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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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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그리하여 자이모쿠자는 성우의 길을 걷는다.


 계절도 학년도 바뀌었지만, 봉사부의 풍경은 이전과 변함이 없다. 햇볕이 드는 창가에 자리 잡고 조용히 책을 읽는 유키노시타와 그런 유키노시타 옆에 꼭 붙어서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싱글싱글 스마트폰을 들여보고 있는 유이가하마. 실로 평온한 분위기다. 
 그런 두 사람에게서 어제부터 읽던 책으로 시선을 되돌린 나였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 장도 채 넘기지 못했건만 노크 소리와 함께 부실 문이 열린 것이다. 

 "오랜만이구나 히키가야 하치만!!" 

 최근엔 잇시키에게 밀리는 감이 있지만, 툭하면 봉사부에 찾아와 하찮은 의뢰를 하기로 정평이 난 자이모쿠자였다. 어제도 봤는데 오랜만은 무슨 오랜만이냐……. 이제는 일일이 태클을 거는 것도 지겹다.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 역시 같은 심정이었는지 자이모쿠자의 얼굴을 확인하자 관심이 식었다는 듯 고개를 홱 되돌려버린다. 

 "히키가야, 네 담당이란다."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떨군 유키노시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이제는 완전히 내 담당이 되어버린 건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토츠카라면 모를까 땀내나고 징그러운 사내자식을 담당해봐야 귀찮고 짜증 날 뿐이지만, 이 부실에서 자이모쿠자와 커뮤니케이션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인 것도 사실이다. 씁,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빠르게 끝내도록 할까. 

 "자이모쿠자, 이번 소설도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묘사도 난잡해서 읽기 힘들었고. 네, 끝. 잘 가라." 
 "하, 하치만?! 본관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만?!" 

 자이모쿠자가 당황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인다.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도 황당하다는 양 쓴웃음을 지었지만, 내심 내게 동감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 귀찮아…….

 "후우, 오늘은 뭐하러 온 거냐?" 

 마음을 다잡고 그렇게 묻자 자이모쿠자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크게 심호흡하더니 가방에서 종이 다발을 꺼냈다. 응,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표정 하지 마라 하치만. 이번 작품은 예전에 쓴 것들과는 다른 혼신의 역작인 것이다." 
 "그 말 전에도 들었거든? 네 혼신의 역작은 대체 몇 번을 나오는 건데?"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 혼신의 역작이란 것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불쏘시개였다. 
 그런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이모쿠자가 흐응 하고 오만방자한 포즈를 취하더니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 게이지가 상승할 것 같은 썩소를 짓는다.
 
 "이번에는 정말로 이전과는 다른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여 최근 유행하는 요소들을 넣고, 무거운 스토리를 싫어하는 최근의 오타쿠 독자들에게 눈높이 맞춰 가벼운 느낌으로 썼으니까."
 "독자들에게 눈높이에 맞췄다는 헛소리는 한 번이라도 수준 높은 글을 쓰고나서 해라."

 자이모쿠자에게 현실과 타협했다느니 유행하는 요소를 넣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솔직히 조금도 기대되지 않는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때도 역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이 녀석, 꼬박꼬박 소설을 쓰고 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실력이 안 는단 말이지. 뭐, 그래도 저번에 유키노시타에게 영혼까지 털린 후로는 쓸데없이 장황하고 집요한 묘사는 좀 줄어들었으니까 아주 발전이 없는 건 아닌가. 
 하지만 이런 발전 속도여서는 자이모쿠자의 소설이 노잼을 탈출하는 것보다 내가 이승을 탈출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야, 자이모쿠자. 너도 이젠 슬슬 우리 말고 소설 투고 사이트나 게시판에 올려보는 게 어떻겠냐? 우리나 거기나 가차 없이 까는 건 별반 다르지 않을걸?" 
 "흐, 흐음…… 확실히 그건 그럴지도……." 

 자이모쿠자가 언제나 자신의 소설을 가차 없이 혹평하고 있는 유키노시타를 힐끗 쳐다본다. 그러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유키노시타와 눈이 맞자 흠칫 몸을 떨고는 재빠르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마치 악명 높은 일진과 눈이 마주친 빵셔틀을 보는 것 같군. 우리 유키노시타 양도 알고 보면 상냥하고 좋은 아이니까 구역질을 할 만큼 무서워할 건 없지 않나…… 안심해라…… 안심해라, 자이모쿠자. 

 "므, 므흠. 그렇지 않아도 이번 소설의 평가가 괜찮다면 소설가가 되자 사이트에도 투고해볼 생각이었다."
 "……그런 조건이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는 건 영원히 무리 아니냐?"

 아무래도 나는 졸업할 때까지 계속 자이모쿠자의 졸작 소설을 읽게 될 운명인 것 같다. 나란 아이는 어쩜 이리 불행하담!
 하지만 뭐, 내키지 않는 지겨운 의뢰라도 의뢰는 의뢰다.

 "유키노시타, 유이가하마. 일이다."
 "에에……."

 손을 쭉 내밀어 자이모쿠자로부터 넘겨받은 원고를 대신 건네자 유이가하마가 으엑 하고 표정을 찡그리고, 유키노시타가 후우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원고를 받는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지만, 현실은 반이 되기는커녕 세 배가 되었단 말이지.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이번에는 자이모쿠자가 가져온 원고지의 양이 평소보다 적다. 뭐, 적다고 해도 일반적인 라노베 한 권의 2/3 정도는 되는 분량이지만, 이 정도라면 부활동이 끝나기 전까지는 충분히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 보자, 제목이…… 이세계에…… 야, 잠깐. 이거 설마 이세계 환생물이냐?"
 "호오, 제목만으로도 그것을 눈치챌 줄이야. 과연 내가 인정한 남자군."
 "제목에 떡하니 이세계라고 써놓고서 무슨 헛소리야." 

 바보야? 죽는 거야? 
 어이가 없어 그렇게 말하자, 자이모쿠자가 크흠 하는 소리와 함께 팔짱을 끼며 말한다.

 "아무튼, 이전에 네가 했던 조언을 받아들여 이번에는 학원 이능 배틀물이 아닌 이세계 환생 판타지에 도전해본 것이다."
 "……아~ 확실히 그런 말을 하긴 했었네. 요즘 인기 절정인 이세계 환생 치트 하렘무쌍."

 이세계 환생 치트 하렘무쌍이란 주인공이 이세계에서 환생해서 치트 능력으로 무쌍을 찍으면서 하렘을 건설하는 소설이다. 소년 점프의 표어가 '우정, 노력, 승리'라면 이세계 환생 치트 하렘무쌍의 표어는 '치트, 승리, 하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자위적인 요소가 강하다 보니 높은 인기와 더불어 태반이 불쏘시개인 걸로도 유명하다.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설마 진짜로 써올 줄이야……. 

 "므흠, 이세계 환생 치트 하렘무쌍은 아니다. 치트적인 능력을 얻지도 무쌍을 찍지도 않으니까."
 "하렘은 있는 거냐……. 어쨌든 이세계 환생물이잖아."
 "이…세계 환생……?"

 저번에 한 번 들었을 텐데 이미 잊어버린 모양인지 나와 자이모쿠자의 얘기를 듣고 있던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고 등으로 죽은 주인공이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다른 세계에서 환생하는 소설이다."

 덧붙여 트럭에 치어 죽은 주인공이 신에게 치트급의 능력이나 아이템을 부여받고 이세계에서 환생하는 내용이라면 높은 확률로 지뢰작이다.

 "그래? 요컨대 판타지구나?"
 "뭐, 그렇지. 가끔 현대 배경의 게임이나 만화, 소설의 세계에서 환생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판타지지."
 "만화나 소설의 세계에서 환생한다고? ……혹시 팬돌이 팬의 세계로 환생하는 작품도 있니?" 
 "그건 이세계 전생물이라기 보다는 팬픽이네. 팬돌이 팬의 세계로 환생하는 작품은 아마 없을걸? 만화나 소설의 세계라곤 해도 보통은 그 소설에만 나오는 가상의 작품이니까."  
 "……그래."

 유키노시가타 조금 실망한 기색으로 말한다. 
 그런가, 유키노시타는 팬돌이 팬의 세계에 가보고 싶었던 건가……. 하기야 나도 초등학교 땐 프리큐어의 세계에 가서 큐어 화이트와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니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뭐, 만나서 하고 싶은 건 전혀 다르겠지만. ……다르겠지? 만약에 같다면 앞으로 유키노시타 양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 같으니까 곤란한 거야요.

 "헤에…… 그렇구나." 

 별 관심 없어 보이는 투로 그렇게 말하더니, 유이가하마가 건네받은 원고지를 대충 훑어본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살며시 원고지를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자이모쿠자의 의뢰에도 관심 좀 가져 주지 그러냐……. 

 "……므흠!" 

 유이가하마가 자이모쿠자의 소설을 읽지 않는 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자이모쿠자 역시 라노베는커녕 독서 자체에 흥미가 없는 유이가하마의 감상까지는 굳이 들을 생각이 없는지 딱히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어째선지 오늘은 유이가하마가 원고지를 내려놓는 모습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모으려는 듯이 크게 헛기침을 한다.

 "이번 소설은 이전과 달리 초심자도 읽기 쉽도록 난해한 표현을 되도록 줄인 것이다. 그러니 부디 이번만이라도 읽어봐 주지 않겠나?" 

 유이가하마 쪽으로 고개를 돌린 자이모쿠자가 엄청나게 진지한 분위기로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 시선은 미묘하게 유이가하마를 벗어나 부실 창문을 향해있다. ……너 혹시 유령이라도 보이니?

 "……아, 나 말이야?"

 유이가하마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자이모쿠자가 부실 바닥을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귀여운 여자애랑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게 부담스러운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알게 된 지 벌써 1년은 됐으니까 이젠 슬슬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냐? 이 녀석, 이차원 여자에겐 가차 없이 욕망을 쏟아내는 주제에 삼차원 여자랑 대화하는 건 정말 서툴다니까.
 그건 그렇고 이렇게 유이가하마에게까지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걸 보니 이번에는 평소보다 신경 써서 쓰긴 쓴 모양이군. 
 그러나 라이트 노벨 같은 건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만 재미있게 읽어 주면 충분한 물건이다. 취향도 아닌 사람에게 억지로 포교해봐야 서로 피곤해질 뿐이다. 라노베에 대한 흥미도 지식도 없는 유이가하마가 뼈와 살이 되는 비평을 해준다든가, 긍정적인 평가를 해줄 거라곤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다.
 하지만 뭐, 반대로 그런 유이가하마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어낸다면 그건 정말로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뭐,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 이런 기회라도 없으면 너 전혀 책 안 읽으니까."
 "실례잖아! 나도 책 정도는 읽는다고."

 유이가하마가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리며 나를 째려본다.
 응, 그거 패션잡지를 말하는 거지? 아니지, 유이가하마니까 교과서를 말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웅~…… 그러면 오늘은 나도 읽어볼까?"

 별로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이렇게 부탁하는 걸 거절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인지 유이가하마가 하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원고지를 다시 집어 든다. 
 다소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는 태도였지만,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지 자이모쿠자가 흠흠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 짓는다. 

 "이번 작은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르니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뭐야, 이 녀석. 단순히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건가?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역시 기대는 안 된단 말이지요…….


× × ×


 유이가하마가 휴우 하고 어깨에서 힘을 빼며 다 읽은 원고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평소 독서를 하지 않아서인지 유이가하마가 글을 읽는 속도는 나와 유키노시타보다 현저하게 느렸고, 덕분에 우리는 유이가하마가 다 읽을 때까지 20분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뭐, 부활동이 끝날 때까지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고, 헤에~ 아~ 하며 다채롭게 표정을 바꿔가며 소설을 읽는 유이가하마라는 드문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딱히 불만은 없지만.

 "자아, 그럼 어디 감상을 들어보도록 하실까."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 신경 거슬리게 옆에서 내 반응을 힐끔힐끔 살피던 자이모쿠자가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말한다. 처음엔 마지못해 읽던 유이가하마 도중부터는 흥미를 보이며 읽어서 그런지 그 얼굴에는 전에 없을 만큼 강렬한 우월감이 서려 있다. 
 그러나 그런 거만도 태도도 잠시. 맞은편에서 눈을 내리뜨며 생각에 잠겨있던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자 자이모쿠자가 흠칫 몸을 떤다. 아마도 지난 1년간 유키노시타에게 가차 없이 털려온 탓일 것이다.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반사적으로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마치 파블로프의 개를 보는 것 같군. 뭐, 자이모쿠자의 경우는 개라기보다는 곰이지만.

 "미안해. 역시 난 이쪽 계통 소설은 취향이 아닌 것 같아……."
 "끄, 끄응……."

 평소라면 여기서부터 유키노시타의 가차없는 혹평이 시작됐겠지만, 오늘의 반응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자이모쿠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목소리도 평소와 달리 쌀쌀맞지 않다. 따스한 것까진 아니어도 미적지근한 온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지금까지 읽은 네 소설 중에서는 가장 괜찮았어. 특별히 재미있었던 건 아니지만, 읽는 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어. 제대로 완성도 되어있지 않던 예전 것들과 달리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한 여지를 두면서도 하나의 이야기로서 제대로 완결되어 있고. 뭐, 군데군데 의미 모를 독백은 많았지만 말이야."
 "오, 오옷? 그, 그런가……."
 "우응~ 나도 괜찮았던 것 같아. 뭔가 RPG 같더라? 이번엔 어려운 단어도 많이 안 나와서 읽기 쉬웠어."
 "오, 오오……!"

 혼신의 역작이니 뭐니 하며 한껏 큰소리를 쳤지만 내심은 불안했던 거겠지. 자이모쿠자는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전에 없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떨리는 목소리로 탄성을 흘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직 감상을 말하지 않은 내게로 고개를 돌린다. 안경 안쪽에서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눈빛이 좀 짜증 난다.
 
 "솔직히 놀랐다 자이모쿠자. 네가 써온 소설에 재미를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오오오오! 하치만이여, 너라면 이 소설의 재미를 이해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너만은 본관의 이 절묘한 드립과 클리셰 비틀기를 이해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놀랍게도 자이모쿠자의 이번 소설은 재미있었다. 자이모쿠자가 썼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았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했습니다.)
 아직 라노베 1권도 안 되는 분량이니 단언하기는 이르지만 이런 느낌으로 순조롭게 써나간다면 출판사에 스카우트 되어 정식으로 출판하는 것도 불가능한 꿈은 아닐 정도다. 
  
 "응, 확실히 교통사고로 죽어서 이세계? 에서 환생한다는 거 신선했어."
 "아니, 그건 이 바닥에서는 완전 식상한 전개니까."
 "어, 그래?"

 나 같은 헤비 라노베 독자에게 있어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설정이지만, 이런 류의 소설을 읽은 적 없었던 유이가하마에게는 그 진부한 설정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모양이군. 하지만 칭찬받아야 할 건 죽어서 환생했다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라노베 작가 지망생인 히키코모리 주인공은 신작 라노베의 점포 특전 한정판을 사기 위해 오랜만에 멀리 외출을 했다가 트럭에 치일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트럭에 치여 죽는 것이 이세계 전생물의 정석이지만, 자이모쿠자는 그것을 한번 비틀어서 주인공이 가까스로 트럭을 피하게 했다. 
 하지만 안심하는 것도 잠시, 주인공은 그 직후 위험하다며 한 박자 늦게 자신을 밀친 지나가던 여고생으로 인해 옆 차선을 달리던 차에 치여 죽게 된 것이다. 차에 치여 죽은 건 마찬가지지만, 치어 죽는 과정은 그래도 나름 신선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점을 설명해주자 유키노시타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유이가하마도 멍한 표정으로 헤에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보아하니 유이가하마는 잘 이해가 안 된 모양이군. 뭐, 유이가하마는 진부한 클리셰조차 신선하게 느끼고 있는 상태니 클리셰 비틀기가 잘 와 닿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힛키, 혹시 주인공이 플레임을 데리고 이세계로 가는 것도 식상한 전개야?"
 "아니, 그건 제법 신선한 전개다. 대부분은 그냥 치트 능력이나 아이템을 받고 환생하거든. 그렇다고 할까, 환생을 시켜주는 여신이 이렇게 대놓고 주인공을 무시하는 경우부터가 드물다."

 그런 내 설명에 유키노시타가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원하는 능력이나 아이템을 준다는 건 지나치게 편의적인 전개가 아닌가 싶었지만, 주인공이 그것을 이용해 여신을 이세계로 데려가는 건 확실히 인상적이었어." 

 음, 그건 확실히 인상적이지. 그 후로도 여관에 묵을 푼돈도 없어서 여신과 함께 막노동한다든가, 저렙의 몬스터 사냥을 갔다가 관광을 당하는 등 기존의 이세계 전생물의 클리셰를 비트는 전개들이 이어지긴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그 장면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한가지 의문스러운 게 있는데……." 
  
 턱에 손은 얹은 유키노시타가 그렇게 운을 떼며 자이모쿠자 쪽을 바라본다. 그러자 우리 세 사람의 대화를 흠흠 하고 흡족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자이모쿠자가 헉하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유키노시타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여신 플레임 말인데, 일본 지역의 환생을 담당하는 여신의 이름이 어째서 영문 이름인 거니?" 
 "아, 네? 아, 특별히 깊은 뜻은 없습니다……."
 "아, 그건 그거다. 그 뭐냐, 죽도라고 하면 별 느낌 없지만, 영어로 뱀부 블레이드라고 하면 뭔가 멋지게 느껴지잖아? 대충 그런 거다." 
 "므, 므흠. 그 말대로다."
 "아~ 그렇구나." 
 "……별로 멋지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아무래도 영어권 나라에서 몇 년간 유학한 경험이 있는 유키노시타에게는 잘 와 닿지 않는 모양이군.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처럼 익숙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에겐 같은 의미더라도 여신 화염보다 여신 플레임 쪽이 뭔가 더 멋지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일본 노래에 쓸데없이 영어 가사가 들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니까.
 
 "아, 맞다.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이 사가밍이란 여자 마법사 말이야. 혹시 사가밍…… 사가미 미나미가 모델인 거야?" 

 아, 그건 나도 좀 신경 쓰였다. 뭐, 자이모쿠자가 우리 반 사가미를 알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고, 유희부 사가미의 TS 모에화일 리는 더더욱 없을 테니 그냥 우연이겠지만. 사가밍이란 이름은 아마도, 아니, 분명 전혀 다른 누군가를 의식한 이름이리라.

 "므흠? 아니, 사가밍은 본관이 직접 생각한 이름이다만. 그 사가미 미나미인가 하는 여자와는 하등 관계없는 것이다." 
 "그래? 사가밍이라고 하니까 자꾸 사가밍이 생각나서 신경 쓰였어. 뭐, 사가밍은 이런 이상한 소리 안 하지만." 

 뭐, 사가미가 모델이었다면 전투 때마다 '너는 내가 지킨다……!'며 아군에게 방어마법을 걸고, 적의 공격을 방어마법으로 대신 막을 때마다 '여긴 나한테 맡기고 도망쳐!!'라고 소리치고, 아군이 데미지를 입을 때마다 '지킬 수 없었어…….'라며 쇼를 하는 머리가 이상한 중2 마법사(방어마법 밖에 못 씀)는 나오지 않았겠지.

 "아무튼, 재미있었어. 이 정도라면 중2가 되고 싶어 하는 라노베 작가인가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구나. 작가가 돼도 괜찮을 정도는 아니지만, 글솜씨는 저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아졌으니까. 같은 사람의 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야."
 "후후, 선비가 사흘을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날 때는 눈을 비비고 마주해야 하는 법이지."
 
 검호 장군에서 여몽 장군으로 승급이라도 한 건지 자이모쿠자가 중지로 안경을 척 고쳐 쓰면서 오만방자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모습이었지만, 그런 자이모쿠자의 태도에도 유키노시타는 피식 웃을 뿐이다.

 "그래, 정말로 괄목상대구나."

 유키노시타가 따스한 시선으로 자이모쿠자를 바라본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유키노시타가 자이모쿠자에게 이런 미소를 보여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거다. 자이모쿠자의 성장이 진심으로 기쁜 거겠지. 하기야 언제나 낙제점만 받던 아이가 90점을 받아왔으니 오랫동안 공부를 봐준 사람으로서 기쁜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알게 된 지 1년도 넘었지만, 여태껏 자이모쿠자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해주지 않는 유키노시타와 중2라는 모멸 어린 별명으로 부르고 있는 유이가하마. 그런 두 사람이 자이모쿠자의 성장을 진심 어린 미소로 축하하고 있다. 그 모습에 어쩐지 복잡한 미소를 짓던 자이모쿠자도 결국 한줄기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싸늘한 날씨조차 잊게 하는 훈훈한 분위기가 부실 안을 따스하게 감싼다. 
 아아,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다……. 
 자이모쿠자의 소설이 표절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뭐, 표절작이니까 출판 따위는 절대 무리겠지만."
 "코헉!?"

 정곡을 찔린 자이모쿠자가 화들짝 놀라며 괴상한 신음을 낸다. 그리고는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거덕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하, 하치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건 본관이 창작한 거다만……." 

 뻔뻔하게 표절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자이모쿠자였지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까지는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추어 소설을 표절하면 안 들킬 거로 생각했나 본데, 소설가가 되자 사이트에 올라오는 소설은 나도 종종 보고 있다고." 

 어디에서 연재된 소설을 표절한 건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자 허억 하고 자이모쿠자의 말문이 막힌다. 파랗게 질린 얼굴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 수상 쩍인 모습에 유이가하마가 얼굴을 찡그리고, 유키노시타도 미간을 찌푸린다. 

 "어? 이거 표절한 거였어?
 "어, 표절작이다. 표절의 정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표절작이다."

 유이가하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휴 한숨을 쉬고, 유키노시타는 두통을 진정시키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히키가야, 자세히 설명해 주겠니?"


× ×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졸작만 써오던 자이모쿠자가 갑자기 괜찮은 소설을 써온 이유. 그것은 어떤 인기 소설을 표절했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출판되지 않은 아마추어 작품이니 표절해도 모를 거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실은 소설가가 되자 사이트에 올라오는 아마추어 소설은 나도 종종 읽고 있었고, 표절의 대상이 된 소설도 읽은 적이 있는지라 자이모쿠자가 표절을 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와……."
 "하아…… 정말 기가 막히는구나……."
 
 유키노시타가 어깨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차가운 시선을 자이모쿠자에게 향한다. 그 경멸 어린 시선을 보고 있으니 나까지 괜히 으스스해지는 게, 마치 겨울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다. 

 "오, 오해다! 딱히 표절인 건……." 
 "아니, 명백하게 표절이잖아. 물의 여신이 불의 여신이 된 것뿐이잖아? 폭렬마법 성애자가 방어마법 성애자가 된 것뿐이잖아? 다크 나이트 샤이닝은 또 뭔데? 무슨 G건담이냐?" 
 "쿠허억!"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등장인물이나 설정, 이야기의 전개 등이 빼도 박도 못할 만큼 똑 닮아있다. 철벽의 방어력을 갖췄지만, 공격은 맞추질 못하는 트롤기사가 강력한 필살기를 가졌지만, 공격이 스치기만 해도 뻗는 트롤기사로 바뀌었을 뿐이다. 얼핏 전혀 달라 보이지만, 표절 당한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표절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똑 닮아있다. 

 "그래, 괜찮은 소설을 표절했다니 괜찮다고 느끼는 게 당연하겠구나."

 유키노시타가 부드러운 목소리와 싱긋 미소 짓는다. 온기가 담긴 미소일 텐데 이상하게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기는커녕 등골이 오싹해진다. 

 "표절이나 하고 중2 최악이야……." 
 "크, 크헉……."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소로 자신을 칭찬하던 두 사람의 싸늘한 태도에 자이모쿠자의 거구가 격하게 흔들린다. 

 "저, 정말로 오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본관은 어디까지나 인기를 끄는 요소를 살짝 참고한 것뿐이다. 결코 표절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좀 지나치게 영향을 받아버린 모양이지만…… 결코 의도한 것은 아니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변명한 자이모쿠자였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그 차가운 시선 피하듯 내게로 몸을 돌린 자이모쿠자가 곰 같은 두 손을 내 어깨에 올리며 말을 잇는다. 
 
 "하치만…… 본관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인기 있는 소설을 베꼈다고…… 표절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냐?"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자이모쿠자의 눈을 까맣게 썩은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여요." 
 "푸헙!? 푸, 푸허허어……."

 의자에서 떨어진 자이모쿠자가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며 몸부림치다가 벽을 들이받는다. 그리고는 심장이 아프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거칠게 숨을 헐떡인다. 생각 같아선 목에다 ‘저는 도작을 했습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걸게 하고 차가운 바닥 위에 정좌시키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귀여운 여고생이라면 모를까 곰 같은 사내자식에게 그런 걸 시켜봐야 보는 이쪽이 괴로워질 뿐이다. 게다가 저런 추하고 딱한 모습을 봐버리면 아무래도 마음이 약해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이모쿠자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공허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자이모쿠자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향한다. 그 시선을 내려다보며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눈언저리까지 들어 올렸다. 

 "자해해라, 자이모쿠자."
 "크혹……."

 영주가 없어도 효과는 있었는지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자이모쿠자의 손이 차가운 바닥 위로 털썩 떨어진다. 기쁨의 눈물이 흘렀던 볼을 타고 또다시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으음,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간 진짜로 죽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군. 
 하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표절 작가에게 자비 따윈 필요 없으니까. 게다가 만약 표절인 걸 들키지 않았다면 훨씬 더 가혹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 거다. 이런 표절작을 인터넷에 투고했다간 빠르든 느리든 누군가는 표절이라는 걸 눈치챌 테고, 그 후에는 그야말로 영혼까지 털리게 될 테니까. 차라리 지금 이렇게 욕먹는 게 훨씬 나은 결말이다. 
 아~ 오늘도 하찮은 의뢰였어~

 ​"​…​…​…​…​하​치​만​이​여​.​"​
 "엉?"
 
 후우 후우 하고 거칠게 호흡을 가라앉히고 있던 자이모쿠자가 입을 열었다.

 "……본관에게는 작가의 재능이 없는 걸까?"
 "설마 지금까지는 있다고 생각했던 거냐?"
 "…………."
 
 자이모쿠자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고인다. 그만 좀 울어라. 여기가 무슨 눈물 명소라도 되니? 왜 이렇게 눈물 보이는 사람이 많은 거야……. 그보다 언제까지 바닥에 누워있을 건데……. 
 더러운 바닥에 드러누워 더럽게 눈물 콧물을 훌쩍이는 자이모쿠자의 추한 모습에 더는 비난할 마음도 안 드는지 유키노시타가 한숨을 내쉬고는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집어 든다. 유이가하마는 진작에 관심을 잃었는지 이미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다.
 부활동이 끝날 때까지 앞으로 15분 정도인가……. 나도 읽다가 만 책이나 마저 읽어야겠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자이모쿠자의 표절 소설로 더러워진 머릿속을 씻어내는 대는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덮어둔 책을 펼치려던 찰나, 자이모쿠자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앉고는 고뇌하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다.

 "본관은…… 본관은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이냐…… 라노베 작가가 되지 못한다면 본관의 사랑은……."
 "……엥? 사랑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냐?"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그렇게 묻자 자이모쿠자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서 의자에 다시 앉는다. 
 이런 젠장, 너무 경솔했다! 반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심코 반응해서 제2의 의뢰가 시작돼버렸어! 

 "후우……."

 자이모쿠자가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을 꽉 움켜쥐더니 비장감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무릎에 놓고 허리를 곧게 폈다. 

 "본관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어, 그야 물론 처음 듣는 소리지."

 심각한 얼굴로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만……. 그보다 이 녀석,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던 건가? 뭐, 한창 여자친구를 원할 고등학생의 나이니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좋아하는 여자와 라노베 작가 되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어느 작품에 나오는 여캐냐?"

 계절마다 최애캐가 바뀌는 녀석이니 이번 분기 신작 애니에 나오는 캐릭터려나? 

 "아니, 이차원이 아니라 삼차원에 실존하는 여성이다만……."

 자이모쿠자가 살짝 깬다는 양 나를 쳐다본다. 
 엥? 나 지금 자이모쿠자에게 무시당한 거야? 가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오타쿠 취급받은 거야? 충격과 굴욕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아, 그러냐. 그래서 네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그 여자애는 누군데?"

 솔직히 관심은 없지만 물어보지 않으면 괜히 더 시간만 잡아먹을 게 분명하니 할 수 없이 물어본다. 

 "그녀의 이름은 토마츠 미카코. 훗날 자이모쿠자 미카코라고 불리게 될 여인이다." 
 "……뭐, 상상은 자유니까." 

 역겹긴 하지만 자이모쿠자가 그런 망상을 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중학교 시절엔 곧잘 좋아하는 여자애와 결혼하는 망상을 했었으니까. 
 좋아하는 그 애가 나와 결혼해서 히키가야 ○○○가 되는 망상은 실로 달콤해서, 머릿속으로 그 애와의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행복한 기분이 들 정도다. 
 뭐, 현실은 결혼은커녕 전화번호도 모르는 시궁창이다 보니 망상이 끝난 후엔 급격하게 허무하고 우울해지지만. 요컨대 망상은 인기 없는 남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마약인 것이다. 

 "그래서 그 토마츠인가 뭔가 하는 여자랑 네가 라노베 작가가 되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는 건데?" 
 "므흠, 라노베 작가가 되어 애니화에 성공한다면 절벽 위에 꽃인 그녀와도 결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것이다." 
 "무슨 바쿠만이냐? 라노베 작가가 된다고 해서 여자들한테 인기 생기는 거 아니거든?" 

 라노베 작가가 돼서 자신의 팬과 결혼하겠다는 거라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라노베 작가가 돼서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건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이야기다. 소○온 작가처럼 1,000만 부도 넘게 팔리는 최상위 인기 작가가 된다면 돈의 힘으로 혹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공모전 1차 합격도 힘들어 보이는 자이모쿠자가 그런 인기 작가가 될 거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차라리 25세에 연봉 천만 엔을 받을 수 있다는 편집자를 노리는 게 나을 것이다. 
 뭐, 절벽 위의 꽃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여자가 자이모쿠자가 성공할 때까지 솔로로 남아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고, 설령 솔로라고 해도 재력만으로 자이모쿠자를 배우자로 선택할 리 없고, 애초에 편집자가 되는 것부터가 무리겠지만.

 "헤에……. 중2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우리가 나누는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었는지 유이가하마가 이쪽을 쳐다보며 한마디 던진다. 상대가 자이모쿠자기도 하고, 예전에 연애 의뢰를 받았다가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그런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흥미가 생긴 모양이다. 하여간  연애 얘기를 참 좋아하는 녀석이라니까.

 "근데 토마츠 미카코? 우리 학교에 그런 애가 있었던가? 후배야?"

 발이 넓은 그녀에게도 생소한 이름이었는지 유이가하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으음…… 음…… 뭐, 우리보다 한 살 연하긴 하지만 같은 학교인 건 아니다."

 질문은 유이가하마가 했건만 자이모쿠자는 내 쪽을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헤에~ 중2한테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는 여자애가 있었다니 뭔가 의외네."
 "뭐, 자이모쿠자가 일방적으로 아는 거겠지만. 상대 쪽은 자이모쿠자의 존재도 모를걸?" 
 "크, 크으윽……. 화, 확실히 그 말대로긴 하다만……."

 자이모쿠자가 미간을 찡그리며 끄응 신음을 흘린다. 가벼운 잽을 날렸을 뿐인데 벌써 이 모양이라니, 머지않아 아까 그랬던 것처럼 부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눈을 까뒤집고 쓰러질 모습이 눈에 선하군. 

 "아~……. 그럼 같은 학원에 다닌다든가?"
 "므, 므흠……. 딱히 그런 건 아니다……."
 "이름이랑 나이 외에 더 아는 건 없냐?"

 의뢰자가 자이모쿠자고 의뢰가 연애 관련인 시점에서 이 의뢰의 성공 가능성은 0이나 마찬가지지만, 유이가하마는 자이모쿠자의 얘기에 다소 흥미가 있는 모양이고, 자이모쿠자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얘기를 털어놓으면 조금은 위안이 되겠지.

 "토마츠 미카코. 나이는 16세. 생일은 9월 9일. 키는 160cm고 혈액형은 B형. 출신지는 미에 현이고, 취미는 노래와 요리. 좋아하는 가수는 야나기 나기. 그리고 3살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는 모양이다." 
 "…………."

 거의 프로필 급의 미칠 듯이 상세한 정보가 나왔다.

 "징그러!! 왜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거야!? 완전 스토커잖아!?" 

 유이가하마가 완전 질색하는 표정으로 몸을 뒤로 젖히고, 옆에 있던 유키노시타도 독서를 멈추고는 경계 태세를 취하듯 차가운 눈초리로 자이모쿠자를 째려본다. 
 확실히 이건 징그럽군. 스토커 소리를 듣는 게 당연한 레벨이다. 나도 중학교 시절에 오리모토네 집이 어디 있는지 몰래 알아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일단 그녀와 같은 반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환경이었던 거다. 그런데 같은 학교인 것도 같은 학원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는 연예인 프로필급의 정보를 알아내다니, 이건 보통 집념이 아니다. 그야말로 스토커. 지금 걸로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의 안에서 자이모쿠자의 호감도가 한층 더 내려갔으리라. 뭐, 애초에 올라간 적이 없을 테니 딱히 내려갈 것도 없겠지만.

 "엑?! 아, 아니, 전부 위키피디아에 적혀있는 ​것​들​이​다​만​…​…​!​?​"​

 질색을 넘어 혐오로 물들어가는 두 사람의 반응에 자이모쿠자가 당황한 듯 두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뭐? ……아아, 난 또 뭐라고. 성우였냐."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성우랑 결혼하겠다는 부질없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 라노베 작가가 돼서 애니화에 성공하는 것과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는 게 무슨 상관인가 했더니 그런 거였군. 
 진지한 얼굴로 결혼하고 싶으니 뭐니 하니까 연애상담인가 했더니 그냥 이룰 수 없는 소원을 푸념하는 거였다. 하기야 성우가 아니라 일반인이었어도 이룰 수 없는 소원인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아, 그런 거였구나……." 

 자이모쿠자가 말하는 여자애가 성우라는 게 밝혀지자 바짝 날을 세우고 있던 두 사람이 경계 태세를 푼다. 성우였다는 반전 없이 그냥 일반인이었다면 한동안 봉사부 출입금지를 당했을지도 모르겠군.
 자이모쿠자에 대한 혐의가 풀림과 동시에 관심도 식었는지 유이가하마가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스마트폰을 다시 꺼내 든다.

 "하치만이라면 당연히 미카코시를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모르고 있었다니 의외군……."
 "아니, 난 너처럼 성우에 빠삭한 오타쿠가 아니라니까."

 니코니코동화에 올라온 성우 관련 영상을 몇 번 본 적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우에 관심이 없다 보니 대중적으로 유명한 일부 성우와 큐어 화이트의 성우를 알고 있는 정도다. 우리보다 연하의 성우면 아마 신인일 텐데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흐음, 그런가. 아무튼, 본관은 훗날 미카코시와 결혼할 예정이다만, 최근 그 미카코시에게 한가지 문제가 생긴 것이다." 
 "네가 성우 때문에 고민할 일이 뭐가 있는데? 이번 분기 출연작이 없냐?"
 "그거라면 문제없다. 미카코시는 한창 떠오르고 있는 인기 성우니까. 신인임에도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고, 성우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미인이지."

 자이모쿠자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며 흐흥 하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아니, 토마츠 미카코인가가 잘나가는데 왜 네 녀석이 잘난척하는 건데? 네가 무슨 친오빠라도 되냐?
 하지만 뭐, 그게 팬심이라는 거겠지. 나도 코마치도 빠라고 부를 정도로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연예인이 없다 보니 그다지 공감은 안 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인기가 많다고 생각해보면 대충 이해는…… 아니, 마냥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은데…….

 "아, 이 사람이 토마츠 미카코구나. 헤에~ 확실히 귀엽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유이가하마가 탄성을 흘린다. 스마트폰을 꺼낸 건 관심이 식어서가 아니라 사진을 검색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유키농, 얘 귀엽지 않아?"

 유이가하마가 유키노시타에게 스마트폰을 내밀자 유키노시타가 고개를 돌려 화면을 들여다본다.

 "그러네. 확실히 귀엽구나."
 "성우는 외모는 별로라는 이미지였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나 봐."

 호오, 유이가하마는 그렇다 치더라도 유키노시타까지 순순히 칭찬할 정도로 귀여운 건가. 어디 나도 한 번 구글 선생님께 물어보기로 할까. 
 대충 히라가나로 토마츠 미카코라고 치고서 이미지 카테고리를 누르자, 동일인물로 보이는 여자애의 사진이 좌르르 쏟아져나왔다.

 "자이모쿠자, 얘가 토마츠 미카코 맞냐?"
 "므흠, 그렇다. 그녀야말로 언젠가 본관의 신부가 될 여인 토마츠 미카코다."
 "아, 그래. 똑같은 생각을 가진 놈들이 몇 만 명은 될 것 같지만, 뭐, 힘내봐라."

 검색되어 나온 수많은 사진 중 하나를 적당히 눌러 확대된 사진을 천천히 살펴본다. 
 으음, 유키노시타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없는 게 흠이지만, 확실히 예쁘긴 예쁘군. 성우니 만큼 당연히 목소리도 좋을 테고, 연기까지 잘한다니 이건 인기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겠군. 
 뭐, 예쁜 건 우리 유키노시타랑 유이가하마가 더 예쁜 것 같지만.

 "뭣이?! 끄, 끄응……. 분하지만, 더 예쁘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 것 같군……." 
 "…………엥?" 

 잠깐, 어째서 내가 마음속으로 한 말에 자이모쿠자가 대답을 한 거지? 이 녀석, 설마 독심술에 눈을 뜬 건가? 아니지, 실은 내가 사토라레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면 내가 유키노시타를 가끔 도마노시타라고 부르는 것도 들통났을 테니 이렇게 무사할 리가 없고……. 이거 아무래도 나도 모르게 입 밖에 내버린 모양이군……. 
 얼굴이 급격하게 뜨거워지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니, 뭐, 딱히 이상한 의미로 한 말은 아니다. 지극히 냉정하게 감상을 말한 것뿐이다. 나도 모르게 우리 유키노시타니 유이가하마니 하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딱히 깊은 의미는 없다. 그 뭐냐……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할까, 우리 공주님이 제일 귀여워라고 할까…….  
 나는 후우 하고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두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디 못 들었기를……. 

 "어, 음, 그, 그래?"
 "그, 그래……."

 아주 잘 들린 모양인지 유이가하마가 쑥스럽게 에헤헤 웃으며 뺨을 붉히고, 옆에 있는 유키노시타는 내 시선을 피하듯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뭐니, 그 반응은. 안 그래도 민망한데 그런 반응을 보이면 더 민망해지잖아…….  
 
 "……그래서, 그 문제가 생겼다는 건 뭐냐?"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렇게 묻자, 자이모쿠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실은 최근 그 미카코시에게 남자 친구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는 것이다."
 "뭐? 그게 대체 너랑 무슨 상관인데?" 

 어이가 없어 그렇게 말하자, 자이모쿠자가 침까지 튀겨가며 언성을 높인다.

 "무슨 상관이라니! 장래 본관의 신부가 될 미카코시에게 다른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데 그게 보통 일이냐!"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 

 예전엔 그래도 성우랑 결혼하고 싶다고 소망하는 수준에 그쳤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병이 악화하였는지 마치 성우와 결혼하는 것이 확정된 것처럼 지껄이게 되어버렸군.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는 여자에게 남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만으로 바람난 여자 친구라도 둔 것처럼 구는 게 참으로 꼴불견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이돌이 아니니까 연애금지 조례 같은 것도 없을 거 아냐? 성우가 아니었더라도 그 정도로 예쁘면 다가오는 남자도 많았을 테니까 본인이 연애에 흥미가 없는 게 아니라면 남자친구 정도는 있어도 이상하지 아니겠지." 
 "크, 크윽. 그럼 남자친구가 있다는 의혹은 사실이라는 건가……." 
 "글쎄다, 나야 모르지. 지금은 없더라도 성우가 되기 전에는 남자친구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유이가하마나 유키노시타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 정도 미모면 평범하게 생각해서 한 번 정도는 연애경험이 있지 않을까? 성우는 목소리만큼이나 연기력이 중요한 직업이니, 츠키카게 선생님의 말씀대로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한 번쯤은 사랑을 해보는 게 좋을 테고.

 "뭐…라고…? 그렇다는 건 즉, 미카코시는 이미 처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 말인가……?"
 "……야, 너 지금 끝내주게 역겹거든?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역겹다. 너 설마 유니콘남이었냐?"

 여자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완벽한 남자가 아니라 처녀만 선호하는 불쾌한 남자라는 의미에서. 
 성우 팬덤 사이에서 비처녀 논란이 곧잘 터져 나온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장난 아니게 역겹군. 
 봐라, 유이가하마랑 유키노시타도 완전 소름 돋는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잖아. 오늘 무슨 날이냐? 너 왜 그렇게 미움받고 싶어서 안달 난 듯한 행동만 해대는 건데……. 

 "오, 오해하지 마라. 본관은 딱히 처녀가 아니라고 해서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본관이 동정을 지키고 있듯이 배우자가 될 상대도 가능하면 순결한 몸이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아니, 너는 딱히 지키는 게 아니잖아? 버리고 싶은데 못 버리고 있는 것뿐이잖아?" 

 만약에 하야마 같은 인기인이 그런 얘기를 한다면 ​혼​전​순​결​주​의​자​인​가​보​다​ 하겠지만, 나나 자이모쿠자 같은 스쿨 카스트 최하층의 인기 없는 남자가 그런 소리를 해봐야 설득력 없는 소리일 뿐이다. 그 이전에 게임 센터에서 탈의 마작 같은 걸 즐기는 놈이 혼전순결주의자일 리가 없는 거다. 출처는 나.

 "아, 아니, 본관은 언젠가 사랑하는 미카코시에게 줄 생각으로……."
 "그럼 묻겠는데, 네 취향의 예쁜 여자가 나타나 너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먼저 유혹하더라도 넌 동정을 지킬 거냐?"  
 "크후읏! 아픈 곳을 찌르는군……."

 동정도 지키지 못하면서 뭘 지킬 수 있겠냐고 떠드는 놈들의 8할은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동정 따윈 간단히 버릴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나머지 2할은 두려운 마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두고두고 후회하겠지.

 "헤에, 힛키는 예쁜 여자가 고백하면서 유혹하면 넘어가는 거구나~……."

 차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유이가하마도 유키노시타도 하나같이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런, 여자들이 있는 데서 할만한 얘기가 아니었는데 자이모쿠자의 헛소리에 어울려주다 보니 너무 돌직구를 날려버렸군. 이대로라면 철벽을 자랑하는 내 방어막에 실은 슈퍼로봇대전의 AT 필드 같은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 거야! 

 "……날 자이모쿠자와 똑같은 취급하지 마라. 난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미인계랑 꽃뱀을 조심하라고 철저하게 가르침 받았기 때문에 그런 수작엔 넘어가지 않는다고." 
 "힛키의 아버지는 그런 걸 가르치신 거야!?" 
 "좋은 교육인 건지 나쁜 교육인 건지 모르겠구나……." 

 유이가하마가가 경악하는 얼굴을 하고, 유키노시타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한숨을 흘린다. 응, 확실히 좀 안쓰러운 아버지긴 하지.

 "애초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한테 고백하고 유혹하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딱히 꽃미남인 것도 아니니까." 
 "……그, 그러네. 힛키의 좋은 점은 오랫동안 지켜보지 않으면 알기 힘들고." 
 "……그렇구나." 

 오랫동안 지켜봐야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점이 없는 거냐……. 여러 가지 있잖아? 국어 학년 3위라든가, 귀여운 여동생이 있다든가, 치바를 사랑한다든가, 집에 고양이가 있다든가. 응, 제법 되네.
 얘기가 도중에 새버렸지만, 아무튼 결론은 자이모쿠자의 말이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거다. 

 "므흠, 그렇군. 자신의 순결은 하루빨리 때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여자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는 건 확실히 이기적이고 역겨운 생각이겠군……."
 "뭐,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역겨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크, 크윽. 정말 가차 없군……. 하지만 하지만이여, 그렇게 말하는 네 녀석도 마음속으로는 사랑하는 여자가 순결한 몸이기를 바랄 터. 아닌가?" 
 "……."
 
 자이모쿠자의 반격! 하치만는(은) 데미지를 입었다!
 
 "후후, 정곡을 찔려서 할 말을 잃은 모양이군.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볼 것이니, 네가 본관을 잘 아는 것처럼 본관 역시 너를 잘 알고 있는 거다."
 "……아니,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거거든? 그리고 그거 그런 의미로 쓰는 말 아니니까."

 이 망할 자식아, 그런 건 최소한 여자애들이 없는 곳에서 물어보라고……. 유이가하마랑 유키노시타가 있는 데서 그런 걸 어떻게 말하라는 건데……. 
 아아, 느껴진다.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을 주시하는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의 시선이 느껴진다. 대답 여하에 따라선 나까지 기분 나쁜 유니콘남으로서 매도될 게 틀림없다. 마음 같아서 무시해버리고 싶지만, 이 상황에서 대답을 피해버리면 자이모쿠자의 말에 긍정하는 꼴이 되어버리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군.
 괜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나는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자이모쿠자, 중요한 건 사랑하는 사람의 첫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마지막 사람이 되는 거 아닐까?"
 "뭐어?"

 자이모쿠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린다.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시선이다. 정말 사람 열 받게 만드는군…….
 후우, 어쩔 수 없지. 좀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줘 볼까.

 "……이건 내가 인터넷 뉴스에서 본 실화인데, 오래전 있었던 어떤 여자 아이돌과 그 아이돌의 팬인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 남자 팬은 그 아이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자와는 일절 사귀지 않았다는 모양이다. 그런 그의 지극한 사랑은 그녀가 아이돌을 은퇴하고 다른 남성과 결혼한 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더군. 보다 못한 남자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어떻게든 남자를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남자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지.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남자는 우연히 40세가 되어 남편과 이혼한 그 아이돌과 만나게 되었다. 이제는 연예인도 아니고, 젊은 시절처럼 예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남자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런 지극한 사랑에 감동한 그녀는 남자와의 만남을 이어간 끝에 결국 그와 재혼했다고 한다."
 "허어…… 그것참 대단한 이야기군……."

 내 이야기에 자이모쿠자가 놀란 모양새로 감탄사를 흘린다. 
 좋아, 자연스럽게 위기를 넘긴 것 같군.

 "아무튼, 너도 그 미카코인지 뭔지 하는 성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사소한 거에 연연하지 말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하는 걸 축복해주라는 얘기다."
 "므흠, 그렇군. 듣고 보니 확실히 중요한 건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인 것 같군. 뭐, 본관으로서는 그래도 역시 20대 중반 정도까지는 미카코시와 연인 사이가 되고 싶지만."
 "……너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를 제대로 듣기는 한 거냐? 네가 그 인기 성우랑 결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정 이루고 싶거든 드래곤볼이라도 모으던가."

 자이모쿠자의 소원이 비현실성을 생각하면 드래곤볼이 아니라 슈퍼 드래곤볼을 필요할 가능성조차 있다. 뭐, 현실에 드래곤볼은 없고, 있다 한들 자이모쿠자로서는 모을 수도 없겠지만.

 "끄응, 그러면 본관도 미카코시가 40대 아줌마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아니, 그 미카코인가 하는 성우가 남편과 이혼을 한다고 해도 너로서는 무리가 아닐까?'
 "뭣이!? 어째서냐! 변함없이 사랑한 끝에 재혼했다던 조금 전의 이야기는 뭐였던 거냐!"
 "응, 왜냐면 그 아이돌 팬이라는 사람은 돈 잘 버는 벤처 기업 사장이거든. 너 그 정도로 성공할 자신 있냐? 없잖아?"
 "크허억! 결국, 이 세상은 돈인가……."

 자이모쿠자가 고통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살짝 휘청거린다.
 으음, 이걸로 자이모쿠자도 부질없는 꿈에서 깨어나 길고 긴 인생을 홀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면 좋으련만. 가령 고양이나 개를 기른다든가?

 "어, 힛키, 좀 전의 그 얘기 진짜야?"

 가만히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유이가하마가 놀랍다는 듯 묻는다.

 "뭐, 인터넷 기사니까 장담은 할 순 없지만 그렇다더라." 
 "헤에~…… 20년이나 한 사람을 계속 좋아하다니 대단하네. 나라면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아."
 "그러네. 기다리면 좋아하는 상대와 재혼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결혼한 시점에서 깨끗하게 포기해야겠지."
 "뭐, 그렇지." 

 훈훈한 이야기처럼 말은 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선 무거운 걸 넘어 무섭기까지 한 이야기다. 
 아이돌을 은퇴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더는 TV 화면으로조차 만날 수 없는 상대를 10년도 넘게 변함없이 사랑하다니, 나로서는 그 마음이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운 좋게 남편과 이혼하고 홀몸이 된 그녀와 만나 오랜 짝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여전히 젊은 날의 그녀를 마음에 품은 채 홀로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터무니없이 무거운 사랑이다.
 뭐, 자이모쿠자의 대답을 자연스럽게 피하고자 적당히 꺼냈을 뿐인 얘기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아이돌도 없고, 아이돌인 것도 아닌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다. 굳이 어느 쪽인지 말하자면 프로듀서고.

 "끄응……. 인기 라노베 작가도 무리고, 잘나가는 벤처 기업 사장 역시 무리고……. 본관은 대체 어떻게 해야 성우와 결혼할 수 있단 말인가……."
 "……네 사전엔 포기란 단어는 없는 거냐? 그보다 너 성우랑 결혼하는 거 이전에 글 쓰는 게 좋아서 라노베 작가가 되려는 거 아니었냐?"
 "므흠, 글을 쓰는 건 물론 좋아한다. 하지만 본관은 그보다도 성우와 결혼하고 싶은 거다. 그럴 수만 있다면 굳이 라노베 작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 이 녀석 딱히 라노베 작가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거구나……. 하긴, 게임 시나리오 작가니, 편집자니 하며 몇 번이나 갈아탔었고.

 "만약 성우랑 결혼할 수만 있다면 본관은 수명의 1/3을 바칠 용의도 있다."
 "반이 아닌 거냐……."

 반이라고 했으면 헛소리로 일축했을 텐데 1/3이라고 하니까 묘하게 진실성이 느껴지는군.
 하지만 지난 1년간 자이모쿠자의 소설을 읽어온 나로서는 이 녀석이 인기 라노베가 작가가 되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다. 설령 피나는 노력 끝에 인기 작가가 되고 애니메이션화에 성공했다고 해도 자이모쿠자가 여성우가 결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 여자랑 제대로 말도 못 하잖아.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녀석이 성우들과 만날 기회를 얻는다 한들 많지 않은 만남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성우와 사적으로 연락할 만큼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곤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다. 실은 성우가 자이모쿠자의 팬이라서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올 가능성도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은 있다는 것뿐, 기대하기는 힘들다. 
 만약 자이모쿠자에게 여자 성우와 결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라노베 작가가 아니라…….

 "……차라리 성우가 되는 편이 더 가능성 있을 것 같은데." 
 "으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무심코 내뱉은 말에 자이모쿠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으음, 나도 모르게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해버렸군.

 "그 뭐냐, 너 작가의 재능은 없어도 목소리 하나는 쓸데없이 좋잖아? 성우랑 결혼하고 싶은 거면 차라리 성우가 되는 게 더 가능성 있지 않겠냐? 가령 네가 라노베 작가가 되고 애니화에 성공한다고 쳐도 어차피 너 막상 좋아하는 성우랑 만나면 제대로 말도 못 붙일 거잖아?"
 "그, 그그그그렇지 않은걸! 제대로 인사할 수 있는 걸!"
 "그래,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랑 업무적인 얘기만 좀 나누고 끝이겠지."
 "크허억……. 부정하고 싶지만, 본관으로서도 여자 성우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이 안 되는군……."

 크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자이모쿠자.

 "아무튼, 잘은 모르겠지만 같은 소속사의 성우가 되면 작가가 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보게 될 테니 가능성도 더 크지 않겠냐? 라노베 작가랑 결혼했다는 성우는 들어본 적도 없지만, 같은 성우끼리 결혼한 경우는 많으니까." 

 겉모습과 내용물은 징그러워도 목소리 자체는 좋고, 중2병에 걸린 탓에 일상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는 상태니 본격적으로 연습하게 되면 연기력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남은 건 외모랑 중2병이랑 유리멘탈만 어떻게 하면 되겠군. 으음, 넘어야 할 산이 많군……. 하지만 그래도 역시 라노베 작가로 대성하는 것보단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본관 스스로가 성우가 된다고……? 그 발상은 없었다……."

 자이모쿠자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며 멍하니 되뇐다. 
 아니,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니까 그런 반응을 보이면 곤란하다만…….

 "하치만, 정말로 본관의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하나?" 
 "어, 뭐, 목소리만 놓고 보면 그렇지. 아마 유이가마하나 유키노시타도 인정할걸?"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웅~……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뭘 멋대로 단정하는 거니. 나도 자이……츠의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한 적은 특별히 없어." 
 "하, 하치만!? 얘기가 전혀 다르다만!?" 

 두 사람에게 부정당하자 자이모쿠자가 가볍게 상처받은 것처럼 울상을 짓는다. 아, 그렇군. 이 녀석, 유이가하마나 유키노시타랑은 얘기를 안 하니까 멋진 목소리를 들을 기회도 없었겠군. 

 "자이모쿠자, 쿨한 미남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굵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고백해봐라.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는 자이모쿠자를 보지 말고 목소리에만 집중해봐." 
 "어? 아, 응, 알았어." 
 "하아…… 어쩔 수 없구나." 

 유키노시타가 읽던 책을 책상에 내려놓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 모습을 본 유이가하마도 유키노시타를 따라 눈을 감는다. 굳이 눈을 감을 필요까진 없지만, 확실히 그편이 목소리에 집중하기는 좋을 것이다. 

 "하, 하치만? 갑자기 고백하라고 해도 곤란하다만……." 
 "대사는 적당히 '예전부터 계속 좋아했습니다. 저와 사귀어주세요.' 정도면 되니까 여성향 게임의 고백 장면처럼 해봐라." 
 "그렇군. 어떤 느낌인지 대충 알 것 같다. ……그, 그런데 하치만이여, 그 대사는 누, 누굴 보면서 하면 되는 것이냐?"

 자이모쿠자가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기면서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고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 쪽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이 자식, 정말 사람 짜증 나게 만드네. 누가 너더러 쟤네한테 고백하랬냐……. 
 
 "딱히 안 쳐다봐도 되니까 최대한 멋진 목소리를 내는 것에 집중해라." 
 "므흠, 그렇군."
 "……저기, 아직도 멀었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니? 빨리 시작하렴."  

 기다리다 지쳤는지 유이가하마가 입을 삐죽고, 유키노시타가 미간을 찡그리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재촉한다. 그 말에 어딘가의 난청 주인공처럼 "어, 아, 네."하고 어색하게 대답한 자이모쿠자가 크흠 하고 몇 차례 헛기침을 한 후 마음을 다잡듯이 크게 심호흡한다. 

 "……예전부터 쭉 좋아했습니다. 저와 사귀어주세요."
 "…………."
 
 정말이지 목소리만은 쓸데없이 멋지다니까. 특별히 신경 써서 목소리를 낸 거라 그런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멋진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여자였고 자이모쿠자란 걸 몰랐다면 무심코 네라고 대답할 정도로 멋졌다.

 "엑, 거짓말…… 지금 거 진짜로 중2가 낸 거야?!" 
 "놀랐어……. 정말 목소리만은 좋구나." 

 유이가하마가 경악하고 유키노시타 역시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자이모쿠자의 목소리가 좋다는 걸 알고 있었던 나조차 놀랐을 정도니 두 사람이 충격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생긴 것과 안 어울리게 쓸데없이 멋진 목소리. 그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아니, 돼지 목에 진주 목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들었지? 너 작가의 재능은 없어도 성우의 재능은 있다고. 성우랑 결혼하는 게 인생목표라면 차라리 작가 말고 성우를 노리는 게 나을 거다." 

 뭐, 진짜로 성우가 된다 한들 인기 있는 그 미카뭐시기랑 결혼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라노베 작가가 되는 것보다는 더 가능성 있을 것이다. 0.1%가 1%로 늘어나는 정도의 차이겠지만. 

 "그런가……. 본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던 건가……." 

 자이모쿠자가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달은 만화 주인공처럼 두 손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전율한다. 일일이 이런 중2병 짓거리를 안 하면 성에 안 차는 걸까. 만약 이 녀석이 정말로 성우가 된다면 다른 건 몰라도 중2병 캐릭터만은 명품 연기를 보여줄 것 같다. 

 "성우가 돼서 성우와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같군." 
 "……야, 너 설마 진짜로 성우에 도전하려는 거냐?" 

 딱히 진지하게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진지한 반응을 보이니 조금 당황스럽군. 자이모쿠자의 목소리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성우가 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많고, 그것을 극복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가볍게 생각할만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지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고 그 결과도 자기 책임이지만, 내가 한 말로 인해 누군가의 인생이 크게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역시 조금은 마음이 걸린다. 

 "어디까지나 라노베 작가보단 성우가 되는 게 가능성 있어 보인다는 것뿐이니까 너무 김칫국 마시진 말라고." 
 "훗, 그 정도는 본관도 알고 있다. 목소리가 좋다는 것만으로 헤쳐나 갈 수 있는 업계가 아니니까." 

 아, 그런가. 하기야 성우에 관한 건 나보다 자이모쿠자가 몇십 배는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혹한 길이라는 것 역시.

 "하지만 그래도 기뻤다. 정말로 기뻤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건 처음인 것 같군. ……이 감정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마치 오랜 체중이 씻겨 내린 것 같은 기분이다.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이렇게 의뢰하러 오길 잘한 것 같다. 오늘은 정말 고맙다." 

 그렇게 말하며 자이모쿠자가 당차게 웃었다. 
 표절 소설을 칭찬받았을 때 보여준 어딘가 석연치 않아 보였던 미소와는 다른, 진심 어린 미소였다.

 "앞으로도 도와주겠는가? 그…… 긴장하지 않고 여자와 대화하는 법 같은 것도 연습해야 할 것 같고 말이지." 

 아무래도 자이모쿠자는 진심으로 성우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조금 전까지의 자이모쿠자였다면 그런 연습을 도와달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일이 되면 성우가 되겠다는 생각 따윈 버리고 다시 라노베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쓸지도 모른다. 일주일 후에는 또 편집자가 되겠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성우가 되겠다는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 나는 정말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버린 셈이 된다. 
 그러므로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 도와줄게. 뭐, 네가 쓴 소설을 읽는 것보다는 쉽겠지." 
 "고맙다. 그러면 다음에 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자이모쿠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실을 떠났다. 
 당당하게 걸어나간 그 뒷모습엔 두 시간 전, 부실 문을 열며 들어왔을 땐 없었던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어, 그러니까…… 중2는 라노베 작가가 아니라 성우가 되겠다는 거야?" 
 "그런 모양이네." 

 다소 갑작스러운 전개에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가 어안이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조금 당황스럽군. 처음에는 분명 자이모쿠자가 쓴 소설의 감상을 들려주는 의뢰였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잘 나가다가 막판에 급전개를 하는 애니라도 본 기분이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적어도 한동안은 자이모쿠자의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 ×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오늘은 다른 반과 같이 체육 수업을 받는 날이다. 
 어떻게 되먹은 인연인지 나는 학년이 바뀌었음에도 체육 수업에서 자이모쿠자와 같은 조를 하고 있다. 

 "하치만이여, 난 이제 확신했다. 네 말대로 나는 정말 성우의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갑자기 또 뭔데." 
 "실은 저번 주말에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음성 채팅을 했는데 말이다. 모처럼이니까 연습도 할 겸 멋진 목소리를 내려고 의식했더니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성우 같다고 호평을 받은 것이다." 
 "헤에…… 그러냐……." 
 "후후,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한테도 님 목소리 대박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한순간 나의 팬이랑 결혼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런 소리는 여자랑 제대로 대화나 나눌 수 있게 되고 나서 해라." 

 자이모쿠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봉사부로 찾아와 유이가하마나 유키노시타를 마주 보고 대화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비록 느리긴 해도 성우가 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아직은 여전히 말도 더듬고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지만, 훈련을 반복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자이모쿠자의 그 노력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 노력이 앞으로도 쭉 계속되어 정말로 성우가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자이모쿠자가 출연한 애니메이션 BD라도 한 장 사주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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