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티 돌
밤중에, 갑자기 사치코에게 전화가 와서 레이는 놀랐다.
휴대폰에 표시된 이름을 보고 진짠가 의심했다. 사치코와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곤 있지만, 전화로 길게 대화를 하는 사이는 아니고, 이렇게 전화가 걸려온 것 마저도 사실은 오랜만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전화 내용도 굉장히 간결해서, ‘내일, 중요한 용건이 있으니까 오후 1시에 우리 집까지 와 줬으면 해.’ 였다. 이유를 물어봤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고만. 수상쩍은 느낌이었지만 사치코가 이런 걸로 레이를 속일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 정말로 중요한 일이리라 생각해 그러겠다고 했다.
휴대폰을 머리맡에 두고,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서 잠들었다.
곧 대학이 시작되려는 시기니, 혹시나 사치코도 새로운 생활을 맞아 조금 불안해진 걸까. 그래서 상담거리가 있어서 부른 건지도 모른다. 릴리안 여대라곤 해도, 고등학교때까지는 다르게 수많은 학교들에서 학생들이 입학해 오다보니, 고등학교 때 까지랑은 여러모로 다른 거다. 좋은 집 아가씨라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부분이 있는 사치코가, 대학생활에 불안감을 느끼지까진 않더라도, 묻고 싶은 게 있는 것 정도는 충분히 말이 되는 거다.
그렇다곤 해도, 레이라고 해서 딱히 뭘 할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어, 사치코랑 느긋하게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네.”
서로 다른 진로를 골라, 앞으로는 지금까지처럼 편하게 만나긴 힘들어 진다.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고, 레이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오가사와라 저택엔 오랜만에 찾아왔지만, 그리 바뀐 부분은 없었다. 사용인 언니에게 거실로 안내받아, 홍차를 내왔을 즈음 사치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으으응, 괜찮아. 사치코와 이렇게 휴일에 느긋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가끔은 괜찮고.”
“미안해, 별로 느긋히 있을 시간은 없어. 이거 다 마시면, 레이에겐 잠시 심부름을 부탁하고 싶어.”
“심부름?”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레이.
심부름이라면 저택에도 얼마든지 사용인이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부러 전화를 걸어서 불러내서까지 부탁한다는 건 사용인에게도 부탁할 수 없는 사치코의 개인적인 볼일이려나 싶었다.
의문을 꺼내는 건 간단했지만, 친구이기에 사치코의 말을 그대로 믿고싶다.
“그건, 내가 아니면 안되는 거란 이야기지?”
그런데도 말로 확인한다.
사치코는 한 순간 눈을 끔뻑거린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이가 아니면 부탁할 수 없는 거야.”
긴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친구가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고 부탁해온 거다. 게다가, 그 사치코가. 그러면 레이가 할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괜찮아. 뭘 하면 돼?”
“여기 가 줬으면 해.”
한 장의 편지를 꺼낸 사치코. 설명은 그것 뿐이고, 뒷말을 이을 것 같은 기색은 없다.
“여기에 가서, 나는 뭘 하면 되느 건니?”
지도와 가게 이름 같은 게 쓰여있는 종잇조각에 눈을 향한 뒤, 레이는 묻는다.
“미안해, 지금은 그 이상 말할 수 없어. 그래도 가면 알도록 되어 있으니까.”
“흐응, 잘 모르겠지만, 알았어. 여기에 가면 되는 거지?”
종잇조각을 잡고, 다시금 지도를 바라본다. 의외로 멀다.
“가 주는 거니? 이런 영문을 알 수 없는 부탁인데.”
“그치만, 사치코가 부탁한 거인 걸. 그러면, 가야지.”
그렇게 말하고 홍차를 마신 뒤, 자리서 일어난다.
사치코가 현관 앞까지 배웅하러 따라온다.
“고마워, 레이. 그래도, 레이에게 나쁘겐 안 할거야.”
“응, 그건 걱정 안 하니까.”
가볍게 손을 들곤, 나가려 한 순간에.
“레이.”
다시 한 번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사치코가 드물게도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축하해.”
그 말을 뒤로하고, 레이는 걸음을 옮겼다.
전철을 환승하며 지정된 곳을 향한다. 전철값은 오가사와라 집안에서 내 주겠다면서, IC카드를 건네받았다.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상당한 도회지여서, 레이도 간 적 없는 곳이었지만 어딘지 알기 어려운 곳은 아닌 것 같았다. 목적지에서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전혀 예상도 되지 않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고 낙관시하고 있다.
한시간 쯤 걸려서, 지도가 가리키는 장소인 듯한 가게 앞에 도착했다. 가게 이름도 확실하니 아마 맞겠지 싶어 문을 열어 안을 엿보자, 바로 스탭같은 사람이 맞으러 나왔다.
“어서오세요.”
“저기, 저, 오가사와라 댁의 심부름으로.”
“예, 들었습니다. 하세쿠라 레이 님이시지요. 부디 이쪽으로.”
“에, 제 이야기, 들은 건가요?”
“예, 물론 그렇습니다. 왕자님이라 느껴질 정도로 늠름하고 아름다운 분이라고 들었기에, 바로 알았습니다.”
“으……사, 사치코 녀석…….”
점원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뒤를 따라간다.
“저기, 그래서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예, 저희에게 모두 맡겨 주세요.”
“에? 어, 어, 잠깐?”
따라간 곳에 있는 별실엔, 스탭같아 보이는 여성 여럿이 나란히 기다리고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런 레이를 둘러싸고, 여성진은 일제히 일을 시작했다.
“……………….”
얼이 나간 레이.
가게에 들어오고 이미 몇 시간이 지나, 저녁에 가까운 시간대가 되어 있다. 레이는 간신히 해방됐지만,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할 정도로 얼이 나가 있는 상태다.
“멋져요. 어떠신가요, 스스로 봐 주세요.”
스탭 여성의 말을 듣고, 다시금 전신거울로 바라본 자신의 모습은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가슴팍에 비즈를 곁들인 노 슬리브 원피스. 윗쪽은 청초한 오프 화이트, 치마쪽은 대조적으로 시크한 네이비로 플리츠 주름이 들어가 있어서, 상쾌한 라인을 내보인다. 추가로 원피스 위에는 인조 모피 볼레로.
C자 밴드풍으로 땋아 머리도 고쳤고, 팔찌와 티스트랩 펌프스로 마무리.
내추럴하게 메이크도 마쳐서, 평소보다도 속눈썹이 잘 보이고, 눈도 크게 보인다.
“……이거, 누구?”
“하세쿠라 레이 님, 당신 자신이에요.”
예전에도 변신, 이라고 할까 가게 사람에게 코디네이트를 받은 적은 있지만, 그때완 차원이 다르다고 할까, 아무리 봐도 프로로 일하면서 예능인이나 모델을 담당할 것만 같은 사람이 여럿이서 레이를 변신시킨 거다.
“저기, 왜 이런 상황에?”
“하세쿠라 레이님께는, 앞으로 물건 전달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물건 전달? 그걸 위해서 이 차림이 필요한 거예요?”
“예.”
시원스레 긍정당해,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어졌다. 이렇게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레이를 예쁘게 꾸민 걸 보면, 어지간한 상대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오가사와라 집안과는 관계가 없는 레이 따위가 찾아가도 괜찮은 상대인지가 거꾸로 불안해진다.
혹시나 상대의 취향이 레이같은 키가 크고 보이시한 사람이라거나. 아니, 그래서야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상황이지, 사치코의 개인적인 부탁이라곤 볼 수 없다.
당황하는 중에, 스태프 여성에게 아까 말한 물건같은 포장을 건네받았다. 별로 크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아, 뭐가 들어있는지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쪽은 사치코 님께서 맡기신 겁니다. 상대편과 만나고 나서 읽어 주세요.”
“하아…….”
봉투를 받는다.
이미 수수께끼밖에 없지만, 생각할 시간도 없는 모양이었다. 스태프에게 안내받아 가게 앞으로 나가자, 검은색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수같은 사람이 정중히 뒷자석 문을 열고, 고개를 숙인다.
당황하면서도 스태프들의 미소의 압력에 밀려, 천천히 차 안에 몸을 넣는다. 굉장히 넓고 앉기 편한 쿠션이 레이를 맞이해 주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정중히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는 스태프들에게 배웅받으며, 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달린 시간은 5분도 되지 않았다. 그 정도라면 걸어도 괜찮았다 싶지만, 익숙하지 않은 펌프스였으니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었겠지.
“저기, 이걸 건넬 상대분이라는 건.”
에스코트해 주는 운전수, 라고 하기엔 아마 운전은 덤인 거겠지. 오히려 콩셰르주 같은 사람에게 물어보자,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곧, 도착합니다.”
“예, 죄송합니다.”
별로 레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왠지 사과해 버리는 건 소시민이어설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도착한 곳은 레이도 들은 적 있는 유명한 고급 호텔이고, 지금은 엘리베이터에 타서 최상층을 향하고 있다. 최상층에 있는 건 전망대, 그리고 레스토랑. 이런 곳에서 만날 사람은, 역시나 굉장한 사람이리란 생각밖에 안 든다. 무슨 회사의 사장이라거나 회장이라거나, 그런 사람은 아닐까.
불안과 긴장이 부쩍부쩍 자라는 사이, 돌아가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로 이끌린 곳은 역시나 레스토랑. 입구에서 점원에게 에스코트를 받기 시작해서 익숙하지 않은 펌프스로 주뼛거리며 창가 테이블로 안내받자, 거기에는 고급스러운 수트를 입은 신사가 앉아 있었고――
“어, 에, 혹시나 유키 군?!”
“레, 레이 쨩?!”
드르르륵 의자 소리를 내면서 일어나, 눈을 크게 뜬 건 틀림없이 유키. 세련된 수트에, 머리모양은 평소와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공들여 세팅되어 있는게 느껴진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다른 손님도 계시기에.”
“아, 예, 죄송합니다!”
말하고 싶은 건, 듣고 싶은 건 잔뜩 있었지만, 주위의 눈이 모인 걸 깨닫고 둘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았다.
“그럼, 두 분 다 오셨으니 코스를 시작해도 괜찮을지요?”
“에, 아, 예.”
잘 모르는 채로 대답을 하자, 안내해 준 웨이터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소리도 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윽고 깜짝 놀라 정면의 유키를 바라본다.
“저기, 유, 유키 군, 무슨 일이야?”
“에? 나는, 레이 쨩에게 불려서 왔는데……”
“엣, 나한테? 나는 물건을 전달하러…….”
그런 기억은 없어서 허둥지둥 고민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를 리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자, 안절부절 못하는 듯한 유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무슨 일, 있니?”
“아, 아뇨……그, 오, 오늘의 레이 쨩, 굉장히 예뻐서 눈길을 뺏겨서……아, 평소의 레이 쨩도 굉장히 귀엽다고?! 그래도, 오늘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고 어른스러워서.”
“에……아, 고마워…….”
그 말을 듣고, 치장하고 화장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힌다.
“유, 유키 군도, 멋진 모습이야. 멋있어.”
“설마, 나는 왠지 어린애같고, 옷에 맞지도 않잖아. 억지로 걸쳤단 느낌이고.”
수줍어하면서 말하는 유키. 확실히 유키가 말하는 것 같은 느낌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 내게 유키 군은 언제나 멋있는 걸.”
“고, 고마워.”
“아, 아냐.”
유키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지만, 오히려 입에 담은 레이 쪽이 더 부끄러워서 목덜미까지 새빨개져 버렸다.
그 타이밍에 오르되브르가 나왔기에, 일단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마르 바닷가재, 가리비, 아보카도로 구성된 오르되브르는 정말로 맛있었다.
먹으면서 어떻게 된 건지 고민한다. 사치고에게서 부탁받은 심부름이었을 텐데, 왜 이렇게 된 건지.
그러다, 아까 들른 가게에서 건네받은 편지가 떠올랐다. 가방 안에서 허둥지둥 꺼내, 탁자 아래에 펼치고 눈을 향한다.
『――레이, 급작스런 일로 놀라고 있을까.
나 자신이 혼란스럽다 보니 계속 마치질 못해 마음에 남아 있던 게 있어서, 이런 형태로 실현시키게 되어 버렸어. 그래도, 대학 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꼭 해 두고 싶었어.
새삼스런 이야길지도 모르겠지만, 유키 군과 교제를 시작한 걸 축하할게. 유키 군이라면 분명 레이를 행복하게 해 줄거야. 혹시 레이를 울리거나 하면, 내가 전력으로 레이를 위해 움직일테니, 그 때는 말해 주렴.
본론인데, 오늘의 깜짝 선물은 유키 군과 교제를 시작한 레이에게 내가 늦게나마 주는 선물이야.
마침 운 좋게, 오늘은 유키 군의 생일이야.
그래서, 오늘 자리를 제공한 건 레이에 대한 선물이고, 예쁜 레이 자신이 유키 군에 대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줘. 좋아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일테니까.
그럼, 즐겨 줘.
당신의 친구로부터.』
끝까지 읽고 나서, 간신히 이해했다.
“…………사치코도 참.”
쓴웃음이 떠오른다.
서투르지만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한 사치코가 분명 많이 고민하고 한 결정일 거고, 그 마음은 굉장히 고맙다. 혹시나 반대 입장이었다면 레이도 사치코를 위해서 뭔가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레이 쨩?”
“아, 미안. 저기, 이거 전부, 사치코가 꾸민 거란 모양이야.”
“엣, 사치코 씨가?”
“응. 나랑 유키 군이 사귀기 시작한데 대한 축하와, 오늘이 유키 군의 생일……생일…………에에엣, 새, 생일?!”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날 뻔한 걸 어떻게든 막았지만, 큰 소리만은 집어넣지 못해서 어둥지둥 입을 막고 주위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오늘 제일로 충격적인 사실에 레이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에……에, 오, 오늘, 유키 군의……생일이야?”
“으음, 응.”
4월 1일, 예전에 누구한테 들은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잊었던 건 틀림 없다. 애인의 생일을 모르다니, 얼빠진데도 정도가 있다. 게다가 사치코는 알고 일부러 이런 준비를 해 줬는데.
알고 있었다면 온 힘을 다해 케이크를 만들었을 거고, 그것만이 아니라 요리도, 선물도 잔뜩 준비했을 텐데.
“저기, 레이 쨩, 신경 쓰지 마. 나, 생일 이야기 한 적 없었고……그리고 미안, 나도 레이 쨩의 생일, 아직 모르고.”
“아……으, 응.”
“그리고 경위는 어찌됐든, 이렇게 생일에 레이 쨩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굉장히 기쁘고. 거기에 더해, 이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고, 레이 쨩도 굉장히 예쁘고……불만은 아무것도 없어.”
“으, 응, 미안해.”
“그게 아니잖아, 레이 쨩. 나, 다른 말을 해 줬으면 싶어.”
“에?”
“그도 그럴게, 레이 쨩과 사귀기 시작한 뒤로, 첫 생일이니까.”
거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안 한 걸 깨달았다. 정말로, 왜 자신은 이렇게나 둔한 건지 고민하며, 그런데도 지금은 최고의 미소를 보일 때라는 건 이해하고 있으니까, 레이는 마음을 담아서 인생 최고라 할만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생일 축하해, 유키 군.”
“응, 고마워, 레이 쨩.”
“그래도 정말 미안해, 선물, 제대로 나중에 줄 테니까. 아, 그리고 케이크도 만들 거고.”
“응,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이, 일단 오늘은, 내가 선물이라는 걸로.”
사치코의 선물에 쓰여있던 걸 떠올리고 말했다. 남자같은 외모인 자신이 꾸며봐야 별 볼일 있을까 싶지만, 수많은 사람이 레이를 열심히 아름답게 꾸며준 거다. 자신을 가져야지.
“――――아, 으, 응.”
역시나 부끄러운 대사였는지, 유키 쪽이 당황한 듯이 눈길을 여기저기 옮기며, 뺨을 긁고 있다.
타이밍 좋게, 스프가 나왔기에 틈이 생긴다.
“포르치니 버섯과 머쉬룸 스프래. 맛있어 보여. 저기, 모처럼 좋은 기회니까 식사를 즐기자.”
눈앞에서 옅은 김을 내고 있는 스프의 냄새에, 늦게서야 배가 비어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도 그럴게, 사치코 집에서 홍차를 마신 뒤로 아무것도 입에 담지 않은 거니까.
“그, 그렇네, 응. 나, 테이블 매너같은 거 모르는데, 괜찮을까?”
“괜찮아. 나도 마찬가지니까.”
여기서 처음으로, 둘이서 자연스레 웃을 수가 있었다.
코스 요리는 정말로 맛있었다. 과연 얼마나 되는 걸까 하는 불안이 중간에 고개를 쳐들었지만, 사치코의 호의니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와규 필레 구이는 부드러우면서도 즙이 많아서, 곁들여져 나온 포아그라와 함께 먹자 색다른 맛이 느껴졌다. 디저트로 나온 젤라토는 어떻게 만든 건지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한 시간 반이 지나, 만족스럽게 식후의 허브티를 입에 담는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얌전히 사치코에게 감사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레이 쨩 말야.”
“왜?”
커피를 입에 담고 있던 유키가, 문득 뭔가를 떠올린 것 처럼 입을 열었다.
“처음에, 물건이 어떻다던가 말 하지 않았었나?”
“물건…………앗!”
그 말을 듣고 가게 사람에게서 물건을 건네받은 걸 떠올렸다. 지금 상황을 보면, 아마 유키에게 전하란 소리겠지. 혹시나 사치코가 준비해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가방에서 꺼낸 작은 꾸러미를 탁자 위에 두고, 슬며시 유키 쪽으로 밀었다.
“에, 나한테?”
“응.”
“열어봐도 돼?”
끄덕이자, 유키는 꾸러미를 꺼내 공들여 래핑을 풀어간다. 그 뒤에 뚜껑을 열자, 안에서 나온 물건은.
“…………열쇠?”
둘이서 그걸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잘 살펴보고, 지금 둘이 있는 호텔의 룸 키라는 걸 깨달았다.
“――――에?!”
거의 동시에 둘은 고개를 들고, 눈이 마주치자 똑같이 고개를 숙인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에……에, 에, 호텔 방 열쇠라니……사치코, 무무, 무슨 소리야? 그, 그보다 나, 처음에 “선물은 나”라고 말했었는데……에, 아니, 그 생각은 아니었어?!’
‘이건, 호텔 방 열쇠고, 그걸 레이 쨩이 건네 왔는데……혹시나 “내가 선물”이라는 건, 그, 그런 의미였나?! 에, 레알?! 어, 어쩌면 돼 나는?!’
둘 다 허둥지둥거리고 있다.
하지만 먼저 침착해 진 건 유키 쪽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상황은 사치코 씨가 꾸민 거라고 말했었지. 그렇다는 건, 이것도 사치코 씨가 생각한 거겠지. 레이 쨩이 직접 한 것 같진 않고, 실제로 저렇게나 당황하고 있고.’
“――이건, 사치코 씨의 장난이지? 우리를 놀리려고 하는.”
“…………에? 아……아아, 그, 그렇지! 그런가, 아―그런 건가.”
“정말, 사치코 씨도 의외로 장난스럽네.”
웃으며 농담으로 흘려버리려는, 유키의 배려.
안심하고 있는 한편, 그걸로 괜찮은가 싶은 자신이 있는 걸 깨닫는 레이.
사치코는 장난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레이를 생각하고 건네준 거겠지. 그렇기에 가게에서 옷이나 머리모양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전부 갈아입힌 걸 거고, 공들여 잔털 처리까지도 해 준 걸거다. 그건 즉, 애인끼리라면 이렇게 될 일도 있으리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저, 저기 유키 군. 그 방은, 스위트 룸이지? 잠깐, 어떤 방인지 보고 싶지 않아?”
“에? 그건, 뭐어, 보고 싶다곤 생각하는데.”
“잠깐 들러서, 보고 가지 않을래?”
☆
“우…………와아………….”
발을 디딘 순간, 그런 감탄 소리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옆에 선 유키도 마찬가지였다.
스위트 룸의 모습을 상상은 하고 있었지만,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방이었다.
넓이는 대체 어느정도인 걸까. 거실, 침실, 욕실로 구성된 방. 거실은 넉넉한 소파나 식탁, 50인치는 될법한 커다란 TV에 홈시어터 세트까지. 침실에는 거대한 더블침대가 둘이나 있었고, 그 외에도 워크 인 클로짓이나 드래서도 당연히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커다란 창문에선, 높은 층이다 보니 도시의 야경이 보인다. 레이는 창가로 뛰어가서 눈을 빛낸다.
“우와, 굉장해……레스토랑도 굉장했지만, 여기도 대단해!”
레스토랑에서 본 야경과는 각도가 달라선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아니, 스위트 룸이라는 건 이렇게나 대단한 거였구나. 뭐라고 할까……아무 말도 못하겠어.”
“정말로.”
둘은 나란히 서서, 한동안 말 없이 야경을 바라봤다.
‘덧붙여서 둘은, 이것도 절제해서 고른 거라는 걸 모른다. 다른 스위트룸은 역시나 훨씬 더 넓고, 확실히 안 쓸 방이나 물건이 있기에 사치코도 그만둔 거다.’
한동안 있다가, 문득 옆에서 눈길이 느껴져 바라보자, 허둥지둥 창으로 눈을 돌리는 유키의 모습이 보였다.
느낌이 왔다.
레이는 주뼛주뼛 유키의 손을 잡았다.
“유키, 군.”
슬쩍 아래를 보자, 상기된 유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유키의 손이 레이의 어깨에 놓이고, 레이는 이끌리는 대로 가볍게 몸을 굽혀, 입술을 겹친다.
아직 몇 번인지 셀 수 있을 정도의 키스.
“…………슬슬, 돌아갈까?”
입이 떨어진 순간, 애써 유키는 밝게 말하고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기, 기다려, 유키 군. 아직 막차까지는 시간이 남았고, 모처럼 온 스위트 룸이니까 좀 더 있다 가자.”
실제로 식사를 마치고 바로 온 거기에, 시간적으로는 늦었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레이는 비치되어 있던 기기로 드립커피를 솜씨좋게 만든 뒤, 거실 테이블에 2인분을 놓았다.
TV를 켤까 고민했지만, 모처럼 이런 기회니 방을 즐기고 싶어 그만뒀다. 호화스런 소파에 앉아서 둘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즐긴다.
그런 시간은 천천히 지나가는 것 같으면서 빨라서, 이윽고 정말로 막차를 신경써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레이 쨩, 슬슬 안 나가면 위험하니까.”
일어나는 유키.
뒤이어 일어난 레이를 보고, 유키는 조금 유감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안심한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을 약간 보였다.
“――유키 군.”
레이는 유키의 셔츠 소매를 살짝 집었다.
“……레이 쨩, 무슨 일이야?”
고개를 숙이면서도, 레이는 과감히 말했다.
“나, 나 말야. 오늘, 사치코네 집에 간다는 것 밖에 부모님껜 말 안했어.”
“――――.”
“유유, 유키 군은……안돼?”
“나……나는, 남자고, 코바야시네라도 묵었다고 하면……그래도, 레이 쨩.”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는 유키의 어깨에 탁 턱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나 말야, 오늘, 아마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에서 제일, 예쁜 모습이라고 생각해……그러니까……그………….”
그 이상은 더이상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었다.
과연 유키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해, 고개를 들어서 바라보고 싶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레이 쨩.”
그런 레이의 뺨에서 귀로 손을 옮기는 유키. 조심조심 고개를 들자, 눈 앞 가까이 유키 군이 보여서 레이는 눈을 감는다.
뜨겁고, 부드럽게 입술이 맞닿는다.
“응…………핫……아.”
혀가 안에 들어와, 레이도 거기 응한다.
처음 한 딥키스는, 몸의 심지가 저릴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레이 쨩. 나, 레이 쨩과 만나서, 세계 제일로 행복해.”
한 번 입술을 뗀 유키가 정면에서 마주 보며 말을 꺼내와서,
“아니야, 제일은 나인 걸.”
레이도 정면에서 유키를 바라보며,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최고의 미소를 보였다.
☆
다음 날, 오가사와라 저택에 돌아가자, 사치코는 새침땐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으려나, 내 선물은?”
“어땠다, 가 아니잖아. 정말, 완전히 당했어.”
오랜만에 들어온 사치코의 방에, 레이는 철푸덕 테이블에 뺨을 딱 붙이며 엎어진다. 시원한 감촉이 기분 좋다.
“그걸 보면, 놀래는데 성공한 모양이네.”
“그야 정말……그래도, 고마워.”
몸을 일으키고, 솔직히 인사를 한다.
사치코가 참견해 주지 않았다면 사귀고 처음 맞는 유키의 생일을, 그렇게나 멋지게 보낼 수 없었다. 레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유키의 생일을 모르고 지나갔다간 굉장히 침울해졌을 거고.
“즐겨 준 모양이라 잘 됐어. 호텔도 멋졌지?”
“아, 아아……으, 응.”
화악, 뺨을 붉게 물들이는 레이.
“고, 고마워. 사치코가, 그런 걸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지만……덕분에, 에헤헤…….”
“멋졌지? 그 호텔에서 보는 야경은. 레이와 유키 군은 꼭 그 야경을 봐 줬으면 싶어서 선물한 거야.”
“응, 굉장히 예뻤어…………응? 그게 다야?”
“그게 다냐니, 뭐가?”
“에, 그러니까, 야경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그 호텔 방은.”
“맞아. 그 외에, 뭐가 있다는 거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치코.
잘 생각해 보면 남녀의 연애사나 성지식에 대해선 동년배의 일반적인 여자들보다 한참 부족한 사치코. 거기에 더해 남성 혐오증에 결젹븡이기도 하다. 아무리 레이와 유키의 사이를 축복해 준다고 해도, 갑자기 호텔 방을 “그런 의미”로 제공해 주는 건 부자연스러운가.
고급 호텔 스위트 룸이고, 침대도 2개 있었으니, 굉장히 평범하게 무드가 있는 하룻밤을 보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게 사치코 답다. 실제로 혹시나 남녀 사이의 행위에 대해 생각했다고 하면, 이렇게 태연히 있을 수 있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받은 입장에선 정식으로 사귀고 있는 남녀가 호텔 방에서 밤을 보내는 상황이면, 떠올릴만한 생각은 하나밖에 없다.
“……왜 그래, 레이. 얼굴이 새빨간데, 방이 덥니?”
“아, 아니, 그런 게 아냐, 괜찮아!”
“그래? 이상하네.”
사치코의 이 모습을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결백해 보인다.
역시, 둘이 형편 좋게 해석했던 거다.
하지만.
슬쩍 사치코의 얼굴을 보자, 이상하다는 듯이 마주 바라봐서 왠지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고마워, 사치코. 사치코가 친구여서 정말 좋았어.”
마음속 깊숙히 그리 생각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말이야. 감사히 생각하렴.”
잘난 듯 말을 하는 모습도, 어딘지 수줍음을 감추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런 사치코도, 내가 친구라서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뭘 부끄러운 소릴 하는 거야.”
“또 또, 부끄러워하긴.”
“부끄러워하는 거 아냐.”
입을 빼죽이는 사치코를 보고, 웃음을 참는다.
사랑스런 친구에 소중한 애인, 그런 얻기 힘든 존재가 둘이나 있어 줘서, 레이는 정말로 자신이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