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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언바운드 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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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루벤크렌체(Luvenkrantze) - 5


 곡선이 주가 된 표면에 금이 가고, 스파크가 튀었다. 엠프리스의 근력은 예상외로 비행 유닛을 쉽게 찢을 정도였다. 갈라진 틈 사이로 보이는 엔진 내부에서 불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흰색 일변도의 구름에 지워지지 않을 얼룩을 남겼다.




 좌익을 완전히 떼어냈을 즈음 아르엘이 저항을 시도했다. 체인 블레이드가 다시 전개됐을 땐 한센도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콕핏의 측면에 겨누어진 칼날을 아르엘의 우측 상완부를 붙잡아 저지하고, 서로 움직일 수 없는 틈에 너덜너덜해진 좌익을 엔진 내부에 쑤셔 박았다. 이물질이 낀 엔진이 폭발하면서 두 마도병기의 몸이 크게 옆으로 쏠렸다.




 중심이 무너져 내리는 돌발 상황 속에서도 아유다의 대응은 직관적이면서 정확했다. 바다로의 돌진을 강행하는 대신, 그녀는 엠프리스에게서 떨어지는 쪽을 택했다. 터지기 일보직전인 비행 유닛을 분리시킨 뒤 전방의 흰 거인에게 주먹을 날렸다. 부스터나 스러스터를 미처 켜지 못했기에 엠프리스의 몸은 저만치 뒤로 날아가, 파편과 연기가 난무하는 구름에 거대한 공동을 뚫어버렸다.




 엠프리스가 구름 밖으로 내팽개쳐진지 얼마 안 되어 2차 폭발이 일었다. 폭음과 함께 형성된 공기의 격류는 그나마 남아 있던 솜사탕의 잔재마저 갈가리 흩어놓았다. 오후의 햇빛을 머금은 아드리아 해 위로 산산 조각난 비행 유닛이 불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누군가에겐 절대로 기분 좋을 수 없는 광경일 테다. 한 건 해냈다는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는 한센에게 아유다가 항의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부순 그거, 평생을 벌어도 살 수 없는 귀중한 장비였어.」




 "이젠 그저 고철일 뿐이지."




 비싼 장비를 박살냈음에도 한센은 마음의 동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며칠 전의 그였다면 일말의 죄책감에 눈살을 찌푸리기라도 했을 것이다. 이 상황을 정말 실전이라고 인식한 건지, 날개 하나쯤 잃는 손해가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로선 오히려 아유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소극적인 것치곤 은근히 격렬한걸. 비행 유닛을 뜯는다는 선택지는 나름 참신했어. 비전투형에 타고 있어도 감각은 여전하구나.」




 "쓸데없는 소리."




 누구 때문에 이러는 건데, 라는 말은 심중으로만 덧붙였다. 자기가 가장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실을 아유다가 언급해버린 셈이었다. 침묵이 뒤따르자 여기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샘솟기 시작하여, 한센은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호기심도 충족되지 않았어? 엠프리스의 성능이 슬슬 감잡히기 시작했을 거 아냐."




「미안하지만, 이걸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아멜리아 언니뿐이야.」




 "너답지 않네. 돈 때문에 선배의 개가 되다니. 아예 날 죽이고 보너스도 청구하지 그래?"




「쓸데없는 소리.」




 자기가 쓴 표현을 그대로 돌려받는 게 이렇게 기분 나쁜 적은 처음이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아유다는 이쪽으로 다시 돌진해왔다.




 날개를 잃은 아르엘은 좀 더 역동적이고 인간다운 움직임을 보였다. 이젠 체술에서 우위를 점해보려는지, 가까워지면서 스러스터와 풋 나이프를 이용해 3단 돌려차기를 걸어왔다. 회전력을 더한 각력으로 상대를 날려버리는, 아유다의 트레이드마크격인 기술이다. 역으로는 대표적이었기에 파훼법도 어렵지 않았다.




 한센은 아르엘이 회전하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기체를 돌렸다. 좌측 상완부와 하완부로 공격을 받아내면서 다른 쪽으로는 아르엘의 복부를 붙잡았다. 아유다가 자기 힘에 휘말려 대처하지 못하도록 만든 뒤, 반대편으로 내던져서 중심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바로 그 때 머리 위에서 모터 소리가 났다. 이변을 인식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체인 블레이드가 직선으로 내리꽂혔다. 급히 아르엘을 밀쳐 궤도에서 벗어났지만 장갑이 긁히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칼날이 숄더 플레이트를 깊게 스치자 불똥과 함께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분명 신형기에 흠집이 났을 텐데, 한센의 반응은 언짢은 신음을 흘리는 선에서만 끝났다. 일격이 끝난 직후 아유다의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말도 안 돼. ​전​이​장​갑​(​t​r​a​n​s​i​t​i​o​n​a​l​ ​a​r​m​o​r​)​이​라​니​…​…​.​」​




 "내 졸업 작품을 보는 건 오랜만이지?"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말투는 흡족한 한센이었다. 장갑 표면에 베르셴코프 입자를 흘려 여차할 때 일회용 방어막으로 쓴다. 그가 고안한 '전이장갑'의 기본 개념으로, 아르엘의 은폐장과 원리는 비슷했다. 구현하는 과정이 쉬웠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쳇.」




 아유다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은 것 같았다. 분명 저편에서 '비전투형이 그딴 기능을 갖고 있을 게 뭐람', 하면서 투덜거리고 있겠지. 그리고 그 심리는 아르엘을 통해 그대로 한센에게 전해졌다. 무릎으로 엠프리스의 팔을 쳐낸 뒤 흰 철거인을 발판삼아 크게 뒤로 도약했다.




「역시 그거, 보통 마도병기가 아니잖아.」




 중얼거림에 섞인 묘한 흥분이 아유다가 아직 카페인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상정외의 요소는 그녀의 전투의욕만 고취시키고 있는 셈이다. 야수는 기다릴 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유다를 겨냥한 표현인지는 몰라도, 옛말을 곱씹으면서 한센은 슬슬 적극적으로 나서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분위기에 맞추듯 OD 센서가 베르셴코프 입자의 이상 기류를 보고해왔다.




 형태 없는 파동이 다시 한 번 아르엘의 전신 구석구석을 투명하게 녹여갔다. 그 형태가 완전히 흐릿해졌을 즈음, 한센은 처음으로 아유다에게 선공을 가했다.




 페달부터 밟고 생각해보니, 지금껏 싸우기 싫어하던 자신이 갑자기 공세로 돌아서게 된 것이 우스웠다. 기체를 상처 입히기 싫다고 말한 게 꼭 머나먼 과거의 일 같았다. 실전에서 굴렀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 현상의 반동일 수도, 곧 펼쳐질 아유다의 지옥도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반응일 수도 있었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좋다고 판단하고는 전방을 향해 빠르게 주먹을 꽂았다.




 보이지 않은 벽에 막힌 듯 엠프리스의 팔은 허공에서 멈췄다. 충격의 여파가 바람처럼 퍼져 무형의 커튼에 큰 동요를 일으켰다. 터져 나오는 입자 속에서 아르엘의 모습이 시각화된 노이즈처럼 흐려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했다. 콕핏 앞까지 온 주먹을 손 하나만으로 막아내고, 버티고 있었다. 점점 힘에 부쳤지만 눈-다각도로 뻗은 여러 개의 적색 안광만큼은, 미동도 없이 엠프리스의 듀얼 아이 센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 옛날 느낌 난다 그거지?」




 "닥쳐."




 힘겨루기 상태가 되자마자 한센은 망설임 없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엔진이 과열될 만큼 속력을 높였다. 미쳤다고 이런 짓을 하지, 같은 생각은 억지로라도 접었다. 지금은 이 자식을 처리하고 푹 쉴 방법이나 궁리하자.




 아르엘은 가속을 줄이려고만 할 뿐, 적극적인 반항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날뛸지 지켜보겠다는 시선을 가만히 던지고 있기만 했다. 아유다의 의지가 아르엘에 생기를 불어넣은 듯해서 묘하게 속이 뒤집어졌다. 그래서 엠프리스의 다른 손으로 아르엘의 머리를 잡아 뜯으려 했다. 기체의 원주인인 아멜리아에 대한 배려는, 그 무모한 행동에 일말의 먼지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아르엘의 두부 전체가 힘없이 앞뒤로 움직였다. 이대로 주먹을 쥐면 머리가 찌그러지고, 손을 들어 올리면 머리가 뽑힌다. 어느 쪽이든 고철이 되겠지만 실행에 옮기기 직전, 한센은 망설임에 빠졌다. 아유다와는 달리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자제심이 일순간 마음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많이 물러졌구나. 연애할 때도 안 하던 짓을 하다니.」




 머리를 붙잡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 심중을 파고드는 듯한 아유다의 지적이 돌아왔다. 정말 초콜릿을 먹고 이상해진 게 맞는지 의심이 갔다.




 "어른답게 상식선에서 대응하려는 것뿐이야."




「거짓말. 넌 겁이 나서 망설이고 있는 거야. 과거의 일 때문에 투지를 억눌러야만 하니까.」




 "입 다물어."




 아유다의 성격이 어둡게 바뀐 경우는 자주 있어도, 이렇게 직설적인 도발을 걸 만큼 사나워진 적은 없었다. 카페인에 취해도 최소한 남의 민감한 부분을 대놓고 언급하진 않았다. 그 태도에 질려버린 한센은 원래 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베네치아 기지가 있는 방향으로 아르엘을 내팽개쳤다.




 속박이 풀리는 동시에 아유다는 기체의 자세를 제어했다. 냉병기만으론 무리라고 결론 내렸는지 이번엔 구속용 철제 ​와​이​어​(​w​i​r​e​)​를​ 꺼내들었다. 마도병기 단위의 적을 상대할 때 무력화 목적으로 자주 쓰이는 장비였다. 최대길이는 아르엘 체고의 약 세 배인 42미터. 채찍 다루는 법을 조금만 알아도 충분히 위협적인 수단으로 쓸 수 있었다.




 허공에 붕 뜬 시커먼 철줄이 탄력을 받아 세차게 날아들었다. 와이어 치고는 꽤 얇아서 잠깐만 정신을 팔아도 시야에서 놓칠 것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무기를 상대하는 건 실전에선 엄청난 고역이나 다름없다. 회피기동에 들어가면서 한센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우측 22도 너머로 사각이 존재했다. 엠프리스가 몸을 기울이는 때에 맞춰 와이어가 쇄도해 들어왔다. 서로의 표면이 닿으려는 찰나, 전이장갑의 영향으로 와이어 쪽이 튕겨나갔다. 물살에 휘말린 실처럼 힘을 잃고 축 늘어지는 게 보였다. 저 상태라면 재장전까지 시간이 소요될 테다.




 한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르엘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이번에야말로 뭔가 뜯어낼 결심으로 와이어가 연결돼 있는 하완부 장갑에 기체의 팔을 뻗었다.




「지금도 억지를 부리고 있어.」




 엠프리스에게서 간단히 벗어나며 아유다는 여전히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맹목적인 집착을 버리지 못한 사람을 비웃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하얀 거인의 콕핏을 세게 차 튕겨내면서, 마침 원점까지 되감긴 와이어를 다시 한 번 크게 휘둘렀다.




 원래라면 복부에 닿았어야 할 것이 저편의 대응으로 팔에 대신 감겼다. 전이장갑은 방어막의 역할만 하기에 '입자의 작용에 의한' 파괴 활동은 불가능하다. 아유다는 그 사실을 대강 짐작한 듯싶었다. 결속이 성립된 순간 팽팽해진 줄을 당겨 조금씩 엠프리스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질세라 한센도 아르엘의 바깥으로 기체를 빼내려 했다.




 곧바로 한센은 자기 결정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억지를 부리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반항해봤자 자해가 될 뿐인 이 무기의 흉악한 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와이어는 올가미처럼 더욱 강하게 엠프리스의 팔을 조여갔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가늠하던 와중, 머릿속 한구석에 작은 흥분이 일었다.




 전이장갑의 내구도가 아슬아슬해졌을 즈음 겨우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결국 탈출한다는 선택지를 폐기하고, 오히려 상대의 심장부로 파고들었다. 묶인 쪽 팔을 방패삼아 아르엘을 밀쳐내고는 체술을 걸기 힘들도록 두 기체의 몸을 밀착시켰다. 이러면 반격할 수 있는 수단은 체인 블레이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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