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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언바운드 윙


01. 헤르만(Herman) - 2


심연(深淵)은 찬바람을 데리고 왔다. 눈앞의 어둠이 오감을 무디게 할 무렵,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그 냉기를 계속 자각하게 만들었다. 인위적인 공기의 흐름은 잠깐 동안의 휴식마저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사정없이 전신에 부딪쳐오며 일어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미치겠네, 라고 중얼거린 청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수면을 시도한 횟수만 두 자리가 넘었다. 낭비한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처음엔 그럭저럭 버틸 만했지만 결국 무의식의 강에서 나오게 되었다. 잔다고 눈을 감았지만 정신은 불순물 없는 물처럼 깨끗했다.




 이틀밖에 못 잤는데 이 정도로 괴롭다니, 불면증일까. 약을 먹고 버티던지, 아니면 포기하고 침대에 뛰어들던지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추위 아닌 추위 속에 미약한 두통마저 느껴지자 청년은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이 상태라면 오늘 저녁에 있는 일정에 지장이 가게 된다.




 약 아니면 수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고민하던 도중 갑작스런 누군가의 외침이 청년의 고막을 때렸다.




 “잠깐 일어나 봐!”




 청년의 상태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재촉해오고 있었다. 자기엔 글렀다고 판단한 청년은 순순히 두 눈을 떴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이질적인 미모였지만 그 얼굴을 보자마자 짜증부터 났다.




 한숨을 내쉰 청년은 그녀를 향해 고저 없는 어조로 운을 뗐다.




 “뭐하는 짓이야, 아유다.”




 청년의 친구, 아유다는 무릎 위에 올라탄 채 두 팔을 그의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원래부터 기행을 일삼던 녀석이었기에 청년은 언성을 높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단발과 바다처럼 푸른 눈은 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조합이었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그녀의 입은 의도를 알 수 없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품고 있었다. 달리는 차, 그것도 천장이 개방된 군용 지프 안에서 왜 갑자기 벨트를 풀고 다가왔는지 청년은 알고 싶었다.


 “눈을 못 뜨길래 깨워주려고 왔지. 심각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고.”




 아유다는 씨익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대답했다. 아쉬운 듯 기지개를 켜며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를 청년은 그저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상황에 엮인 건 둘째 치고, 자신의 상태가 타인에게 대놓고 노출된 건지 걱정스러웠다.




 “미안해, 한센.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서 좀 깨워달라고 부탁했어.”




 이번엔 운전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센과 마찬가지로 갓 성인이 된 남자의 것이었다. 후사경에 곤란함 섞인 눈빛이 비치자 한센은 깊은 숨을 내쉬며 자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어차피 일어나려고 했으니까 메르겔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 지금 어디쯤이야?”




 “중앙로. 이제 다 왔어.”




 메르겔은 턱짓으로 저 앞에 있는 동상을 가리켰다. ‘중앙로’라 이름 붙여진 대교(大橋) 너머, 회전도로의 중심에 청동 곰상이 서 있었다. 중앙로에서 상가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는 그것은 이곳에 볼 일이 없으면 떠나라는 듯 앞발을 내세우며 중앙로를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주변으로는 자동차들이 곰상을 이정표 삼아 뺑뺑이처럼 도로를 도는 중이었다.




 양옆으로는 펜드래건 강이 있었다. 여러 개의 대교를 품은 수도 최대의 강이다. 이곳을 건너는 즉시 제국인은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 북쪽엔 고전적인 양식을 차용한 황궁과 의회, 덩굴로 감싸인 정부 청사들이 있고, 그 맞은편은 벽돌과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상가 건물들로 가득하다. 펜드래건 강은 두 세계를 구분 짓는 역할을 했고, 중앙로를 비롯한 대교는 그 사이의 통로가 되었다. 사람들은 하루 24시간 내내 끊임없이 양쪽 육지를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한 차례 하품을 한 뒤, 한센은 상체를 좌우로 돌리며 몸 안에 있는 여분의 피로를 모두 쥐어짜냈다. 목소리를 낼 정도로 편해지자 몸을 앞으로 기울여 메르겔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은 게 뭔데?”




 “저기.”




 한센의 시선이 메르겔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상가의 저편, 고층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도심의 한가운데를 철거인의 편대가 비행하고 있었다. 인간처럼 사지를 갖고 움직이고 있었지만 외형은 여러모로 확연하게 달랐다. 은색의 광채를 뽐내며 기계로 이루어진 신체로 허공을 질주했다.




 “마도병기…….”




 인간형 이족보행병기는 결코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전문 영역이기도 했기에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센의 시선이 창공에 빗살무늬를 그리고 있는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마도병기를 보유한 기사로서, 또는 그것을 공부하는 엔지니어로서 순수한 관심을 보였다.




 “제국군 소속의 ​아​르​엘​(​A​r​'​E​l​)​이​네​.​ 도장(塗裝)은 수도 경비대의 것일 테고. 그런데 저 뒤에 달린 건…….”




 비행기의 날개 같은 것으로 편대가 고도를 높이는 모습이 한센의 이목을 끌었다.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전투기의 뒷부분을 떼어다 아르엘의 등에 붙인 것 같이 생겼다. 저것을 보여주기 위해 메르겔은 일부러 그를 깨웠으리라. 서로 취향은 달라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같았기 때문이었다.




 후사경으로 한센의 반응을 살피던 메르겔은 예상대로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올해부터 실전에 투입될 아르엘용 보조 비행 유닛이래. 아는 사람이 말해줬는데, 저걸 장착하면 항속거리가 3배로 늘어난다나봐.”




 그리고 운전에 집중하기 위해 시선을 다시 전방에 고정시켰다. 메르겔의 옆, 조수석엔 조금 어려보이는 소녀가 있었지만 그녀는 흥미가 없는 듯 조용히 타블렛을 만지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메르겔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자기 일에 열중할 수 있게 하려는 나름대로의 배려일까. 메르겔은 곁눈질로 소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흐뭇한 기분으로 안경을 살짝 고쳐 썼다. 안경테를 잡은 왼손 약지에 밋밋한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몰라도, 신장비를 한눈에 알아보셨구먼. 역시 메르겔 라인하르트 씨는 정치에 뜻이 있어도 기사의 본능은 버리지 않았다는 건가?”




 감상을 끝낸 한센의 질문에 메르겔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정치인이 되면 군수공장 쪽을 많이 돌아보게 될 테니까 사전에 미리 공부해두는 것뿐이야.”




 “뭐야, 정치 공부의 일환이었어? 이런 건 정치와는 별 상관없잖아.”




 “무기를 쓰는 건 군인이지만, 그 돈을 대주는 건 정치인이니까.”




 그러면서 피식 웃었다. 자기가 한 말을 알아서 해석해보라는 뜻일 테다. 불친절한 설명이 특기인 녀석이었기에 한센은 포기하듯 하늘을 향해 탄식을 내뱉었다.




 "핑계 대는 수준은 이미 정치인급이네."




 자기 같은 사람은 알아내지도 못할 거라고 멋대로 결론지어버리는 그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재능이 아까웠다. 메르겔은 기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우등생이었다. 모두에게 동경의 대상으로 통했고, 한센도 동기이자 친구로서 그를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졸업식 뒤풀이에서, 정치판에 뛰어들겠다고 메르겔이 선언했을 때 얼마나 당혹스러웠던가. 함께 걸어왔던 길과 엄청난 거리가 있는 목표여서 괴리감이 크게 느껴졌었다.




 아르엘 편대가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한센은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떨쳐낸 뒤, 이번엔 조수석의 소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아네모네는 어떻게 생각해? 미래의 남편이 정치가가 되겠다는데.”




 순간 조수석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타블렛에 뭔가를 끼적이던 소녀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머리가 풍성한 탓에 눈과 입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왼손에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메르겔이 낀 것과 같은 종류임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금발의 소녀, 아네모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메르겔이 정말로 하고 싶어한다면 저는 상관없어요. 저도 상인 집안 출신이지만 오빠처럼 엔지니어를 지향하고 있는 걸요.”




 “그래도 넌 기사학교에서 배운 걸 써먹고 있잖아. 저 녀석은 뜬금없이 문관(文官)이 되겠다는 거고. 말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없어요. 메르겔이 좋아하는 건 저도 좋아하니까요.”




 답은 이미 정해졌으니 논의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아네모네는 조용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침묵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떤 작업을 하고 있을 때면 묻는 말에 저렇게 즉답을 보내주곤 했다.




 “쳇, ​일​심​동​체​(​一​心​同​體​)​냐​.​”​




 한센은 징그럽다는 표정으로 한탄 비슷한 것을 내뱉었다. 1년 전까진 말 잘 듣고, 상냥하고, 자기중심이 뚜렷한 여동생이었는데 약혼이 확정되고 나선 메르겔 일편단심으로 변해버리고 만 것이다. 자기를 편들어줄 사람이 한 명 줄어든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휑해졌다.




 “뭣하면 내가 네 옆에 있어줄 수도 있는데.”




 갑자기 끼어든 아유다가 한센을 힘껏 끌어안았다. 심안(心眼)이라도 있는 건지, 아유다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집어냈다. 위로를 할 겸 은근슬쩍 자기 어필을 하는 것일 테지만 한센은 무감정하게 그녀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한때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소꿉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이로 되돌아와 있었다.




 “필요 없어. 너랑 같이 있는 건 사양이라고.”




 “쌀쌀맞기는.”




 아유다는 화를 내는 대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언젠간 다시 돌아오게 되겠지, 라는 의미의 자신감 가득한 표현이었다. 앞좌석에서 아네모네가 그녀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두 번째 아르엘 편대가 지나갔다.




 센 바람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한센을 비롯한 네 명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위로 올렸다. 한센이 봤던 것과 똑같은 장비를 한 철거인들은 곧바로 상가 뒤쪽의 산을 향해 멀어져갔다. 그것을 보는 네 개의 시선에 각각 다른 빛이 스며들었다.




 “좀 있으면 도착이야.”


 메르겔이 가장 먼저 분위기를 깼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완전히 돌리며 상가가 있는 하얀 돌길로 진입할 준비를 했다.


 ‘낭만의 거리’라 적힌 목제 표지판이 한센의 눈에 들어왔다.




 반대편에서 검은색 세단이 다가온 건 그 때였다. 거리의 풍경을 지켜보던 한센의 시선이 무심코 그쪽을 향했다. 부잣집 아가씨가 탔을 법한 세단은 여유 있게 돌길을 서행하며 그들이 탄 군용 지프를 지나쳤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나으리가 하인 끌고 놀러 오셨나, 하고 자문하며 한센은 생각 없이 차창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벽 뒤엔 한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여느 고급 귀족가의 영애처럼 보편적으로 단정했고, 보편적으로 절도 있었다. 딱히 관심 가는 부분은 없었지만 콧등에서부터 턱밑까지를 가리는 하얀 면사가 유일하게 튀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는 면사를 차내에서 쓰는 영애(令愛)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하인에게까지 이목구비를 공개하기 싫을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뜻일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두 차의 옆면이 서로 마주보는 순간 둘의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놀란 한센이 시선을 돌리기 직전 맞은편의 여성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웃는 것 같기도,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면사 때문에 정확한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유난히 깊은 그녀의 눈만으로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무엇이었을까 생각할 틈도 없이 차는 멈춰 섰다. 한센은 뒤를 돌아봤지만 검은 세단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다들 내려’라는 메르겔의 말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차문을 열었다.




 오후 1시 48분. 한센 헤르만은 카페 ‘커피빈의 역습’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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