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2. 린
3. 만남
4. 마법의 포니테일
5. Baseball Queen
작가 후기
역자 후기
8. 린 (7)
“어쩌지…….”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가즈히로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결말. 게다가 실마리 또한 뚝 끊어져 버렸다.
집주인은 그 노파가 20년 이상 그곳에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세노에’라는 이름을 들은 적조차 없다고도.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실로 여우에게 홀렸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오늘 오전 처음 출발했던 역에 도착한 가즈히로는 전철에 올라타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이 호메이 고교 학생임을 발견하고 무의식중에 몸을 움츠렸다. 어쨌든 오늘은 학교를 빼먹고 말았다.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으면 좋겠지만, 이미 평소의 하교 시간이 된 만큼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겠지.
가즈히로는 인파를 거스르며 환승로를 지나 개찰구로 향했다. 자동판매기 쪽으로부터 자꾸자꾸 사람이 쏟아져 나온다. 그중 유난히 키가 작은 여학생을 발견한 가즈히로는 스커트 주머니에서 표를 꺼내려다가 우뚝 손을 멈췄다.
“쟤…… 어디서 만난 적 있었던가?”
150센티미터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장과 커다란 눈동자가 두드러지는 동안(童顔) 탓에 여학생은 중학생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신경이 쓰인 가즈히로는 만일을 위해 ‘린의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역시 머릿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쑤시는 듯한 통증에 얼굴을 찡그린다. ‘린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대가였지만 덕분에 그 여학생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름은 ‘쿠보 노도카’―― 호메이 고교의 학생회장. 평범한 학생인 가즈히로와 연이 없는, 중요한 직책을 맡은 재원이다. 다만 중학생으로 착각하기 쉬운 저 동안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면도 있었다. 다행히도 노도카에 대해 아는 쪽은 ‘가야사카 린’뿐, 저쪽은 ‘가야사카 린’을 모르는 듯. 그렇다면 저쪽이 먼저 말을 걸어오지는 않겠지.
노도카는 예상대로 가즈히로를 신경 쓰는 기색 없이 지나쳐 갔다. 안심하고 크게 한숨을 내쉰 가즈히로는 그대로 개찰구로 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이거, 네 거니?”
여자아이치고 제법 낮은 노도카의 음성에 깜짝 놀란 가즈히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으리라는 판단에 안심했던 만큼, 놀라움도 더 컸다.
뒤돌아보니 노도카가 전철표를 한 장 내밀고 있었다. 가즈히로는 허둥지둥 스커트 주머니를 뒤져 봤지만, 가지고 있어야 할 전철표가 없었다. 게다가 노도카가 내민 것은 이웃한 현(縣)인, ‘세노에 가즈히로’가 사는 지역의 역사에서 발권한 표……. 따라서 가즈히로 말고 다른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리 없다.
자신이 떨어트렸다고 확신한 가즈히로는,
“고, 고마워…….”
라고 말하고 머뭇머뭇 표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가즈히로를 바라보는 노도카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어쩐지 의아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어째서 이런 표를 갖고 있는지 물으면 어쩌지. 가즈히로의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발길을 돌려서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노도카의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모든 사실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너…… 오늘 쉬는 날 아니었어?”
‘……?’
노도카의 질문은 가즈히로의 예상외였다. 하지만 이건 이대로 마음이 편치 않은 질문이었다.
“어제 머리에 공을 맞았잖아? 괜찮은가 싶어서…….”
노도카는 마치 그때의 상황을 봤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가즈히로는 어제 골판지 상자를 안은 채 걱정 어린 기색으로 보건실에 데려다 줄까 물었던 학생이 노도카였구나……, 하고 떠올릴 수 있었다.
가즈히로는,
“아아, 그게…… 괘, 괜찮아요…….”
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왜 집에서 안 쉬고 전철을 탄 거야? 그것도 교복 차림으로…….”
“아, 그게…… 저기…….”
“땡땡이……?”
표정에 어린 의아한 빛을 더욱 짙게 하며 정확하게 아픈 데를 찔러 온다. 우물우물하는 가즈히로를 바라보며 노도카는 마지막으로 매몰찬 한마디를 던졌다.
“땡땡이라면…… 학교에서 집으로 연락했을지도 모르겠네.”
“……네?”
“집에 비밀로 한 거면 변명을 생각해 두어야 할 거야.”
그렇게 말하고 노도카는 발길을 돌려 떠나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메이 고교의 학생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가즈히로의 옆을 지나쳐 간다. 잠시 후, 사람들 틈에 가려져 노도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가즈히로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뭐, 뭐야. 쟤…….’
역에서 버스를 타고 정거장에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을 터벅터벅 걷는다. 집에 돌아오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코토미가 먼저 귀가해 있었다. 다만 어제와 다른 점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거실에 우뚝 선 채 진을 치고 있던 코토미와 마주쳤다는 정도다.
“오늘 학교 빼먹었다면서~?”
“……어?”
“아까 학교에서 전화 왔었거드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실로 노도카가 말한 그대로였다.
“엄마가 땡땡이만은 안 된다고 했었지~!”
“죄, 죄송해요…….”
“내일은 꼭 학교 가야 한다!”
“네…….”
천하태평으로 끄트머리를 늘어뜨리는 말투는 변함없었지만, 그래도 이때만큼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가즈히로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응?”
“왜 빼먹은 걸까아?”
“…….”
코토미의 어조가 일변하더니 능글능글한 빛마저 어린다. 이야기가 명백하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참이었다.
“남친?”
“뭐?”
“남친하고 데이트했구나~?”
“…….”
“어렸을 때 생각나네……. 엄마도 학생 때는 학교 갔다 오면서 데이트했었거든.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을까 걱정하느라 두근두근했었지~♪”
“아, 그게 아니라…….”
“남친이 있었으면 진즉 소개해 줬어야지. 섭섭하다, 얘.”
왜 그래야 하냐고 이유를 물을 수 없는 박력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코토미의 머릿속에서 ‘린에게 남친이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결론이 나와 버린 모양이다.
가즈히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구나 싶은 분위기를 강하게 느꼈지만, 오해를 푸는 대신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지금으로선 ‘태도가 이상한 이유는 남친이 생겨서’라고 해두는 편이 괜히 정체를 의심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코토미의 남친 공격을 간신히 받아넘기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욕실에 들어갔다. 곧이어 잠옷으로 갈아입은 가즈히로는 함께 텔레비전을 보자며 칭얼대는 코토미를 뿌리치고 총총히 방으로 돌아왔다. 코토미가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오늘도 가즈히로는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볼 기분이 들지 않았다. 흥미가 없어서라기보다도 정신적으로 몹시 지쳤기 때문이리라.
문을 닫고 아담한 방을 둘러본다. 어제는 다른 사람의 방을 빤히 둘러봐도 되는 걸까, 꺼렸던 가즈히로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당분간 계속될지도 몰랐으니까.
가즈히로는 책상 위에 놓인 공책을 손으로 집어 들었다.
‘일기……?’
올해의 연도가 인쇄된 일기장이었다. 펄럭펄럭 넘겨 보니 하루도 빠짐없이 가득 글자가 메워져 있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의 일기를 찬찬히 숙독할 기분은 나지 않았지만, 일기를 쓰려 해도 언제나 작심삼일인 가즈히로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필기용으로 보이는 공책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교과서 곳곳에서 낙서가 보인다. 그런 구석은 가즈히로와 마찬가지였다. 가즈히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오후 11시를 넘은 시간, 하품을 한 번 쏟은 가즈히로는 방 살펴보기를 그만두고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결국, 오늘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저 망연자실하고 있을 수도 없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 가야 하니까.
과연 알지도 못하는 반 친구들과 잘해 나갈 수 있을까. 애당초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고민하자면 끝이 없다는 정도는 안다. 그래서 가즈히로는 고민을 떨쳐 버렸다.
정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다만 가즈히로는 벌써 편안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 2.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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