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마지막화입니다. 중간에 집중력이 흐트려져서 뭘 쓰는지 알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핫 난 왜 이러지...
문의: altegirlsguy@naver.com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군중의 불안은 곧 통제되었다.
아이린은 능숙하게 분위기를 진정시킨 뒤 연회가 계속되도록 했다. 궁을 전부 수색하도록 헌병대에 지령을 내리고는 그들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기 전, 뒤를 돌아본 그녀는 연회장에 대기할 것을 한센에게 명했다.
다시 위층 테라스에 앉아 한센은 멍하니 잔을 비우고 있었다. 술을 입에 댈 생각은 없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와인을 주문한 뒤였다. 얼음에 담가둔 와인은 맛이 나쁘지 않았다. 비싼 술을 음미하는 동안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헤르만 경, 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는 황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왔다. 베이지 일색의 드레스에 머리엔 은색 장식을 달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기에 한센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내 숨을 크게 내쉬고는 맑은 정신으로 황녀를 대했다.
한센의 앞까지 다가온 아이린은,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오지 못해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잡무를 처리하느라 늦었습니다. 설명도 없이 당신을 혼자 둔 게 마음에 걸리네요.”
“이 녀석과 같이 있어서 지루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한센은 턱짓으로 아유다를 가리켰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는 아유다를 깨워서 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이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헛기침을 하며 가장 현명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시녀들에게 잠자리를 펴도록 분부할게요. 제 방 침대 정도면 편히 주무실 수 있겠죠.”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만…….”
무안한 듯 한센은 뒷머리를 긁었다. 친구인 자기가 창피해서 아유다의 발목을 찼지만, 꿈틀거릴 뿐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 보자, 고 중얼거리며 명령을 받은 메이드 두 명이 어찌저찌 아유다를 들어 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당신의 신병에 관해서인데.”
아이린은 다시 한 번 한센의 주의를 끌었다.
“무혐의로 처리되도록 일단 조치했습니다. 다만 증인으로서 소환에 응할 의무는 있어요. 설명은 잘 해뒀으니 쓸데없는 의심을 받진 않을 겁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호의네요.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이런 일에 헤르만 경을 끌어들여서 죄송합니다. 좀 더 조용하고 격식 있게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해버렸네요.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
자정이 되고, 하루가 지나면 연회는 끝난다. 평정심을 가장한 아이린의 말에 알게 모르게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좀 더 신중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렇게 도움 받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같은 생각이 떠다녔다. 부주의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센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 대화가 거의 끊어질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잡힌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이린은 살짝 불편한 반응을 보였다.
“보안국으로 이송된 뒤 심문을 받게 될 겁니다. 그 후 죄질에 따라 감옥이나 수용소로 가게 되겠죠.”
“보안국까지 언급될 정도면,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네요.”
“네. 테러리스트는 재판 없이 처벌되는 게 원칙이니까요. 거기에 처벌받는 인원 대부분이 청소년기의 아이들이라면…….”
아이린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 보고 지나쳤던 얼굴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헌병에게 연행된 ‘꼬리’는 하나같이 어수룩한 외모에, 작은 체구를 하고 있었다. 간간이 성인도 보였지만 열다섯, 열여섯 정도의 소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청춘을 누려야 할 때에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분류해야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조금이라도 마시는 게 어때요?”
심중을 눈치챘는지, 그녀 앞에 와인병을 들어 보이며 한센이 물었다. 숙녀에게 술을 권하다니, 예상도 못한 발언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겸손하게 제안을 거절했다.
“공석에선 술을 마시지 않아요. 단둘이 있었다면 몇 잔은 가능했겠죠.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흠, 기분이 복잡할 땐 술을 조금 마시는 게 도움이 되거든요.”
작게 탄식하며 한센은 와인병을 양동이 안에 다시 넣었다. ‘세노즈, A.De. 6377년’이라고 인쇄된 레이블이 거친 소리와 함께 얼음 속에 묻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한센은 자기도 모르게 무안해졌다. 황족에게 술을 권하는 건 실례가 되던가?
아이린은 한센을 지나쳐,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댔다. 자정이 다가옴에도 연회장의 활기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퀸텟이 느린 곡을 연주하는 게 불만이었다. 졸음을 떨쳐내며 심각한 주제로 고민에 빠졌다. 침묵 속의 그 모습이 한센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춤을 추는 하객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제 말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부터 하고 보자 싶어 한센은 운을 뗐지만 아이린은 평온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기분전환하지 않을래요?”
“네?”
“둘 다 이런 일을 겪었으니 마음이 편치 않겠죠. 그러니까 심신을 정화하면서, 원래 했어야 할 일을 하는 거에요. 좀 전의 말은 잊어주세요. 연회가 끝나고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그렇다고 해도…….”
한센은 회의적인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괜찮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이린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어떻게든 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이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크게 숨을 내쉬며, 그럴 수밖에,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지금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다.
“좋아요. 어떤 걸로 기분전환하시겠어요?”
아이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테라스 너머 저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요청을 하듯 말에 정중함을 담았다.
“연회장에서…… 함께 춤을 춰주실래요?”
제1황녀, 아이린이 계단을 내려오자 주변에서 탄성이 일었다. 부채를 든 귀부인부터 자존심 강한 아가씨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하객마다 악수를 청해오며, 드레스의 완성도와 황녀의 미모를 칭송했다. 개중엔 작은 선물을 가져온 부류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내 옆에 있는 한 남자에게 쏠렸다. 상처가 나 흐트러진 연회복은 그를 순식간에 가십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얼떨결에 아이린의 파트너가 된 한센은, 전방을 주시하며 이런 눈총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하객의 인사를 모두 받아넘기며, 아이린은 한센과 함께 퀸텟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황녀가 다가오자 연주는 멈췄다. 퀸텟의 우익(右翼)에 있는 노신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뒤 아이린은 곡을 신청했다. 한센이 엿듣기로는 서력 시대의 명곡이라고 했다. 노신사의 감탄이 이어지고, 아이린은 산뜻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확인하듯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있겠죠? 아저씨의 주특기인 바흐 콘체르토(concerto).”
당연히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얼마 안 가 연주가 재개되었다. 울려 퍼지는 선율 속에서 아이린은 연회장의 중앙으로 한센을 이끌었다.
불행하게도 한센은 춤을 출 줄 몰랐다. 하물며 여자의 손을 잡고 이렇게 밀착해본 적도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심장을 두근대게 만들었다. 춤이 시작되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묘한 전율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어긋난 느낌’을 다시 받았다. 주위엔 온통 이런 춤에 익숙한 사람들뿐이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아이린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물며 연회복에 난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스텝이 꼬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아쉬움 섞인 목소리로 우려를 표했다.
“새 걸로 갈아입지 그러셨어요. 헤르만 경의 품위가 떨어질 텐데.”
한센은 살짝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반 년 치 월급을 털어서 산 정장이에요. 버리기 전에 돈값은 하고 버려야죠.”
새 연회복을 구해주겠다는 호의를 거절한 가장 큰 이유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아이린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었다.
“굳이 버릴 필요까진 없잖아요. 제가 아는 가게에 수리를 맡기면 돼요. 황실 전속 양복점이니까 실력은 믿을 만해요.”
“수리비를 낼 형편이 안 돼서…….”
한센의 대답은 이상하리만큼 진지했다. 수리비는 자기가 부담하겠다는 말과 함께 아이린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그 와중에 리드하는 것을 잊어, 스텝이 또 꼬이고 말았다.
그 뒤로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상류층의 춤도 크게 나쁘진 않았다. 아이린의 지도 아래 한센은 춤의 기본기를 빠르게 익혀나갔다. 제3자와 시선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어주는 대담함도 보였다. 주변의 의혹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적응된 탓인지 부담은 덜했다. 조그마한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한센은 오래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을 만나서 이것저것 묻고 싶었어요.”
“……소원이 이뤄져서 기쁜가요?”
아이린은 자기가 할 말을 입 속에서 골랐다. 한센의 심정을 모르고 있진 않았다.
“기쁘다기보단, 혼란스럽달까요. 질문할 건 많은데 순서를 못 정하겠어요. 지난 1년 동안 쌓인 게 너무 많았거든요.”
“죄송해요. 가명을 쓰고 당신을 속여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씁쓸한 표정으로 아이린은 사과를 한 뒤, 말을 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묻는 건 어때요? 너무 사적이지 않은 선에서 성심성의껏 대답해줄게요.”
“그럼 저의 스폰서가 되어주신 이유부터 설명해주세요.”
두 사람의 몸은 시계 방향으로 반회전했다.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한센의 의문을 풀어나갔다.
“헤르만 경을 돕기로 한 건 순전히 제가 원해서였어요. 2년 전에 기사학교를 시찰할 일이 있었는데, 혼자 강당에 들어갔다가 어떤 학생의 발표를 듣게 됐죠. 그 학생이 바로 헤르만 경 당신이었어요. 그 때의 발표 주제,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가요?”
“제 기억으로는, <3세대 베르셴코프 엔진의 응용 방안>이 주제였던 것 같은데…….”
졸업반으로 진급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과제였다. 제국 중앙 기사학교의 관례에 따라, 2학년 말에 전교생 앞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공개한 적이 있었다.
“네. 강당 입구에 서서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헤르만 경의 발표가 의외로 감명 깊었지 뭐에요. 혁신적인 발상을 하는 인재가 제국에도 있었구나 싶었어요. 다른 학생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지만요.”
“응용 방향이 비전투형 마도병기에 치중돼 있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평가가 안 좋았어요.”
아픈 기억이 떠오르자 한센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찡그려졌다.
“그 때 처음으로 헤르만 경이 만들려는 마도병기를 봤어요. 흥미가 생겨서 당신이 어떤 사람일까 조사하면서 때를 기다렸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니, 당신을 지원해줄 좋은 정치적 근거가 생겼고요.”
“정치적 근거라 함은?”
아이린은 엷은 미소와 함께 잠시 뜸을 들였다. 이 상황에선 느린 곡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언바운드 윙 플랜(Unbound Wing Plan; UWP)이 의회 심사를 통과했어요.”
“언바운…… 뭐요?”
“고대어라서 발음이 힘들 거에요. 사람들의 기억에 안 남게 일부러 어려운 이름을 붙였죠. 그래서 저 외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됐어요.”
“확실히 어려운 이름이긴 하네요.”
거짓말이었다. 신형기의 작명을 위해 고대어 사전을 뒤졌을 때 배운 게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아이린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UWP의 목적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는 거에요. 기존의 인재로는 검은 마도병기 같은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지 못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선발을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제가 그 조건에 가장 부합했던 거고요.”
“네. 물론 그 사람이 헤르만 경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어요. 다만 2년 전의 그 발표가 진심이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죠. UWP를 통해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현실로 변한 꿈은 누구에게나 좋은 거잖아요.”
“그게 좋은 걸까요, 과연…….”
예상외로 한센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시선을 아이린에게 던졌다.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아이린은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곡은 다른 악장으로 넘어갔다.
“전 제 마도병기를 무기로 쓸 생각이 없어요. 검은 마도병기가 국가적 위기인 건 인정해요. 하지만 제가 돕고 싶은 건 군이 아닙니다. 사람들이죠. 아이린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 부분에선 언젠간 저와 어긋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대담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허락은 받았다고 해도 한센은 심장이 떨어질 정도의 긴장감을 맛봐야 했다. 말을 끝내자마자 목을 막고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다시 한 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헤르만 경의…….”
“한센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한센의 의도는 존중해드리겠습니다. 그게 UWP의 골자이기도 하니까요. 1호 선발자로서 성과만 내주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 말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요구해도 되겠습니까?”
중요한 사항이니만큼 실례를 무릅쓰고 직설적으로 나갔다. 아이린은 살짝 당황했지만, 별 일 아니라는 듯 빠르게 감정을 수습했다.
“근거는 이미 있지 않나요? 한센과 맺은 그 계약 말이에요.”
“그건 알리사 힐스레스트가 했지, 아이린 이메리룬이 한 게 아니잖아요.”
“아뇨, 아이린 이메리룬이 한 거에요. 계약서에 사인도 들어가 있어요.”
“네? 그런 건 본 기억이 없는데…….”
아이린은 작게 웃으며, 나중에 자외선을 한 번 쬐어보라고 했다. 더 물을 것이 있냐는 그녀의 말에 한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질문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말해도 될까요?”
아이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센은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친구의 말이 맞았어요. 높은 곳의 아가씨들은 남자 앞에서 가면을 쓴다고 했거든요. 뭔 바보 같은 소린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사실이었네요.”
“친구분이 날카로운 지적을 하셨네요. 이름이 무엇인가요?”
“메르겔 라인하르트. 현 총리 가문의 방계라고 들었어요. 지금은 정치를 공부하고 있죠.”
“라인하르트……?”
그 성을 듣자 아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라인하르트 가문에 방계가 있었던가, 하고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재밌는 경험을 했다는 듯 한센은 비교적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메르겔이 준 책이 당신이 번역한 <군주론>이었어요. 끝까지 읽긴 했는데 그 책에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본명이 있을 줄은 몰랐죠. 아마 그 녀석은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설마 책만으로 절 찾아냈을 줄은…….”
자신은 황녀이면서 학자였고 번역가였다. 자기 이름이 들어간 책이 언급되는 건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가면을 벗겨냈다면, 살짝 소름이 돋았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어떤 신사인지 나중에 알아보기로 했다.
“제 외모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시던가요?”
“아뇨. 책만 던져주고는 발을 빼버렸어요.”
“그러면…… 개인적인 질문인데, 황녀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소감은 어때요?”
“네?”
한순간 한센은 말을 잃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이린은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의 아름다움을 잴 줄 몰랐기에 마음속 깊이 곤란함을 느꼈다. 이럴 땐 뭐라고 말하면 되는 거지?
“어…… 아유다만큼 아름다우시네요.”
결국 생각을 포기하고 자기가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을 내뱉었다. 아이린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실없는 웃음과 함께 완전히 풀렸다.
“한센 덕분에 많이 웃게 되네요. 아유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에 비유했으리라고 생각해요.”
“네, 뭐…… 소꿉친구니까요.”
은근슬쩍 말을 흘러 넘기며 한센은 속으로 작게 후회했다.
2악장이 끝나고 퀸텟은 연주를 마쳤다. 한센과 아이린은 서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시계는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노신사가 아이린에게 눈짓을 보냈고, 둘은 다음에 연주할 곡을 재빨리 합의했다. 퀸텟의 마지막 곡이 시작되었다. 즐거운 분위기를 풍기며 아이린은 한센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제 30분 남았어요.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얘기하도록 해요.”
“말 안 해도 그럴 겁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아직 많이 있거든요. 우선 신형 마도병기의 이름부터 받아갈까요.”
“아직도 이름을 안 정하셨나요?”
“형식명만 있지 기체명은 아직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한센은 아이린의 손을 잡았다. 아까 전과는 달리 꽃을 보듬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여러 가지를 묻고, 아이린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알리사 힐스레스트로 알고 지냈던 지난 1년의 시간을 30분 안에 모두 보상받으려 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채 한센은 자기가 한 말을 나직이 매듭지었다.
“가디언 타입, 1호기의 기체명을 부탁드립니다, 아이린.”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이린은 한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디언(Guardian)'에 어울릴 법한 이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핫 난 왜 이러지...
문의: altegirlsguy@naver.com
02. 이메리룬(Imerirune) - 7 (2장 完)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군중의 불안은 곧 통제되었다.
아이린은 능숙하게 분위기를 진정시킨 뒤 연회가 계속되도록 했다. 궁을 전부 수색하도록 헌병대에 지령을 내리고는 그들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기 전, 뒤를 돌아본 그녀는 연회장에 대기할 것을 한센에게 명했다.
다시 위층 테라스에 앉아 한센은 멍하니 잔을 비우고 있었다. 술을 입에 댈 생각은 없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와인을 주문한 뒤였다. 얼음에 담가둔 와인은 맛이 나쁘지 않았다. 비싼 술을 음미하는 동안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헤르만 경, 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는 황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왔다. 베이지 일색의 드레스에 머리엔 은색 장식을 달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기에 한센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내 숨을 크게 내쉬고는 맑은 정신으로 황녀를 대했다.
한센의 앞까지 다가온 아이린은,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오지 못해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잡무를 처리하느라 늦었습니다. 설명도 없이 당신을 혼자 둔 게 마음에 걸리네요.”
“이 녀석과 같이 있어서 지루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한센은 턱짓으로 아유다를 가리켰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는 아유다를 깨워서 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이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헛기침을 하며 가장 현명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시녀들에게 잠자리를 펴도록 분부할게요. 제 방 침대 정도면 편히 주무실 수 있겠죠.”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만…….”
무안한 듯 한센은 뒷머리를 긁었다. 친구인 자기가 창피해서 아유다의 발목을 찼지만, 꿈틀거릴 뿐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 보자, 고 중얼거리며 명령을 받은 메이드 두 명이 어찌저찌 아유다를 들어 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당신의 신병에 관해서인데.”
아이린은 다시 한 번 한센의 주의를 끌었다.
“무혐의로 처리되도록 일단 조치했습니다. 다만 증인으로서 소환에 응할 의무는 있어요. 설명은 잘 해뒀으니 쓸데없는 의심을 받진 않을 겁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호의네요.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이런 일에 헤르만 경을 끌어들여서 죄송합니다. 좀 더 조용하고 격식 있게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해버렸네요.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
자정이 되고, 하루가 지나면 연회는 끝난다. 평정심을 가장한 아이린의 말에 알게 모르게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좀 더 신중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렇게 도움 받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같은 생각이 떠다녔다. 부주의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센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듯했다. 대화가 거의 끊어질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잡힌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이린은 살짝 불편한 반응을 보였다.
“보안국으로 이송된 뒤 심문을 받게 될 겁니다. 그 후 죄질에 따라 감옥이나 수용소로 가게 되겠죠.”
“보안국까지 언급될 정도면,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네요.”
“네. 테러리스트는 재판 없이 처벌되는 게 원칙이니까요. 거기에 처벌받는 인원 대부분이 청소년기의 아이들이라면…….”
아이린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 보고 지나쳤던 얼굴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헌병에게 연행된 ‘꼬리’는 하나같이 어수룩한 외모에, 작은 체구를 하고 있었다. 간간이 성인도 보였지만 열다섯, 열여섯 정도의 소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청춘을 누려야 할 때에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분류해야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조금이라도 마시는 게 어때요?”
심중을 눈치챘는지, 그녀 앞에 와인병을 들어 보이며 한센이 물었다. 숙녀에게 술을 권하다니, 예상도 못한 발언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아이린은 고개를 저으며 겸손하게 제안을 거절했다.
“공석에선 술을 마시지 않아요. 단둘이 있었다면 몇 잔은 가능했겠죠.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흠, 기분이 복잡할 땐 술을 조금 마시는 게 도움이 되거든요.”
작게 탄식하며 한센은 와인병을 양동이 안에 다시 넣었다. ‘세노즈, A.De. 6377년’이라고 인쇄된 레이블이 거친 소리와 함께 얼음 속에 묻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한센은 자기도 모르게 무안해졌다. 황족에게 술을 권하는 건 실례가 되던가?
아이린은 한센을 지나쳐,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댔다. 자정이 다가옴에도 연회장의 활기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퀸텟이 느린 곡을 연주하는 게 불만이었다. 졸음을 떨쳐내며 심각한 주제로 고민에 빠졌다. 침묵 속의 그 모습이 한센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춤을 추는 하객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제 말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부터 하고 보자 싶어 한센은 운을 뗐지만 아이린은 평온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기분전환하지 않을래요?”
“네?”
“둘 다 이런 일을 겪었으니 마음이 편치 않겠죠. 그러니까 심신을 정화하면서, 원래 했어야 할 일을 하는 거에요. 좀 전의 말은 잊어주세요. 연회가 끝나고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그렇다고 해도…….”
한센은 회의적인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괜찮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이린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어떻게든 쉬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이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크게 숨을 내쉬며, 그럴 수밖에,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지금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다.
“좋아요. 어떤 걸로 기분전환하시겠어요?”
아이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테라스 너머 저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요청을 하듯 말에 정중함을 담았다.
“연회장에서…… 함께 춤을 춰주실래요?”
제1황녀, 아이린이 계단을 내려오자 주변에서 탄성이 일었다. 부채를 든 귀부인부터 자존심 강한 아가씨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하객마다 악수를 청해오며, 드레스의 완성도와 황녀의 미모를 칭송했다. 개중엔 작은 선물을 가져온 부류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내 옆에 있는 한 남자에게 쏠렸다. 상처가 나 흐트러진 연회복은 그를 순식간에 가십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얼떨결에 아이린의 파트너가 된 한센은, 전방을 주시하며 이런 눈총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하객의 인사를 모두 받아넘기며, 아이린은 한센과 함께 퀸텟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황녀가 다가오자 연주는 멈췄다. 퀸텟의 우익(右翼)에 있는 노신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뒤 아이린은 곡을 신청했다. 한센이 엿듣기로는 서력 시대의 명곡이라고 했다. 노신사의 감탄이 이어지고, 아이린은 산뜻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확인하듯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있겠죠? 아저씨의 주특기인 바흐 콘체르토(concerto).”
당연히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얼마 안 가 연주가 재개되었다. 울려 퍼지는 선율 속에서 아이린은 연회장의 중앙으로 한센을 이끌었다.
불행하게도 한센은 춤을 출 줄 몰랐다. 하물며 여자의 손을 잡고 이렇게 밀착해본 적도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심장을 두근대게 만들었다. 춤이 시작되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묘한 전율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어긋난 느낌’을 다시 받았다. 주위엔 온통 이런 춤에 익숙한 사람들뿐이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아이린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물며 연회복에 난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스텝이 꼬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아쉬움 섞인 목소리로 우려를 표했다.
“새 걸로 갈아입지 그러셨어요. 헤르만 경의 품위가 떨어질 텐데.”
한센은 살짝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반 년 치 월급을 털어서 산 정장이에요. 버리기 전에 돈값은 하고 버려야죠.”
새 연회복을 구해주겠다는 호의를 거절한 가장 큰 이유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아이린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었다.
“굳이 버릴 필요까진 없잖아요. 제가 아는 가게에 수리를 맡기면 돼요. 황실 전속 양복점이니까 실력은 믿을 만해요.”
“수리비를 낼 형편이 안 돼서…….”
한센의 대답은 이상하리만큼 진지했다. 수리비는 자기가 부담하겠다는 말과 함께 아이린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그 와중에 리드하는 것을 잊어, 스텝이 또 꼬이고 말았다.
그 뒤로 짧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상류층의 춤도 크게 나쁘진 않았다. 아이린의 지도 아래 한센은 춤의 기본기를 빠르게 익혀나갔다. 제3자와 시선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어주는 대담함도 보였다. 주변의 의혹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적응된 탓인지 부담은 덜했다. 조그마한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한센은 오래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을 만나서 이것저것 묻고 싶었어요.”
“……소원이 이뤄져서 기쁜가요?”
아이린은 자기가 할 말을 입 속에서 골랐다. 한센의 심정을 모르고 있진 않았다.
“기쁘다기보단, 혼란스럽달까요. 질문할 건 많은데 순서를 못 정하겠어요. 지난 1년 동안 쌓인 게 너무 많았거든요.”
“죄송해요. 가명을 쓰고 당신을 속여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씁쓸한 표정으로 아이린은 사과를 한 뒤, 말을 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묻는 건 어때요? 너무 사적이지 않은 선에서 성심성의껏 대답해줄게요.”
“그럼 저의 스폰서가 되어주신 이유부터 설명해주세요.”
두 사람의 몸은 시계 방향으로 반회전했다.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한센의 의문을 풀어나갔다.
“헤르만 경을 돕기로 한 건 순전히 제가 원해서였어요. 2년 전에 기사학교를 시찰할 일이 있었는데, 혼자 강당에 들어갔다가 어떤 학생의 발표를 듣게 됐죠. 그 학생이 바로 헤르만 경 당신이었어요. 그 때의 발표 주제,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가요?”
“제 기억으로는, <3세대 베르셴코프 엔진의 응용 방안>이 주제였던 것 같은데…….”
졸업반으로 진급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과제였다. 제국 중앙 기사학교의 관례에 따라, 2학년 말에 전교생 앞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공개한 적이 있었다.
“네. 강당 입구에 서서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헤르만 경의 발표가 의외로 감명 깊었지 뭐에요. 혁신적인 발상을 하는 인재가 제국에도 있었구나 싶었어요. 다른 학생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지만요.”
“응용 방향이 비전투형 마도병기에 치중돼 있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평가가 안 좋았어요.”
아픈 기억이 떠오르자 한센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찡그려졌다.
“그 때 처음으로 헤르만 경이 만들려는 마도병기를 봤어요. 흥미가 생겨서 당신이 어떤 사람일까 조사하면서 때를 기다렸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니, 당신을 지원해줄 좋은 정치적 근거가 생겼고요.”
“정치적 근거라 함은?”
아이린은 엷은 미소와 함께 잠시 뜸을 들였다. 이 상황에선 느린 곡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언바운드 윙 플랜(Unbound Wing Plan; UWP)이 의회 심사를 통과했어요.”
“언바운…… 뭐요?”
“고대어라서 발음이 힘들 거에요. 사람들의 기억에 안 남게 일부러 어려운 이름을 붙였죠. 그래서 저 외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됐어요.”
“확실히 어려운 이름이긴 하네요.”
거짓말이었다. 신형기의 작명을 위해 고대어 사전을 뒤졌을 때 배운 게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아이린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UWP의 목적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는 거에요. 기존의 인재로는 검은 마도병기 같은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지 못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선발을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제가 그 조건에 가장 부합했던 거고요.”
“네. 물론 그 사람이 헤르만 경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어요. 다만 2년 전의 그 발표가 진심이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죠. UWP를 통해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현실로 변한 꿈은 누구에게나 좋은 거잖아요.”
“그게 좋은 걸까요, 과연…….”
예상외로 한센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시선을 아이린에게 던졌다.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아이린은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곡은 다른 악장으로 넘어갔다.
“전 제 마도병기를 무기로 쓸 생각이 없어요. 검은 마도병기가 국가적 위기인 건 인정해요. 하지만 제가 돕고 싶은 건 군이 아닙니다. 사람들이죠. 아이린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 부분에선 언젠간 저와 어긋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대담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허락은 받았다고 해도 한센은 심장이 떨어질 정도의 긴장감을 맛봐야 했다. 말을 끝내자마자 목을 막고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다시 한 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헤르만 경의…….”
“한센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한센의 의도는 존중해드리겠습니다. 그게 UWP의 골자이기도 하니까요. 1호 선발자로서 성과만 내주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 말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요구해도 되겠습니까?”
중요한 사항이니만큼 실례를 무릅쓰고 직설적으로 나갔다. 아이린은 살짝 당황했지만, 별 일 아니라는 듯 빠르게 감정을 수습했다.
“근거는 이미 있지 않나요? 한센과 맺은 그 계약 말이에요.”
“그건 알리사 힐스레스트가 했지, 아이린 이메리룬이 한 게 아니잖아요.”
“아뇨, 아이린 이메리룬이 한 거에요. 계약서에 사인도 들어가 있어요.”
“네? 그런 건 본 기억이 없는데…….”
아이린은 작게 웃으며, 나중에 자외선을 한 번 쬐어보라고 했다. 더 물을 것이 있냐는 그녀의 말에 한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질문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감상을 말해도 될까요?”
아이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센은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친구의 말이 맞았어요. 높은 곳의 아가씨들은 남자 앞에서 가면을 쓴다고 했거든요. 뭔 바보 같은 소린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사실이었네요.”
“친구분이 날카로운 지적을 하셨네요. 이름이 무엇인가요?”
“메르겔 라인하르트. 현 총리 가문의 방계라고 들었어요. 지금은 정치를 공부하고 있죠.”
“라인하르트……?”
그 성을 듣자 아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라인하르트 가문에 방계가 있었던가, 하고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재밌는 경험을 했다는 듯 한센은 비교적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메르겔이 준 책이 당신이 번역한 <군주론>이었어요. 끝까지 읽긴 했는데 그 책에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본명이 있을 줄은 몰랐죠. 아마 그 녀석은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설마 책만으로 절 찾아냈을 줄은…….”
자신은 황녀이면서 학자였고 번역가였다. 자기 이름이 들어간 책이 언급되는 건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알리사 힐스레스트의 가면을 벗겨냈다면, 살짝 소름이 돋았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어떤 신사인지 나중에 알아보기로 했다.
“제 외모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시던가요?”
“아뇨. 책만 던져주고는 발을 빼버렸어요.”
“그러면…… 개인적인 질문인데, 황녀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소감은 어때요?”
“네?”
한순간 한센은 말을 잃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이린은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의 아름다움을 잴 줄 몰랐기에 마음속 깊이 곤란함을 느꼈다. 이럴 땐 뭐라고 말하면 되는 거지?
“어…… 아유다만큼 아름다우시네요.”
결국 생각을 포기하고 자기가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을 내뱉었다. 아이린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실없는 웃음과 함께 완전히 풀렸다.
“한센 덕분에 많이 웃게 되네요. 아유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에 비유했으리라고 생각해요.”
“네, 뭐…… 소꿉친구니까요.”
은근슬쩍 말을 흘러 넘기며 한센은 속으로 작게 후회했다.
2악장이 끝나고 퀸텟은 연주를 마쳤다. 한센과 아이린은 서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시계는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노신사가 아이린에게 눈짓을 보냈고, 둘은 다음에 연주할 곡을 재빨리 합의했다. 퀸텟의 마지막 곡이 시작되었다. 즐거운 분위기를 풍기며 아이린은 한센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제 30분 남았어요.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얘기하도록 해요.”
“말 안 해도 그럴 겁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아직 많이 있거든요. 우선 신형 마도병기의 이름부터 받아갈까요.”
“아직도 이름을 안 정하셨나요?”
“형식명만 있지 기체명은 아직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한센은 아이린의 손을 잡았다. 아까 전과는 달리 꽃을 보듬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여러 가지를 묻고, 아이린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알리사 힐스레스트로 알고 지냈던 지난 1년의 시간을 30분 안에 모두 보상받으려 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채 한센은 자기가 한 말을 나직이 매듭지었다.
“가디언 타입, 1호기의 기체명을 부탁드립니다, 아이린.”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이린은 한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디언(Guardian)'에 어울릴 법한 이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