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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도 안 한 따끈따끈한 초고입니다. 졸려서 뒷전개가 좀 빠른 듯하지만 뭐 어때 하핫. 1권 분량 다 쓸 때나 수정하겠습니다. 햣하ㅡㅡ

02. 이메리룬(Imerirune) - 6


 방해는 거의 오지 않았다. 중간에 아이린의 팔을 붙잡으려는 첫 번째 ‘꼬리’를 제친 게 다였다. 정직하게 직선으로 나 있는 길은 아무 생각도 들지 못하게 했다. 은근히 거리가 있었기에, 더욱 큰 길로 나올 때까지 긴 침묵이 이어졌다.




 미술관이라도 되는 듯, 새로 들어선 복도는 화려했다. 자동차 세 대는 족히 들어갈 것 같은 폭에 양면이 예술품으로 가득했다. 황제가 여동생을 위해 특별히 개조한 아트홀(art hall)이라고 했다. 서력 시대 작품의 모방에서 현 시대의 최신작까지 모여 있다나. 흥미를 자극하긴 했지만, 그저 그것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한센에겐 시간이 없었다.




 이번엔 방향을 왼쪽으로 잡았다. 높은 아치가 몇 번이고 계속 반복되었다. 창문과 그림, 조각이 쉴 새 없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벗어났다. 거친 숨소리와 빠른 심박, 그리고 부드러운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였지만 지나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뒤에서 아이린의 힘겨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더 이상 안 쫓아오는 것 같은데…….”




 무시했다.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오히려 더했다. 문고리를 부서질 정도로 세게 쥐고 강하게 열어젖혔다.




 반대편에서 아트홀로 들어오려던 시녀들이, 한센이 튀어나오자마자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 직후 자신들의 주군이 나타나자 하나같이 눈을 크게 떴다. 한센을 억지로 멈춰 세운 아이린은, 시녀들의 부서가 무엇이든 일단 에이미를 맡기고 봤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만 일러둔 채 부연 설명도 없이 제 갈 길을 계속 갔다.




 그 뒤로도 수없이 방향을 알려주고, 여러 개의 복도를 거쳤다. 조급함에 억지로라도 채찍질하던 몸이 조금씩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느려지더니, 어느새 힘이 풀려 완전히 주저앉았다.




 “못 뛰겠어요?”




 호흡 곤란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린을 보며 한센이 물었다. 그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100미터를 쉬지 않고 열다섯 번이나 주파했는데, 지치지 않겠어요?”




 “여기가 쓸데없이 넓은 거에요. 규모가 안 큰 데가 없어서 낭비되는 시간이 너무 많아요.”




 “어쩔 수 없잖아요. 원래부터 이런 곳이었는데…….”




 아이린은 가슴을 움켜쥐고 기침을 하면서, 타들을 것 같은 속을 잠깐이나마 진정시켰다. 여기까지 왔는데 땀도 안 흘리는 한센이 신기하다 못해 초인 같아 보였다.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까 걱정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더 이상 무리일 것 같아요.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




 그 말에 한센은 무릎을 꿇었다. 상태를 확인해보려는 듯 아이린의 다리에 손을 댔다. 놀란 그녀가 숨을 삼켰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허벅지와 종아리를 눌러본 뒤 다리를 조금씩 움직여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장까진 얼마나 남았죠?”




 “저길 지나서, 모퉁이를 돌고 직진하면 돼요. 가깝진 않지만 얼마 안 남았어요.”




 한센은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한 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연회장에 도착할 때까지 좀 실례하겠습니다. 안고 다니는 동안엔 몸에 힘을 빼고 있어주세요.”




 “네?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시는…….”




 아이린의 물음은, 한센이 그녀를 안아 올리면서 끊겼다. 그 과감한 행동엔 일말의 망설임도, 예고도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몸이 붕 떠올랐다. 마음의 준비가 되기도 전에 그녀는 한센에게 안겨 있었다.




 당혹스러웠지만 하반신에 느껴지는 고통이 더 컸다. 여기서 거부하거나 불만을 표시한다면 상황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불평하는 대신, 팔을 한센의 목에 걸었다. 헛기침으로 머릿속에 든 잡생각을 모두 떨쳐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뒤를 흘끗 보았다. 추격은 이미 오래 전에 따돌렸지만 한센은 이상하리만큼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들, 누군데 당신을 노리고 있는 거에요?”




 “모르겠어요. 저도 처음 만났으니까요.”




 “정말 아는 게 없어요? 이유 없이 찾아오진 않았을 텐데.”




 대답하는 대신, 아이린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테러리스트이고, 검은 마도병기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하지만 한센에게 굳이 그걸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정도는 그도 알고 있으리라고 여겼다.




 “저기…… 힘들지 않아요?”




 주제를 돌리려는 듯한 질문에 한센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매일 하는 운동과 다를 거 없으니까 괜찮아요.”




 “조금 여유를 가지셔도 될 것 같아요. 지금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요. 절 드는 것만으로도 무거우실 텐데 달리기까지 하시면…….”




 “그것보다 더한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 ‘아르고스 1’이에요.”




 이번엔 아이린이 되레 묘한 반응을 보였다. 시선을 전방으로 돌리며 한센은 말을 이었다.




 “연회장에서 그 사람의 콜사인(call sign)을 들었어요. 타깃은 누구이며 누가 어디로 배치되는지도. 섬광탄을 던졌을 때 이미 도망가고 없더군요. 여기서 꾸물거리면 그 사람과 또 엮일지도 몰라요.”




 “아르고스 1…… 보리스 예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름이 보리스인가요? 뭐, 상관없겠죠. 그 사람의 목적이 당신과 연루돼 있다는 것만 알아도 충분하니까.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정체를 대신 밝혀준 건 ​고​마​워​해​야​겠​네​요​.​”​




 “거기까지 들으셨군요. 보리스의 목적은 어떻게 알아내셨나요?”




 “어……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해 두죠.”




 그렇게 말한 직후 한센은 거칠게 방향을 틀었다. 언제 그곳에 있었는지, 모퉁이를 돌자마자 괴한 하나가 튀어나와 기습을 시도했다. 꼭 붙잡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한센은 거의 눕듯이 몸을 기울여 미끄러져갔다. 그 뒤는, 아이린이 예상한 대로 괴한의 패배로 이어졌다. 뒤통수부터 바닥에 부딪친 적이 걱정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연회장에 가도 변하는 건 없을지도 몰라요. 그 사람의 부하는 상상 이상으로 많거든요.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눈에 띌 정도로 이곳저곳에 퍼져 있었어요.”




 회전력을 이용해 완벽하게 다시 일어서며 한센이 말했다. 아이린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연회에 투입될 인력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미리 대비를 해놓았을 텐데…….”




 “그런 예상은 신이나 할 수 있겠죠. 이미 지난 일이에요. 일단은 우리 관계를 어떻게 해야 될지에만 신경써주세요. 이 일은 금방 끝나니까요.”




 “엣, 관계라뇨?”




 당황해서 묻는 아이린을 보며, 한센은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 당신이 황족일 줄은 전혀 생각 못 했거든요. 그리고 지금 이 자세, 슬슬 풀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 아아……!”




 그제야 말뜻이 이해된 듯 아이린은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이상한 오해를 할 게 뻔했다. 황녀가 외간 남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말이 사교계에 퍼지겠지. 황족 모독은 둘째치고,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급히 한센에게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 사람도 의식은 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대충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한센에게 검을 넘겨받았다. 벨트를 꼭 조인 뒤 저쪽의 문을 가리키며, 아직 부끄러움을 씻어내지 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 문을 열면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와요. 그 뒤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길이 아직 남아있는 겁니까. 황궁은 참 쓸데없이 넓고 복잡하네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기에 아이린은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결국, 요리사와 시녀가 드나드는 길이어서 문을 하나 더 뒀다는 말을 하긴 했다.




 다리는 거의 회복되어 있었다. 아이린은 한센과 함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연회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입구 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헌병대는 그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궁을 샅샅이 뒤질 것이다. 실수를 했으니 그 이상으로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했다.




 ‘테러리즘에 협상은 없다.’를 마음속에 되새기며 서서히 열리는 문을 지켜보았다. 끼익, 하는 경첩 특유의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기분 나빴다. 웬 팔이 튀어나와 한센의 목을 붙잡았을 땐, 그 예감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았다.




 완전히 열린 문으로 보리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센의 몸은 저항할 틈도 없이 옆쪽 벽에 처박혔다. 목을 쥔 그 손만으로 보리스는 한센을 완전히 들어 올렸다. 움직일 수 없도록 숨통을 틀어막으면서, 한센의 이목구비를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너였군. 갑자기 끼어들어서 일을 망친 게……. 아냐가 묘사한 것과 판박이야.”




 “그 손 당장 놓으세요!”




 적의를 감지한 아이린은 즉시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한센을 붙잡고 있는 그 팔을 아주 잘라내려 했다. 하지만 보리스는 기도를 막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를 제지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냐는 무언의 질문을 던지면서.




 “그 이상 다가오시면 이 녀석만 곤란해집니다. 살리고 싶으시면 가만히 계시죠.”




 “이젠 하다못해 제3자까지 건드리는 겁니까, 보리스 예거!”




 보리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린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한센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예 천쪼가리가 된 상의 틈으로 검은 신축소재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놈이 무모한 짓을 하는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더욱 짙게 미소 지었다.




 “자네, 파일럿 슈트를 입고 있었나. 이러니 힘이 초인 같았다는 말이 애들 입에서 나오지. 듣기로는 한 손으로 붙잡고 3미터나 날려 보냈다면서? 안전장치도 없이 몸은 괜찮았나?”




 대답을 바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한센에게 가볍게 비웃음을 던졌다.




 “슈트를 입었다는 건 뼛속까지 군인이라는 뜻이겠군. 혈기왕성한 때니까 충분히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애송이. 세상은 젊은 놈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게 아냐.”




 “당장 놓으라고 했습니다! 헌병대를 부르기 전에 썩…….”




 “아르고스 1로부터. 작전은 실패했다. 잡힌 애들은 놔두고 모두 후퇴해.”




 보리스가 갑자기 후퇴 지시를 내리자 아이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당하게 황녀와 눈을 맞추며 보리스는 ​이​어​피​스​(​e​a​r​p​i​e​c​e​)​에​서​ 손을 뗐다. 눈앞에 겨눠져 있는 검을 보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레어메탈로 만든 검이군요. 철 정도는 가볍게 자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도병기의 장갑에나 쓰이는 철을 그런 명검으로 변화시킬 줄은…….”




 “왜 후퇴 명령을 내린 겁니까?”




 잡담할 시간은 없다는 듯 아이린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보리스의 입가에서, 아까처럼 미소가 다시 사라졌다.




 “좋은 소식입니다. 당신을 데려가려는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듣기로는 어딘가의 ‘경비대장’이 훼방을 놓았다는군요. 한 방 먹었습니다, 아이린 이메리룬.”




 “아멜리아…….”




 경비대장이라면 그 사람밖에 없었다. 분명 이상한 낌새를 챈 것이리라. 하지만 뒤이어 나온 보리스의 말은, 한숨 놓던 아이린을 다시 한 번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지막 발악…… 이라고 표현하던가요. 무력으로라도 당신을 데려가야겠습니다. 그 전에 이 쥐새끼부터 먼저 처리해야겠지만요. 각오는 됐나, 애송이?”




 은색 리볼버가 보이자 아이린은 조급해졌다. 보리스의 손을 정말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 한센과 눈을 마주쳤다. 검을 내리라는 무언의 지시에, 당혹스러웠지만 일단 따랐다. 보리스의 왼손을 붙잡은 한센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숨통이 트이자마자 실없는 웃음을 내보냈다.




 “뭐가 웃기지?”




 “하나 정정하고 싶어서 말이야, 재수 없는 아저씨.”




 한센의 눈은 보리스의 눈만큼이나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똑바로 말하겠는데, 난 군인이 아냐.”




 “재미있군. 그럼 용병인가? 아니면 기사?”




 “……아저씨, ​민​간​인​(​c​i​v​i​l​i​a​n​)​이​란​ 단어를 못 들어본 것 같은데.”




 바로 그 순간, 보리스의 몸이 옆으로 크게 거꾸러졌다. 재빨리 피하는 아이린의 시야에 보리스를 붙잡고 있는 한센이 들어왔다. 눈 깜짝할 새에 리볼버를 뺏고, 배를 차서 반대쪽으로 밀쳤다. 그 ‘파일럿 슈트’의 힘인지 보리스는 3미터 정도 뒤로 밀려났다.




 자세를 수습한 한센은 아이린의 옆으로 다가가 총을 보여주었다. 허락을 맡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 한 번만 쏴도 될까요?”




 “네? 어디에 쏘시게요? 황궁에서 사람을 죽이면…….”




 “그냥 직접 보여드릴게요. 이렇게…….”




 거침없이 총을 들어 올리는 한센은, 마치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았다. 곧바로 총성과 함께 어딘가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파공음은 연회장에까지 퍼져나갔다. 비명소리와 함께 음악이 멈췄다.




 아이린은 그제야 한센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했다.




 공포탄.




 주변의 이목을 끌기 위해, 허공에 총을 쏜 것이다.




 보리스는 한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경보는 곧 속보가 되어 둘 사이의 거리를 늘려갔다. 그는 빠르게, 소리 없이 모퉁이 뒤로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별난 청년을 다 봤다는 듯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최대의 위협이 사라졌지만 아이린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 뒤에 밀려올 자잘한 것들을 상상하며 한센에게 나직이 이렇게 말했다.




 “창문은 변상하지 않으셔도 돼요.”




 고개를 끄덕이며, 한센은 리볼버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멀리서 여러 개의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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