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메리룬(Imerirune) - 3
아무도 없는 실내 복도를 혼자 걷고 있었던 아이린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자 즉시 발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좌측으로 꺾인 복도의 모퉁이에서 무언가가 나올 것 같았다. 처음엔 그저 막연한 추측에 불과했지만,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조금씩 확신으로 변해갔다. 대리석 바닥을 차박차박 하고 쳐대는 것은 인간의 두 발이 틀림없었다. 허둥댄다고 생각될 정도로 불규칙적이었기에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의문은 얼마 안 가 풀렸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구두를 손에 들고 있는 시녀가 허겁지겁 모퉁이를 빠져나왔다. 무서운 사람이라도 봤는지, 나이어린 시녀는 심하게 동요하고 있는 얼굴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더니 인사 한 마디도 없이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군주를 홱 하고 지나쳐버렸다.
엄청난 실례를 저지른 건 둘째치고, 말이 아닐 정도로 흐트러진 두발과 복장을 본 아이린은,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즉시 그 시녀를 불러 세웠다.
“이봐요, 당신. 자기 상태가 지금 어떤지 확인 안 해보셨습니까?”
목소리를 크게 낸 탓인지 시녀는 곧바로 뛰는 것을 멈추고 몸을 뒤로 돌렸다. 그 직후 인상을 쓰고 있는 제1황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뜨며 전신을 경직시켰다. 서둘러 차렷 자세를 했다지만 옷과 머리는 여전히 고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변명은 됐고, 우선 진정하세요.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엉망진창이 됐는지 제대로 설명해주셔야겠습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상태로 아이린은 말을 잘랐다. 아랫사람, 그것도 겨우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를 상대로 화를 내고 싶진 않았다. 본론부터 말하라는 무형의 압박에 시녀는 몸을 움츠리면서도, 울먹임을 애써 참아내며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연회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괴한들이 나타나 황녀 전하가 계시는 곳까지 안내하라고 협박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목에 칼을 들이밀기에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만……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어떻게든 뿌리치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괴한이라뇨? 불청객이 무단으로 궁에 들어왔다는 겁니까?”
어서 대답해보라는 듯 아이린은 시녀를 재촉했지만, ‘저는 조리부 소속이기 때문에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만이 돌아왔다. 외부인에 대한 보안이 가장 철저해야 할 황궁에서 뜬금없이 무단 침입이 일어나다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괴한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생각하고 있을 때,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은 시녀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 온 특사라고 했습니다. 황녀 전하와 급히 얘기할 게 있다고 한 뒤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특사…… 이군요. 무슨 얘기를 하러 왔는지는 듣지 못했습니까?”
“그, 그건…… 상황이 너무 정신없어서 저도 잘…….”
“무슨 얘기이긴, 당연히 외교와 관련된 얘기를 하러 왔지.”
시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며 말이 끊기려는 찰나, 복도 모퉁이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은 히익, 하고 놀라는 시녀를 자기 등 뒤로 물린 뒤, 적의가 담긴 시선으로 모퉁이 쪽을 노려보았다.
여러 개의 발소리와 함께 황궁에 난입한 ‘괴한들’은 황녀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복을 입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들의 이질성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무리의 선두에 선 중년 남자는 입고 있는 점퍼마저 어색해질 정도로 인상이 험악했다. 자기 자체가 벽이라고 말하는 듯한 덩치에 잘 단련된 근육, 얼굴에 대각선으로 그인 긴 흉터는 남자가 험한 인생을 살아왔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다정해 보이기는커녕 섬뜩해보였다.
무리의 규모는 일곱 명 정도. 자칭 특사치고는 인원이 많았지만, 저 모두가 외교만을 위해 온 것 같진 않았다. 경쇠마냥 벨트에 매달려 있는 삼단봉을 확인한 아이린은, 더욱 경계의 빛을 띠며 그들로부터 세 걸음 물러섰다.
“신원과 소속을 밝히세요. 불복하면 경비병을 부르겠습니다.”
아이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그러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말입니다. ‘제국식’으로 인사를 드리자면, 사절단의 대표 보리스 홀츠아커 폰 예거라 합니다.”
상류층의 예를 표하며 순순히 본명을 밝히는 남자의 대응에, 아이린은 한쪽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이름이 귀족식인데다 귀족의 인사법을 1도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해냈으니 이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한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한 번 헛기침을 한 뒤, 훈계하는 말투를 억지로 꺼냈다.
“예를 갖출 줄 아시는 분이 어째서 허락도 없이 이곳에 들어온 겁니까. 특사로서 외교 안건을 토의하러 오셨다면 적법한 절차를 거치셨어야지요. 당신들의 그 무례한 행동이 이 시녀를 얼마나 곤란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 그 부분에 대해선 사과드리겠습니다. 제 심복들이 사람을 좀 거칠게 대하는 면이 있어서요. 최대한 평화롭게 끝내려 했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보리스의 공손한 대답 속에 어떤 위험한 의도가 있음을 아이린은 직감했다. 작게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려 겁에 질린 시녀와 눈을 맞췄다. 저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기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제3자인 그녀를 여기에 휘말리게 할 순 없다. 그렇게 생각한 아이린은 곧바로 둘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겠어요?”
“네? 아…… 어제 조리부에 새로 배속된 에이미 스튜어트입니다.”
어제 배속된 신입이라니, 어지간히 나쁜 운에 걸려버린 불쌍한 아이다. 반대편에 있는 자칭 특사의 동향을 확인하며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뒤쪽에 있는 문으로 나가서 제 서재에 있는 기사를 이곳으로 불러주세요. 무뢰배들에게 둘러싸였다고 하면 바로 달려올 겁니다. 두발 및 복장 불량에 관한 건은, 사태가 사태임을 참작하여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전하.”
에이미는 교육받은 대로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치듯 야외 복도로 향했다. 인사까지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구나, 라고 혼잣말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은 아이린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앞에 있는 특사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저 보리스라는 인물은 무리 전체를 통솔하고 있었다. 세월이 만들어낸 노련한 우두머리답게, 이제 막 팽팽해지기 시작한 긴장 속에서 유일하게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심복’이라고 불린 이들이 그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것도 있었다. 마치 늑대 떼의 알파메일(alpha male)처럼, 보리스의 연륜과 카리스마가 젊은 피의 혈기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왜 왔는지, 왜 자기에게 적의를 표출하고 있는 건지 아이린으로선 알 길이 없었지만, 상황 파악을 위해 일단 대화를 계속하기로 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곳에 쳐들어온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상대를 한 번 떠보기 위해 아이린은 일부러 거친 표현을 써 보았다. 심복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지만 보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 전에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외교를 목적으로 온 특사로서,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정당성을 부여받지도 못한 당신 같은 사람들을 외교의 주체로 인정하라는 말입니까.”
네 주제를 알라는 듯 음색에 독기를 묻혔지만, 상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아넘겼다.
“외교의 주체로 인정해달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이런 물의를 일으킬 일도 처음부터 없었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 문제가 신사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선 저의 요구를 받아들이시는 게 좋습니다. 무력을 쓰지 못할 이유는, 저희들에겐 없습니다.”
“어찌 무례한…….”
아이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내려다가, 문득 어떤 깨달음이 일자 말을 멈추었다. 방금 전에 보리스는 ‘문제’라는 표현을 썼다. 그것이 무장을 한 채 황궁에 무단 침입하여 제국의 황녀를 협박하는 이 상황을 가리킨다면, 그 표현은 확실히 적절했다. 하지만 보리스를 외교 특사로서 인정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무언가 다른 문제가 있다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연회가 오늘 밤 내내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한센 헤르만이 끝까지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다. 경비병을 호출할 수도 있겠지만 연회장과는 거리가 좀 있으니, 제때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미라는 시녀가 아멜리아를 데리고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단, 당신들의 소속과 진짜 목적을 밝히는 것을 조건으로 하겠습니다.”
대화를 촉진시킬 목적으로 아이린은 일부러 한 발 양보해주었다. 보리스의 입가에 다시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소속은…… 제국법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해 두지요. 물론 이런 식의 일방적인 불평등 계약은 저희들도 좋아하지 않으니, 비밀로 하는 대신 일단 적의는 없다는 뜻으로 무기를 모두 버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보리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서 불평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험한 결정입니다. 방심한 틈에 경비병을 부를 수도 있잖습니까.’라는 반박부터, ‘저 여우같은 여자를 믿는 것도 모자라 등에 날개까지 달아주자는 말씀이십니까?’라는 인격모독성 발언까지 나오는 등 여러 가지 불쾌한 말들이 아이린의 신경을 건드렸다. 개중엔 이쪽을 향해 노골적인 살의를 표출하는 부류도 있었다. 기싸움에서 밀리면 곤란했기에 최대한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허공에 오른손을 올린 것만으로 보리스는 심복들의 불만을 단번에 잠재웠다. 주변의 잡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이렇게 말했다.
“무기를 ‘일단’ 버리고 이쪽으로 가까이 오세요. 허튼 짓을 했다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황녀 전하의 아량에 경의를 표합니다.”
보리스는 굳이 빈말을 한 뒤 심복들과 함께 가지고 온 것들을 하나씩 땅에 떨어트렸다. 삼단봉에서 시작하여 단검, 리볼버, 스턴건, 심지어 군용 섬광탄까지 나왔다. 대리석 바닥과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그것들을 보자 아이린의 등줄기를 타고 섬뜩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등을 만져보니 식은땀이 조금씩 나고 있었다.
확실히 이 사람들은 단지 외교만을 목표로 하고 온 것이 아니었다.
미친 결정을 내렸다, 고 아이린은 생각했다. 무기를 가진 위험인물들을 외교 특사로 인정한 걸로 모자라 가까이 접근하는 것까지 윤허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보리스의 제안을 들어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이제 손에 들고 있는 패는 클라인 경뿐인데, 왜 이렇게 도착이 늦는 것일까. 황녀 전용 서재와 실내 복도 간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도 않을 텐데…….
문득, 커피빈의 역습에 두고 온 검이 생각났다. 고의적으로 한 행동이긴 했지만 지금 그 검이 자기 손에 있었다면 그나마 덜 긴장했을 것이다. 레어메탈을 제련한 날은 모든 것을 베어버릴 수 있었기에, 항상 부적처럼 검을 들고 다녔다. 이 상황만큼 마음 속 강함의 원천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없었다.
“자, 그럼 용무를 말씀드리지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보리스는 다시 원래의 싸늘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미소를 지을 때와 별 차이 없었지만, 이쪽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는 것을 아이린은 보았다.
……잘못하면 한센 헤르만을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불안감에 뒤를 돌아봤지만, 문은 아직도 굳게 닫힌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