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인연
Prologue. 요리 예찬
1장. 요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
2장. 반쪽짜리 마법사와 허세부리는 여관주인
3장. 어브노말계 서버
4장. 내 주방보조와 서버알바가 완전 수라장
5장. 요리와 나의 어사일럼
Epilogue. 셰프와 향신료
작가 후기
1장. 요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 (5)
요정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보다 1년 전에 먹은 내 음식이라고? 1년 전, 나는 이탈리아나 프랑스를 돌아다니며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얘를 만났다고? 고개를 살짝 들어서 오필을 보았다. 하늘색 눈동자.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어디서 본 느낌이 드는데.
어디였지? 뭔가 생각이 날 것 같다. 이 파란색의 눈동자는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떠올렸다. 1년 전에 비가 내리던 그 날. 비가 멈추고 식당에 찾아온 거지 소녀. 그래, 맞아. 확실히 그때, 그 여자애랑 오필은 똑같이 생겼다.
“그래. 맞아. 그때, 걔가 나야. 원래는 당신의 스승을 모시려고 했지만, 당신의 음식을 먹고 생각이 바뀌었어. 하시연. 내게는 당신이 필요해. 세상을 구할 영웅이 말이야.”
세상을 구할 영웅이라니. 쓸데없이 거창하다.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말이지. 그리고 뭣보다 요리로 세상을 구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거절을 할 수는 없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하였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있지?”
“물론.”
고개를 끄덕인 뒤에 이어 오필은 나를 가리켰다.
“차원 이동은 신 고유의 영역이야. 그리고 신의 힘은 신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강해지는 법. 즉, 유레이니아에서 당신의 요리를 먹고 요리의 신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포인트가 늘어나고, 일정 포인트를 채우면 당신을 돌려보내 줄 수 있어.”
“그 말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내 요리를 먹여야 한다는 거네.”
“정답이야.”
요정이 씨익, 하고 웃었다. 기분 나빠. 생각보다 돌아가는 방법은 쉽다. 그런데 차원 이동에 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건……. 오필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요정이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맞아. 당신의 생각대로 내가 바로 이 유레이니아에 존재하는 요리의 신, 오필이야.”
위엄 넘치는 표정을 한 요정에게 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아니, 날파리가 뻗대고 빛나봐야 별로 위엄이 넘치지 않으니까. 오히려 성가시다.
“실례야.”
빛이 꺼지고 요정이 늘어졌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도 있네.
“어쨌든 나는 당신을 이곳으로 일방적으로 데려왔어. 설명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말이야. 그 점은 분명 내가 당신에게 민폐를 끼친 거야. 가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영구적이게 만들어줬다고 해도, 당신에게 유레이니아의 모든 언어를 알려줬다고 해도.”
“그건, 아니 잠깐.”
가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영구적이게 하고 모든 언어를 알려줬다고?
“그래. 당신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어? 생전 처음 보는 언어를 듣고, 말하고.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말이야. 정말 둔하네. 그건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매우 불편할 것 같기에 내가 당신에게 걸어준 축복이야. 그리고 서비스로 가방 안에 있는 것들 또한 내 축복으로 영구적으로 상하지도, 녹슬지도, 이가 빠지지도 않을 거야.”
그것 참……. 편리하네.
“그러네. 굉장히 편리하지. 이게 다 내가 당신을 아끼니까 해준 거야.”
“그런 게 가능하면 그냥 보내주지?”
“그건 무리야. 지금의 나는 당신을 데려오느라 모든 힘을 사용해서 더 이상의 힘이 없어.”
침울한 표정과 함께, 요정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후우,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네. 머리를 긁었다.
“그래서 사과했잖아.”
“사과한다고 다 끝나면 경찰이 왜 필요하겠니.”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야. 음, 그러면 이렇게 하자. 당신이 유레이니아에 요리를 전파해준다면. 내가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줄게. 돌아가는 것과 별개로. 내 이름을 걸고 말이야.”
(책임), (진실), (약속).
어디서 꺼냈는지 요정이 세 가지의 단어가 적힌 종이를 펄럭였다. 소원을 이루어주겠다고? 잠시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 남이 이루어주는 소원 따윈 아무 쓸모도 없다. 소원은 내 손으로 이뤄야만 한다. 나는 그것을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배웠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오필이 말하였다.
“당신은 나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인간이네.”
짝짝짝, 요정이 박수를 쳤다. 시끄럽긴.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하였다.
“당연하지.”
그래, 난 강하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포기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나의 부탁은 들어주는 거야?”
“그거밖에 방법이 없으면서 무슨 소리를.”
한숨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는 곳은 이세계. 아는 사람은 전무. 일하는 곳은 허름한 여관. 끌고 온 것은 요리의 신이라.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잘 부탁할게, 하시연. 당신이라면 가능하겠지?”
그 말을 끝으로 오필은 사라졌다. 오필이 있던 자리를 보다가, 계단을 올라 미쉘씨가 배정해 준 방으로 향했다. 내일부터는 바빠질 테니 일찍 자야한다. 요리를 배척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요리의 훌륭한 점을 알려주려면 무지 힘들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스승님도 말했지만 요리를 알려주는 것은 결국, 요리사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2장. 반쪽자리 마법사와 허세부리는 여관주인
요리사의 아침은 빠르다. 가게를 청소하고, 식재료를 받아서 손질한다. 그리고 편하게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또한 필수다. 즉, 내 몸은 훌륭하게도 새벽에 기상하는 습관이 들어버렸다는 거다.
직업을 찾은 뒤 첫날. 졸린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향했다. 미쉘씨가 설명해준 대로 빛나는 공을 천장에 붙였다. 정령이 들어있다던가. 마찬가지로 정령이 들어있는 방울버튼을 눌렀다. 물이 콸콸 쏟아진다. 으음, 역시 뭔가 신기하다.
3일, 아니 4일 만에 제대로 씻는 건가. 오랜만에 씻으니 기분이 굉장히 상쾌하다. 수건처럼 보이는 헝겊으로 물기를 닦은 뒤에, 벗어놨던 옷을 다시 입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현재 입고 있는 옷은 교복, 그것도 동복이다. 숲을 헤맨 덕에 더럽고 꼬질꼬질해서 상당히 찝찝하다.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보니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옷을 갈아입을까? 가방에 있는 옷을 떠올렸다가 포기하였다. 조금 있다가 미쉘씨가 일어나면 입을 만한 옷을 달라고 말해봐야지. 없으면 월급에서 제외하는 대신 한 벌 사달라고 하거나. 방으로 돌아와서 잠시 방을 정리하고 가방에서 장비들을 챙겼다.
주방으로 내려간 뒤에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면 일단 청소부터 시작할까.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청결이다. 세균, 곰팡이, 기름 자국 등. 이런 것이 생기면 쥐와 바퀴벌레가 생기기 십상이다. 그러니 그때그때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은 당연. 물로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도 필수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바닥을 쓸고, 물에 젖은 걸레와 마른걸레로 바닥을 청소. 물론 요리를 할 공간도 행주로 깨끗하게 청소를 한다. 청소를 끝낸 물을 버리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니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내가 이세계로 왔다는 느낌이 한층 더 강해졌다.
잠시 하늘을 구경하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주방에 있는 식재료는 굉장히 부실했다. 어제 봐서 알고 있긴 했지만 이건 좀 심각하다. 닭은 다 사용했고 향신료를 제외하면 쓸 만한 재료라고는 밀가루, 버터, 올리브유, 감자, 당근. 생강, 양파 정도인가. 심지어 당근은 얼마 남지도 않았다.
이거 너무한데. 주재료가 하나도 없잖아. 포기하지 않고 주방을 조금 더 살펴보니 페페론치노와 비슷한 고추, 우유와 치즈, 그리고 계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재료가 없으니 스튜 종류는 무리고. 밀가루랑 계란이 많으니 이걸로 파스타 생면을 뽑아서 알리오 올리오를 할까. 그 외에 같이 내놓을 요리들을 떠올렸지만, 재료가 없으니 무리다. 역시 시장에 가봐야겠다. 이곳에는 어떤 식재료가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알리오 올리오는 마늘과 올리브 오일이란 뜻으로, 말 그대로 마늘과 올리브 오일로 만드는 이태리 전통 파스타다. 만들기도 쉽고 재료도 별로 안 들어가는데 맛은 생각보다 좋아서 집에서 간단히 해먹기 좋다.
면을 만들기 위해 둥그런 형태의 솥을 꺼낸 뒤, 그곳에 밀가루를 담는다. 어제 루를 만들 때도 생각했지만, 이곳의 밀가루는 한국에서 쓰던 밀가루보다 색깔도 진하고 입자가 거칠다. 세몰리나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솥에 담은 밀가루의 가운데를 비워두기 위해 양옆으로 몰아넣었다. 파스타 생면을 만드는 법은 굉장히 간단하다. 비워놓은 가운데에 계란을 깨서 넣으면 반죽에 필요한 준비는 끝. 이제 필요한 곳은 반죽을 치대는 것뿐.
큰 원을 그리듯이 저어주며 밀가루와 계란을 섞다가 어느 정도 반죽이 뭉치면 손바닥으로 손빨래하듯이 동그란 반죽일 될 때까지 치댄다. 손에 체중을 실어서 힘껏. 힘껏 치대다가 반죽의 표면이 마치 여자 가슴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워지면 완성이다. 물론 만져본 적은 없지만. 스승님이 말했으니 비슷할 거다. 그때 스승님이 만져보라고 했을 때 만져 볼걸.
어쨌든 완성된 반죽은 랩으로 싸서 휴지시켜야 하는데…. 여기에 랩이 있을 리는 없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가방에 마트에서 샀던 쓰레기봉투 있는 것이 떠올랐다. 방으로 가서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그걸로 솥을 감쌌다.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새것이니깐 괜찮겠지.
반죽을 휴지시키는 동안 알리오 올리오의 밑 재료인 마늘을 손질한다. 다른 것을 손질하고 싶어도 알리오 올리오 자체가 이것만 하면 끝이니 별로 할 게 없군. 나중에 시장을 가서 필요한 재료를 찾으면 저녁 메뉴에 추가하든가 해야겠다.
“아, 연. 자네, 벌써 일어났나?”
한참 마늘을 손질하는데, 미쉘씨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연. 내 본명 하시연을 듣고 발음하기 어렵다며 이름의 끝만 부르기로 하며 붙은 애칭이다.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한테 애칭으로 불리다니. 어쩐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들었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하니,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빨리 일어나셨네요, 사장님.”
“사장님……?”
“고용해주셨으니 사장님이죠.”
“음, 그건 그렇군. 사장님이라. 듣기 좀 그렇군. 그냥 이름으로 부르게.”
미쉘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장이라는 호칭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군.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건 지금 뭘 하는 건가?”
“점심 메뉴 때문에 마늘을 손질하고 있어요.”
“흐음, 그런가. 상당히 부지런하군.”
“이 정도는 기본이죠.”
마지막 마늘의 껍질을 벗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허리야. 아직 그렇게 나이를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허리가 아프다니 이거 큰일이다.
“아, 그런데 미쉘씨. 혹시 나중에 시장 좀 데려다줄 수 있으신가요?”
“시장? 거기는 무슨 일로?”
“식재료가 다 떨어졌더라고요. 그리고 이왕 사는 거 구경 좀 하고 재료를 사게요.”
“식재료라. 하긴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니 그게 좋겠군.”
“……손님이요?”
미쉘씨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