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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아호트니크(охотник) - 5


 저녁의 대로는 곧 자동차로 가득 찼다. 교통 체증이야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심해서 한센은 답답함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설적이게도 에어쇼가 열리는 비행장은 반대 방향에 있다. 길이 막힌다면 오히려 옆쪽이 그래야 할 터. 비교적 순탄해야 할 이곳마저 완전히 경직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인지, 한센은 간절히 알고 싶었다. 심지어 주변 차량의 대부분은 중형차이기까지 했다.




 조금씩 전진하면서 시간에 못 맞추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러자 이대로라면 문제가 생긴다는 판단이 섰다. 차가 다시 멈춰 섰을 때 핸드폰을 켜고, 조수석으로 옮겨둔 상자에 눈을 옮겼다. 모양은 피자 박스를 연상시키는 정사각형. 저것을 아이린에게 전해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치추적기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볼까. 상황에 따라선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애초에 아이린에게 핸드폰을 선물해준 목적이 이것이었다. 그녀의 요청도 있었지만, 나중에 있을 또 다른 위협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기기에 자체적으로 위치추적기를 심어놓았다. 사생활 침해가 되지 않겠냐는 그의 우려에 아이린은 오히려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어 좋다는 이상한 대답을 했다.




 이유를 붙이는 건 자유라 해도, 한센은 자신의 행적이 남에게 무차별로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렸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아이린이 있는 장소가 화면에 표시된다. 그리고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하며 추적기가 켜졌음을 주인에게 알린다. 평상시에도 괜찮다고 했으니 황궁에 계속 있는지 정도만 확인해도 되지 않을까. 한센의 엄지손가락이 버튼 바로 위에서 멈췄다.




 '……이번 에어쇼는 사상 최대인 동시에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논평가의 말을 들으며 한센은 고민에 빠졌다. 마찬가지로 그도 아이린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다. 잘못해서 불순한 의도로 오해받으면 곤란할 뿐더러, 몇 배의 손해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평상시'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다. 당장 추적기를 켜면 편하겠지만, 그 뒤의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테다.




 참, 고민 한 번 거창하게 한다고 한센은 생각했다. 직후 그쯤 해두라는 듯 뒤에서 클랙슨이 울렸다.




 "네, 네. 지금 갑니다."




 한센은 지금까지의 잡념을 핸드폰과 함께 모두 조수석에 던져버렸다. 파란불이 켜진 동시에 체증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자, 황궁을 향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았다.

























 "7월의 그 사건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이린 앞,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헬멧을 쓴 남자는 샴페인 잔을 들어보였다. 기포를 일으키는 액체 속에 곧게 앉아 그와 대치하고 있는 황녀의 모습이 비쳤다.




 샴페인을 가져온 두 메이드는 침입자의 등장에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은 저 남자가 주군의 방에 숨어든 일말의 흔적도 잡아내지 못했다. 아니, 항상 문 앞을 경비하는 입장에서 외부인의 존재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명백히 징계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용서받은 뒤였다.




 정중한, 어쩌면 신사적인 그 질문에 아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명해보라는 의미로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을 뿐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7년이 지났습니다. 날짜만 대도 머릿속에 떠오를 정도의 충격을 남겼죠. 비교적 최근의 일을, 가장 가까이서 겪었을 터인 당신이 기억 못할 리가……?"




 아이린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떠오르기도 싫은 그 일이 언급된 탓이다.




 "아, 7월의 그 '반란' 말입니까."




 "당신들 입장에선 반란이었던가요. 이쪽은 ​'​항​쟁​'​이​었​지​만​.​"​




 자신을 벤데타라 칭한 이 남자는 싸울 의욕이 없는 것 같았다. 두 해석이 양립하는 시점에서 논쟁하는 의미가 없다고 보는 모양이었다. 그의 말투에서 아이린은 오만함을 느끼면서도, 한구석에 이질감이 있음을 깨닫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조직을 대표하여 왔다는 사람이, 중립적인 화법을 쓰고 있다.




 이렇게까지 열의가 없는 테러리스트는 처음 보았다. 상대의 입장을 긍정하지 않지만 자기 입장을 강요하지도 않는 저 태도는 무엇인가.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표정으로 의도를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방적인 요구가 아닌, 진짜 '외교'를 하러 온 것이라면 우선 시작은 좋다고 하겠다.




 "……이야기를 줄이시죠. 긴 서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기꺼이."




 남자는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저희는 7월의 그 때 실패했던 일을 매듭지으러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래 전, 어떤 '조약'을 목적으로 이곳에 오려 했던 무리가 있었죠. 당신의 아버지인 칼츠 이메리룬은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 가두행진하던 국민들을 향해 발포를 지시했습니다. 물론 '조약'은 이후 휴지쪼가리가 되었고요."




 그 결과로 일어난 항쟁ㅡ뭔지 아시겠지요. 그는 웃으며 작게 덧붙였다. 과거 이야기를 들은 것뿐이었지만 아이린은 상대의 목적을 아주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미 지난 일을 뒤집기 위해 온 것입니까."




 "지난 일?"




 "잠깐의 환상으로 튀어나온 터무니없는 요구였습니다. 이미 피로 매듭지어진 상처를 다시 터뜨리겠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만."




 "'조약'을 위한 국민의 희생이 무의미했다는 건가요?"




 "그들을 속이지 않았습니까. 당신 같은 공화파가."




 공화파. 이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것도 몇 년 만이다. 그들에게 농락당한 대중이 얼마나 많은 피를 쏟아냈는지. 이젠 잊히다 못해 사멸했지만, 아이린은 그 단어 외에 이들을 정의할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옛 시절로 돌아가자’는 사상은 근본부터 어리석었고, 사회가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당신의 요구는 이미 수차례 논파되고 결렬되어 묻힌 것입니다. 과거의 공명에 얽매여 그 때의 무력시위를 재현하려는 행동이 지지를 얻게 되리라고 보십니까?”




 “보리스로 인해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굳이 유감을 표하겠습니다만.”




 그가 동요했다. 오른쪽 검지가 살짝 꿈틀거렸다가 멈췄다. 이변을 눈치챈 아이린은 그가 최소한 자기만큼 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립적이고 동떨어진 태도는 가면이었다. 내색하지 않을 뿐, 어떤 부분에선 그도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상대로, 시작부터 쐐기를 박으시네요.”




 잠시 후 남자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이린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이런 일은 낯설지 않은 듯했다.




 “다만 각오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일국의 군주라면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이겠죠. 그런 면에서 당신은 알기 쉽고 전형적입니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신 것 같군요.”




 “저에 대한 모욕이 협상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자각은 없습니까?”




 “반대로 묻죠. 당신이야말로 협상을 할 의지가 있습니까?”




 어처구니없게도 그대로 받아쳤다. 대답 대신 아이린은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무례는 차치하고, 보리스를 보낸 건 당신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전 보장을 전제로 하루 동안 당신의 신변을 빌리려 했죠. 도중에 변수가 좀 있었지만, 당신이 협상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외교라 해도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일절 불가합니다.”




 “그래서 ‘테러리스트식 외교’를 지양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실수로부터 배운다고들 하죠. 저희는 최대한 신사적인 방법으로 당신에게 민중의 소리를 전달하려 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어디서 틀에 박힌 기만을 가져오는가. 어떤 변명을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의 궤변에 아이린은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공격심마저 느꼈다. 이들은 7년 전의 그들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제국은 ‘조약’에 대해 협상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끈질기시네요. 이래봤자 평행선을 그릴 뿐인데.”




 “국가의 근본을 뒤흔드는 짓을 제 손으로 하라는 겁니까.”




 “이쪽이 제시한 ‘조약’도 엄연히 국민의 의견이 반영된…….”




 “오해하시는 게 있는 듯한데.”




 아이린은 언성을 높이며 남자의 말을 끊었다.




 “공화파는 국가 전복에만 관심이 있었던 광신도 집단이었습니다. 선민의식에 빠져 원래 사상마저 오염시킨 게 그들입니다. 그런 무리가 쓴 ‘조약’에 국민의 의견이 들어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만.”




 “사상에 대한 이해가 미숙했을 뿐입니다. 지금의 ‘조약’은 선대의 오류를 발판삼아 여러 번 수정이 가해졌습니다.”




 “몇 번을 고쳐도 국가 전복이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을 테죠. 공화파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 국민도 분명히 반대할 겁니다.”




 아이린은 공화주의 사상 자체엔 거부감이 없었다. 아니, 국가에 따라선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이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황녀이기 이전에 학자였다. 학자로서의 자신은 적의 사상이라도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게 했다. 7년 전의 기억은 쓰라렸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쌓인 지식으로 아픔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용서가 안 되는 건, 변형된 이념으로 대중을 현혹하려는 자들이었다.




 공화파와 함께 제국 내 공화주의 운동은 소멸했다. 테이블 너머의 저 남자는 공화파의 아류를 자처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무엇을 말하든 아이린이 들어줄 가치는 없다. 계속 있으면 한센과의 약속에 늦게 된다.




 아이린은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끝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협상의 여지는 없습니다. 참석해야 될 자리가 있으니 먼저 실례해주시죠.”




 “에어쇼에 가시는 모양이죠?”




 “알려줘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이런 시기에 에어쇼를 강행하셔서.”




 남자는 아이린과 동등하게 섰다. 어째서인지 그 태도엔 협상에 실패했다는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선책이 있다는 일종의 시위 같아 아이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감정을 절제하고 있다고 보기엔 너무 여유로웠다.




 “이제 남은 방법은 ‘테러리스트식 외교’밖에 없으려나요.”




 “무력행사라도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 순간, 속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미약한 진동을 전했다. 가슴 아래에 손을 대며 아이린이 긴장하는데, 남자는 작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세요. 해를 입는 건 당신이 아닙니다. 적어도 지금은.”




 “……에어쇼에 무엇을 할 생각입니까?”




 그제야 아이린은 남자가 말한 ‘테러리스트식 외교’의 진의를 알아챘다. 인간이 아닌, 마도병기 단위의 무력행사를 벌이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즉시 종을 들어 헌병을 부를 준비를 했다. 이 남자가 여기에 오래 있으면 위험하다.




 “별 것 아닙니다. 다만…….”




 남자는 아이린의 드레스 속, 핸드폰이 진동하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종보다는 그것이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검은 마도병기, 라는 것을 좀 투입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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