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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시는군요. 인질이 되는 것이 조건이라니.”
복도 모퉁이를 돌기 직전, 어디서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귓불을 울렸다. 불만으로 가득 찬 듯 완고하고 가시 돋친 말투가 호기심을 자극해왔다. 소리 없이 안쪽 벽으로 등을 기댄 한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재빨리 파악에 들어갔다.
좋은 소식은 지금껏 찾고 있었던 ‘꼬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3자가 그들과 연루되어버린 이 상황은 전자를 능가할 정도로 나빴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꼬리’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는 영애는 어딘가 심하게 친숙해 보였다. 분홍빛이 옅게 도는 머리에, 얼굴의 반을 가린 면사…… 틀림없다. ‘알리사 힐스레스트’였다.
상황을 이해할 새도 없이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후하면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하고 당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질’이라는 표현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원활한 이해와 교섭을 위해 황녀 전하께서 잠시 시간을 내주셨으면 하고…….”
“그게 인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제국의 외교 업무는 이곳, 황궁에서만 처리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상대국의 방침을 대놓고 무시하는 외교를 하다니, 당신들의 우두머리는 상식이 부족한가 보군요.”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태도는 단호했다. 자기주장과 근거, 도발을 차례대로 늘어놓는 그 모습은 흡사 공격대의 선두에 선 논객이었다. 하지만 상황 분석에만 집중하던 한센의 사고는, 이내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치게 되었다. 외부인인 그녀가 어떻게 그들을 알고 있을까?
“그런 항의를 해봤자 황녀 전하만 곤란해지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꼬리’의 리더로 보이는 남자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술렁임을 잠재운 뒤, 감정의 변화 없이 나직이 저런 말을 던졌다. 뒤따라 들려온 힐스레스트의 대답은 한센의 입장에선 조금 의외로 다가왔다.
“전 ‘특사로서의’ 당신의 요구가 매우 부당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특사……?”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오자 한센은 당황하며 벽 뒤로 몸을 숨겼다. 행여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도 동요는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은 얼마 안 가 풀렸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일종의 위기가 닥쳤다고 인식한 뇌가 사고의 연쇄를 가속하기 시작했다.
정리하자면 ‘꼬리’는 외교(外交)라는, 뭔가 이상한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 연회장에서 ‘꼬리’를 처음 발견하고, 그들의 대화가 도청기에 잡히면서부터 어떤 예감이 들긴 했다. 다만 특사의 사전적 의미가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옥에 티였다. 특수한 안건을 갖고 온 사절이라면 연회장에 잠복해 있을 필요가 처음부터 없었을 테다.
상황이 어떻든 일단 목적은 알았다. 미행에 실패한지 한참 뒤가 지나서야 이렇게 어이없는 계기로 알게 된 셈이다. 연결이 엉성한 부분들은 차치하고, 이제 잠자코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분위기상으론 보통 외교가 아닌 듯싶다. 계속되는 힐스레스트의 말을 빠짐없이 뇌리에 받아들였다.
“당신이 누굴 위해 일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외교 특사로서 평등한 조약을 맺겠다고 한 이상, 이쪽의 권리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표를 다짜고짜 데려가겠다는 것이야말로 납치이자 중대한 외교적 결례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셨습니까?”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신원은 보장됩니다. 또한 신체적 위협이나 무단 억류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끝낼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공평한 조건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렇게 비밀리에 상의해야 될 정도로 중대한 일이란 뭡니까? 적어도 그것만은 알고 결정을 내려야겠군요. 한 번 말해보세요.”
힐스레스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한센은 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전체적인 맥락까지는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부터 중요한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 정도는 보였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꼬리’의 리더는 해야 할 말을 조심스럽게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흠…… 설명 드리기가 참 곤란하군요. 저희들은 교섭 대상을 데리고 오라는 것 외의 다른 지령이나 정보는 받지 못했으니까요.”
“뭐라고요?”
힐스레스트와 마찬가지로, 한센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꼬리’의 리더가 말을 잇지 않았다면 곧바로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추측 정도는 알려드릴 수 있겠지요. 듣기만 하면 바로 감이 오실 겁니다. 지령 외의 행동이긴 해도, 이걸 알게 된 사람이 누구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군요.”
다시 고개를 내민 한센은 긴장 어린 시선을 힐스레스트에게 향했다. 여전히 적의 가득한 태도로 ‘꼬리’의 리더를, 아니 ‘꼬리’ 그 자체를 상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알 수 없는 이면이 보였다. 시력이 아주 좋은 건 아니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경계심에 조금씩 섞여 나오는, 미세하게 떨리는 팔로 전해지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감정 중 하나였다.
그녀는 제3자의 위치를 벗어난 지 오래다. 자칭 특사가 신병 확보를 목적으로 접근해왔다면 평범한 귀족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한 가지 의문이 한센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무거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저희들이 운용하고 있는…… ‘검은 마도병기’와 관련된 일입니다.”
-저 사람, 아까 전에 힐스레스트를 ‘황녀 전하’라고 부르지 않았나……?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름대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힐스레스트가 처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건 한센도 마찬가지였지만, 최대한 동요를 억누르고 퍼즐 조각이 서로 맞물릴 때까지 기다렸다.
남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더군요. 사신, 지옥의 개, 심지어는 다른 세계에서 온 괴물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하긴 그 안의 것을 직접 본 사람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거, 최초의 발견자가 된 전하께 축배라도 드려야 되는 걸까요?”
“……브란덴부르크를 습격한 건 당신들이었습니까.”
힐스레스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직접적인 답이 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급진적인 놈들이 사고를 쳤다, 고 하면 충분하지 않겠지요. 여하튼 제가 드릴 수 있는 설명은 여기까집니다. 슬슬 결정을 내려주셔야겠습니다, 황녀 전하. 아니, 이제부턴 편의를 위해 ‘아이린 이메리룬’이라 해 두죠.”
“본명까지 알고 있다니, 조사를 철저하게 해 오셨군요.”
예상과는 달리 황녀는 가벼운 쓴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긴장된 전신을 서서히 풀어갔다. 무서워할 건 이제 없다는 무언의 시위로 보였다. 소매에 반쯤 덮인 손을 면사가 걸려 있는 쪽으로 올린다. 천조각을 안경 벗듯이 걷어내자 1년간, 알리사 힐스레스트 뒤에 숨어 있던 진면(眞面)이 ‘꼬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제1황녀,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의 얼굴이자 본모습이었다.
등을 돌린 한센은, 복잡해진 표정을 손으로 가렸다. 결국 자기가 만나고자 했던 사람은 귀족 따윈 가볍게 밟아버리는, 이 국가의 황녀였다. 아니, 저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반쯤 짐작이 가긴 했다. 정작 진실이 공개되자 흥분되는 대신 허탈해졌다. 저렇게 쉽게, 천쪼가리 하나 벗는 걸로 모든 것을 알게 되다니.
“예거 경, 당신의 말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모퉁이 너머의 침묵을 깼다. 제국 정경사문의 선두에 서는 자답게 말투는 여전히 당당했다.
“당신의 상관은, 검은 마도병기를 무기삼아 저와 교섭을 하려는 것이로군요. 수도 근처의 브란덴부르크를 공격한 건 이 일의 전조였을 테고요.”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아이린 이메리룬 당신이 동의한다면, 제가 내건 조건은 모두 지켜질 것이라고 약속드릴 수 있…….”
짝, 하고 큰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 뒤를 돌아보니, 남자의 고개는 돌아가 있었다. 아이린은 손을 위로 든 채였다―‘예거 경’의 뺨을 전력을 다해 갈긴 것 같았다.
사람들의 험악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아이린은 독기 어린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나의 답변이다. 네놈은 스스로를 ‘외교 특사’로 둔갑시켜 날 함정에 빠트리려 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네놈들에게 지킬 예절은 없다. 테러리스트 주제에 잘도 내 앞에 나타나서 입을 나불댔구나.”
“……그런 테러리스트에게 한 방 먹이다니, 강단 있는 분이시군요. 꽤 아팠습니다만.”
예거 경의 대답에 한센은 혼란스러웠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건가?
“네놈들의 수괴는 다음 목표를 수도로 정해뒀겠지. 검은 마도병기가 격파된 적이 없는 것을 이용해, 나와의 협상에서 심리적인 우위를 점하려 했을 것이다. 네놈들의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거절해야 된다는 것 정도는 알겠구나. 그 더러운 면상으로 내게 외교를 들먹이다니.”
“흠, 당신은 브란덴부르크의 일에서 배운 게 아무것도 없는 모양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기회는 많았는데 말이지요. 현장을 조사하러 간 당신의 오빠만 불쌍하게 됐군요.”
“폐하를 욕할 자격은 테러리스트 놈들에겐 없다. 폐하께선 네놈들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 붓고 계시다. 그런 말로 날 도발하려 한 너는, 이 나라의 사람이 아니구나.”
“‘제국식’으로 이름을 댄 시점에서 눈치 못 채셨습니까?”
아이린은 풋, 하고 비웃음을 날렸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마다. 너 같은 놈들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 겪어봐서 잘 알고 있지. 겉으로는 ‘고귀한 목적’, ‘숭고한 사명’을 들먹이면서 하는 일은 이런 협박과 살인밖에 없지 않느냐. 참으로 위대한 성전 납셨구나.”
“뭐라고? 이 개 같은 년이……!”
한 젊은 부하가 분노해서 달려드는 것을 예거 경이 가볍게 제지했다. 목을 붙잡고 창문 샛기둥에 뒤통수를 처박아버린 게 제지라면 제지일 것이다. 머리에 충격을 받은 그 부하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기절한 듯, 죽은 듯싶었지만 일단 단기 억제제는 되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예거 경은, 재킷 뒤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이 일을 단순히 곤란한 문제로 여기는 듯했다.
“최대한 신사적으로 합의를 보려 했는데, 가지 않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무기로 날 위협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
훤히 보인다는 듯 아이린은 곧바로 예거 경의 자세를 지적했다.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리라. 사뭇 긴장하며, 한센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섬광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땅바닥에 저렇게 많은 무기를 버려놓고도 아직 남은 게 있다는 걸까?
“알고 있습니다. 불응할 시엔 무력을 쓰겠다고 한 말을 굳이 지키려는 것이죠. 저 개인은 비폭력을 지향합니다만, 어쩔 수 없이 테러리스트의 방식을 따라야겠군요.”
섬광탄이 손에 닿을락말락했다. 옆을 흘끔 보니, 황녀의 시선은 아직 예거 경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발각되지 않은 것 같다. 난데없이 저쪽으로 섬광탄을 던지면 아주 미안한 상황이 연출되겠지. 몸을 완전히 엎드리고 나서야 손가락으로 겨우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
“아르고스 8. 슬슬 문 열고 이쪽으로 데려와.”
태세를 수습하려던 찰나, 갑자기 터져 나온 큰 소리에 한센은 몸을 흠칫했다.
“읍, 읍……!”
이어서 들려온 건 여자의 목소리-입을 막힌 상황에서 내는 신음에 가까웠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포박당한 메이드 한 명과, 칼을 든 ‘꼬리’ 한 명.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을 기세로 날을 살가죽에 대고 있다. 복도 끝의 문을 열고 이쪽으로 난입해온 게 확실했다. 뉴스나 영화에서 소위 말하는 ‘인질극’의 분위기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뒤로 돌아 상황을 파악한 아이린은, 적잖이 당황했는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에이미 스튜어트. 어, 어떻게 당신이…….”
“말씀드렸잖습니까, 테러리스트의 방식을 따르겠다고.”
예거 경은 담담하게 말을 잘랐다. 무서워서 울기까지 하는 메이드를 무시하고, 리볼버의 은색 총구를 황녀의 뒤통수에 갖다 댔다. ‘외교 특사’로서의 자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자, 당신들 황족이 아끼는 제국민이 인질이 됐습니다. 이 정도면 당신의 마음이 바뀌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정확히 30초 드리겠습니다.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 즉시 저 시녀의 목은 날아갑니다.”
“최후의 반항마저 실패해버렸다는 겁니까…….”
이전과는 달리 아이린의 감정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다. 다시 이쪽으로 몸을 돌린 그녀에게 예거 경은 이렇게 말했다.
“운 좋은 쥐새끼가 자기 실수로 다시 덫에 걸려든 겁니다. 테러리스트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든 숨어서 지켜볼 수 있으니까요.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고 들었는데, 당신을 향한 충성심이 어지간했던 모양입니다.”
“바로 어제 온 신입이 쉽게 충성하리라곤 기대할 수 없겠지요.”
씁쓸한 웃음과 함께, 아이린은 멍하니 리볼버의 총구를 응시했다.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한센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세가 완전히 기운 이상 자기라도 개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섬광탄을 쓴다 해도, 잘못 던지면 황녀와 ‘인질’까지 다칠 수 있었다. 대략 20초의 틈을 이용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둘을 안전하게 빼낼 수 있는 방법을…….
그 순간, 불현듯 아이디어 하나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한센은 잠시 뒤, 볼펜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꺼냈다.
02. 이메리룬(Imerirune) - 4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시는군요. 인질이 되는 것이 조건이라니.”
복도 모퉁이를 돌기 직전, 어디서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귓불을 울렸다. 불만으로 가득 찬 듯 완고하고 가시 돋친 말투가 호기심을 자극해왔다. 소리 없이 안쪽 벽으로 등을 기댄 한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재빨리 파악에 들어갔다.
좋은 소식은 지금껏 찾고 있었던 ‘꼬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3자가 그들과 연루되어버린 이 상황은 전자를 능가할 정도로 나빴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꼬리’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는 영애는 어딘가 심하게 친숙해 보였다. 분홍빛이 옅게 도는 머리에, 얼굴의 반을 가린 면사…… 틀림없다. ‘알리사 힐스레스트’였다.
상황을 이해할 새도 없이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후하면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하고 당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질’이라는 표현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원활한 이해와 교섭을 위해 황녀 전하께서 잠시 시간을 내주셨으면 하고…….”
“그게 인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제국의 외교 업무는 이곳, 황궁에서만 처리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상대국의 방침을 대놓고 무시하는 외교를 하다니, 당신들의 우두머리는 상식이 부족한가 보군요.”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태도는 단호했다. 자기주장과 근거, 도발을 차례대로 늘어놓는 그 모습은 흡사 공격대의 선두에 선 논객이었다. 하지만 상황 분석에만 집중하던 한센의 사고는, 이내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치게 되었다. 외부인인 그녀가 어떻게 그들을 알고 있을까?
“그런 항의를 해봤자 황녀 전하만 곤란해지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꼬리’의 리더로 보이는 남자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술렁임을 잠재운 뒤, 감정의 변화 없이 나직이 저런 말을 던졌다. 뒤따라 들려온 힐스레스트의 대답은 한센의 입장에선 조금 의외로 다가왔다.
“전 ‘특사로서의’ 당신의 요구가 매우 부당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특사……?”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오자 한센은 당황하며 벽 뒤로 몸을 숨겼다. 행여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도 동요는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은 얼마 안 가 풀렸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일종의 위기가 닥쳤다고 인식한 뇌가 사고의 연쇄를 가속하기 시작했다.
정리하자면 ‘꼬리’는 외교(外交)라는, 뭔가 이상한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 연회장에서 ‘꼬리’를 처음 발견하고, 그들의 대화가 도청기에 잡히면서부터 어떤 예감이 들긴 했다. 다만 특사의 사전적 의미가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옥에 티였다. 특수한 안건을 갖고 온 사절이라면 연회장에 잠복해 있을 필요가 처음부터 없었을 테다.
상황이 어떻든 일단 목적은 알았다. 미행에 실패한지 한참 뒤가 지나서야 이렇게 어이없는 계기로 알게 된 셈이다. 연결이 엉성한 부분들은 차치하고, 이제 잠자코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분위기상으론 보통 외교가 아닌 듯싶다. 계속되는 힐스레스트의 말을 빠짐없이 뇌리에 받아들였다.
“당신이 누굴 위해 일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외교 특사로서 평등한 조약을 맺겠다고 한 이상, 이쪽의 권리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표를 다짜고짜 데려가겠다는 것이야말로 납치이자 중대한 외교적 결례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셨습니까?”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신원은 보장됩니다. 또한 신체적 위협이나 무단 억류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끝낼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공평한 조건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렇게 비밀리에 상의해야 될 정도로 중대한 일이란 뭡니까? 적어도 그것만은 알고 결정을 내려야겠군요. 한 번 말해보세요.”
힐스레스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한센은 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전체적인 맥락까지는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부터 중요한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 정도는 보였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꼬리’의 리더는 해야 할 말을 조심스럽게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흠…… 설명 드리기가 참 곤란하군요. 저희들은 교섭 대상을 데리고 오라는 것 외의 다른 지령이나 정보는 받지 못했으니까요.”
“뭐라고요?”
힐스레스트와 마찬가지로, 한센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꼬리’의 리더가 말을 잇지 않았다면 곧바로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추측 정도는 알려드릴 수 있겠지요. 듣기만 하면 바로 감이 오실 겁니다. 지령 외의 행동이긴 해도, 이걸 알게 된 사람이 누구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군요.”
다시 고개를 내민 한센은 긴장 어린 시선을 힐스레스트에게 향했다. 여전히 적의 가득한 태도로 ‘꼬리’의 리더를, 아니 ‘꼬리’ 그 자체를 상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알 수 없는 이면이 보였다. 시력이 아주 좋은 건 아니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경계심에 조금씩 섞여 나오는, 미세하게 떨리는 팔로 전해지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감정 중 하나였다.
그녀는 제3자의 위치를 벗어난 지 오래다. 자칭 특사가 신병 확보를 목적으로 접근해왔다면 평범한 귀족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한 가지 의문이 한센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무거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저희들이 운용하고 있는…… ‘검은 마도병기’와 관련된 일입니다.”
-저 사람, 아까 전에 힐스레스트를 ‘황녀 전하’라고 부르지 않았나……?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름대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힐스레스트가 처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건 한센도 마찬가지였지만, 최대한 동요를 억누르고 퍼즐 조각이 서로 맞물릴 때까지 기다렸다.
남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더군요. 사신, 지옥의 개, 심지어는 다른 세계에서 온 괴물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하긴 그 안의 것을 직접 본 사람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거, 최초의 발견자가 된 전하께 축배라도 드려야 되는 걸까요?”
“……브란덴부르크를 습격한 건 당신들이었습니까.”
힐스레스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직접적인 답이 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급진적인 놈들이 사고를 쳤다, 고 하면 충분하지 않겠지요. 여하튼 제가 드릴 수 있는 설명은 여기까집니다. 슬슬 결정을 내려주셔야겠습니다, 황녀 전하. 아니, 이제부턴 편의를 위해 ‘아이린 이메리룬’이라 해 두죠.”
“본명까지 알고 있다니, 조사를 철저하게 해 오셨군요.”
예상과는 달리 황녀는 가벼운 쓴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긴장된 전신을 서서히 풀어갔다. 무서워할 건 이제 없다는 무언의 시위로 보였다. 소매에 반쯤 덮인 손을 면사가 걸려 있는 쪽으로 올린다. 천조각을 안경 벗듯이 걷어내자 1년간, 알리사 힐스레스트 뒤에 숨어 있던 진면(眞面)이 ‘꼬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제1황녀, 아이린 바이스슈타인 폰 이메리룬의 얼굴이자 본모습이었다.
등을 돌린 한센은, 복잡해진 표정을 손으로 가렸다. 결국 자기가 만나고자 했던 사람은 귀족 따윈 가볍게 밟아버리는, 이 국가의 황녀였다. 아니, 저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반쯤 짐작이 가긴 했다. 정작 진실이 공개되자 흥분되는 대신 허탈해졌다. 저렇게 쉽게, 천쪼가리 하나 벗는 걸로 모든 것을 알게 되다니.
“예거 경, 당신의 말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모퉁이 너머의 침묵을 깼다. 제국 정경사문의 선두에 서는 자답게 말투는 여전히 당당했다.
“당신의 상관은, 검은 마도병기를 무기삼아 저와 교섭을 하려는 것이로군요. 수도 근처의 브란덴부르크를 공격한 건 이 일의 전조였을 테고요.”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아이린 이메리룬 당신이 동의한다면, 제가 내건 조건은 모두 지켜질 것이라고 약속드릴 수 있…….”
짝, 하고 큰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 뒤를 돌아보니, 남자의 고개는 돌아가 있었다. 아이린은 손을 위로 든 채였다―‘예거 경’의 뺨을 전력을 다해 갈긴 것 같았다.
사람들의 험악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아이린은 독기 어린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나의 답변이다. 네놈은 스스로를 ‘외교 특사’로 둔갑시켜 날 함정에 빠트리려 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네놈들에게 지킬 예절은 없다. 테러리스트 주제에 잘도 내 앞에 나타나서 입을 나불댔구나.”
“……그런 테러리스트에게 한 방 먹이다니, 강단 있는 분이시군요. 꽤 아팠습니다만.”
예거 경의 대답에 한센은 혼란스러웠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건가?
“네놈들의 수괴는 다음 목표를 수도로 정해뒀겠지. 검은 마도병기가 격파된 적이 없는 것을 이용해, 나와의 협상에서 심리적인 우위를 점하려 했을 것이다. 네놈들의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거절해야 된다는 것 정도는 알겠구나. 그 더러운 면상으로 내게 외교를 들먹이다니.”
“흠, 당신은 브란덴부르크의 일에서 배운 게 아무것도 없는 모양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기회는 많았는데 말이지요. 현장을 조사하러 간 당신의 오빠만 불쌍하게 됐군요.”
“폐하를 욕할 자격은 테러리스트 놈들에겐 없다. 폐하께선 네놈들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 붓고 계시다. 그런 말로 날 도발하려 한 너는, 이 나라의 사람이 아니구나.”
“‘제국식’으로 이름을 댄 시점에서 눈치 못 채셨습니까?”
아이린은 풋, 하고 비웃음을 날렸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마다. 너 같은 놈들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 겪어봐서 잘 알고 있지. 겉으로는 ‘고귀한 목적’, ‘숭고한 사명’을 들먹이면서 하는 일은 이런 협박과 살인밖에 없지 않느냐. 참으로 위대한 성전 납셨구나.”
“뭐라고? 이 개 같은 년이……!”
한 젊은 부하가 분노해서 달려드는 것을 예거 경이 가볍게 제지했다. 목을 붙잡고 창문 샛기둥에 뒤통수를 처박아버린 게 제지라면 제지일 것이다. 머리에 충격을 받은 그 부하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기절한 듯, 죽은 듯싶었지만 일단 단기 억제제는 되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예거 경은, 재킷 뒤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이 일을 단순히 곤란한 문제로 여기는 듯했다.
“최대한 신사적으로 합의를 보려 했는데, 가지 않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무기로 날 위협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
훤히 보인다는 듯 아이린은 곧바로 예거 경의 자세를 지적했다.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리라. 사뭇 긴장하며, 한센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섬광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땅바닥에 저렇게 많은 무기를 버려놓고도 아직 남은 게 있다는 걸까?
“알고 있습니다. 불응할 시엔 무력을 쓰겠다고 한 말을 굳이 지키려는 것이죠. 저 개인은 비폭력을 지향합니다만, 어쩔 수 없이 테러리스트의 방식을 따라야겠군요.”
섬광탄이 손에 닿을락말락했다. 옆을 흘끔 보니, 황녀의 시선은 아직 예거 경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발각되지 않은 것 같다. 난데없이 저쪽으로 섬광탄을 던지면 아주 미안한 상황이 연출되겠지. 몸을 완전히 엎드리고 나서야 손가락으로 겨우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
“아르고스 8. 슬슬 문 열고 이쪽으로 데려와.”
태세를 수습하려던 찰나, 갑자기 터져 나온 큰 소리에 한센은 몸을 흠칫했다.
“읍, 읍……!”
이어서 들려온 건 여자의 목소리-입을 막힌 상황에서 내는 신음에 가까웠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포박당한 메이드 한 명과, 칼을 든 ‘꼬리’ 한 명.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을 기세로 날을 살가죽에 대고 있다. 복도 끝의 문을 열고 이쪽으로 난입해온 게 확실했다. 뉴스나 영화에서 소위 말하는 ‘인질극’의 분위기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뒤로 돌아 상황을 파악한 아이린은, 적잖이 당황했는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에이미 스튜어트. 어, 어떻게 당신이…….”
“말씀드렸잖습니까, 테러리스트의 방식을 따르겠다고.”
예거 경은 담담하게 말을 잘랐다. 무서워서 울기까지 하는 메이드를 무시하고, 리볼버의 은색 총구를 황녀의 뒤통수에 갖다 댔다. ‘외교 특사’로서의 자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자, 당신들 황족이 아끼는 제국민이 인질이 됐습니다. 이 정도면 당신의 마음이 바뀌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정확히 30초 드리겠습니다.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 즉시 저 시녀의 목은 날아갑니다.”
“최후의 반항마저 실패해버렸다는 겁니까…….”
이전과는 달리 아이린의 감정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다. 다시 이쪽으로 몸을 돌린 그녀에게 예거 경은 이렇게 말했다.
“운 좋은 쥐새끼가 자기 실수로 다시 덫에 걸려든 겁니다. 테러리스트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든 숨어서 지켜볼 수 있으니까요.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고 들었는데, 당신을 향한 충성심이 어지간했던 모양입니다.”
“바로 어제 온 신입이 쉽게 충성하리라곤 기대할 수 없겠지요.”
씁쓸한 웃음과 함께, 아이린은 멍하니 리볼버의 총구를 응시했다.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한센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세가 완전히 기운 이상 자기라도 개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섬광탄을 쓴다 해도, 잘못 던지면 황녀와 ‘인질’까지 다칠 수 있었다. 대략 20초의 틈을 이용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둘을 안전하게 빼낼 수 있는 방법을…….
그 순간, 불현듯 아이디어 하나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한센은 잠시 뒤, 볼펜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