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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유급생활은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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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계 싫어하시는 분들은 읽지 않는게 좋습니다.

죠죠러 속성 주의.



1화


어둠으로 점철된 중학교시절을 끝낸 나지만, 고등학교 시절은 더 큰 어둠 속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이다.

고등학교만큼은 어떻게든 상쾌한 리얼충 라이프에 편입되고자 하는 각오도 무색.

입학 첫날에 차에 치이려던 강아지를 구하다가 크게 다치고 말았다.

척추를 다쳐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됐을 때는 절망했다.

성인의 유해도 없는 세계.

현대 일본에서 말 타고 다닐 수도 없다.

황금장방형의 회전? 그딴 게 될 리 없잖아.

 

불행중 다행으로 오랜 재활을 끝내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숨 돌렸다고 할까.

 

대가로 나는 출석일수 미달로 인해 유급을 하게 되었다. 등가교환이라는 거다.

 

그리하여 소부고에서의 내 두번째 봄은 다시 1학년이 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진학고에서 출석일수 미달로 유급하는 녀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희귀한 케이스인 나는 당연스럽게도 학급과 괴리되어 있다.

같은 학급의 녀석들은 내게 말을 걸어주는 일은 없다.

물론 나 역시 녀석들에게 말을 걸 수는 없다.

정말이지. 최악의 고등학교 생활이다.

 

내 인생을 수치로 표현하자면 마이너스겠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대신 공부할 시간이 많아졌다.

정확히는 공부밖에 할 수 없는 거겠지.

유급한 녀석이 쉬는시간마다 자는 척하는 건 눈총을 받는 일이다.

안 그래도 유급 이유에 대해 아는 녀석이 없을 것 아냐.

같은 학급의 녀석들에게 불량학생이나 집단괴롭힘으로 인해 등교거부를 했던 녀석이라고 오해받긴 싫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공부다.

특히 수학이 마음에 든다. 어려우니까 공식을 외우거나 문제를 풀다보면 시간이 메이드 인 헤븐이 발동한 것처럼 가속해서 휘리릭 지나간다.

이런 식으로 졸업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흘려보내자는 것이 내 고교생활의 방식이자 목표.

 

그러던 나날이었다.

점심시간, 특별동의 1층 보건실 옆. 매점의 뒤쪽. 테니스 코트가 보이는 자리에서 나는 항상 그렇듯 가볍게 점심을 떼우고 참고서를 보고 있는 중이다.

이곳은 사람이 거의 오지 않아서 좋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베스트 플레이스라고 부른다.

 

격렬한 기쁨은 필요없는, 그대신 깊은 절망도 없는, 식물의 마음같은 학교생활이 나의 목표. 빨리 졸업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서 다시 참고서에 의식을 집중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로 유추해보건대 인원은 두명인가.

아마도 어디 쉴 곳을 찾는 모양이다.

가끔 가다가 있는 일이다.

나를 발견하곤 어디론가 가겠지.

 

다시 참고서에 의식을 집중하려는 그때, 사람의 그림자가 참고서를 가린다.

뭐지? 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앞에는 한명의 여학생이 서 있었다.

 

짧은 스커트에 세개 정도 윗단추가 풀려있는 블라우스. 하트 모양의 목걸이. 벚꽃빛이 감도는 갈색의 당고머리. 귀여운 얼굴. 한눈에 봐도 잘 노는 여자애다. 그러니까 나의 간단한 사람 분류법에 근거하자면 「빗치」다.

 

그리고 이 녀석의 뒤에는 살짝 거리를 두고 서 있는 흑발의 여학생이 있었다. 차가운 눈동자와 흰 피부. 만약 설녀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이미지일 것이다. 교칙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 복장으로 보아, 이 빗치같은 녀석과 어울릴 만한 녀석은 아니다.

 

제3자인 내가 이 녀석들의 교우관계에 이러쿵저러쿵 따질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둘이서 남들이 들으면 곤란한 대화라도 하기 위해 한적한 장소를 찾아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이곳은 만원이다. 다른 곳으로 가봐.

 

나는 신경을 끊고 다시 참고서로 시선을 옮긴다.

 

“...저, 저기...”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티가 역력한 목소리로 빗치 녀석이 말한다. 너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 거야? 설마 나?

같이 온 녀석에게 말하는 것일 수 있으니까 괜히 대답해서 창피하는 일은 없도록 나는 조심스럽게 눈만을 움직여 시선을 그쪽으로 옮긴다.

 

빗치는 뒷짐을 쥐고 선채, 빨갛게 한 얼굴을 내게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둘이서 할 말이 있으니 나보고 이 자리에서 떠나달라는 요구라도 할 모양인가. 빗치주제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거보니 일말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안 떠나. 왜냐면 여긴 내가 먼저 왔다고. 비켜줄 의무도,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 녀석에게 남에게 저리가라고 할 수 있는 권리따윈 없다.

 

“왜?”

 

나는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데로 가달라는 소리를 들으면 무시해버린다는 답을 정해놓고.

 

​“​우​.​.​으​으​.​.​.​여​,​ 역시..내..내겐 무리야...이런 거...어울리지도 ​않​고​.​.​.​아​하​하​.​”​

 

빗치는 내 경계심을 눈치챈 모양인지 움찔하며 놀라더니 이윽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선다. 생긴 것에 비해 무척이나 소심한 녀석이군. 말도 제대로 못 꺼내다니.

가라. 운동장이 넓잖아.

녀석은 천천히 뒤로 물러서선 같이 온 설녀 녀석의 옆에 바싹 달라붙는다.

나는 다시 시선을 참고서로 옮긴다. 내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면 이제 가겠지.

 

“유이가하마양.”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설녀 녀석의 목소리겠지. 외모처럼 말투도 차갑군.

 

​“​우​.​.​으​.​.​알​았​어​.​ 유키노시타양. 할게.”

 

그 목소리에 빗치의 주눅든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빗치의 이름은 유이가하마고, 설녀의 이름은 유키노시타인 모양이다.

쓸데없는 정보를 습득했다. 얼른 삭제해버려야지. 내 뇌용량은 수학공식이나 원소의 특징, 역사연표를 외우는 것으로도 벅차다고.

 

“저, 저기....”

 

빗치가 설녀의 압박에 의해 다시 내 앞으로 걸어와 말을 건다. 친구가 아니라 설녀의 부하라도 되나? 아니면 이지메? 이 녀석 생긴 것과 달리 불쌍한 녀석이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불쌍한 녀석이니 비켜달라면 비켜줘야겠다.

잠깐만. 비켜주면 저 설녀한테 괴롭힘 당하는 거 아냐?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그렇게 고민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빗치가 불쌍한 느낌이 들어서 경계심을 낮춘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자 빗치가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정말 소심한 녀석이네. 어쩔 수 없이 내가 떠나줘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였다.

 

​“​.​.​쿠​.​.​쿠​키​.​.​.​”​

“...뭐?”

 

잘못 들은게 아닌가 싶어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러자 빗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어왔다. 녀석의 손에는 래핑처리된 검게 탄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뭐야?”

​“​저​.​.​.​저​기​.​.​.​쿠​키​를​.​.​.​.​먹​어​.​.​.​”​

 

빗치의 목소리는 작게 꺼져들어가서 그 뒷말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쿠키라는 단어 하나만큼은 어떻게든 알아들었다. 나는 슬쩍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뒤에선 설녀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렇군! 이건 벌게임이다. 중학교때의 악몽이 다시 시작될 줄은....

 

그렇다고 해도 너무하지 않나. 중학교때는 내 착각과 오해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고등학교에서는 조용히 지냈는데 어째서 내가 벌게임용도로 이용되는 거야?

이 학교 유일의 유급이라는 점 때문일까?

아니면 같은 중학교를 나온 녀석들이 내 과거를 퍼트리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둘다일지도.

어쩌면 이 두 녀석 중 한 명이나, 두명 다 나와 같은 중학교 ​출​신​일​지​도​.​.​.​.​.​.​.​

이런 일이 벌어질까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소부고에 들어왔건만!

 

과거는 산산히 부숴버려도 돌바닥 아래에서 지렁이처럼 기어나온다는 게 이런 걸까.

 

그렇다고는 해도 빗치도 참 불쌍한 녀석이다. 검게 탄 이 쿠키라고 주장하는 물질을 보면 아마도 직접 만든 거겠지.

수제쿠키를 학교의 웃음거리인 녀석에게 전해준다니....

저 뒤에 서 있는 설녀 녀석. 성격 엄청 나쁘구나. 너무 질이 나쁘지 않냐.

이 빗치도 화가 나서 대충 만든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새까맣게 타버렸지.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을....

그러나 이런 괴롭힘은 내가 거부하거나 도망가거나 무시하면 더 엄청난 꼴을 당한다. 약올라서 더욱 악랄한 짓으로 괴롭혀 온다. 출처는 나.

 

역으로 생각하는 거다. 「괴롭힘 받아도 돼」 라고....

 

그렇다면 이 녀석들이 나에게 엄청난 혐오감을 느껴 두번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쓰도록 하자.

 

나는 빗치녀석이 덜덜 떨면서 내민 쿠키를 낚아채고선 빠르게 래핑을 풀어버린다. 그리고 단숨에 입안에 털어넣는다.

 

“맛있어.”

“어, 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뒤에 서있던 흑발의 녀석도 놀라고 있다.

「미각이 이상한 자식!」 이라든가, 혹은 「뭐야! 기분 나빠! 왜 이렇게 기뻐하면서 먹는 거야! 나한테 마음 있는 거야?」 라는 식으로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그 생각은 끝이 없는 혐오감으로 이어진다. 두 번 다시 내게 접근할 생각을 못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나한테 고백을 받거나 스토킹당할 수도 있으니까.

좋아. 여기서 결정타를 날리자.

지금부터 할 말은 아무리 흑역사로 단련된 강자인 나라고 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다.

각오를 정하고 내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미소를 지어보인다.

 

“맛있는 쿠키를 먹게 해줘서 고마워. 유이가하마양.”

“어..어?! 어어?!! 으, 응! ​힛​키​는​.​.​.​.​내​.​.​이​름​.​.​.​알​고​ 있었구나...”

 

몰랐어. 알게 된 건 너희의 대화 때문이라고.

그런데 힛키는 누구야? 역시 나인가?

내가 유급당한 이유가 역시 등교거부인 걸로 알려져 있던 거냐!

히키코모리로 인식되고 있는 거냐고!

히키코모리를 줄여서,  『힛키』! 그런 거냐!

나도 모르는 새, 치욕적인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니.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습득했다.

 

빗치의 얼굴은 아까보다도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 봤을 때의 상기된 얼굴은 나같이 기분 나쁜 녀석에게 벌게임으로 쿠키를 주는 행위에 수치심을 느껴서였겠지.

그리고 지금은 분노와 혐오와 같은 감정에 지배받고 있을 것이다. 「너같은 녀석에게 이런 징그러운 말을 듣다니 정말 기분 나빠!」라고.

 

그러나 나도 지금 심히 불쾌한 감정이라고. 벌게임용으로 이용당하거나 힛키라는 심한 별명으로 불렸잖아.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봤자 상황은 바뀌지 않겠지. 오히려 힛키라는 유급생녀석이 이 빗치를 괴롭혔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그건 좋지 않아. 순간의 감정을 못 이긴 탓에 더 나락으로 빠질 순 없다.

대신 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럼 난 이만.”

 

점심시간도 다 끝나갈 시간이니 타이밍도 나쁘지 않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베스트 플레이스에서 퇴거한다. 조금이라도 오래 있으면 곧 저 녀석들의 매도를 듣게 될 수 있으니까. 아무리 나라도 그런 불합리한 정신폭력은 견디기 어려우니 여기선 전략적 후퇴다.

뒤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정신건강에 좋은 소리는 아닐 거다. 못들은 걸로 하자.

 

이제 두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그건 너희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너희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 내가 누군가를 괴롭힌 적이 있었지. 라는 과거를 상기하고 괴로워할 수 있잖아.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내라고.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나 정말 비참하네.

역시 내 청춘...아니, 인생은 잘못됐다.

 

 

 

 

벌게임으로 이용된 더러운 경험을 겪고난 뒤, 며칠 후의 점심시간, 나는 여전히 베스트 플레이스에 앉아있다. 그 뒤로 빗치와 설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도 빗치는 설녀에게 그런 최악의 벌게임을 시키는 건 너무 심했다고 화를 냈겠고, 설녀는 미안하다고 했겠지.

이런 걸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래. 길 가다가 똥이라도 밟는 날도 있는 거야.

그 일은 그때 끝난 거야. 고로 두번 다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가라! 액시즈! 불쾌한 기억과 함께!

 

뇌에 불쾌한 기억에 대한 삭제명령을 내리고, 나는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점심을 해결하고 공부를 한다. 고등학교는 틀렸으니 빠르게 날려버리고 대학생활이나 준비하자. 재수는 절대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현역으로 대학을 입학해도 재수를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단 한번에 현역으로 대학에 입학해야한다.

나 히키가야 하치만에겐 꿈이 있어!

 

“어? 힛키다.”

 

야생의 빗치가 나타났다! 이제 겨우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는데 왜 또 나타난 거냐 넌?!

그때의 녀석과 동일인물이 맞나싶을 정도로 빗치는 명랑한 모습을 하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이게 평상시의 모습일 것이다. 벌게임을 당할 때는 싫은 티가 역력하더니만.

그리고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으니 나같은 녀석한테 말을 걸어도 이상한 소문이 날 부담도 없겠지.

 

“왜 이런데 있어?”

 

나는 대답대신 참고서를 살짝 들어보인다. 너하곤 얘기하기 싫거든.

 

“아, 그렇구나. 왜? 교실에서 공부하면 되잖아.”

 

사정은 대충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교실에서 공부할 수 없어서 이런데서 공부하네. 기분 나빠!」라는 의미가 분명하다.

내가 네게 뭘 잘못했는데 이러는 거냐?

전의 벌게임에서 너에게 마음있는 척 군게 그렇게 기분이 상할 일이었냐?

시비는 네가 먼저 걸어왔겠지!

하지만 이런 머리 빈 빗치녀석이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따질 리 없다. 그저 내가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겠지.

나는 이 녀석을 쫓아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몰라. 까먹었다.

 

“그건 그렇고 넌 왜 여기에 있냐?”

 

용무가 없으면 꺼져달라는 뜻을 돌려 말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앙심을 품고 복수하러 올지 모르잖아.

 

“아, 맞아! 그게말야, 유키농이랑 가위바위보 했는데 져버려서, 벌게임을 하고 있거든.”

 

또 벌게임이었냐.

이번에는 나에게 말 거는 걸로?

그나저나 유키농이 누구야? 그때의 그 설녀 말하는 건가. 너 그 녀석에게 괴롭힘당하고 있는 거 아니냐? 더 늦기 전에 학생지도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상담해라.

그렇지만 나한테 직접 벌게임이라는 걸 밝히다니.

기분이 나빠서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밖으로 나온다.

 

“내게 말 거는게 ​벌​게​임​이​구​나​.​.​.​”​

“아, 아냐! 진 사람이 쥬스를 사오는 것 뿐이야!”

 

빗치는 내 말에 황급하게 손을 내저으면서 변명한다. 변명해도 소용없다. 네 멍청한 머리의 탓인지 가벼운 입 탓인지 모르겠다만 넌 이미 벌게임이라고 말했다고!

게다가 나한테 수제쿠키를 건네주는 벌게임을 하는 녀석들이 고작 쥬스를 사오는 시시한 일을 하겠냐.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은근슬쩍 빗치가 내 옆에 앉는다.

왜 내 옆에 앉는 거냐? 기분 나쁜 녀석이잖아? 난?

아! 그런가? 수제쿠키를 주는 고난이도의 벌게임을 하는 녀석들이다.

고작 말 거는 것 가지고 벌게임을 할 리는 없다. 즉, 이번의 벌게임은 내 옆에 앉는 것인 모양이다.

역시 너 괴롭힘당하는 거 아니냐? 그 설녀는 네 친구가 아닌 것 ​같​은​데​.​.​.​.​.​.​.​

 

“유키농, 최근은 「자기 식량정도는 자신이 구해. 이런 행위로 자신의 정복욕을 채우는 게 뭐가 즐거워?」같은 말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지​만​.​.​.​.​.​.​.​”​

 

녀석은 나와는 하등 관계 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자신없어?」 라고 부추겼더니 하더라구.”

 

내 대답은 상관 없이 녀석은 제멋대로 떠들고 있다. 게다가 내용도 자기가 상대방을 농락했다는 거짓말이다.

 

이제야 이 녀석의 오늘 벌게임 내용을 잘 알 것 같다.

아마도 내 옆에 앉아서 대화를 하는 것이 벌게임인 모양이다.

누가보면 오해하기 좋은 모습이라고? 엄청난 고난이도잖아. 역시 너 괴롭힘당하고 있구나.

 

이 녀석도 나하고 대화하기 싫으니까 제멋대로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내용을 떠들고 있다. 그 와중에 은근히 그 설녀를 깎아내리는 걸 보니 너도 그 녀석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로군.

 

“그래서, 유키농이 이긴 순간에, 말없이 주먹을 가슴에 대면서 좋아했는데, 그거 엄청 귀여웠어....”

 

전언철회. 이 녀석은 그쪽 세계의 녀석인 거 같다. 지금 기뻐하는 저 얼굴은 거짓이라고 하기엔 너무 감정이 드러나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백합적인 의미로 그 설녀를 좋아하고, 설녀는 백합적으로 다가오는 이 녀석을 쫓아내기 위해 괴롭히고 있는 상황인 모양이다.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따질 수 없구만. 그렇지만 내가 왜 너희의 그 복잡한 관계에 휘말려야할 이유는 없겠지? 어째서 나를 이용하고 있는 거냐. 그 설녀자식.

 

네 문제 해결은 틀렸어! 이 녀석이 벌게임으로 인해 나에게 접촉할 때마다 더더욱 남자를 싫어하고 여자를 더더욱 좋아하게 될 거 아니냐! 게다가 나도 너희때문에 점점 여자가 싫어지기 시작했어!

 

이러면 전업주부가 된다는 꿈을 자택경비원으로 바꿔야 할 지 모른단 말이다.

 

한참을 혼자서 신나게 떠들던 빗치녀석은 갑자기 차분한 어조로 질문해 왔다.

 

“...저기, 입학식날 있었던 일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다마다, 내가 유급하게 된 결정적 이유니까. 아니지, 이 녀석의 질문은 입학실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모양이다.

 

“올해 입학식? 별 일 없었는데.”

“그게 아니라...작년 말하는 거야.”

 

이 녀석. 내가 유급생인 걸 노리고 일부러 기분나쁜 질문을 해오고 있군. 하지만 단련된 강자인 내가 화를 낼 거 같냐. 그리고....

 

“난 그날 교통사고당하는 바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데.”

“사고....”

 

빗치녀석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진다.

그래. 이 기회에 이 녀석에게 내가 유급당한 이유가 폭력사건이라든가 등교거부같은 이유가 아니라는 걸 밝히자.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내가 불쌍한 녀석이라는 걸 알고 더 이상 접근해오지 않겠지.

 

“어떤 여자애가 자기 개를 놓쳐버렸던가? 그래서 개가 차에 치이려고 했거든. 내가 뛰어들어서 개를 구하고 대신 차에 치였지.”

“어떤 여자애.... 히, 힛키는 그 애 기억 못하는 거야?”

“차에 치이자마자 의식을 잃었다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런 상황에서 기억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 그렇구나.”

“덕분에 하반신 마비가 와서 재활기간때문에 유급해버렸다고. 의사말로는 나이도 어리고 운이 좋은 케이스라 재활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더군. 자칫했으면 평생을 휠체어를 타고 살 뻔했어.”

 

내 말에 빗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걸 넘어 흙빛이 되었다.

 

“......그, ​그​랬​구​나​.​.​.​.​몰​랐​어​.​.​.​”​

 

빗치는 양심이 찔린 모양인지 테니스코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제 알았겠지? 이렇게 불쌍한 녀석이니 너희 벌게임 용도로 쓰는 건 그만두라고. 그 설녀에게도 똑바로 전해줘!

 

​“​그​.​.​.​그​럼​.​.​.​힛​키​.​.​.​몸​이​ 많이 불편한거야? 그래서....”

 

히키코모리가 된 거야? 라고 말할 것 같아서 얼른 말을 잘랐다.

 

“아니, 지금은 멀쩡해.”

 

오히려 사고 당하기 전보다 몸이 더 튼튼해졌지. 의사가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나이먹어서 후유증으로 고생할 수 있다고 말해서 운동은 열심히 한다고.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서 조깅을 하고 하교 후엔 근처의 스포츠 센터에서 운동을 한단 말이지.

 

“그, 그래. 다행이구나...”

 

빗치녀석의 목소리엔 어딘가 울음이 섞인 느낌이 들었다. 의외로 감수성이 풍부한 성격인가보지? 알아들었으면 이젠 다시 벌게임 용도로 날 쓰진 말라고.

 

“안녕. 유이가하마양.”

 

마침 테니스코트에서 여자 테니스부원이 이쪽으로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 빗치랑 아는 사이인가?

 

“안녕. 사이쨩.”

 

빗치도 손을 흔들며 녀석에게 답례 인사를 한다.

 

“연습이야?"

“응. 우리 부, 엄청 약하니까 점심에도 연습 해야되거든. 점심에도 사용하게 해 달라고 계속 부탁했더니 최근 드디어 OK사인이 났어. 유이가하마양이랑 히키가야군은 여기서 뭐 해?”

 

어라. 이 여자애 내 이름을 알고 있네?

 

“그냥 앉아 있어.”

 

빗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사이쨩. 수업에서도 테니스 하는데 점심에도 연습하는구나. 힘들겠네.”

“아니, 좋아서 하고 있는거니까. 그런데 히키가야군이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하는 건 처음 봤어.”

 

응? 이 녀석 나 알고 있나? 빗치는 2학년인 건 교복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녀석은 체육복을 입고 있어서 몇학년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로 친하게 말을 주고받는 걸 보면 2학년인 것 같군. 나는 유급해서 너와 같은 학년이 아닐텐데?

 

“너 누군데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그러자 테니스부의 녀석은 시무룩해졌다.

 

“아하하... 역시 내 이름 모르는구나. 토츠카 사이카라고 해. 히키가야군하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에헤헷, 나 존재감 엷으니까....”

 

역시 2학년이었나.

 

“작년엔 나 출석일수 미달이었으니까.”

 

당시에 유급이 확정된 마당이라 같은 학급의 녀석을 기억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다른 학년이 될 녀석들이니까. 라는 건 변명이고 지금도 같은 학급의 녀석은 한 명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내 성격상 유급하지 않았어도 몰랐겠지.

 

“그랬었지. 미안해. 히키가야군. 민감한 얘길 꺼내서.”

“아냐. 어차피 나 여자애들하고는 얘길 잘 안 하니까.”

 

내 말에 토츠카가 흠칫하더니 날 바라본다.

 

“나, 남잔데.... 그렇게 보여?”

 

남자...라고? 내가 놀라서 말없이 바라보자, 녀석은 얼굴을 빨갛게 하고는 손을 입고 있던 핫팬츠쪽으로 내린다.

 

“...확인해 볼래?”

 

이건 무슨 신종 괴롭힘이냐. 확인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내가 속을 것 같아? 아무리봐도 여자겠지? 속고 싶어도 속을 리 없잖아. 내가 그렇게 머리가 나빠보였단 말이냐!

그렇군. 빗치 녀석은 이 녀석하고 미리 짰구나.

순순히 벌게임을 당하긴 싫어서 날 괴롭히려고.

확인하자고 나서는 순간, 날 성추행범으로 몰아세운다는 그 함정은 간파했다고!

 

그렇다고 해도 이런 악랄한 방법을 사용해서 괴롭히려고 할줄은....

빗치녀석. 쿠키를 먹고 일부러 느끼하게 말한 것 때문에 내게 단단히 앙심을 품은 모양이다!

차라리 그때 바쁜 척하고 도망가는게 나았으려나.

 

아무튼 여기선 괜히 확인해보자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냥 이 녀석들의 거짓말을 믿어주는 척으로 넘기자. 남자애라고 인정하면, 「남자애인 줄 알았어? 유감! 여자애였습니다!」 라고 놀려올 수 있겠지만 성추행범으로 몰리는 것보단 낫겠지.

 

“아니, 넌 남자겠지. 미안. 몰아세워서.”

“아냐. 괜찮아.”

 

곧 「여자애였다고 이 바보야!」 라고 놀려올 것 같아서 난 황급히 화제를 돌린다.

 

“그렇다고 해도 내 이름을 잘 알고 있네? 작년에 몇번 못봤을텐데.”

“아, 응. 히키가야 군은 눈에 띄잖아.”

“어? 엄청 평범하잖아. 어지간한 일이 없으면 모를거라고 생각하는데.”

 

테니스부원녀석의 말에 빗치가 그렇게 답한다.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소부 고등학교 유일의 유급생이라고? 너도 그걸 알고 날 벌게임 용도로 쓰고 있는 거면서.

젠장. 나쁜 의미로 유명하다는 게 이렇게 좋지 않다. 정말 평범해지고 싶다.

 

“전에 우연히 히키가야군이 조깅하는 모습을 봤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그래? 그렇게 빠르게 뛰진 않는데.”

“운동신경이 ​좋​아​보​이​던​데​.​.​.​혹​시​ 테니스에 관심 있어?”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냐.”

 

마리오 테니스는 재밌잖아. 하지만 실제 테니스는 쳐본 적은 없다. 둘이서 하는 스포츠잖아. 내겐 불가능하다고.

 

“그, 그래?”

 

테니스부 녀석은 어딘가 기뻐보이는 얼굴이다. 왜 저럴까.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도 다 끝났네. 그럼 난 이만.”

 

이 녀석이 사실 난 여자였다고 밝히면서 놀려오기 전에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 나는 언제나 그렇듯, 베스트 플레이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요새 들어서 베스트 플레이스를 노리고 있는 녀석들의 빈도가 올라간 느낌이 드는데,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나?

 

“히키가야군. 안녕.”

 

내게 인사를 해오는 것에 놀라서 고개를 드니, 거기엔 며칠 전에 만났던 여자 테니스부원 녀석이 서 있었다.

 

“안녕.”

 

그렇게 인사를 해주고 다시 공부에 집중하기로 한다. 하지만 사람의 기색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왜?”

 

다시 고개를 들어 아직도 안 간 여자테니스부원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쭈볏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저기, 히키가야군,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상담?”

 

내가 그렇게 반문하자, 녀석은 내 옆에 앉는다. 뭐야. 너도 벌게임이냐?

녀석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역시 벌게임이구만. 최근에 이 학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거냐? 히키가야 하치만하고 대화하는 벌게임이?

어느새 그렇게 전교의 웃음거리가 된 거야?

중학교때처럼 웃음거리가 될만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

역시 전교 유일의 유급생이라는 신분때문일까. 젠장.

 

“응. 우리 테니스부에 관한 건데, 엄청 약하잖아? 거기에 인원도 적어. 이번 대회로 3학년이 빠져나가니까 더 약해질거라고 생각해. 1학년들은 고등학교 들어와서 시작한 사람이 많아서 익숙하지가 않고.... 또 우리가 약하니까 동기부여도 잘 안 되는것 같아. 사람이 적으면 자연히 정규 선수가 되니까.”

 

역시 벌게임이라서 그런지 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말을 하는군. 이 녀석에게 벌게임을 시킨 녀석은 어디서 숨어서 보고 있는 걸까.

살짝 짜증이 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래서.... 히키가야군만 괜찮다면 테니스부에 들어와 줬으면 하는데....”

 

어째서 그런 결론을 낼 수 있는 거냐 하는 눈으로 바라보니 여자테니스부원 녀석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키가야군, 운동신경 좋아보이니까. 테니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 거기에 모두의 자극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히키가야군이랑 함께라면, 나도 좀 더 힘 낼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 이, 이건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나, 나도 테니스, 더 잘해지고 싶으니까.”

 

응? 벌게임은 아니었나?

지금 발언은 이 여자테니스부원 녀석이 나한테 마음이 있어서 자기 부로 날 끌어뜨리려고 하는 시도라고 착각할 수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나는 중학교때 이런 착각과 오해에 휘말리는 바람에 수많은 흑역사를 남긴 강자라고? 안 통해.

게다가 우연히 조깅하는 모습을 보고 내 운동신경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대체 뭘 노리고 날 테니스부로 끌어들이려는 걸까.

 

핫! 그거다! 내가 여기서 덥썩 테니스부에 들어간다는 소리를 하면 「아하하. 속았네! 너같은 기분 나쁜 녀석에게 입부신청을 할 리 없잖아!」라고 놀리려는 것이다. 분명히.

 

동기? 동기는 내가 전에 남자라고 이 녀석이 날 속이려 들 때, 순순히 남자라고 인정하는 바람에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라도 상한 거겠지. 분명.

「내가 그렇게 남자같아 보였냐? 용서 못해!」 라고 생각하는 거야. 생긴 건 순진하게 생겨 가지곤 속은 시커멓구나. 역시 여자는 무서워.

제멋대로 원한을 품고 제멋대로 보복을 하려든단 말이야. 이쯤되면 나는 여성불신을 넘어서 여성공포증까지 걸릴 것 같다.

 

“미안. 나 테니스 쳐본 적 없거든.”

“그건 신경쓰지 않아도 돼. 우리 테니스부 약해서 초심자라도 상관없으니까.”

 

이 녀석. 어떻게든 날 테니스부로 넣으려고 필사적이네. 잠깐!

내가 입부한다는 소리에 거짓말이었습니다. 라고 놀리려고 하는 것치곤 너무 필사적이다. 다른 이유가 틀림없다.

아마도 날 테니스부에 넣어서 훈련한다는 핑계로 날 괴롭히려는 걸까?

초심자니까 분명 이런저런 추태를 보이는 것을 보고 비웃으려고!

그래. 그게 정답이었어.

 

“미안. 역시 테니스부에 들어가는 건 무리야.”

​“​그​렇​구​나​.​.​.​.​”​

 

녀석은 엄청나게 실망한 기색이다. 저걸 보니 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나같이 귀여운 여자애의 권유를 감히 거절해? 절대 용서 못해!」라고 생각할 지도.. 그렇다면 더 집요하게 괴롭혀올지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수습하자.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 수 ​있​으​니​까​.​.​.​.​다​른​ 거라면.”

“그래. 고마워. 히키가야군에게 상담했더니 편해졌어.”

 

여자테니스부 녀석은 왠지 쓸쓸하게 웃으면서 떠나갔다. 나름 수습한다고 한 발언이지만 역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걸까?

 

 

다음날, 점심시간. 베스트플레이스에 앉아서 점심을 해결하고 막 공부를 하려던 참이었다. 문득 테니스코트쪽을 바라보니, 거기엔 설녀, 빗치, 여자테니스부원 셋이 모여있었다. 저녀석들 친구였나? 역시 어제 그건 벌게임이었구만.

 

뭐하고 있나 봤더니, 빗치와 여자테니스부원이 난데없이 팔굽혀피기를 하고 있었다. 설녀는 주변에 서서 그걸 바라본다. 기합이라도 주는 걸까?

설녀 무서워. 친구가 아니라 그거잖아. 하트먼 상사와 훈련병 같은 느낌이야.

여자테니스부원은 팔굽혀피기를 5번 정도 하더니 이내 뻗어버렸다.

세상에 어떤 남자고등학생이 팔굽혀피기를 5번밖에 못하냐? 역시 여자애였구만.

 

나는 그쪽에 신경을 끈채,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저녀석들이 내게 다가와서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며칠 후, 베스트플레이스에서 여전히 공부를 하고 있는 나에게 빗치녀석이 다가왔다. 교복이 아니라 ​테​니​스​복​차​림​이​었​다​.​

 

“저기..힛키. 괜찮아?”

 

이 녀석 왜 이렇게 친하게 구는 거야? 그런가.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녀석이라고 인식한 건가. 그리고 그 힛키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

 

“무슨 일이야?”

“그, 그게....일단 와줄래?”

 

빗치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내 손을 잡고 끌고가기 시작한다.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대답하지 말라고.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냐!

내가 빗치에게 끌려간 곳은 테니스코트였다. 테니스코트 한쪽에 앉아있던 전의 그 테니스부원녀석이 밝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이제야 빗치가 나를 놔줬다.

 

“아. 히키가야군. 와줬구나.”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저기.... 히키가야군. 전에 도와준다고 했었지?”

 

언제? 아 그건가. 자존심에 상처입지 않도록 대충 말했던 그거 말하는 거야? 젠장. 얼마나 기억력이 좋은 녀석인 거야. 역시 원한을 품고 있잖아. 이래서 여자랑 말하기 싫어!

그 대충한 말을 끄집어내서 사람을 괴롭히려 들다니. 얼마나 터무니 없는 원한이야.

엄청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네.

 

“무슨 일이야?”

“그, 그게....”

 

테니스부원 녀석은 더듬거리면서 근처에 있던 금발의 남학생과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뭐냐. 너희. 커플이냐? 커플이라서 머리색을 통일한 거야? 너무 바보커플이잖아. 너희!

그렇긴 해도 미소년과 미소녀의 조합인가. 잘 어울리긴 하네. 빌어먹을. 폭발해라!

 

“그런가. 토츠카가 다쳐서 히? 히키타니였지? 히키타니가 대신 하는 거야? 그러면 좀 불리하잖아.”

 

대신? 뭘 대신해? 히키타니는 누구야? 누군가 이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스피드왜건은 어디 있냐! 내가 당황해서 테니스부원녀석과 빗치를 번갈아보자, 빗치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 그게...힛키. 하야토랑 유미코랑 테니스를 치기로 했는데 사이쨩이 ​다​쳐​서​.​.​.​그​러​니​까​ 대신 해달라고...”

 

그러니까 너희끼리 테니스를 하고 싶은데 사람이 부족해서 날 부른 건가? 그런 거야? 아니, 사람이라면 여기 잔뜩 있잖아?

 

“왜 내가?”

“그, ​그​게​.​.​.​히​키​가​야​군​이​면​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아서....”

 

테니스부원 녀석은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결론을 낸 건데, 내가 분명히 테니스는 쳐본 적 없다고 말했을텐데.

그건가. 괴롭힘인가. 테니스를 쳐본 적 없는 내게 강제로 테니스를 치게 해서 추태를 보이게 할 셈인가. 순진한 얼굴을 한 주제에 터무니 없이 사악한 녀석이잖아!

 

“도, 도와줄거지?”

 

녀석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이 눈으로 얼마나 되는 남자를 홀려서 파멸로 이끌었을까. 나에겐 통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근처의 모든 녀석들은 내가 나오는 걸 기정사실화한 분위기다. 여기서 내가 하지 않겠다고 하면 겁쟁이라고 비웃을 게 틀림 없다.

 

“좋아.”

 

망신 좀 당하고 말지 뭐. 그 후에는 제발 신경 좀 꺼줘라.

 

 

.

...

......

.........

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친한 녀석들끼리의 테니스라고 생각했는데 스케일이 너무 크다. 아까까진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테니스 코트였지만, 내가 옷을 갈아입고 온 사이에 어느 틈엔가 근처는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대충 세어봐도 삼백명은 넘을 것 같다. 2학년은 물론이고, 1학년도 섞여있다. 어떻게 아냐고? 지금 내가 있는 학급의 카스트 최정점에 군림하는 잇시키란 녀석이 보이거든. 녀석은 「하야마 선배! 힘내세요!」라고 외치는 중이다. 아무래도 저 금발의 남학생, 하야마 하야토는 엄청난 인기인 모양이다. 하긴 엄청난 미소년이긴 하니까.

 

“HA YA TO! HA YA TO!”

 

무언가 약속이라도 되어있던 걸까. 코트 주변의 녀석들은 이름을 연호하며 파도타기를 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무서워.

 

아무튼 나는 빗치녀석과 함께 태그를 짜고 저 햐아마랑 그 여자친구로 보이는 금발의 롤머리녀석을 상대하게 된 거지만....

너무한 거 아니냐. 이건.

내가 추태를 보이는 꼴을 보고 비웃으려고 한 것치곤 너무 무시무시하잖아. 관중이 너무 많다고. 빌어먹을.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면 이렇게까지 날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거야? 저 테니스부 녀석. 아니, 이젠 내 적이라고 생각하자. 똑똑히 기억해두마. 토츠카라고 했지?

 

“이봐. 히키타니.”

 

네트 반대편에 있던 금발 남학생이, 아니, 너도 적이다. 기억해두마. 하야마라고 했지? 하야마가 나를 부른다.

 

“뭐야?”

“나, 테니스 룰, 잘 모르거든. 더블스같은거 엄청 어렵잖아. 그러니까 적당히 해도 되지?”

 

과연 그럴까? 이건 엄청난 ​함​정​같​은​데​.​.​.​그​렇​다​면​ 네가 모를 리 없잖아. 나도 테니스는 쳐본 적 없지만, 룰은 안 단 말이야. 어쩌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해서 날 봐주려는 걸까?

너 실은 여기서 제일 좋은 녀석?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추태를 보일테다. 하지만 순순히 질 생각은 버리자, 어떻게든 하면서 테니스를 배우는 거야. 내 작전은 최대한 추태를 줄이는 것으로 변경됐다. 아무리 나라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참하게 패하는 건 버틸 수 없다.

 

하지만 함정은 또 있었다. 빗치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초심자였다는 사실이다. 나도 전혀 공을 못 맞추고 있는데...녀석도 똑같다. 녀석도 초심자다.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리얼하다.

너...나한테 얼마나 원한이 있는 거야. 자기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는 것을 감수하면서 까지 내가 불리해지게 만드는 거냐.

아, 아니다! 이 녀석은 일단 빗치스럽긴 해도 귀여운 얼굴에 거유다.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이론 하에 이 녀석이 테니스를 못쳐도 다 용서가 된다.

즉,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가.

이 테니스 코트 안에서 내 편은 없는가. 죄다 적뿐인가....

 

게다가 저 금발 롤머리 녀석은 테니스를 쳐본 경험이 있는지 움직임이 상당하다. 게다가 하야마란 녀석도 움직임이 좋다.

그러고보니 저 녀석 자긴 테니스 룰을 잘 모른다고만 했지. 테니스를 못 친다는 소린 한 마디도 안했다. 젠장!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방적인 게임은 계속된다. 그렇게 유린되고 있는데, 때마침 하야마가 쳐낸 공이 빗치와 가까운 쪽으로 날아간다. 빗치는 몸을 날리면서 그 공을 쳐냈다. 어라? 생각보다 꽤 열심이네. 하다보니까 날 함정에 빠뜨리는 계획이라는 걸 잊어먹기라도 한 걸까?

아무튼 빗치가 쳐낸 공은 붕 떠올라 네트를 넘어갔다. 그러자, 금발 롤머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강력하게 후려친다. 공은 빗치의 얼굴을 스치고 코트에 떨어졌다.

너희 같은 편 아니었냐!?

빗치는 무서웠던 모양인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고 중얼거린다.

 

“...엄청 무섭다.”

“유미코, 너 진짜 성격 나쁘구나.”

“뭐? 아냐! 시합이니까 이정도는 당연한거지! 그리고 나 그렇게 성격 나쁘지도 않거든!”

“아하, 그럼 그냥 초S구나.”

 

네트 건너편에서 하야마와 금발 롤머리가 그렇게 떠들면서 웃는다. 코트 주변의 관객들도 모두 웃는다. 오직 웃지 않는 건 나와 빗치. 그리고 토츠카뿐인가.

토츠카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이제야 자신이 무슨 흉악한 짓을 한 건지 깨달은 걸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나의 공개처형이라는 걸.

이대로 한 점도 얻지 못하고 져버리면 등교거부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걸 깨닫고 두려워하는 걸 보니 생각보다 뿌리까지 썩은 녀석은 아닌가보네.

빗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이내, 아얏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쓰러진다.

 

“무슨 일이야?”

“미안, 살짝 삔거 같아.”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여자의 눈물은 대부분이 거짓이거나 곤란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행위니까. 난 속지 않아.

 

“만약 지면, 사이쨩이 곤란하겠지.... 아, 위험한데.... 이대로라면 좀 위험할지도.... 사과를... 미안해.”

“.......”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것이 거짓눈물은 아닌 것 같아보인다. 아마도 미안하다는 건 나를 이런 함정에 끌어들인 것에 대한 것이겠지. 위험하다는 소리도 설마 일이 이렇게 커질 거라는 건 예측하지 못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나.

정말 나도 사람이 무르다니까. 터무니 없는 원한을 갖고 내게 피해를 입히려는 녀석의 눈물을 보고 금방 마음이 약해지니.

 

“그 상태로 테니스를 치는 건 무리겠지.”

“으응? 아냐. 나...어떻게든 버텨볼게.”

“그럴 필요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하야마쪽을 바라보았다.

 

“부상자가 생겼는데 룰을 좀 바꿀 수 없을까?”

“왜? 히키타니? 유이가 많이 다쳤어?”

“많이 삔거 같아. 그러니까 너희의 상대는 나 혼자 하지. 아니면 일대일로 바꿀까?”

 

내 말에 가소롭다는 듯이 테니스 코트는 비웃는 소리가 가득 울려퍼졌다. 하긴 방금까지 일방적으로 당하던 녀석이 2:1이니 1:1이니 하는 소릴 하는데 비웃지 않으면 이상하다. 하지만 이제 익숙해졌다고. ​그​리​고​.​.​.​.​이​대​로​ 가면 이 빗치랑 토츠카란 녀석이 죄책감을 받겠지. 지금도 받겠지만 이대로 비참하게 패하면 더 심한 죄책감을...

남에게 괴롭힘받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동정받는 건 절대 참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빗치녀석이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관중들을 헤집으며 밖으로 사라진다.

 

“어떻게 된거야? 친구랑 싸웠어? 버려진거야?”

 

금발의 롤머리가 조롱해온다. 나는 그걸 무시하고 하야마를 바라보았다.

 

“신경쓰지 말고 계속하자고. 난 옛날부터 혼자였으니까 남과 같이 하는 건 익숙하지 않거든.”

“정말 혼자서 할 거야? 히키타니?”

“그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코트를 구르고 있는 공을 주워 하야마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하야마가 잡은 공을 내게 되돌려주었다. 「서브는 너희 차례일텐데」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하야마가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면 히키타니가 불리하잖아. 그러니까 서브권을 양보해줄게.”

 

그러자 관중들로부터 오오 하는 함성이 울려퍼졌다. 참으로 자비롭구나 네 녀석.

 

“좋을대로. 이제 서브쪽은 대충 기억했다.”

“응?”

 

나는 자리를 잡고 토스를 올렸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라켓을 휘두른다. 이제야 알았다. 플랫서브는 내리꽂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앞으로 민다는 느낌으로 치는 것이었다.

 

후려친 공은 선이 되어 네트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친다는 느낌으로 센터와 센터를 꿰뚫는다.

테니스공이 코트바닥에 꽂히자, 건너편에서 다 이긴 줄 알고 있는 하야마와 금발 롤머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어?」라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을 하더니 바닥을 구르고 있는 테니스공을 바라본다.

한참 비웃음으로 가득차 있던 코트 주변의 분위기는 경악으로 바뀌었다.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오직 나를 제외하곤.

 

“굿. 제법 재미있는 게임이군.”

“히, 히키타니. 아까 뭐라고 했지? 기억했다. 서브 쪽은 대충 기억했다고 말했나?!”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하야마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두번 말할 필요는 없다.”

 

나는 심드렁하게 답하면서 다시 서브를 준비했다. 이제야 하야마와 금발 롤머리도 바짝 긴장한 얼굴로 내쪽을 바라보고 리시브 준비를 한다.

눈치가 빠른 녀석들이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아까는 대충 기억했지만, 지금은 똑똑히 기억했다고.

서브란 것이 뭔지 말이야.

내게 서브권을 양보한 걸 후회하게 해주지.

 

두번째 플랫서브는 아까보다 더 빠르고 날카롭게 서비스 코트 센터 안쪽을 때리고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번에는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녀석들은 미동도 하지 못했다.

 

세번째 플랫서브는 두번째보다 더 빠르고 날카로운 각으로 변했다. 하야마와 금발 롤머리가 공이 오는 궤도에 미리 자리를 잡았지만, 여전히 미동도 못한다. 오히려 금발 롤머리는 공의 속도에 공포를 느낀 모양인지 라켓을 휘두르긴 커녕, 몸을 뒤로 피했다.

하야마와 금발 롤머리의 안색이 흰색을 넘어 새파랗게 변해 가고 있었다.

 

“.......”

“.......”

 

둘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여태까지 하야마와 금발 롤머리의 일방적 승리로 진행되려던 분위기가 격변. 이제는 나의 일방적 승리로 흐름이 돌아왔다.

상대는 내 서브를 받아낼 수 없고, 나는 상대의 서브가 어떤 것인지 기억했다.

저쪽에서 온 서브는 날아오는 족족 하야마와 금발 롤머리가 구사했던 드롭 샷, 딥 샷, 라이징 샷 등을 상기하고 아까까지의 수모를 되갚아주듯이 같은 샷을 더 강력하게 쳐내서 농락한다. 상대의 점수는 빗치가 코트 밖으로 나갔을 때부터 계속 고정. 내 점수만 변화하고 있다.

 

결국 경기는 나의 대역전승으로 끝났다.

금발 바보커플의 얼굴은 이젠 파란색을 넘어 검은 그림자가 서려 있다.

주위는 300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 있었는데 텔레비전의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 마냥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경기가 끝나고, 나는 천천히 네트로 다가갔다.

 

“너희의 패인은 단 하나다. 하야마. 단 하나의 심플한 답이다.”

“...뭐, 뭐지? 히, 히키타니?”

 

내 말에 넋이 나가있던 하야마가 황급하게 질문을 해왔다. 왜 갑자기 초심자였던 녀석이 이렇게 테니스를 잘하게 됐는지 알고 싶다는 심정이겠지.

 

“너흰 날 화나게 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천천히 코트 밖으로 나간다.

빗치와 토츠카 그리고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설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라? 설녀녀석은 왜 테니스복을 입고 있는 거지?
그렇군. 빗치가 빠져나가서 자기가 대신 들어와 날 함정에 빠뜨리려던 계획이었나.

아무튼 이 녀석들이 놀라고 있는 건 이런 식으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함정에서 빠져나갈 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사람을 무시하는 거 아니냐? 난 의사의 예상으론 3년 이상 걸릴 거란 재활을 1년도 안 되어서 마쳤다고.
   

코트를 둘러싸고 있던 관중들은 내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없이 양쪽으로 갈라져서 길을 열어주었다.

비웃음의 대상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자신들의 우상을 공개처형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적의를 품고 있는 녀석도 생겼겠지.

 

 

나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테니스 경기 이후로부터 교실에서 자꾸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나 할 것 없이 그 시선은 간헐적으로 느껴진다.

대체 누굴까 하고 살짝 시선을 따라가보니, 학급 카스트의 최상위에 군림하고 있는 잇시키가 얼른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배를 망신준 탓에 원한이라도 품은 모양이다.

하필 같은 학급에 적이 생길 줄이야.

 

 

역시 내 유급생활은 잘못 됐다.

계속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국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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