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1. 지하세계의 벽돌 굼벵이
1-2. 쓰레기장의 궁전
1-3. 그녀가 부탁했던 길
에필로그
외전-찌예 이야기
1-2. 쓰레기장의 궁전 (3)
분명히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눈앞의 저 매드 사이언티스트, 루제플이 영창한 주문의 절차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한데, 루제플 본인은 사태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리라고는 전혀 고려해 본 적도 없는 듯했다. 표정은 자신만만했고, 그간 힘든 과정을 다 끝냈다는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흐흐흐.”
불과 몇 초 사이에 나는 두뇌를 풀가동했다. 거의 본능적이라고 봐도 좋다. 영혼 속박이 걸리지 않은 이 특이한 상항이 날 살릴 유일한 열쇠임을 직감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심했다.
속인다.
영혼 속박이 완료된 양 루제플이 계속 착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일단 루제플이 오인하게 만들어 놓고 그가 다시 눈치를 채기 전까지 활로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 다짐하고는 겉으로는 더없이 순종적인 자세로 루제플을 대했다.
“옳지! 크크크크!”
좀 누그러진 모습으로 내가 잘 묶여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굽실거리자 그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갑자기 정색해서는 명령을 내렸다.
“오른손 들어 봐.”
오른손을 들었다. 눈치로 알아듣는 척하며 지체 없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루제플이 다시 몸짓을 하며 명했다.
“왼손 들지 마.”
움찔!
들 뻔 했다! 들 뻔 했어!
우와, 이 나쁜 놈.
쿵쾅쿵쾅! 하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마터면 결연한 각오를 다지자마자 바로 걸릴 뻔했다.
사람 능욕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했다. 아직까진 문제없었지만 의심하는 듯한 루제플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1초가 천년 같다.
정말, 이 말에 절절히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라면 내가 세계 최고다. 그렇게 심장이 타들어 갈 무렵, 루제플은 피식 웃었다.
“쩌는구먼!”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냥 자기 작품에 다른 문제는 없는지 검수하는 장인의 눈빛이었던 듯하다.
휴우. 10년 감수했네.
루제플은 자신의 공정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지 곧 나를 풀어 줬다.
으으윽.
몸 이곳저곳이 뻐근하고 아프다. 당장 스트레칭이라도 해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일단 루제플 앞에 얌전히 섰다. 다행히 그는 그런 태도가 만족스러운 듯했다.
자, 이런 과정으로.
영혼 속박에 걸리지 않은 채, 삼류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조수로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지하세계에서 말이지.
***
머리가 터질 것 같다.
하지만 결코 게으름 부리지 않았다.
살면서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 본 적도 없다. 솔직히 이 기세라면 당장 유명한 대학에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잠도 안 자고 결사적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정말 문자 그대로 결사적이었다.
왜냐하면,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쓸모없는 녀석! 생각보다 똘똘한 줄 알았더니 그냥 그렇구먼! 이번 주 안으로 이 책을 다 못 외우면 폐기해 버릴 줄 알아!”
아직도 루제플의 역정이 귓가에 맴돈다. 그는 내가 이쪽 언어의 리스닝이 되는 줄 모르고 있다. 그 덕에 대강 알아듣는 듯한 태도에 내 지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곧 내 별 볼 일 없는 머리는 만천하에…, 는 아니고 이 작은 연구실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루제플은 창조의 기쁨으로 보여줬던 넉넉한 모습을 싹 잊어버렸다. 그리고 가학적이고 신경질적인 매드 사이언티스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마법과 실험용 마법봉으로 죽을 정도로 날 구타, 고문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건 처음이었다. 내 비명이 커질수록 그의 괴롭힘은 가열되어 갔다.
세상에, 채찍이라니.
그런 건 귀갑 묶기가 된 미소녀에게나 쓰시죠.
진짜 지금까지의 좀비 감독관들은 애교였다. 벽돌 굼벵이를 괴롭히던 그들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화난 마족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다시 혼나지 않기 위해 죽도록 책을 파고들었다.
역시 사람은 자율적으로는 하지 못하고 이렇게 몰려야 노력하게 된다. 매가 약인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현재 있는 방은 실험실 옆에 딸린 작은 창고인데, 영혼 속박이 걸린 이후로 줄곧 여기에 있었다.
주인님.
아니, 그 개새끼는 언어를 통달해야 실험실의 다른 구역을 돌아다니게 허용해 줄 것 같았다. 일단은 이 좁은 창고에 박아놓고 최대한 지식을 쑤셔 넣을 작정인 듯했다.
우선은 언어부터다.
현재 죽도록 땅밑 공용어를 익히고 있었다. 나중에 타르나이어(내가 마족이라 부르는 종족의 언어)도 필히 배워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어 요즘 밤에도 잠을 못 이룬다.
아니, 사실은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할까.
실내에만 있어 밤이 언제인지도 잘 모르겠고.
이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장점은 내가 잠을 안 잔다는 데 있다. 좀비라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다. 그냥 신체가 무너지면 쓰러다. 몸의 재생이나 회복의 과정이 없었다. 하급 언데드의 삶이란 다 그런 모양인 듯하다.
그래도 그 덕에 창고에 박혀, 인간일 때는 상상도 못할 수준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밤에 잠만 안 자도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흡사 시간과 공간의 방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었다.
거기다 죽을 정도로 무서운 루제플의 압박과 강요가 이어지고 있어 동기부여는 아주 충만하다.
스스로 결심할 때보다 협박이 더 효율이 높다니…….
나란 놈은 정말.
웅얼웅얼.
결국 정해진 기간 안에 땅밑 공용어 입문서를 달달 외울 수 있었다.
덕분에 열나게 얻어터질 것을 몇 대 맞고 끝냈다. 원래라면 안 맞아야 할 텐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날 했던 중요한 실험에 실패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폐기되지 않은 게 어딘가?
또 하루를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