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메리룬(Imerirune) - 2
어렸을 때, 어머니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영웅 서사시와 권선징악 우화, 서력 시대에 일어났다는 기계 전설 같은 것들은 하나같이 호기심과 감성을 자극해왔다. 자기 전 침대에서 조금씩 들어온 어머니의 이야기는, 갓 성인이 된 지금의 소녀를 있게 해준 양분이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제국의 심장이 되는 이 황궁(皇宮)과 얽힌 역사적 사실이었다. 시작은 그저 단순한 질문에 불과했지만, 어머니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설명해주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는 구 공화국의 폐허를 밟고 서 있는 거에요. 궁이라 부르는 이곳은 예전의 의회 건물을 재활용한 것이죠.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희생은 말도 못할 정도로 컸답니다. 이 건물은 ‘역사는 피로 쓰인다’라는 격언을 몸소 증명하고 있는 셈이에요…….
유익한 설명이긴 해도, 그 당시의 소녀가 이해했을지는 의문이다. 자식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당신은 이제 고인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났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와 사별하고 13년이 지났다. 법적 성인이 된 소녀는,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문학을 전공했고, 일찍 학위를 받아 오빠와 함께 국정(國政)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멀어져버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뒤로하고, 이 ‘황궁’이라는 곳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 시작점은 만나야 할 누군가를 만나는 데 있었다.
“황녀 전하.”
익숙한 경칭이 귀에 날아 들어온다. 벽화를 보며 침묵하고 있던 소녀는, 아직 사색에서 깨어나지 못한 눈을 옆으로 돌렸다. 간단히 목례로 대답하자 제복 차림의 여성은 경례를 풀고, 방에서 나온 주군을 바른 자세로 맞이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습니다. 슬슬 연회에 참석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수고했어요, 클라인 경.”
그 뜻을 이해한 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체내의 모든 감각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심호흡을 한 뒤, 타인을 대면하는 상황에 적절하도록 머리와 드레스의 결을 매만졌다. 제1황녀이자 군주 되는 입장으로서 아랫사람에게 단정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 곤란하다.
좋아, 라는 혼잣말과 함께 자세를 바르게 고친 소녀는, 마지막으로 가디건 주머니에서 흰 면사를 꺼내 얼굴을 가렸다.
양쪽으로 기둥이 늘어서 있는 복도를 따라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자주 드나드는 이곳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옷이 펄럭인다. 날씨 따뜻한 철이라지만 해가 지면 바람이 춥기에, 소녀는 시녀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오늘 낮에 입었던 가디건을 계속 걸쳤다. 입고 있는 드레스와 충돌하는 감이 있어도 별 중요한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직도 ‘알리사 힐스레스트’라는 가명을 쓰고 계시는 겁니까.”
클라인 경의 질문에 소녀는 곁눈질로 뒤를 돌아보았다. 의문문과 평서문 사이의 어중간한 말투를 썼다는 건, 무슨 의도로 계속 정체를 숨기고 있느냐고 묻는 동시에 질책하기 위함일 것이다. 의문이 담긴 소녀의 시선과, 설명을 요구하는 클라인 경의 시선이 서로 맞닿았다.
황족에 대한 불경죄로 당장 처벌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소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군주의 위치에 있다 해도 최측근이라면 발언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 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이제 질렸어요. 가명을 쓴다는 게 이렇게까지 답답할 줄은 몰랐거든요. 처음부터 ‘아이린’으로서 다가갔으면 일이 좀 더 수월해졌을 지도 모르죠.”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즐거워 보이셨습니다만.”
“그랬나요? 뭐,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말꼬리를 살짝 가볍게 하며, ‘아이린’은 작게 웃었다. 알리사 힐스레스트로서 보낸 근 1년의 시간이 유익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가명이라는 두건을 뒤집어쓴 채, 단 한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타인을 연기한다―일방적인 대화만 할 수 있었지만, 조금이나마 그 사람을 알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그래도 만나게 되면 사과해야겠지. 오래된 인연인 것 같아도 사실은 낯설 정도로 새로우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가슴 한편이 먹먹해진다. 두건을 벗고 솔직하게 다가가면 그 사람은 멀리 떨어지려 할까봐 두렵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틀리지는 않았을까. 부끄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닌데, 첫 대면에서부터 본명을 밝혀도 괜찮을까. 이 순간을 빌려 소녀는―제1황녀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은―바람을 등진 채 다시 한 번 사색의 연쇄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으셨나 봅니다.”
귓속으로 뜬금없이 비집고 들어온 지적에 아이린은 엣, 하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었다. 다시 뒤를 돌아보자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는 클라인 경이 보였다. 저 사람도 웃을 때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본심이 꿰뚫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크게 뜨며 얼굴을 붉혔다.
“자, 장난이 심하네요, 아멜리아. 사적인 감정 같은 건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당황한 나머지 클라인 경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표정을 숨기려는 듯 아이린은 고개를 정면으로 홱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평온한 클라인 경의 태도가 조금 얄밉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할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등 뒤에서 클라인 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장담하건데, 그 아이는 무조건 화부터 내진 않을 겁니다. 센 척을 하는 그 속에 유약함이 숨어 있는 녀석이죠. 어느 정도는 강경하게 나가셔도 될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학교 선배라서 그런지 잘 알고 있군요.”
숙지했다는 뜻으로 아이린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바람이 거세진 탓에 길게 대답할 수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쉴 새 없이 불어닥치는 공기의 격류 속에서, 아이린은 자신의 계획을 처음 들은 클라인 경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 때의 동요는, 평소에 철가면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보일만한 게 아니었다.
클라인 경이 ‘한센 헤르만’의 선배였다는 사실은 그렇게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다. 그 인간관계를 이용하기 위해 아이린은 마침 후임자가 필요했던 수도 경비대장의 자리를 미끼로 내걸었다. 길고 힘든 설득이 이어졌지만, 클라인 경의 재능과 가치는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녀의 도움이 있었기에 계획의 달성을 예정보다 훨씬 앞당길 수 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클라인 경과는 최측근이 될 정도로 가까워졌고, 약속한 대로 그녀의 여동생을 기사단에 편입시켜주었다. 쓸모가 없어진 사냥개는 잡아먹어야 한다는 오빠의 충고를 가볍게 무시한 처사였다. 체스 말은 되도록 많이, 그리고 아끼는 편이 좋다. 이제 퀸(queen)을 직접 움직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 아이린은, 실내 복도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클라인 경.”
“왜 그러십니까?”
나직이 클라인 경을 부른 아이린은 문고리 위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운 계획을 클라인 경에게 알려줬을 때, 당신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망상’이라고 딱 잘라서 말한 일, 기억하고 있나요? 고작 한 기의 마도병기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구상 자체가 바보 같다고 했죠.”
“……그런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 말을 한 것도 사실이고요.”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클라인 경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확실히 클라인 경은 신하로 두고 써먹기에 좋은 인재였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그 성격을 조금이라도 빌려올 수 있었으면, 하고 한탄하며 아이린은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뒤로 이제 한 해가 지났어요. 그 사람―한센 헤르만―도 당신과 같은 생각, 같은 말을 하게 될까요? 사실 이건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고 밝히면 분명 화를 내겠죠?”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쉽게 화를 내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전하의 계획에 기꺼이 손을 빌려줄지는 저로서도 장담하기 힘듭니다.”
여기서부턴 네가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는 요지의 대답이었다.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도 아이린은 클라인 경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했다. 조언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결국 길을 나아가야 하는 건 아이린 자신이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한 번 시험해봐야겠지.
“이제부턴 주사위 게임이 되는 거네요.”
혼잣말과 함께, 울렁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며 씁쓸하게 웃는다. 시간을 더 낭비할 순 없겠지만 왠지 앞에 있는 이 문을 열기가 두려워졌다.
“제가 대신 열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클라인 경의 제의에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직접 매듭짓고 올 동안 좀 쉬고 있어요. 당신의 수고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무모한 행동에 기꺼이 동참해준 것 감사드립니다, 아멜리아 베르크도프 폰 클라인.”
“전하의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한 발 물러서는 그 태도엔 일말의 부언(附言)이나 이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숨어 있었던 먹먹함이 다시 일어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어가는 것을 아이린은 느꼈다. 있는 대로 흐려졌을 법한 옛날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질 줄이야. 단지 오래 전의 은혜를 갚기 위해 벌였던 일이 이 정도로 커진 걸 보면, 역시 사람의 일은 누구도 맞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미묘한 마음으로 문고리를 당겨, 실내 복도로 이어지는 문을 살짝 열었다.
“어머니, 저는 당신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멀어져가는 클라인 경의 발소리를 뒤로한 채, 천천히 두 번째 심호흡을 했다.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중얼거리며 아이린은 적갈색의 두꺼운 관문(關門)을 완전히 개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