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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언바운드 윙


01. 헤르만(Herman) - 7 (1장 完)


 그날 저녁은 약속한 대로 맥주 파티가 열렸다.




 정확한 이름은 ‘신형기 완성 및 프로젝트 성공 기념회’였지만, 원래 의의를 지키려는 참석자는 없었다. 맥주로 시작된 파티는 5시간의 떠들썩함을 거친 뒤 마지막 건배를 하는 것으로 나름 조용하게 끝을 맺었다. 잘 사람은 자러 들어갔고, 열기도 이제쯤 거의 다 사라졌지만 여기에 한 명, 아직 깨어있는 사람이 있었다. 탄식을 내뱉으며 방금 비운 캔을 찌그러트린 그는 파티의 주인공인 3급 기사, 한센 헤르만이었다.




 벤치에 앉은 그는 허탈하다는 듯이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은 해가 떠 있는 동안엔 유동적으로 움직여 생기를 과시하지만, 밤이 되면 광대한 어둠이 되어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앉은 곳 근처에 가로등이 없었다면 자기가 어디에 있다는 인식조차 없어질 판이었다. 이 상태 그대로 잠들어버려서 다음날 아침 어머니에게 혼이 나겠지. 그만큼 무(無)로 돌아간 팬드래건 강은, 희미한 정신으로 생각을 풀어놓기에 좋은 장소였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한센은 지금 풀어놓을 생각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아유다는 먼저 자러 들어갔고, 메르겔과 아네모네는 자고 가기로 했다. 이 야심한 밤에 자기만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니 조금 쓸쓸해졌다. 여러 가지 고민들을 누군가와 나눠보고 싶어도 그렇게 해서 일이 풀리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인생을 함께 보낸 소꿉친구들이 있다는 건 좋지만, 그들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으니까. 적어도 가까운 존재, 설령 그것이 부모라 해도 열쇠를 대신 찾아줄 수 없다는 사실은, 강에 자기 자신을 떠맡기다시피 한 한센도 자각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뒤, 추워진다는 생각에 손을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깃털 같이 가벼웠지만 쥐려는 순간 모서리에 손바닥을 찔렸다. 인상을 쓰며 꺼내보니, 오늘 낮에 기네비어가 건넨 명함이었다. 대충 어딘가에 쑤셔 넣어두고 잊어버린 모양이다. 심하게 구겨진데다 반쯤 접혀 있기까지 했다.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갑자기 호기심이 동해 명함을 빳빳하게 폈다. 취하지 않은 덕분에 거기에 적힌 정보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기네비어 베르크도프 폰 클라인. 수도 경비대 산하 제1기사단 소속 3급 기사(소위). ​0​1​-​4​5​8​-​2​5​-​8​6​9​8​.​ 상담 및 면담은 사전 협의 후 결정……?”




 뭔지 알 것 같은 괴리감에 한센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기사단은 자기들을 ​P​M​C​(​P​r​i​v​a​t​e​ Military Company; 민간군사기업)의 일종으로 보고 있는 걸까. 황실기사단연맹의 통제를 받는 준군사조직이지만 그들도 군인인 만큼, 군번줄(dog tag)을 달고 다닐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명함이라니, 어딘가 달라도 너무 다른 것 아닌가?




 자기가 본 것을 잊으려는 듯 한센은 명함을 완전히 구긴 뒤, 찌그러진 캔 안에 넣었다. 고개를 돌리자 가로등 옆에 놓인 쓰레기통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리와 궤도를 계산한 직후 쓰레기통의 입구를 향해 캔을 던졌다. 재수 없는 느낌의 명함을 품은 채 마지막 남은 맥주 캔은 완만한 호를 그리며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멋지게 튕겨나갔다.




 “쳇.”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캔을 보며 한센은 혀를 찼다. 힘을 너무 약하게 줬는지 꽤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맞추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실력이 떨어졌음을 한탄하며 캔이 착지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캔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자마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아직도 자작(自酌)하고 있는 거야?”




 몸을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니 메르겔이 그곳에 서 있었다. 양팔에 책을 가득 든 채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자러 간다고 해놓고 어딜 갔다 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강을 구경하던 자신이 할 말이 아니겠다 싶어서, 한센은 몸을 돌려 메르겔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메르겔도 아직 자려는 기색이 없는 것 같아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너한테도 고민이 있었어?”




 메르겔은 반쯤 장난 섞인 말투로 물었다. 벤치의 다른 끝에 앉은 그는 옆에 놓아둔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관심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말하면 얼마든지 들어주겠다는 태도에, 역시 메르겔답다고 느끼며 한센은 운을 뗐다.




 “파티까지 다 끝나고 나서야 문제가 보이기 시작해서.”




 “흐음, 무슨 문제?”




 아네모네와 비슷한 말투에 비슷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럴 조짐이 보였다. 은근히 마음이 놓인 한센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고민을 털어놓으려 했다가, 문득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입을 다문 채 망설임에 빠졌다.




 다시 생각해보니 우스웠다. 방금 전까진 누구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멋대로 단정 지었으면서, 정작 친구가 앞에 있을 땐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기네비어가 지적했던 ‘언동의 모순’이라는 표현이 새삼 실감되었다. 지금 상황에서 일어난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한센은 알 수 없었다. 말을 할까, 아니면 사과하고 혼자 담아둘까를 고민하느라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가져온 책의 목차를 살피고 있던 메르겔은,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자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혼란스러우면 책을 읽는 게 어때? 머릿속을 좀 정리하면 말문이 트일지도 모르니까. 친구라면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어.”




 그러면서 한 번 보라는 듯 책의 탑을 향해 손바닥을 펴보였다. 밤늦게 독서를 하는 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한센은 일단 아무거나 한 권 고르고 봤다. 희미한 가로등 불에 의지하여, 하드커버 교과서처럼 묵직한 그것의 제목을 확인했다.




 “사회계약론, 저자 장 자크 루소…….”




 친숙하지 않은 언어였기에 알아보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나마 읽기라도 했다는 것은 이전 시대, 즉 서력을 썼던 세계에서 사용되던 고대어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서라도, 제목이 이해되자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얌전히 놔두고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제국어로 된 책이었지만, 제목이 ‘군주론’인 시점에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굳이 펴보지 않아도 뭔가 정치철학과 관련된 서적임은 분명해보였다. 저자를 보니, ‘니콜로 마키아벨리’ 밑에 역자로 분류된 누군가의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이라는 거창한 성명은, 구독하고 있는 조간신문에서 항상 봐오고 있었다.




 “맞는 책을 못 찾은 모양이네.”




 메르겔이 나지막이 던진 말에 한센은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군​주​론>​을​ 다시 책의 탑 위에 올려놓았다.




 “읽었다간 머리 터질 것 같아. 이런 고서(古書)들을 잘도 읽는구나, 너.”




 “사람은 취향에 따라 책을 고르는 법이니까.”




 대답하면서도 메르겔은 자기가 읽고 있는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둠이 9할인 곳에서 책을 보면 글씨가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하는 의문은, 지금의 한센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독서는 하지 않았지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니 마음의 여유가 조금이나마 생겼다. 메르겔도 그가 억지로라도 책을 읽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문제라고 할까, 정확하게 표현하면 ​‘​불​안​감​’​이​겠​지​.​”​




 본론으로 들어간 시점이 좀 뜬금없었지만 어찌됐든 내뱉고 봤다. ‘무슨 불안감?’하고 묻는 메르겔을 향해 한센은 조용히 편지 한 장을 흔들어보였다.




 파티 막바지에 전해 받은,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친서(親書)였다. 랭 이모가 말하길, 웬 면사를 쓴 아가씨가 대신 전해달라며 맡겨두고 갔다고 했다. 별도의 설명이 있다면 모레 저녁, 7시까지 편지에 적힌 장소로 올 것. 실수였는지 검은 두고 갔고, 커피와 크로와상을 대접받은 내내 예법을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정체를 두고 랭 이모 나름대로의 추측이 나왔지만, 결국 그녀의 본모습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사람 보는 것에 정통한 랭 이모마저도 실패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 한센에겐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통칭 ‘기념회’가 끝나고, 가게마저 문을 닫은 뒤에야 봉투를 뜯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친필에다가, 볼펜이 아닌 만년필로 쓰였다. 내용은 랭 이모에게서 들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날에 만날 장소와 여전히 가명만이 적힌 점이 신경 쓰였을 뿐. 지금까진 느슨한 규제에 만사태평이었지만, 초대장의 내용을 숙지하고 나니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후엔 이렇게 벤치에 앉아 어떻게 할까 하는 되도 않는 사색에 잠겨 있었다.




 “……막상 일이 터지니까 혼란스러운 거구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자초지종을 들은 메르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로선 이야기의 표면까지만 이해가 닿아도 친구의 심정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 한센은 팔짱을 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만나는 건 적어도 한 달 후라고 생각했는데……. 비전투형 마도병기를 만들어서 화가 난 걸까?”




 “그 사람, 프로젝트에 전혀 간섭 안 했다면서?”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잖아. 돈을 대준 건 자기니까, 좋은 말 할 때 전투 병기로 수정하라고 요구할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그렇게 되면 어쩌지?”




 “아직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은 무리가 아닐까 싶은데.”




 메르겔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한센의 추측을 부정했다. 정당한 근거가 있는 듯했지만, 알고 보니 스폰서가 변덕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었다. 하긴, 무엇이 어찌됐든 한센이 전투형 마도병기를 만들기 싫어한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것이 이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였고, 한센의 불안을 설명해줄 유일한 근거였다.




 말없이 강을 바라보고 있는 한센에게 메르겔은 전에 본 적 있었던 한 서사시의 구절을 읊조렸다.




 “마음은 마음이 제 집이다. 그리고 스스로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어디서 들어본 말인데, 서력 문학?”




 “정답. ​실​낙​원​(​P​a​r​a​d​i​s​e​ Lost)에서 나왔어.”




 책을 덮은 메르겔은 눈을 감은 채 나직이 말을 이었다.




 “너는 바보가 아니니까 무슨 의미인지는 금방 알 거라고 믿어. 그리고 하나 충고하자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 속단해버리면 안 돼. 순수하게 널 만나고 싶어서 부른 걸 수도 있잖아.”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지. 지금까지 얼굴도 안 비췄는데…….”




 한센은 친구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네모네 앞에서 보였던 그 여유로운 모습은 아주 작은 걱정 하나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마치 어둠이 친 장막 뒤에서 숨겨뒀던 본심을 조금씩 풀어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프지 않게, 살살.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그렇게 확신하지 못하고 있자 메르겔은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전투형 마도병기를 만드는 게 두려워?”




 이번엔 직설적으로 나갔다. 한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살짝 움츠렸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시간이 꽤 지나면서 나쁜 기억이 어느 정도는 옅어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좀 더 강하게 내리쳐도 되지 않을까.




 “정확히는 ‘무기’ 그 자체를 만드는 게 싫은 거겠지. 가장 기본이 되는 검(劍)도 제대로 못 잡고 있으니까. 악의는 아니지만, 아직도 검을 만지는 게 무서운 거야? 엄연한 전투 병력인 ‘기사’가?”




 “그 도구로 사람을 죽인 적이 없으면 모를 일이야.”




 자신의 오른손을 펴며 한센이 말했다. 메르겔의 말투는 점잖은 신사에 가까운 한편 상대의 무의식을 직접 건드리는 위력을 갖고 있었다. 손바닥을 계속 응시하던 한센은, 그 위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자 얼른 주먹을 다시 쥐었다.




 “난 다른 기사들과는 달라. 살을 베고, 뼈를 끊으면 검이 어떻게 흔들리고, 얼마나 진동하는지 알고 있어. 실감했기 때문에 기억이 선명하다고. 그 때 사람을 죽인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하고 깨달은 거야. 무기를 쓴 대가가 이거구나, 하고.”




 직접 검으로 죽인 게 아닌, 마도병기의 힘을 빌렸다면 절대로 얻지 못했을 깨달음이었다. 이후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한센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후보생 시절부터 구상해왔던 신형기의 제작 방향이 비전투형으로 급변한 것도, 되짚어 보면 그 때 그 사건 때문이었다. 기억을 대부분 털어버린 지금도 그 영향은 아직 남아 있었다.




 두렵냐고 하면, 두려울 지도 모른다. 무간섭으로 일관해오던 알리사 힐스레스트가 갑자기 태도를 바꿀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프로젝트의 종료를 알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번도 보고서를 요구해온 적이 없었다. 전형적인 귀족의 여유겠지만, 의도를 종잡을 수 없어 내내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반동으로 잠을 줄이고,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낙관적으로 있었다.




 뒷사정을 가진 밤 10시의 한센은 낮 2시의 한센, 낮 5시의 한센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널 ‘무기’로 만들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거네.”




 일순의 침묵 뒤, 메르겔은 친구의 심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한센의 본모습이 드러난 시점에서 따로 근거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강도를 낮추자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주제를 잠깐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애니한테 들었는데, 시장에서 기네비어랑 말싸움을 했다며? ‘한센 헤르만’ 운운하면서 네 약점을 쥐고 흔들었겠지, 안 그래?”




 “사람을 억지로 바꾸려 든다고, 그 녀석은. 받은 명함도 쓸 일이 없어서 버렸어.”




 손을 한 번 털며 개운하다는 투로 한센이 대답했다. 기네비어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녀는 결국 제3자에 불과했다. 이런 뒷사정을 모르고 있으니 이해를 못하고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잠시 시간을 내어 설명을 했다면 상황이 어디까지 바뀔 수 있었을까. 감정적으로 행동했던 자신을 책망한 한센은, 뒤늦은 후회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곧 깨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네비어도 성격이 죽은 거야. 옛날 같으면 가만히 안 뒀을 텐데.”




 아무렇게나 던진 혼잣말에 메르겔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곤란한 표정과 함께 가볍게 반박했다.




 “너도 옛날이라면 맞서 싸웠겠지. 말싸움하기 싫어서 그냥 나왔다고 애니가 그러더라. 어떤 면에선 너도 많이 변한 거 아니겠어?”




 “도망친 게 아냐. 다음 기회를 물색한 것뿐이지.”




 한센은 나름 센 척을 했다. 속사정은 달라도, 지금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싶었다. 친구의 이런 모습이 재밌었는지 메르겔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바로 핑계를 대는 걸 보니 여자 사귀기엔 글렀네.”




 “이미 약혼녀가 있다고 건방지게 구는구먼.”




 “뭐, 너도 희망이 없는 건 아니잖아. 아유다가 있으니까.”




 “걔도 여자였었나…….”




 살짝 과장해서 내뱉은 우스갯소리에, 이번엔 두 남자가 동시에 웃었다.




 이후 대화는 정체되었다. 다시 찾아온 고요함 속에 한센의 기분도 다시 우울해졌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니 마음이 가벼워지긴 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알리사 힐스레스트를 만날 생각을 하니 심장이 뛰고, 다리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센은 문득, 이 일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근본적인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별 일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커져갔다.




 “역사 수업을 잠깐 해볼까 하는데.”




 어둠 속, 침묵의 벽을 갑자기 깨며 메르겔이 운을 뗐다. 웬 역사 수업인가 했지만 한센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이전에 있었던 세계, 그러니까 서력 시대의 사람들은 마법이라 불릴 정도의 과학 기술을 무한대로 갖고 있었대. 공산품이 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고, 사람들은 풍요로움 속에서 매일 밤을 화려하게 보내고, 또 보내고…… 그런 쾌락의 날이 몇 백 년은 지속된 모양이야.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서력 시대의 과학은 빠르게 발전했다지.”




 “학교 수업에서 배운 거잖아. 그건 갑자기 왜?”




 한센이 말을 맺는 동시에 메르겔은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잠시 후 그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며 메르겔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서력 시대의 사람들은 하늘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 같아. 처음엔 글라이더, 그 뒤엔 비행기가 나오더니, 끝내는 ‘하늘너머’까지 수직으로 갈 수 있는 무슨 방주 같은 게 발명됐다나봐. 그걸 타고 사람들은 ‘하늘너머’에 집을 짓고, 미사일 같은 걸 띄웠대. 구름과 해밖에 없는 저 공간에 진출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거지. 그게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메르겔의 말을 들을수록 한센의 의문은 커져갔다. 현 시대의 모두가 아는 당연한 내용을, 메르겔은 처음 듣는 사람을 가르치듯 또박또박 설명해나가고 있었다. 거의 6천 년 전에 있었던 서력 시대의 일은 지금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화제를 또 바꾼 것은 아닌지, 하고 생각해보았다.




 잠시 곁눈질로 한센의 반응을 살핀 메르겔은, 손을 내리며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물론 우리들은 ‘하늘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저기에 진출했다는 서력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가 진실인지도 몰라. 하지만 만약 진실이라면,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이 지구를 떠나는 기분은 어땠을까? 해, 달, 구름, 별밖에 없는 하늘을 넘어야 하는 사람들의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 있겠어? 그들도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을 거야. 직접 부딪쳐보고, 데이터를 축적하면서 조금씩 ‘하늘너머’를 알아갔겠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




 “그야 되긴 되는데…….”




 한센은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는 인간의 거울이다, 라는 말이 있다. 미지의 인간이든 세계든 일단 발을 들여 보고 알라는 소리를 거창한 예를 들어가면서 전달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등생이었던 메르겔이 말하니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겉으로만 쉬워보여도,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라고 무작정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보는 건 어때? ‘날 무기로 만들 생각이냐’라고 직설적으로 물어도 좋으니까.”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들은 한센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정말 그럴 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걸 수도 있고.”




 어쩌면 메르겔의 말대로 그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부른 것일 수도 있었다. 프로젝트의 결과에 대해 추궁하는 건 수많은 가능성의 하나에 불과하다. 설령 문제가 터진다 해도 나름대로 반박할 거리는 있다. 그렇다면 변명의 말도 없이, 마음의 준비만 해놓고 가도 괜찮지 않을까.




 메르겔이 오기 전, ‘고민을 나눠봤자 답은 안 나온다’고 멋대로 내린 결론을 수정했다. 확답은 아니었지만 실마리는 잡혔다. 그저 막연한 어둠으로만 보였던 팬드래건 강이 달빛을 품어, 물결을 찰랑이는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적인 변화인지 아니면 심리가 바뀐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역시 후자에 가깝겠지, 라고 생각한 한센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그 사람, 성격은 어때?”




 비교적 맑은 정신으로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을 때, 벤치에서 메르겔이 물음을 던졌다. 내가 알겠냐는 듯 한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고작 한 번 만났어. 그리고 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엔 젬병이야.”




 “추측은 해봤을 거 아냐. 게다가 애니에겐 이것저것 얘기해준 걸로 아는데.”




 “아네모네 녀석, 거기까지 말해버린 건가…….”




 혼잣말과 함께 한센은 고개를 저었다. 규율에 충실하고 입이 무거운 아네모네는, 장래를 약속한 남자 앞에선 때때로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타블렛을 멋대로 가져갔다고 혼을 낸 게 미안해서 사과의 뜻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줬겠지. 자세히는 아니어도 흥미를 유발시킬 정도까지만.




 일어선 상태 그대로 강의 너머를 응시하며 한센은 말을 이었다.




 “뭐, 넌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머리가 돌아가니까 말해주면 뭐라도 나오겠지. 고민을 들어준 대가를 지불하는 셈 치면 되려나.”




 “마음대로 생각해. 난 그저 알고 싶을 뿐이니까.”




 메르겔이 하는 말에 ‘어떤 의도’가 다분히 있음을 눈치 챈 한센이었지만, 아무 일도 아닐 것이라고 여기며 오늘 오후에 했던 이야기와 생각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알리사 힐스레스트와 처음 만난 일. 허술한 계약을 체결했던 일이며,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의문점들. 그것들을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득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 등등,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자기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누가 듣고는 있는 건지 싶었지만 무시하고 계속 말을 해나갔다. 이야기가 막바지에 이를 쯤엔 고개를 돌려 메르겔의 상태를 확인했다.




 책을 편 채로 무릎 위에 둔 친구는 말없이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 표정이 심각했다. 역시 ‘어떤 의도’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감 잡을 수 없었다. 본인이 직접 발설하기 전엔 영영 모를 것이다.




 “왠지 알 것 같아. 그 사람이 누군지…….”




 한참 뒤, 생각을 정리한 메르겔이 입을 열었다. 눈을 크게 뜬 한센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며, 그를 실망시킬 말을 이어서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침묵하고 있는 게 낫겠지. 어디까지나 네 일이고, 내가 먼저 ​스​포​일​러​(​s​p​o​i​l​e​r​)​해​버​리​면​ 재미없으니까. 누군가 했더니 역시 그 사람이었구나.”




 “야, 누군데 그래?”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한센이 물었다. 뜬금없이 나온 말이긴 했지만, 상류층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메르겔이라면 알아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어서 대답해보라고 재촉해도 메르겔은 미소만 지을 뿐, 쓸데없는 정보나 내어주었다.




 “그거 알아? 귀족 가문의 아가씨들은 특이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어. 파티나 사교회가 열리면, 관심 있는 남자에게 가명과 가면을 쓰고 다가가는 거야. 그리고 이 남자가 괜찮다 싶을 때 진짜 모습으로 집에 돌아갈 때까지 일일 연인 놀이를 하는 거지. 잘 되면 그게 진짜 연애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고.”




 “네 말대로 특이하긴 한데, 그게 지금 이 얘기랑 무슨 상관이 있어?”




 화제가 틀어지자 한센은 조급해졌다. 장난치길 좋아하는 게 메르겔의 일부이긴 해도 ‘알리사 힐스레스트’를 안다고 한 이상 일말의 도움이라도 주길 바랐다. 언제라도 올지 모르는 대답을 제대로 듣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커다랗고 시커먼 무언가가 한센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얼굴과 부딪치기 직전에 팔을 들어 그것을 잡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책이 한 권 그곳에 있었다. <​군​주​론>​이​라​고​,​ 한센이 포기한 책이자 메르겔이 방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책이다. 한센이 얼떨떨한 기분으로 서 있자 자리에서 일어난 메르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머릿속이 혼란스러우면 책을 읽어. 쉬운 제국어로 번역됐으니까 이해하는 데엔 별 문제 없을 거야. 시간도 늦었으니까 먼저 자러 갈게.”




 “잠깐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가버리면…….”




 조급함이 분노로 표출됐지만 메르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깐 피곤에 찌든 눈을 비빈 뒤 주섬주섬 책들을 안고 벤치 뒤쪽에 있는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를 붙잡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 어떤 예감이 들자마자 한센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결국 책을 읽으라고 했는데 메르겔은 성격상 빈말을 할 녀석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하나 잊고 말 안 했는데…….”




 현관 손잡이를 잡은 채 메르겔은 고개를 돌려 한센을 바라보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더 이상의 대화를 피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눈빛은 그리 밝지 않았다.




 “난 그 사람을 직접 만난 적은 없어. 그래서 그 사람의 의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야. 뭐, 그 책을 보면 단서가 한두 개쯤은 나오겠지. 모레까지는 알아낼 수 있도록 행운을 빌게.”




 그리고 방 좀 빌린다, 라고 덧붙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집이니 아네모네와 같은 방을 쓰려는 것일 테다. 현관문이 쿵, 하고 닫힐 때까지 한센은 벤치 옆에 우두커니 섰다. 소음이 사라지고 다시 고요가 찾아온 뒤에야 두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손해를 봤다고 멋대로 결론내린 한센은,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에 툭, 하고 벤치 다리를 몇 번 찼다.




 “네 말만 하면 다냐? 쓸데없는 의문만 던져놓고.”




 문제가 하나 풀리는 동시에 다른 하나가 떠오르는 꼴이었다. 답답한 기분을 이기지 못해 벤치를 차는 발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팬드래건 강에 어둠이 다시 스며들어, 그나마 눈에 보였던 것들을 하나둘씩 삼키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한센 헤르만은 책을 읽느라 밤을 샜다는 이유로 모친으로부터 설교를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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