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헤르만(Herman) - 4
“이번 장난은 도가 너무 지나쳤어요, 오빠. 기밀사항을 무단으로 공개하는 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라고요.”
타블렛을 꼭 안은 소녀가 한센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자기 딴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려주려 한 것이었지만, 한센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등을 돌린 사람에겐 어떤 말을 해도 벽과 대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쉽게도 소녀는 이 간단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고 안경을 고쳐 쓴 뒤, 금발의 소녀, 아네모네 리귄스는 꾸지람을 이어갔다.
“메르겔이 같이 산책이라도 갔다 오자고 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둘이 서로 짜고 절 속인 거죠? 제가 없는 사이에 타블렛을 멋대로 만져서, 도면 같은 걸 이모에게 ‘무단’으로 보여줬을 테고요.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나 되는 오빠가 어떻게…….”
“거기까지 해. 이미 보여준 건 어쩔 수 없잖아.”
무미건조하게 여동생의 말을 끊으며 한센은 몸을 돌렸다. 두 손에 캔 수프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흰 셔츠 위에 재킷을 걸쳤고, 그 아래는 청바지로 적당히 때웠다. 편리성을 지극히 강조한 조합이었지만 그것뿐이었다면 눈에 쉽게 띄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초췌함. 아네모네는 한센의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초췌함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앞에 캔 수프를 들이미는 한센을 보자 어떻게든 반박할 용기를 잃어버렸다. 커피를 사주겠다고 했는데, 전혀 엉뚱한 걸 뽑아오지 않았는가. 지적이라도 해줘야겠다 싶자마자 아네모네는 입을 열었다.
“오빠, 그거…… 커피가 아니라 캔 수프에요.”
“아, 그래? 정말 그러네.”
손에 들린 게 그것임을 확인한 한센은 눈을 크게 떴다. 상품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버튼을 누른 게 원인이었을 테다. 쩝, 하고 버린 돈을 아쉬워하며 다시 자판기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아네모네가 황급히 그를 부르는 동시에 캔 수프를 하나 가져갔다.
한센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네모네는 캔으로 자기 입을 가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따뜻한 걸 마시고 싶었으니까 이걸로 됐어요. 애피타이저(appetizer)로 적당할 것 같기도 하고.”
“이 날씨에 그런 걸 먹겠다고? 정말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아마도.”
자신이 없는 듯 아네모네는 마지막에 약한 목소리를 냈다. 배려 차원에서 받는다 해도 그녀 역시 이렇게 더운 날에 따뜻한 걸 마시긴 싫었다. 그 사실을 한센이 모를 리 없었지만, 상대가 마시겠다고 나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자기 것은 그대로 스쿠터 위에 올려놓았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왜 그러셨어요? 이모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프로젝트와 관계없는 일반인이잖아요. ‘지인(知人)이라 해도 외부인(外部人)으로 판단되면, 상황을 불문하고 일체의 정보도 공개하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이 계약서에 있지 않았나요?”
조심스럽게 캔을 따며 아네모네가 물었다. 닭고기 수프 특유의 냄새와 함께 더운 김이 올라와 안경 렌즈를 뿌옇게 만들었다. 시야가 가려지자 아네모네는 먼저 인상부터 썼다. 괜히 마시겠다고 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조항 타령이냐. 아무리 그래도 공무원 같이 굴 필요는 없잖아.”
동생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내며 한센이 말했다. 그 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닦기 시작했다. 지문과 먼지로 가득했던 렌즈가 능숙한 손수건질 한 번에 투명하게 변했다. 그만큼 아네모네는 요즘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다.
한센이 안경을 다시 씌워주는 동안 아네모네는 볼멘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공무원 같다’는 표현에 일종의 거부감을 느끼는 그녀였다.
“오빠가 계약서에 직접 서명해놓고서 그런 행동을 하니까 제가 이러는 거잖아요. 서면계약(written contract)을 대체 뭐로 생각하시는 거에요?”
“그냥 종잇장에 글 몇 줄 적힌 거밖에 안 되잖아. 프로젝트도 끝났는데, 이제 조항 몇 개 어겼다고 해서 ‘그쪽’에서 무슨 수를 쓰겠어? 그리고 나는 처음부터 계약을 지킬 생각도 없었어.”
“그게 무슨…….”
처음 듣는다는 듯 아네모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센이 지금 하는 말이 그녀에겐 장난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손에 힘을 주고 한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에게 정확한 설명을 요구했다.
분위기에 눌렸는지 한센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계약은 처음부터 모순이었어. 네가 말했던 조항 바로 밑에 그걸 부정하는 문장이 하나 더 있었거든. 그래서 이모한테 보여줘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어. 네 허락도 없이 타블렛을 가져간 건 내 잘못이 맞지만.”
“죄송한데, 전 그런 조항을 본 적이 없어요.”
역시 장난이라고 생각하며 아네모네는 즉시 반박했지만, 한센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대로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그럼 그 타블렛에 있는 스캔본을 한 번 확인해보던지. 1조 바로 밑에 있으니까, 찾아서 네가 한 번 소리 내서 읽어봐.”
그 즉시 아네모네의 손이 움직였다. 스쿠터 위에 타블렛을 올려놓은 뒤 빠른 손놀림으로 원하는 파일을 찾아냈다. 계약서의 스캔본을 화면에 띄우며 아네모네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수작은 저한테 전혀 안 통해요. 재차 말하지만, 저는 오빠가 말한 그 조항을 본 적이 없…….”
도발은 거기에서 끊겼다. 1조를 확인해본 아네모네는 일순 흠칫했다. 문장의 마침표가 찍힌 줄 바로 밑에 언제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1항’이 존재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내용은, 한센이 말한 대로 1조의 내용과 정면으로 상반되어 있었다.
한센이 읽을 것을 재촉하자 아네모네는 마지못해 계약서의 1조 1항을 읊었다.
“단, 정보를 공개하는 을(乙)의 정당한 사유가 있을 경우엔 그 책임을 묻지 아니한다.”
“봤지? 아쉽게도 세세한 부분까진 다 외우지 못한 모양이네.”
자신의 말이 증명되자 역으로 도발을 거는 한센이었다. 아네모네는 성격상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외우고 다녀야 직성이 풀린다. 거의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그녀가 이런 ‘실수’를 한 적은 드물었다.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정도에 그쳤다.
한센은 아네모네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니, 얼굴을 붉힐 정도로 부끄러운 일일까 싶었다. 자존심에 상처가 갔는지, 아네모네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다급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미스 힐스레스트에게 따져봐야겠어요. 거액을 투자하는 입장에서 이런 계약서를 용인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제가 장담하건데, 이걸 방치해두면 분명 문제가 생길 거에요.”
“뭐 어때, 애초에 힐스레스트 본인의 서명이 안 들어가 있는데. 시녀에게 대리 서명을 시켰다는 건, 우리가 계약을 깨도 별 상관없다는 뜻이야. 그래서 계약서의 1조부터 문장을 이상하게 연결해놓은 거고.”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제국법에 의하면 대리인을 내세운 경우에도…….”
“높으신 분들의 관례라는 거지. 이해 못하겠으면 그냥 포기하는 편이 좋아.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의 의도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게 뭔지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러면서 한센은 고개를 저었다. 적극적인 건 좋지만 갑(甲)의 사정을 자세하게 파고들 것까진 없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어차피 이름만 알 뿐, 비밀리에 돈만 대주고 있는 신원불명의 스폰서다. 제3자인 아네모네가 따져봤자 그녀만 피곤해질 게 분명하다.
이어진 것은 잠시 동안의 침묵.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아네모네는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오빠는 진짜로 만사태평하시네요.”
한센은 씨익 웃으며 여동생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신경 쓰지 마. 사죄 겸 모처럼의 데이트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