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메리룬(Imerirune) - 1
퀸텟(Quintet)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가볍고 고상한 음악을 시큰둥하게 듣고 흘려보내며, 한센은 뻐근한 전신을 한 군데씩 풀어주었다.
보이는 것은 예복과 군복, 그리고 가끔씩 눈길을 끄는 화려한 드레스였다. 잔이 부딪치고 말소리가 오가는 게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하객의 주류를 품은 야외 홀(hall)과 거리를 둔 채 2층 테라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한센은,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감각에 점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초대받은 장소는 황궁이었다. 한센은 황실을 동경하지 않았지만, 쓸데없이 이런 곳까지 끌고 와준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수고엔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머리를 다듬으랴, 예복을 준비하랴 하루치의 시간과 돈을 꼬박 낭비하고 말았다. 춤을 출 기분이 들지 않았기에 파티에 와선 그저 앉아만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고리타분한 분위기는 지루했다.
이런 데 올 때가 아냐, 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탄식을 내뱉었다. 무엇을 위한 파티인지는 몰라도 배경은 결국 배경이다. 그는 알리사 힐스레스트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었다. 노을 진 하늘이 이제 밤기운을 걸치고 있는데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침내 본방에 이른 파티 속에 고립되어 있는 자신이 ‘어긋난 것처럼’ 느껴졌다. 배경뿐인 무대 위에서 무엇을 할지 감 잡지 못하는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그나마 이 파티의 광경과, 황궁 그 자체는 볼거리였다. 황실 주최의 연회답게 야외 홀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어딘가에서 한 자리 하는 위치에 있었다. 참가자의 대부분은 귀족 또는 부르주아, 즉 귀빈(貴賓)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만한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잊을 때쯤이면 군복이 나타나 여기에 장성들도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여기는 평민 출신이 올 곳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센은 저 밑을 눈으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들 속에 알리사 힐스레스트가 있을 수 있다. 찾아내서,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간 다음, 용무만 보고 탈출하면 끝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를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었다. 친절한 신사로 있어줄 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이, 이거 받아.”
커져가는 걸음소리와 함께 차가운 무언가가 목 뒤에 닿았다. 얼른 뒤를 돌아보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흑발과 오묘하게 어울리는 청안. 제국인 치고는 너무 이질적인 그 외모를 확인한 한센은 눈살을 찌푸리며 목 뒤에 손을 가져갔다.
‘무슨 짓이야’라며 화를 내는 한센을 향해, 아유다 루벤크렌체는 천진난만하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 사람이 온대? 어린애 같기는.”
피부색과 확실히 대비되는 뺨 위의 붉은 기(氣)는, 아유다가 또 술을 마셨음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술 때문에 실수로 반나절을 날려버린 여자의 태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차가운 무언가’를 눈앞으로 가져온 한센은 그것이 샴페인임을 알자마자 한숨부터 먼저 내쉬었다.
“완전히 네 방식대로 즐기고 있구나.”
한센은 화를 풀려는 듯 잔의 반을 비웠다. 문제를 공유하겠다던 친구는 그의 속사정도 모른 채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층 야외 홀에서 높으신 분들과 춤을 좀 추다가, 살짝 지루해질 무렵에 2층 테라스로 올라와 뜬금없는 주제로 말을 건다. 거의 두 시간 동안 반복되어온 행동이었기에 이젠 체념밖에 보일 수 없었다.
아래층에서 아유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이국적인 외모에 반한 젊은 귀족들이, 무례를 무릅쓰고 춤을 신청하려는 것일 테다. 어서 가 보라며 한센은 손을 내저었지만 아유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오히려 미안하다는 듯 몸을 숙여 남자들의 춤 신청을 거절했다. 노는 걸 좋아하는 주제에 의외네, 라고 한센은 생각했다.
“그 사람의 검은 가져왔어?”
아유다가 던진, ‘남동생’을 챙기려 드는 뉘앙스의 질문에 한센은 반대쪽의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레이피어에 가까운, 여성의 호신용에나 쓸 법한 검이 그곳에 있었다. 조용히 검을 들어 올린 아유다는, 손잡이를 살짝 당겨 묵(墨)빛의 검신이 바깥으로 드러나게 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검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함부로 만지지 마.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될 물건이니까.”
한센이 가볍게 주의를 주자 아유다는 오묘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오른손에 힘을 빼 노출된 날을 다시 검집 안으로 흘려보냈다. 툭, 하고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한센의 귓가를 간질였다.
어딘가 불편한 듯 잠시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한센은 돌로 된 난간에 등을 기대어 아유다와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의자에 앉아 자기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한동안 응시하고는 두 번째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좀 더 진지하게 행동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둔 시점에서 희망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유다의 입장에선 어차피 ‘데이터’를 적당히 수집해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복잡한 고민은 할 필요 없다. 속으로 그렇게 되뇐 한센은 슬슬 성과를 물어야겠다 싶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녹음은 충분히 했어? 남자들과 거의 춤만 췄잖아.”
평온을 가장한 말투 속에 약간의 질책이 섞여 있음을 직감한 아유다는, 일부러 ‘흠…….’하고 말을 끈 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했다.
“글쎄, 충분한 양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춤을 추면서 이리저리 도느라 음질이 불안정해졌을 수도 있고 말이야.”
“농땡이 피운 척 연기하지 마. 네가 쓰고 있는 녹음기는 아네모네가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질투 같은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그 내숭 가득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센은 아유다의 수작을 직설적으로 파훼해버렸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심어준 뒤,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기만 했다는 것에 질투심이 생겼는지 가볍게 떠보려는 셈이다. 소꿉친구지만 서로 연인이었던 적도 있었기에 한센은 그 누구보다도 아유다를 잘 알고 있었다. 누구와는 달리 가면 속의 얼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여자였다.
“2시간 동안 네가 시키는 ‘일’만 했는데, 가끔씩은 이런 장난도 치게 해달라고.”
아유다는 뾰로통한 얼굴로 작게 항변했다. 한센이 손을 내밀자 오른쪽 귀에 건 귀걸이를 떼어내고는, 흰 장갑을 낀 그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수고했어‘라고 감사를 표하는 한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내 반쯤 토라진 채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터키옥색(turquoise)을 발산하는 귀걸이는 말 그대로 싸구려였다. 물방울형 몸체엔 유광 처리가 되어 있었고, 그와 연결된 부품은 전부 모조금이었다. 진품만이 모이는 이 파티에 상류층이 쓰는 고급 장신구의 ‘짝퉁’이 끼어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어도단. 특수한 목적이 없었다면 아유다가 이런 저가품을 선물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귀걸이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든 한센은, 행여 깨지기라도 할까봐 아주 천천히 물방울을 2층 샹들리에의 불빛에 비춰보았다.
안에 든 검은색의 물체를 확인한 뒤 한센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는 양호하네. 장치가 워낙 작아서 부러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버텨줬어.”
“애니가 개조해줘서 그런 거 아냐?”
어젯밤까지 기계를 만지던 아네모네를 떠올리며 아유다가 물었다. 기술자 본인의 말로는 초소형 녹음기 겸 도청기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성능은 배로 향상되겠지만 그만큼 내구도가 줄어들어서, 작은 충격에도 반 토막 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였지, 아마.
“모두 애니의 공이지. 도와주고 싶어도 난 소형 기계를 다루는 데엔 소질 없으니까. 싼 물건을 자기 입맛대로 개조하면서 노는 게 그 녀석의 취향이기도 하고.”
물방울의 가장 약하면서도, 가느다란 끝에 힘을 주며 한센은 덕분에 살았어,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 딱, 하는 두터운 소리와 함께 귀걸이의 몸통과 연결부가 분리되었다. 속 빈 물방울에서 나온 건 메모리칩을 품은, 손톱 크기만 한 기계 하나. ‘반 토막’ 나지 않도록 인형을 모시듯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침묵 속에 칩을 빼냈다.
“연회장을 도청하면 찾을 수 있는 거야? 나름 신출귀몰한 사람 같던데.”
한센이 자기 잔을 비울 것 같지 않자 아유다는 냉큼 반쯤 빈 잔을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자신의 일이 끝났다는 사실에 아유다는 안도하는 한편 이 방법이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연회장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통째로 녹음해 그 속에서 알리사 힐스레스트에 대한 단서를 찾아낸다는 발상은, 심하게 말하면 바보 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모한 것이었다.
“50 대 50의 도박이야. 찾으면 내 승리고, 못 찾으면 힐스레스트의 승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처참하게 져도 좋으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나타나줬으면 좋겠단 말이지…….”
한센은 예복의 재킷을 벗은 뒤 와이셔츠 소매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난 개인적으로 그 사람 마음에 안 들어’라는 아유다의 말은 가볍게 듣고 흘려보냈다. 데이터 수집이 끝난 이상 잡담할 여유는 더 이상 없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혼자서 머리를 굴릴 시간이 필요하다. 아유다가 말하는 것이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고상한 연회 음악과 한데 섞여 허공으로 날아오르다가 어느 순간 알아서 바스러진다.
오른쪽 소매를 걷어 그 안에 감춰둔, 신축소재 같은 것을 드러냈다. 팔목까지 내려온 그것의 끝부분엔 초소형 메모리칩이 딱 들어갈 만한 외장 슬롯(slot)이 달려 있었다. 망설임 없이 칩을 꽂은 뒤 연회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와이셔츠 깃 속에 숨겨둔 케이블 이어폰도 슬슬 꺼냈다.
“저기, 내 말 듣고 있어?”
한센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랐는지, 아유다는 말을 잇다 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도 있냐는 듯 이쪽을 돌아보는 한센을 향해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그 뒤에 나온 대답은, 아유다가 본능적으로 예상하고 있던 것과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여기서부턴 내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볼게. 파티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일하는 동안 천천히 즐기고 있어.”
“……너, 또 멋대로 일을 진행시키고 있구나. 춤추는 것도 이제 지루한데 그냥 여기서 구경하고 있으면 안 될까?”
“저 사람들은 널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한센이 가리킨 곳을 내려다본 아유다는 곧바로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춤 요청을 거절했을 텐데, 아까 전의 신사들이 다시 이쪽을 향해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분명 ‘이방(異邦)에서 온 꽃’을 누가 먼저 차지할까 내기하고 있는 것이리라. 미인은 피곤해, 라고 속으로 자조하며 한숨과 함께 아유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한센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 내버려두는 대가로 같이 춤을 춰달라고 제안하고 싶었지만 이제부턴 그럴 시간도 없다.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그 사람의 검을 칩 빠진 기계 옆에 놓아둔 뒤, 한센을 향해 샴페인 잔을 들어보였다. 반쯤 채워진 액체를 통해 그의 모습이 일렁였다.
“네가 마시다 만 건데, 내가 가져가도 되지?”
다른 남자라면 얼굴을 붉힐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한센의 말투는 무미건조했다.
“물론. 다 마셔도 돼. 끝나면 부를 테니까 이어폰은 꽂고 있어.”
“아이, 아이, 캡틴(Aye, aye, captain)."
서력 시대에 흔히 쓰였다는 문구를 읊조리며 아유다는 연회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 한센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50 대 50의 도박이다. 혹여나 연회장의 대화를 도청했다는 것이 발각되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아유다가 녹음해온 것엔 상류층끼리 통하는 어떤 비밀이 여러 개 숨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꼬리가 잡힐 것인지는 순전히 운에 달렸다. 수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적절하게 처세하는 수밖에.
그 사람을 찾느라 아주 미쳐버렸어, 라고 한센은 스스로를 평가했다. ‘간접키스야, 간접키스’라는 아유다의 혼잣말이 나직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