 때리려 한 그녀에게, 봉래가 빈 오른쪽 옆구리로 원뿔 창이 들이박았어.
마지막으로 정면에서 오른 어깨를 노려 세로로 손도끼를 내려친 인형의 일격을 먹으며, 플랑드르는 그 인형의 머리를 잡아냈어.
“그으으으으……잘도오!”
재생하는 그녀의 분노를 나타내듯, 인형이 그 괴력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쥐여 깨졌어.
카트린느――――!
전투용 인형에는 모두 이름을 붙여뒀던 나는, 무참히 박살난 그녀를 보고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어.
네 죽음, 의미 없게는 하지 않을게!
내가 조종하는 인형들은 하나하나가 진심을 담아 만든 소중한 아이들이야.
죽어간 동료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플랑드르를 약하게 만들어 무력화 시켜 버리자.
““에르메키아 란스”!”
결의를 다시 다지고, 나는 인형 증원을 불러내면서 다시금 섬렬의 창을 플랑에게 내쏘았어.
“아하하핫! 앨리스는, 굉장히 강하구나!”
“귀하에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영광이야.”
내게 접근하면서 시원스레 공격을 피해낸 플랑드르에게 인형을 내보내 견제하면서, 다음 수단을 고민해.
“저기 앨리스! “죽는다”는게 뭔지 알고 있어?! “부서진다”는게 어떤 건지, 나한테 가르쳐 줄래?!”
인형들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고 뒤로 물러난 플랑드르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시작했어.
“언니도, 파체도, 메이링도, 사쿠야도, 소악마도――말만 하면서 전혀 안 가르쳐 주는 거야!”
그건 그렇겠지.
눈앞에서 죽어 보인다고 해서, 보고 있는 사람에게 “죽음”의 개념을 전할 순 없어.
약점 외엔 불사나 다름없는 재생능력을 가진 흡혈귀에게, 진정한 의미로 “죽음”을 가르치는 건 꽤 어렵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부수는 거야! 전부 죽여 부숴 버리면, 언젠가는 분명 나도 “죽는다”는 걸 이해할 수 있는 거지?!”
“무리야.”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리 남에게 시험하더라도 스스로 감각을 잡지 못하는 한 그 개념을 이해할 수는 없어.
“그러면――앨리스가 가르쳐 줘!”
어느샌가 플랑드르는 울고 있었어.
주르륵 눈물방울을 흘리며, 광기에 물들었던 얼굴이 길 잃은 애들처럼 엉망진창이 된 채로 필사적으로 뭔가를 내게 호소해 왔어.
“부서져 버리는 거야. 다들 부서져 버려――정말 좋아하는데, 정말 좋아하는데, 전부 부서져 버려.”
제어 불가능한, 자신의 힘에 휘둘리는 소녀.
창작에서 비슷한 환경을 본 나는 이해해. 이해되는 거야.
아니, 이 마음은 단순한 연민이야. 진정한 플랑의 괴로움은 나 같은 건 도저히 공유해 줄 수 없을, 정말로 깊은 거니까.
“큰 상처를 입힌 언니한테 들은 대로, 지하에 갔어. 떼도 안 쓰고 계속 계속 여기 있었어…….”
이미 둘의 움직임은 멈췄어.
인형들을 자신의 주위로 돌린 내 앞에서, 플랑은 눈을 글썽이며 울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 끝난다면 플랑드르는 유폐되거나 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가 단순한 소녀라면 이런 처사는 필요 없어.
“가르쳐 줘――나를 부숴서, 나한테 가르쳐줘어!”
눈물이 넘치는 채로 광기와 살기를 한계까지 들끓인 플랑드르가 내게 돌격해 와.
거절이라고! 아가씨!
““에르메키아 플레임”!”
“에르메키아 랜스”의 강화판, 위력과 범위를 확대한 섬광이 플랑드르의 몸을 꿰뚫어.
“아하하핫! 아핫! 아하하하하하하핫!”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그녀 자신도 이미 알지 못하겠지.
엉망진창이 된 감정 채로 나를 덮쳐오는 플랑드르.
““디스팡”!”
내 주문에 맞춰, 플랑드르는 직선에서 바로 옆으로 궤도를 바꿨어. 지금까지 내가 정면으로만 마법을 쏜데 따른 회피행동.
하지만, 부족해.
“그갸아아아아아!”
그녀의 뒤……에서 뻗어온 그림자의 덕에 온몸의 그림자를 먹혀서, 몸도 같은 곳을 잃은 플랑드르의 입에서 드높은 절규가 토해져 나왔어.
상대의 정신과 육체를 먹어치우는 주문을 내쏜 건, 내 마법의 줄과 이어진 상해 인형.
인형들은 내 무기이자 지팡이야. 링크가 이어져 있는 상태로 거기서 마법을 내쏘는 훈련도 소홀히 하진 않았어.
접근은 막고 탄막을 받아내며 그 행동을 제한해 나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에?!”
예상대로 진행되던 전투 중에, 마음속으로 약간 승리를 떠올리던 내 옆에, 갑자기 그림자가 향해왔어.
당황해 그쪽으로 눈을 향해보자, 거기엔 눈앞에서 소리치고 있었어야 할 플랑드르가.
금기 『포 오브 어 카인드』――
플랑드르가 넷으로 분열하는, 원작에도 등장한 반칙에도 정도가 있다 싶은 귀축 스펠카드.
지금 싸움은 탄막 놀이같은 장난은 아니야. 선언같은 건 필요 없어.
““비스퍼랑크”! 으윽!”
순간적으로, 효과가 떨어지는 영창생략으로 양손에 마력을 보내 양팔을 교차시켜 그 주먹을 받아들였지만, 흡혈귀의 힘을 생각하면 파성퇴 앞에 빼빼로를 놓은 거나 마찬가지야.
뼈가 부서지고, 피부가 갈라지는, 어찌 할 수 없는 파괴음이 내 온몸을 악기로 삼아 울려퍼져.
“윽, 커윽, 크학!”
땅을 튀기며 쓰러져 등 뒤의 벽에 부딪치는 나. 그 충격으로 폐와 목으로 공기와 핏덩이를 잔뜩 토해냈어.
싸움을 시작하기 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만――겨우 한 방에 형세 역전이야.
상처를 고칠 주문도 쓸 수 있지만, 플랑이 그걸 친절하게 기다려 줄 리도 없어.
끝났어――
멀리서 플랑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어떻게든 지금까지 힘내왔지만, 나는 결국 여기서 끝날 운명인 모양이야.
여기서 내가 죽으면, 원작이 무너진다?
그게 뭐 어때서. 이게 현실이야.
그 현실을 얕봤던 빚이 이렇게 돌아온 것뿐이야.
유카리, 미안――나, 부탁받은 거, 지키지 못했어.
마음 속으로 나는 날 의지해 준 친구에게 사과했어.
아아――그렇지. 알고 있어.
지금까지 쓴 주문보다, 훨씬 강력한 주문은 쓸 수 있었어.
원작에 등장하는 마족의 왕, 마왕과 그 다섯 심복. 아마 플랑드르보다 훨씬 격이 높을 그들의 힘을 빌린 주문을 난 쓰지 않았어.
나는 흡혈귀에게 유효한, 그야말로 그녀가 소멸할 가능성마저 있는 언데드용의 정화주문도 익히고 있어.
그런데 쓰지 않았어.
알고 있어――이미, 알고 있는 거야.
나는――죽고 싶은 거야.
그치만 그렇잖아?
나는 앨리스 마가트로이드같은 인물이 아냐.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어디의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지만――나는 어딘가에서 살아왔던 아무개인 거니까.
혹시나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원래 세계에 돌아가 있을지도 몰라.
자명종을 멈추고 “아~ 왠지 무지 리얼한 꿈을 꿨구나~” 같은 말을 하면서 얼굴을 씻고 양치를 한 뒤, 밥을 먹고 직장이나 학교에 가서――
돌아오면 게임을 하거나 만화를 읽거나, TV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보고 울거나 낄낄 웃거나.
그런 식의 흔히 있는 단순한 인간으로 돌아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밖에 나가는 게 무서웠어.
밖에 나가서, 그게 자신이 아는 현대의 풍경이 아닌 가공의 세계인 환상향이라는 걸 알면, 변명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게 몸과 마음이 얼어붙을 정도로 무서웠어.
밖에 나가서, 시간이 지나는게 무서웠어.
유카, 레티, 루미아――맘편히 그녀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건, 혹시나 그녀들에게서 공격받으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생각해 버렸으니까.
죽는 건 무서워. 그러니까 그런 내 저항을 박살 내고 죽여 줄 상대를 나는 찾고 있었어.
하지만, 결국 나는 모두와 친해졌어.
일본인다운 기회주의. 다들 멋진 사람 뿐이어서, 미움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버렸어.
죽고 싶은데, 죽고 싶지 않아.
무섭고, 두려워서, 밤에도 잠들지 못했어.
――거짓말이야. 지금의 내게 그렇게 깊은 감정은 솟지 않아.
어디까지 높이려 하더라도, 일정한 파도로 멈춰 버려. 갑자기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하는 분노도, 깨어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공포도, 죽는 거나 마주 죽일 상대에 대한 기피감도, 말하는 것 만큼 느끼고 있지 않아.
그래서 나는 살아 있었어. 이렇게 그냥 살아만 있었어.
하지만, 그녀와 만나 버렸어.
나는 그녀와 만나 다시금 깨달아 버렸어.
원인은 선대 하쿠레이의 무녀.
그녀의 인상은 강렬했어.
인간이라는 걸 동경하기에는 넘칠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어.
자신이 인간이라는 걸 떠올리기엔 넘칠 정도로 불합리한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그녀의 죽음을 알고 유카리의 부탁에도 간단히 응했어.
홍마관과의 전쟁. 변명도 할 수 없는, 내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진짜 싸움.
봐, 내가 바라던 대로 저항할 수 없는 “죽음”이 이렇게 내 앞에 가로놓여 있잖아.
레이무――미안해. 파티 약속, 부수게 되겠네.
내뻗은 플랑드르들의 손을 앞두고, 나는 희미해진 시야로 그걸 보고 있었어.
이걸로 끝나――이걸로, 끝낼 수 있어――.
끝낼 수 있는데――여기서 끝내는게 가능한데――젠장――.
레이무를 떠올려 버렸어.
울고 있는 플랑드르 탓에, 한순간이라곤 해도 그녀가 우는 얼굴을 떠올려 버렸어.
젠장, 망할, 빌어먹을.
머릿속에 수없는 욕지기가 끝없이 흘러넘쳐. 끝을 바라는 내 마음속에, 깨달아선 안 되는 다른 하나의 마음이 스며 나와.
죽고 싶지 않아――죽고 싶지 않아――.
정말로, 나는 어쩔 도리 없는 얼간이야.
겨우 하나 뿐인 자그만한 연으로, 다시금 “삶”에 매달려 버렸어.
죽음에 가까워져, 양팔도 망가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그런데도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버렸어.
이것도 말하는 만큼 강한 감정은 아냐. 다른 감정보다 조금 위인 것 뿐이야.
하지만 그 감정은, 다른 무엇보다 강한 감정으로 자라 버렸어.
아아, 플랑드르, 나는 분명, 귀하를 죽일 거야――
원망해도 괜찮아. 증오해 줘도 돼――
나는 귀하에의 죄책감도 크게 가지지 못할 테니까――
귀하의 죽음을 마음속 깊이 괴로워할 수 없는, 최악의 여자니까――
아아――싫구나아――
“――버스트 링크.”
나는 끝을 시작하는 주문을 읊었어.
◇
“에?”
인형사인 마법사에게 최후의 일격을 넣으려고 손바닥을 향하던 네 플랑드르는, 알리스의 변화를 피부로 느꼈어.
그녀의 모습이 바뀐 건 아냐. 마력이 이상하게 높아진 것도, 주위에서 뭔가 출현한 것도 아냐.
하지만 그녀는 읊은 마법을 시작으로 푸른 두 눈동자를 한계까지 뜨곤, 코로 한줄기 피를 흘리기 시작했어.
플랑드르는 몰라. 그녀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를.
하지만 알리스는 알고 있어. 온갖 이세계에서 전해져온, 온갖 이론을 알고 있어.
지식과 지식을 뒤섞어서 지혜로 승화시켰으니까, 그녀는 그게 진실이라는 걸 알고 있어.
뇌의 사고가 초가속 할 수 있다는 것을.
연산한 술식을, 머릿속에 담아둘 수 있다는 것을.
주문과 주문을 더해서 새로운 주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세계에――혹시나 이 세계에도, 수없는 세계를 창조한 혼돈의 바다라는 흔들리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
모든 주문을 맞대어서 사람은 낼 수 없는 단순한 잡음이 된 앨리스의 영창에 따라, 그녀의 주위 전체가 흔들려.
주위에 가득찬 평온한 하얀 빛은, 그 하나하나가 양손으로 고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마법진이야.
무한히 솟아오른 그 구멍에서 지금보다 작은 손가락 셋쯤 크기의 인형들이 각각 무기를 한 손에 들고 나타났어.
하나나 둘이 아냐. 백, 이백, 오백――방의 반을 뒤덮을 정도의 규모로,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꿈틀거리며……그것들은 일제히 플랑드르들을 덮쳤어.
인형들에게 부여되어 있는 건 아까 싸움에서도 썼던 “아스트랄 바인”. 정신을 잘라내는 마법을 받은 무수한 병사가 넷이 된 플랑드르에게 쇄도해.
“아――.”
“갸――.”
“으――.”
저항할 틈도 없이 분신 셋이 산산조각나서 흩어졌어.
파다다다닥 하는 거대한 벌레 날개소리를 내며, 남은 마지막 본체를 향해서 인형들이 그녀의 생명을 먹어치우려 다가가.
“아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격통을 일으키는 침을 온몸에 꽂힌 듯한, 정상인이라면 백번은 발광했을 고통이 플랑드르를 유린해 나가.
절규하는 플랑드르 앞에서, 벽에 기댄 채로 움직이지 않던 앨리스가 입을 열고 기도하는 듯 맑은 목소리로 주문 영창을 시작했어.
――암흑보다 더 어두운 자여, 밤보다 더 깊은 자여, 혼돈의 바다의 흔들림이여, 금색으로 변하는 어둠의 왕――
플랑드르는 그 주문을 몰라. 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위험성을 이해했어.
――나 여기서 너에게 바란다, 나 여기서 너에게 맹세한다――
이건 영창하게 둬선 안 되는 거야. 완성시켜선 안 되는 마법이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레바테인』――
오른손에 낳으려 한 재액의 검은, 백체의 인형과 상쇄되어 먹혀 버렸어.
날개가 되어 도망가려 한 왼손은, 변화한 순간 찢겨 버렸어.
안개도 될 수 없어. 이런 곳에서 되어봐야, 그야말로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려.
――우리 앞을 가로막는 모든 어리석은 자에게, 너와 내가 힘을 합쳐, 그 위대한 파멸을 가져다 줄것을――
“그만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진동마저 함께한 플랑드르의 포효도 허무하게, 앨리스는 이미 그 주문을 완성시켰어.
“――“기가 슬레이브””
세계가――흔들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