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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언바운드 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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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이 길어서 5~6화에 걸쳐서 올립니다)

02. 이메리룬(Imerirune) - 5


 아네모네의 작업실에서 가져온 장난감이 생각지도 않게 빛을 발한 셈이었다. 눈짐작으로 거리를 맞춘 한센은 무리의 중앙을 향해 볼펜을 던졌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고 또르르 굴러 주의를 끈 볼펜은, 충격을 인식하자마자 소음을 내며 폭발했다. 멀리서 들으면 풍선 터지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최​루​액​이​다​!​’​라​는​ ‘꼬리’ 중 한 명의 외침에 맞춰 한센은 모퉁이를 나와 즉시 예거 경을 향해 지면을 박찼다.




 제일 먼저 손목을 가격해 리볼버를 쳐낸 뒤, 있는 힘껏 그를 반대쪽으로 밀었다. 그 거대한 몸뚱이의 붕괴를 볼 틈도 없이 황녀의 손목을 잡고 방향을 틀었다. ‘아르고스 8’의 자세가 풀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인질로 잡힌 메이드를 낚아채듯이 이쪽으로 끌어왔다. 최루액이 분사된 쪽으로 그를 밀어 넣은 건 인질을 내준 것에 대한 작은 선의였다.




 황녀의 상태도 확인할 겸 한센은 잠깐 뒤를 돌아봤지만, 서로 시선을 맞댄 건 겨우 1초에 불과했다.




 “잠깐 뛸까요, 힐스레스트 씨.”




 “네? 콜록……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황녀, 아니 아이린의 말을 다 들을 필요는 없었다. 살갗이 더욱 따가워지기 전에 한센은 서둘러 그녀를 이끌고 실내를 탈출했다.




 오후 10시 반. 밤의 장막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빛이라곤 달빛이 유일하다. 격자로 깔린 푸른 광채를 바닥삼아 한센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이린의 구두 소리와 간간히 느껴지는 숨결이 귀와 목덜미를 동시에 자극해왔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부드러운 살결은, 한센의 머릿속에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뜬금없긴 했지만, 이성을 가까이에 두는 건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실내 복도의 상황을 확인했다. 아네모네의 ‘펜 폭탄’은 위력은 강력해도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메스꺼움을 떨쳐낸 ‘꼬리’ 몇 명이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주우려 하고 있었다. 저러다 리볼버라도 줍게 되면 이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해진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한센은, 망설임 없이 아이린에게 섬광탄을 건넸다. 혼이 나간 듯 멍한 그녀의 시선에 점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핀을 뽑아서, 저쪽으로 던져주세요.”




 “왜 직접 하지 않고…….”




 “전 들고 있는 게 있잖아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던지기나 해요.”




 왼쪽 어깨에 둘러업은 메이드를 가리키며 한센은 말을 잘랐다. 황족 모독에 이어 명령까지 내리다니, 자칫하면 사회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대신,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섬광탄을 들어올렸다.




 고리를 잡아 뽑고,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담아 팔로 호를 그렸다.




 섬광탄이 허공에 뜬 순간 한센은 다시 아이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뛰어요!’라는 단말마 같은 외침과 함께 섬광탄이 착지할 곳에서 가능한 한 멀어지려 했다. 잠시 뒤 망막을 파고들 정도의 강렬한 플래시가 뒤에서 엄습해왔다. 팍, 하고 빛은 한순간 통로 전체를 비추더니 이내 완전히 사그라졌다. ‘꼬리’의 고통스러운 외침을 뒤로한 채, 한센과 아이린은 계속 달렸다. 아무런 방해 없이 길 끝에 서 있는 문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높이 4미터, 폭 2미터의 이 목재 관문을 열면 서재로 직행하는 길이 나온다. 아멜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린은 그 선택지 위에 줄을 그어버렸다. 문을 열려는 한센을 제지하고 좌측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야외 복도의 연장인 작은 통로가 그곳에 있었다.




 “저 길로 가요. 크게 돌아서 연회장 쪽으로.”




 “더 많이 뛰어야 될 텐데, 괜찮겠어요?”




 걱정 받고 있다는 생각에 아이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에 헌병대가 주둔하고 있어요. 그들에게 이 상황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사적인 일은…… 그 뒤에 처리하도록 하죠.”




 그녀의 의도를 대강 파악했는지, 한센은 말없이 좌측 통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샛길 한쪽엔 벽, 다른 한쪽엔 기둥이 늘어서 있고, 그 옆으로는 잔디밭이 형광등 빛을 머금고 있다. 길을 알려달라는 한센의 부탁에 아이린은 잔디밭에 가 있던 시선을 거뒀다. 자신의 손목을 감싸 쥔 그의 손을 묘하게 바라보며, 연회장까지 최단 거리로 갈 수 있는 동선을 뇌리에 떠올렸다.




 “앞으로 계속 간 다음, 석상이 있는 갈림길에서 좌측이에요.”




 침묵만이 돌아오자 자기도 모르게 멋쩍어졌다. 난데없이 끼어든 주제에 일말의 설명도 없고, 언동도 무례하다. 하지만 이 남자의 개입 덕분인지, 머릿속을 잠식했던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어깨 위로 기절해버린 에이미를 들고, 허리에 친숙해 보이는 검을 맨 이 남자-한센 헤르만에게 등을 잠시 맡겨야 할 것 같았다.




 석상까지 앞으로 5미터. 숨이 차기 시작한다고 생각될 즈음, 한센이 갑자기 추궁하듯이 질문을 던져왔다.




 “왜 말 안 했어요?”




 “네?”




 “왜 처음부터 황녀라고 말 안 했냐고요. 지금까지 귀족 영애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저만 곤란해지잖아요.”




 몰아세우다 못해 화를 내자 아이린은 해명을 위해 남은 숨을 쥐어짜냈다.




 “그게…… 당신이 저를 굉장히 어려워할 것 같아서…….”




 말을 끝낼 새도 없이, 검을 든 석재 기사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아이린의 몸은 석상 앞에서 힘없이 왼쪽으로 이끌렸다. 방금 지나온 샛길과 별다를 건 없었지만, 이번엔 눈에 확실히 들어오는 이질감이 있었다. 잔디밭을 지나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괴한들이 몇 명 보였다.




 “그렇다면 하나만 물을게요.”




 마찬가지로 인기척을 느꼈는지, 복도 너머를 바라보며 한센이 말했다.




 “이제부터 누굴 도우면 될까요? 알리사, 아니면 황녀 전하? 부탁이니까 실망스러운 선택은 하지 말아주세요.”




 “알리사를 선택하면 당신을 실망시키게 되는 거군요.”




 아이린은 단번에 그 의미를 이해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온다는 건, 예거 경과 나눴던 대화를 어느 시점에서 엿들었다는 뜻이다. 자세한 경위까지 알 시간은 없었기에 결정이 난 대로 말을 이었다.




 “오늘부로 ‘알리사 힐스레스트’는 없는 사람입니다. 대신 이 나라의 황녀로서 당신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를 황녀 전하가 아닌, ‘아이린’으로 불러주세요.”




 두 사람의 대화가 합의에 이른 순간, 선두에 선 괴한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기사학교에서 배운 대로, “일 대 다수에선 일 대 일.” 소극적으로 각개격파 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 메이드를 들고 있기에 왼손이 봉쇄되고, 아이린을 보호해야 하기에 움직임이 제한된다. 이런 상황일수록 더더욱 정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선두의 ‘꼬리’는 행동이 미숙했다. 그냥 되는 대로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특별한 작전 같은 건 없어보였다. 어깨 너머의 둘도 별 차이가 없는 듯싶었다. 망보기밖에 할 줄 모르는 병아리들이라고 봐야 했다. 다시 말해, 훈련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등 뒤로 붙어요!”




 괴한이 상체를 틀었다. 삼단봉을 내려치기 전, 위력을 더하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대략 3초 후면 일격이 날아올 것이다. 제대로 맞는다면 멍이 드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보호 장구가 없는, 일반인이라는 가정 하에.




 한센은 망설임 없이 오른팔을 들었다. 퍽, 하고 삼단봉이 예복 소매를 짓눌렀다. 뒤에서 아이린이 숨을 들이켰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곧바로 하반신을 움직여 괴한의 복부에 발을 꽂아 넣었다. 호흡이 멎는 소리와 함께 괴한의 상체가 반으로 접혔다. 그 상태 그대로 바닥에 넘어뜨리고 가려 했다.




 좌측에서 갑자기 섬광이 쇄도해왔다.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예복 소매가 조금 잘렸다. 직검(直劍)의 형태를 한 나이프가 괴한의 왼쪽 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쉽게 숨길 수 있는 접이식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물러나는 대신 한센은 중심을 잡으면서 하반신을 살짝 우측으로 틀었다.




 평소의 배가 된 힘으로, 괴한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격렬한 파공음이 순간적으로 터져 나왔다.




 자세만 무너뜨릴 것 같았던 일격이 몸 전체를 붕 띄웠다.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을 한센은 공 차듯이 옆으로 치웠다. 1미터나 날아가는 괴한을 뒤로하고, 나머지 ‘꼬리’를 유인하기 위해 잔디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수상할 정도로 힘이 세군요.”




 곧바로 그를 뒤따르며 아이린이 말했다. 인간이 낼 수 없는 각력을 목격한 탓이었지만, 한센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은 두 ‘꼬리’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어둠 속에 발을 들였다. 더 가까이에 있는 ‘꼬리’가 작은 체구로 날렵하게 다가왔다. 어렴풋이 반사되는 불빛이 역수로 쥔 군용 단도의 형태를 그렸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했는지, 처음부터 냉병기를 꺼내들기로 한 모양이었다.




 곡선을 그리며, 일격이 날아든다. 한센은 당연하다는 듯 공간이 넓은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칼날이 빗나갔다. 완벽하지는 않아서, 아랫배에서 가슴까지 재킷 위에 긴 대각선이 그어졌다. 이물질을 인식한 신축소재가 옷 안에서 조이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경화시켜 방검복이 되려 한다.




 젠장, 얼마를 주고 산 예복인데-짜증을 내며 한센은 ‘꼬리’를 향해 무릎을 휘둘렀다. 명치를 때리자마자 격한 신음이 울려 퍼졌다.




 두 번째 ‘꼬리’가 뒤로 넘어지는 동시에 세 번째가 거리를 좁혀왔다. 덩치는 가장 컸지만 위압감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나름 다져진 실루엣에 맨손으로 달려오는 게 마치 자기 몸 그 자체가 무기라고 말하는 듯했다.




 “조심해요!”




 “알고 있어요!”




 자기 목을 노리고 온 기습을 피해내며, 예민해진 목소리로 한센이 말했다. 어깨쪽 천이 찢어지는 것을 대가로 두 번째 ‘꼬리’의 목을 붙잡을 수 있었다. 덩치 큰 쪽의 주먹을 회전하듯이 흘려보낸 직후 작은 쪽의 뒤통수를 땅에 처박았다. 왼발로 군용 단도를 손에서 쳐내고, 오른발로 작은 쪽의 어깨를 힘주어 밟았다.




 인질을 잡으려는 건지 큰 쪽이 아이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낚아채기 직전 그의 멱살을 잡고 힘껏 몸을 내던졌다. 그러자 군용 단도를 회수하려는 듯 작은 쪽의 발버둥이 밑에서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사춘기식 반항을 그만 둘 의향이 없어보였기에, 한센은 작은 쪽의 어깨에 더욱 힘을 준 뒤,




 “미안. 시간이 없어서 말이지.”




 발을 완전히 틀어 작은 쪽의 어깨에서 팔을 빼냈다.




 거북한 느낌을 참을 수 없어, 아이린은 잠깐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이런 걸 태연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올 즈음, 한센이 나직이 말을 걸어왔다. 감정을 수습하지 못했기에 알아듣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계속 달릴 수 있겠어요?”




 “네?”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돼요. 더 이상 못 뛰겠으면 지금 얘기해요, 두 명까진 안고 달릴 수 있으니까.”




 “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시는 거에요? 겨우 이 정도로 지쳤을 리 없잖아요.”




 아이린의 뺨에 온기가 돌았다. 자기를 안고 달리는 한센의 모습을 무심코 뇌리에 떠올렸다. 왜 그런 황당한 질문을 할까 싶었지만, 한센의 태도는 무척 진지했다. ‘강행 ​돌​파​하​겠​습​니​다​.​’​라​는​ 한 마디와 함께 다시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이번엔 팔을 물린 뒤, 제대로 손이 잡히도록 교정했다. 두 사람은 ‘꼬리’를 제치고 신속하게 기둥 사이로 몸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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