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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제국


episode_ '잃은 자의 분노' : 잔인한 도시



"417년 6월 29일, 짐승과도 같은 엘프들이 이백팔십만에 이르는 악의 군대를 이끌고 제국을 무차별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경악스럽게도 놈들은 인간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학살하며 거침없이 진격해나갔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제국 서부는 그들의 손에 넘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엘프들의 오만함처럼 그들의 군대는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제국 영토의 절반을 장악하고 제국의 북부에까지 그 마수를 뻗치려 했던 암울한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

418년 11월 1일, 제국 동북부 이라세한.

천지사방에 인간의 시체가 쌓여 새빨간 피가 무릎까지 적셨다. 무너져내린 건물에서는 한줄기 실낱같은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는다. 그 건물의 잔해 속에 수많은 생명을 거두며 거세게 불타오르던 불이 있었다. 그 불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죽 솟아나온 나뭇가지에 붙어서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하얀 재가 함박눈처럼 날리어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도시의 하늘은 흐리다. 어딘지 모를 먼 곳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끊길듯 말듯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아주 끊겨버린다. 

그런,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에서, 까마귀가 까–악하고 울었다.

까마귀는 흑진주같이 빛나는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렸다. 그 까마귀는 눈 앞에 있는 먹이를 먹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 까마귀에게는 까마귀 나름대로의 예의란게 있었다. 그 축생은 살아있는 것은 먹지 않기로 자기자신과 약속했던 것이다. 물론 자기자신과의 약속이란 것은 항상 깨지기 마련이다. 그 까마귀에게도 법칙은 예외가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까마귀는 그 작은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을 하고 있었다. 눈 앞에 있는 먹잇감은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미동도 없는 시체다. 그러나 까마귀의 본능은 '이 먹잇감은 단지 죽은 척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까마귀는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인지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것 말고도 주변에는 다른 먹잇감이 널려있다. 대다수의 다른 먹잇감들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지 않을 것이다. 

까마귀는 살짝 약이 올라서, 지금까지 헛짓거리를 하게 만든 먹잇감의 속살을 콱 쪼아버렸다. 조금 꿈틀거리는 것을 보아 확실히 이 먹잇감은 지금까지 죽은 척만 했을 뿐이다. 까마귀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그 옆의 다른 먹잇감으로 총총 뛰어갔다. 아직 썩지도 않은 양질의 고기가 여기저기 널려있으니, 까마귀 입장에서는 잘 차려진 잔칫상이나 다름없었다.

제국군 하졸병 세파빌 사인 비나지는 눈꼬리를 조금 꿈틀하며 빌어먹을 까마귀에게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미 그의 전우들은 모두 죽었다. 엘프들의 사정없는 마법 난사에 맞서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은 척 뿐이었다.

어쨌든 세파빌이 엘프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또한 죽은 척 뿐이며, 가장 효과적인 저항법도 죽은 척 뿐이다. 엘프의 목적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니, 엘프가 점령한 영역에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저항이다.

왜 엘프가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한건지, 왜 인간을 학살하는 것인지는 제국의 어느 누구도 모른다. 제국 정부는 이미 엘프와의 협상을 완전히 포기했다. 제국 정부가 엘프 원로원에 보낸 마지막 서한에는 분노와 독기와 살의만이 가득 차 있었다.

세파빌은 살짝 눈을 떠 주변을 보았다. 그 숫자가 수백이 넘는 유성들이 붉은 꼬리를 늘어뜨리며 회색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 저게 아마도 미티어 스트라이크라고 했던가, 하고 세파빌은 어디서 들어본 마법 지식을 떠올렸다.

땅으로 눈을 돌리니 나무가 있었다. 생기를 잃어 비쩍 말라버린 나무는 대화재에서도 용케 살아남은 듯 하다. 그러나 결국에는 쓰러지고 말 것이다. 바로 세파빌의 전우들이 그랬듯이.

저 멀리서 엘프 병사들이 불탄 거리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귀가 뾰족하고 대체로 더 잘생겼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간의 생김새와 다를 바 없는, 그냥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고, 인간은 그럴 수 없다.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용도 드워프도 오크도 인간도 함부로 흉내내기 힘든 엘프만의 특징인 것이다.

세파빌이 본 엘프 병사들은 제국군 부상병들을 확인사살하고 있었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흘리는 부상병들을 창 끝으로 찌르고, 손가락에서 작은 마력탄을 발사하여 죽인다. 

세파빌은 무감각하게 살인을 수행하는 엘프들의 모습을 보며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분노는 적을 죽이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분노는 분노일 뿐이다. 세파빌이 가진 연노로는 엘프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부릴 수 있는 방어마법을 뚫지 못한다. 

그때 한 엘프의 손끝에서 발사된 자색의 마력탄이 세파빌 바로 옆의 시체를 찢어놓았다. 시체를 뜯어먹으며 배를 불리던 까마귀가 놀라 퍼덕이며 날아올라 도망쳤다. 깜짝 놀란 것은 세파빌도 마찬가지였다. 온 몸을 꼼짝않고 있었지만 세파빌의 심장만은 미치도록 뛰었다. 

까마귀를 쫒아낸 엘프는 찢겨나간 시체를 잠시 생기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동료들이 간 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세파빌은 안도했다. 전장에 투입된지 이틀째, 오늘도 결국 살아남았다. 고작 수 분, 한 시간, 반나절, 하루만에 명을 달리한 전우들보다는 오래 살아남은 것이다.

세파빌은 누운 상태에서 옆에다 두었던 자신의 연노를 조심스럽게 집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연노였던 물건은 어느새 검게 탄 숯덩이가 되어있었다. 엘프가 쏜 마력탄은 시체 뿐만 아니라 연노까지 박살내놓았다.

세파빌은 이를 갈며 조심스레 숯덩이를 내려놓았다. 함부로 내던지거나 했다가 소리라도 나면 간신히 부지한 목숨이 날아가버리게 된다. 

세파빌은 누워있는 채로 눈만 움직여서 다른 누군가가 떨어뜨린 무기가 없나 찾아보았다. 역시나 있었다. 개머리판이 조금 깨어져나간 연노가. 이곳에 땅에 떨어진 무기는 발에 채이도록 많았다. 너무나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간 탓이다.

세파빌은 몸통을 뒤집어서 연노를 향해 기어갔다. 핏물이 그의 얼굴을 적셨다. 핏물이 입안에 들어와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의 몸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그리고 영원처럼 긴 시간이 지나서 마침내 세파빌은 연노의 손잡이에 손바닥을 얹었다. 세파빌이 누워있던 자리와 연노 사이는 불과 2미터도 안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세파빌에게는 그동안의 시간이 몇십 분은 되는듯 느껴졌다. 실제로도 기어가는데 몇십 분이 걸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세파빌의 눈 앞에 있는 연노로는 엘프들에게 그리 큰 피해를 입힐 수 없다. 그 사실은 세파빌 자신이 더 잘 알고있다. 사실 연노로 쏘는 작달막하고 깃도 없는 화살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세파빌은 쇠뇌나 창보다는 역시 연노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연노는 쇠뇌와는 달리 화살을 연사할 수 있고, 이런 난잡한 전장에서는 쓸데없이 길기만 한 창은 오히려 방해가 되는데, 칼을 쓰자니 칼은 적과 근접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프들의 방어마법에 손쉽게 막히는건 어느 무기나 똑같다.

세파빌은 자세를 바꾸어 무릎을 굽혀 엎드렸다. 몸무게를 지탱하게 된 팔이 후들거린다. 이제 슬슬 아군 부대와 합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라세한에 아군 부대라는 것이 남아있다면 말이지만.

그런데 갑자기 세파빌의 배에서 격통이 일었다. 세파빌은 다시 바닥에 엎어져 한손으로 배를 감쌌다. 엘프였다. 소름끼치도록 잘생긴. 아까 세파빌 바로 옆의 시체에 마력탄을 쏘았던 바로 그 엘프가 배를 걷어찬 것이다. 

세파빌은 배를 감싸지 않은 다른쪽 손으로 연노를 집어들어 자신의 배를 걷어찬 엘프에게 겨누었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겨도 화살은 발사되지 않았다. 화살이 어딘가에 걸렸나.

세파빌이 미처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엘프는 세파빌이 든 연노를 걷어차 부수었다. 생존시간 31시간 16분. 아니, 그보다 더 짧은가?  어쨌든 평균보다는 더 높을 것이다. 같은 중대의 전우들은 이미 다 죽었으니까. 그는 고개를 땅에 떨궜다. 땅바닥의 찬 기운이 그의 뺨에 올라온다. 엘프가 창을 들어 가슴을 찔러온다. 과연 지금까지 세파빌이 살아왔던 인생에 후회는 없었는가. 

그러나 세파빌은 갓 스무살이 된 청년이다. 애초에 후회될만한 짓을 저지를 만한 시간이 짧았다. 그리고 그건 여기서 죽어간 수많은 다른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창의 푸른 날 끝이 세파빌의 가슴에 닿은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촤악—!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뜨거운 액체가 세파빌의 몸에 흩뿌려진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 전개에 세파빌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의 가슴에 창날을 들이대던 엘프의 이마 정중앙에 화살촉이 튀어나와 있었다. 목숨이 끊어진 엘프는 힘없이 쓰러져 땅을 구른다. 

세파빌은 몸이 굳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엘프가 서 있었던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길 건너편의 골목 사이로 쇠뇌의 몸통이 비죽 보인다. 그리고 그 어둠 속의 무너진 벽에 기대어 선, 남자가 걸친 롱코트는 틀림없는 제국군의 군복이었다. 

세파빌은 온 몸의 긴장이 풀려버렸다. 어쨌든 살았다. 살아남았다는 기쁨이 죽을 뻔 했다는 공포보다 앞섰다. 그 남자는 주변을 살피고는 코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조용히하라는 표시다.

남자는 쇠뇌를 들고 슬금슬금 걸어와서 세파빌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었다. 얼굴에 수염과 주름이 가득한 탓에 나이가 최소한 사십대 중반은 넘어보인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아직 이십대였다. 계속되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세파빌을 구해준 그는 수졸병 칼베민 캘린다르였다.

칼베민은 세파빌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날 좀 도와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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