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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10화


있는 힘을 다 했지만 고작 몇 센티 정도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움직이는 반동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지 피가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이 내 옷을 뚫고 등 깊숙이 박혀있는 게 느껴진다. 난 내가 빠져나가는 것도, 그녀를 빼내려는 것도 포기했다. 대신 그녀의 등 뒤, 얼음의 창이 날아왔을 방향을 노려보았다.

“나와! 마법사!”

제발 내 예상이 틀리길 바라며 난 공기가 흔들리고,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마법사답지 않게 딱 벌어진 어깨와 큰 키. 실루엣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마법사, 게펜타이너 씨는 백색 로브에서 냉기를 풀풀 날리며 내게 인사했다.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수고했네, 휴드 군. 소녀를 찾아 준 것도 그렇고, 소녀에게 빈틈을 만들어준 것도 정말 고맙군.”

“시끄……러! 이런 악당…… 같으……니.”

통증은 의외로 심하지 않았지만, 대신 복부를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한기가 치솟아올랐다. 모험소설을 보면 복부에 칼을 맞은 기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꽂힌 채 상대방을 일도양단해버리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난 벌써부터 다리가 풀리고 있었다. 도저히 복부에 힘을 줄 수 없어 소리지를 수 없었다. 한기와 분노가 겹쳐 이까지 딱딱거리며 내뱉은 말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당? 자네 입장에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난 내가 지극히 정당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네. 자네에게 설명해 준 적이 있었지. 마법사는 신이 아니기에 과거에서 현재를 읽고, 미래를 읽어 현재를 살아간다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지금 이 순간이고, 그래서 현재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우선시한다네.
우린 자네의 사념을 받아 이곳에 도착했어. 사념인 데다 자네 기운이 이 여자의 검은 기운에 막혀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어. 그래서 마을로 가 교수님을 깨운 후 자넬 추적하게 했지.  일단 은신주문을 걸고 이곳에 있었는데, 그녀가 사도들을 쓰러뜨린 것과 곧 자신의 힘을 거두는 것을 보았지. 그 순간 우리 방침은 그녀의 설득에서 포획으로 변경되었어. 그녀의 압도적인 힘은 매우 위험한 수준에 달했기 때문에 되도록 무력화시켜서 끌고 가야 한다는 게 우리 생각이지. 그 과정에서 자네가 말려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정도 상처는 치료하면 나을 테니 걱정 말게. 자네가 가져간 내 손수건으로는 택도 없을 테니 우리와 함께 상아탑으로 이동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야.”

“휴드~!”

멀리서 교수님의 외침이 다시 들린다. 교수님은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게펜타이너 씨는 브릭 교수님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너와 저 교수님은 우리와도, 종단과도 달라. 너희는 언뜻 보면 종단처럼 과거를 중시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큰 차이가 있지. 종단이 과거에 안주하려 하는 반면 너희는 과거를 토대로 미래를 예비하니까. 하지만 우리에겐 자네들처럼 과거와 미래 같은 막연한 개념이 없다네. 우린 5분 전의 현재와 지금, 그리고 5분 후의 현재를 생각할 뿐이지. 그래서 너희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거야.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그러니 이해해달라는 말은 필요 없겠지. 그냥 서로 평행하게 제 갈 길을 갔으면 하는 바람이네. 지금처럼 가끔씩 서로가 교차할 때도 있지만, 이런 일만 아니라면 우린 대체로 무난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지금도 자네에게 가진 호의에는 변함이 없다네.“

그가 얼음창의 끝을 잡고 단숨에 빼냈다. 난 격통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질렀다. 내게서 튄 피가 그녀의 하얀 몸을 적셨다. 그녀는 여전히 날 안은 팔을 떼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몸을 꼭 안으며, 난 그녀의 마지막 안식처로서의 의무를 다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쿨럭, 이 아이를, 데려가고, 실험하고, 쿨럭…… 이 아이는 인간이야. 이 아이에게도…… 미래를, 누릴, 권리가……”

“거 참. 죽인다고는 하지 않았네. 상아탑의 연구대상으로 평생 보호격리될 뿐이지. 몇천 년 전의 세상에서 날아와 이 곳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느니, 비록 우리지만 안락함이 보장되는 상아탑에서 사는 게 이롭지 않겠나?“

“그……녀는 인간이란…… 말야.”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자꾸 배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게펜타이너 씨는 교수님이 있는 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세 명의 마법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전에 소개받았던 그 세 명이다. 교수님은 기절했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사는 동료들에게  즉석에서 지시를 내렸다.

“브릭 교수님은 기절했나 보군. 저 분과, 여기 휴드 군을 데려가야겠어. 이 자리엔 미리 준비한 위장용 시체를 놔두고, 저 사도들이 죽였다고 하면 되겠지. 우린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았네.”

마법사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새로운 흔적들을 남겼다. 주머니에서 고깃덩이 비슷한 걸 꺼내더니 사람 비슷하게 부풀린 후 태우고, 준비한 피를 흩뿌리고, 여기저기에 있는 난투의 흔적을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난 그들을 속으로 비웃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데사의 눈이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은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

“그건 우리가 아까부터 가짜 영상을 허공에 비추고 있기 때문이지.”

게펜타이너 씨가 남 얘기하듯 무심하게 말했다. 난 잠시 후에야 그것이 나에게 한 말인 줄 알고 경악했다. 머리 위에는 달과 별밖에 없었지만, 전에 그들의 기술을 본 나로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별로 자랑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현재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다네. 그런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의 생각이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지. 그들도 생각이 있었다면 사도 둘만 달랑 보내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오데사의 눈은 지금 사도들이 자네와 브릭 교수님을 잔인하게 죽인 후 이 아이와 싸우다 서로 자멸해버리는 영상을 보고 있을 걸세. 이들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발표할지, 혹은 어떻게 숨길지 기대되는군.”

그들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은 데다 준비까지 철저히 해온 걸 보면 할 말이 없었다. 아마 이번 사안은 이들뿐만 아니라 상아탑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있는 것 같다. 종단과 상아탑보다 먼저 소녀를 확보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왜 난 그 말을 듣고도 이들에 대해 방심한 걸까. 난 분한 표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머리를 숙이다 문득 그녀의 체온이 점점 식어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한기 때문이 아니라, 신체활동 자체가 정지하려는 것 같았다.

창이 사라져 조금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기에, 난 주저없이 그녀를 일단 떼어냈다. 그녀는 힘이 다 빠졌는지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바닥에 눕히고 머리를 내 무릎 위에 올려놓은 뒤 상처를 살펴본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배에 난 구멍이 나보다 두 배는 크다는 것과, 등 뒤에 얼음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는데 거기를 중심으로 신체가 점차 얼음으로 뒤덮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계속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등에서부터 일어나는 변화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화살을 뽑아내려 했지만 깊이 박혀 있는지, 아니면 마법적인 효과가 있는 건지 도무지 빠지지 않았다. 얼음창을 빼줬으니 이것도 빼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논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거, 당장…… 빼……!”

“지금 뺄 순 없네. 이건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 상아탑에서 특별히 제작한 주문이라 말이지. 우린 이대로 이 아이를 꽁꽁 얼린 뒤 데려갈 생각이라네. 그리고…… 자네와 브릭 교수님은 원래 함께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일정이 확 바뀌어버려서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중이지.”

이젠 우리가 제거해야 할 제 1 목격자가 되었다는 말이군. 하지만 별로 두렵지는 않았다. 몸이 멀쩡한 때라면 당연히 죽는 게 싫겠지만, 이런 상처를 입어 정신이 혼미해지고 나니 이대로 죽어도 기절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일 것 같다는 생각 이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공포심 대신 어떻게든 끝까지 반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내게 말을 한 후 무엇이 맘에 들지 않는 건지 제자리를 빙빙 돌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손뼉을 짝 쳤다.

“그래. 진작에 학명을 정했으면 불편하지 않았을 것을. 이제부터 그 아이는 임시학명 「고대 제물」로 정하겠네. 저 아이가 제물이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니 확실한 식별이 될 수 있겠지. 조만간 석관이 발견된 장소를 샅샅이 뒤질 테니, 2호나 3호가 곧 나올 수도 있겠군.
그럼 휴드 군, 그만 그녀에게서 손을 떼게. 난 아직 생각을 정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자네를 보면 자꾸 이 자리를 깨끗이 정리하는 게 안전할 거라는 생각 쪽으로 기울어지려 하는군. 거기엔 자네뿐 아니라 브릭 교수님까지 포함되네. 신중한 선택 하길 바라네.“

“…………틀렸어. 세 사람……이야.”

“정정하게. 두 사람일세, 휴드 군. 저 아이, 아니 「고대 제물」 양은 죽지 않아. 다시 말하지만 저기 박힌 얼음 화살은 맞은 사람을 가사 상태로 동결시킬 뿐이라네.
하지만 자네와 브릭 교수님은 여기서 생을 마치게 되겠군. 정말,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그는 처음 만났을 때, 부활시킨 늑대를 소멸시켰을 때처럼 상냥하게 말했다. 난 저것이 그의 상냥함이란 걸 알았다. 그의 상냥함이란, 말하자면 자르고 또 잘라내 결국 수많은 잔해가 된 플라나리아 앞에서 행하는 간단한 조의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결국 순수한 자기만족, 그뿐이었다. 이것이 현재만을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인 것일까. 자신만을 생각하고 남과 관계하려 하지 않지만, 남과 부딪치게 될 경우 냉철하게 상대를 짓밟을 수 있는 그런 사람. 웃으며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무릎 위에서 움찔 하는 반응이 느껴졌다. 고통을 참으며 몸을 숙이자 그녀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벌렸지만 소리를 꺼내지 못했다. 난 그녀의 차가운 손을 찾아 꼭 잡았다. 그 손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시 그녀가 입을 벌렸다. 이번엔 아주 작게나마 내 귀에 그녀의 말이 도달했다.

“틀려요…………”

그녀는 머리를 조금씩 좌우로 흔들었다. 피범벅이 된 머리카락은 작은 움직임에도 붉은 얼음가루를 사방에 흩뿌렸다. 그것은 이른 싸락눈처럼 쌓이지 않고 붉은 얼룩을 남기며 대지에 스며들었다.

“저런 건…… 제 이름……이 아니……에요……”

“맞아.”

난 목이 메어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저딴 건 네 이름이 아니야……”

그녀는 살짝 끄덕인 후 눈을 감았다. 등에서부터 시작된 동결은 이제 쇄골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이제 온전히 남은 그녀의 신체는 머리와 팔다리 정도였다. 난 저 얼음을 녹일 수 없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얼어붙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쯤 녹일 순 있다.
난 의식을 치르는 사제처럼 신중하게 그녀의 귀로 내 입술을 가져갔다.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이 한 마디를 하기 전엔 기절할 수 없다. 마음속에서 한 가지 단어가 어서 자신을 끌어올려 달라고 발버둥치며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다그친다. 그것은 반갑고, 친근하고, 따스한 느낌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잊으려 했던 그 한 마디에 내 모든 진심을 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통증도, 분노도, 나의 테르도 느껴지지 않는다. 있다면 오직 충만한 사랑과 평안 뿐.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테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저 사랑과 평안의 껍데기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 알맹이를 관조하는 일은 평생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는 것처럼 자신의 테르를 포기한 이들은 결코 이런 기분을 맛볼 수 없겠지. 내 한 마디가 그녀의 미래를 열어주길 간절히 염원하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오데사……
하늘의 빛,
나의……태양.” 

오데사가 눈을 떴다.
어둑한 새벽 하늘에 눈부신 빛이 뿌려졌다.
난 나흘째의 태양이 뜨는 것을 보며 정신을 잃었다.

 

꿈일까.


 
-휴드 님. 어떻게 제가 받았던 이름을 아셨나요?

-알지 못했어. 우연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네 이름이 일치했을 뿐.

교수님의 논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유추해내긴 했지만, 내가 이름을 맞춘 건 역시 우연이다.
난 스스로의 테르를 정화하고자 한 것뿐이다.

-소원이 있어.

-무엇입니까?

-나를 용서해 줘.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다시 말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 줘.

-아아.

그녀는 내 말의 뜻을 깨닫고 활짝 웃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용서함으로 이제 우린 마주볼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테르를 등에 업고, 그것을 떨쳐내려 노력하는 이 대지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사랑과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마워.

인류를 구원하는 건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종단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도문이 생겼다고 알려주고 싶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겠지.
그녀가 멋쩍게 웃더니 나지막이 말한다.

-휴드 님이 말한 신이란 분도 분명 이런 말을 하셨을 거예요.

 

환상일까.

 

-그럼 안녕히, 휴드.

-잘 가, 오데사…… 님.

난 번거로운 인사말 대신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는다.
그녀는 내 품 안에서 점차 빛의 거품으로 변해간다.
그녀의 형태를 한 빛의 거품이 일순간 폭발하는 것처럼 터진다.
눈부신 무지갯빛의 향연이 나를 축복하는 것처럼 비산하고 흩뿌려진다.
그 빛의 중심에서,
난 나 자신을 축복한다.

 

아니면 현실인 걸까.

 

난 눈을 떴다.
아까까지 메마른 벌판이었던 곳이 비옥한 풀밭으로 변해 있었다. 저 멀리 마을 어귀가 보이는 것을 보면 아까와 같은 장소가 확실하다. 사도들과 마법사들이 부드러운 잔디 위에 널부러져 있었고, 교수님은 그보다 조금 더 먼 곳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한 사실에 의문을 가지기에 앞서, 난 일단 내 몸부터 살펴보았다. 길다란 얼음창이 관통했던 자리는 바늘 하나 들어간 흔적 없이 멀쩡했다.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던 중 게펜타이너 씨의 옆에 회중시계가 굴러다니고 있는 걸 보았다. 과연 마법사는 부자라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오전 5시 24분. 새벽이란 소리다. 하지만 하늘엔 오후 5시 24분 같은 태양이 떠 있었다.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거겠지. 내 스스로에게 했던 선언을 다시 떠올려 본다. 사실 해가 일찍 뜨거나 벌판이 풀밭으로 변한 것보다는 며칠 사이에 내가 열렬한 유신론자로 탈바꿈했다는 게 더 기적 같다. 이런 기적들이, 혹은 기적 같은 일들이 이번 여름 동안 얼마나 많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앞으로도 한참 남은 여름과, 내가 겪어야 할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며 난 미소지었다. 그리고 교수님을 데려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그때 발밑에 뭔가 밟혔다. 잔디들 사이에 살짝 가려져 있던 그것은 그녀의 몸에 있던 감겨있던 붕대였다. 검은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기에 안심하고 집어들었다. 이것이 그녀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인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녀를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순간 붕대가 푸스스 소리를 내며 재로 변해간다. 그녀의 기운을 받지 못하는 붕대는 삭을 대로 삭은 낡은 천일 뿐이었다. 오천 년이란 세월을 견디다 이제야 그 무게에 짓눌린 것일까. 난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오천 년 전의 유물이 재가 되어, 바람을 타고 주인을 따라 하늘로 비상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생각대로 기분은 평온했다. 슬프지도, 가슴아프지도 않았다. 그런 사라짐은 이별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일 뿐이다. 지금도 그녀는 내 곁에서 부드럽게 날 감싸안고 있지 않은가. 난 뱃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하며 머리 위에 떠 있는 나의 태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에​필​로​그>​


시아는 봉투 안에서 아이스크림이 나오자 먹겠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한 숟갈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주근깨가 점점히 박힌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고, 눈에는 황홀함이 감돌았다.

“아아, 맛있어! 달콤해!”

“응, 그래그래. 많이 먹어.”

2인분을 사왔는데 여자아이만 먹게 할 순 없어서 예의상 나도 숟가락을 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1.8인분 정도는 양보해야 할 것 같다. 난 일부러 깨작깨작 아이스크림을 떠서 핥으며 시아를 바라보았다. 항상 밝고 활기찬 그녀인 데다, 지금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했던 게 자신의 테르였기라도 한 듯이 넘치는 행복에 겨워하며 행복에 빠져 있었다.
세 숟갈째 큼지막하게 떠 한입에 꿀꺽한 시아가 한참 우물거리다가 푸하, 큰 한숨을 내뱉더니 내게 물었다.

“그런데 말야. 종단 사람들이 교수님을 찾았던 건 결국 어떻게 된 거야? 아이스크림 사주면서 가르쳐주기로 했잖아.”

“아아. 그거 말이지? 다 오해였어. 어떤 사건이 있었는데, 마침 교수님이 그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던 터라 참고인으로 나와주십사 했던 것 같아. 교수님은 연구에 방해될 것 같아 도망치고, 그 와중에 나까지 끌고 갔다니까. 연구다! 발굴이다!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지.”

“헤에. 그런 거라면 나도 부르지 그랬어. 며칠간은 집에만 콕 박혀 있었는데.”

아마 사실을 알면 그거대로 왜 자기를 부르지 않았냐고 난리를 치겠지. 어쩌면 부르지 않았다고 내게 절교를 선언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몇 시간 지나서 다시 내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겠지만.
브릭 교수님과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난 후 이틀 정도 숨어 지내다 랑테 씨를 다시 찾아갔다. 이번엔 브릭 교수님도 함께였다. 내가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노려보자 랑테 씨는 의뢰비를 반으로 깎아 주었고, 덕분에 교수님이 자비를 털어 어떻게 낼 수 있었다. 그는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여전히 출처불명인 그의 정보에 따르면 둘 모두 어떻게든 이 상황을 덮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남겨진 사도들과 마법사들은 종단과 상아탑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데려갔지만 재기불능이 되었다. 사도들은 신성력을 모두 잃었고, 마법사들은 백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랑테 씨가 어렵게 구한 정보에 의하면 오데사의 눈이 갑자기 눈이 멀었다고도 했다. 잇따른 재앙이 겹친 데다 이것을 악마의 소행이라고 하자니 사도들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게 될 판이라, 종단은 이판사판으로 정보조작을 통해 오데사가 빈민촌 근처에 나타난 악마를 퇴치했노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신성력을 잃은 사도들은 신에게 신성력을 바친 것으로, 오데사의 눈은 신의 빛을 그만 정면으로 보는 바람에 눈이 먼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렇게 이번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발표한 종단의 말을 모든 사람들이 믿고 따른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오데사가 출현했다고 한 벌판이 하루아침에 풀밭으로 바뀐 데다, 엘드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새벽에 느닷없이 해가 쨍쨍하게 떴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오데사 교에 대한 믿음을 한층 북돋워주었다. 상아탑은 오데사 교와 모종의 합의를 보았는지 공식적인 반응이 없이 침묵하는 중이라고 한다.

혹시 상아탑에서 여전히 나와 교수님을 노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며칠간 랑테 씨가 마련해 준 은신처에서 지냈는데 - 이번에도 어딘가에 찌르면 당신을 죽여버리겠다고 진심으로 협박했다 - 아직까진 아무 일 없었다. 은신처에 숨은 첫날, 랑테 씨의 권유로 ‘만약 저희가 누군가에게 납치된다면 그날 있었던 모든 일을 적은 문서가 자동적으로 엘드 곳곳에 퍼지게 될 것입니다.’ 라는 익명의 투서를 보낸 게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종단이야 우리가 죽은 줄 알 테니 이쪽에서 먼저 접촉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 대해 캐고 들진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살아있는 게 들킨다면 좀 골치아파지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상아탑과 같은 방식으로 협박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게다가 여름방학 동안 자신의 가게에서 나오는 모든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수행하겠다는 서약을 한 대가로, 랑테 씨가 그들의 동정을 살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일단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

“휴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잠깐 한눈파는 사이 아이스크림을 반 넘게 먹은 시아가 뾰루퉁한 표정으로 내 볼을 찔렀다.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니 시아가 아이스크림 한 숟갈을 떠 내 쪽으로 내밀고 있는 게 보인다. 저걸 받아주지 않아 화가 난 거다. 난 냉큼 아이스크림을 덥석 물었다. 그러자 시아는 숟가락을 슬슬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휴드 낚았다~ 월척이다~”

“읍읍읍~ 푸하!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맛!”

겨우 다 빨아먹은 후 항의해 보았지만 그녀는 싹 무시하고 다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헤에, 간접 키스인데도 그렇게 태연하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난 최대한 느물느물한 표정을 지으며 시아에게 말을 건넸다.

“시아야, 전에 나보고 살 좀 찌라고 했었지?”

“응. 넌 너무 말랐어. 배 안 나온 건 좋지만, 팔도 마르고 다리도 마르고~ 남자라면 어깨 딱 벌어지고 근육이 있어야지.”

시아는 근육을 선호하는 건가.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놀려먹어야지. 난 기억을 잘 갈무리해두며 기대감에 찬 것처럼 말했다.

“두고 보라구! 몸을 만들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 먹을 테다!”

말하고 나니 랑테 씨의 지옥 아르바이트가 다시 떠올랐다. 아직 완전한 리스트는 보지 못했지만, 여름방학 내내 그걸 다 해야 할 테니 개학할 무렵에는 정말 몸이 제대로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제대로 골병이 들거나. 굳이 반반의 확률을 나눠 계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 자신에 대한 연민이 든다. 아무튼 지금은 이게 주제인 게 아니다.

“응? 아르바이트는 이해가 가는데, 아이스크림은 왜?”

시아는 숟가락을 멈추지 않고 질문했다. 난 모처럼 내 숟가락을 움직여 아이스크림을 퍼내며 그녀에게 준비된 일격을 먹였다.

“후후후후후. 이 아이스크림에는 사실 살을 찌우는 성분이 한가득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지. 너도 그렇게 많이 먹으면 토실토실해질걸?”

“상관없어.”

“에?”

시아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녀는 강아지처럼 귀엽게 숟가락을 빨며 말했다.

“토실토실한 여자애는 싫어?

“푸훗!”

“꺅! 튀잖아! 이 아까운 걸!”

“……미안.”

난 사과하고 손수건을 꺼내 그녀를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시아는 이미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꺼내느라 치마가 약간 말려올라가고, 그 아래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상처 하나가 내 눈에 띄었다.

“그 상처 뭐야?”

“아~ 에헤헤, 교수님 고양이랑 놀아주다가.”

시아의 무릎에는 언뜻 보기에도 아파 보이는 붉은 줄이 세 가닥 그어져 있었다. 저 정도라면 피도 찔끔 났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이스크림 사들고 돌아오는 길에 저 녀석의 걸음걸이가 좀 불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 같으면 그 고양이와 당장 결판을 냈을 텐데, 저 녀석은 당해 놓고도 해실해실 웃기만 한다. 내가 야단치자 시아는 다시 치마를 내려 상처를 가리며 자신을 변호했다.

“그치만 내가 아니면 밥 줄 사람 없잖아. 교수님도 오랫동안 안 들어오시고 해서 내가 가끔 가서 밥 줬지~”

이 녀석이 고양이를 돌보게 된 것은 사연이 있다. 교수님이 한번은 고양이를 학교에 데려온 적 있었는데, 이상하게 이 녀석은 시아를 잘 따랐다. 하긴 시아의 느긋한 성격을 생각하면 고양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고양이와 시아는 눈이 맞아 버렸고, 그래서 시아는 가끔 교수님이 연구에 몰두해 집을 비울 때면 멋대로 연구실에서 키를 꺼내가 고양이와 놀아주곤 했다. 언젠가 따라가 구경해 보았을 땐 고양이가 시아를 잡아먹는 것 같았는데 말이지.

“……존경스러운 녀석.”

“휴드, 그거 너무 진심이 묻어나는 말인걸? 기분좋네.”

“그래도 여자애가 이런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되지.”

난 아까 꺼내든 손수건으로 그녀의 무릎을 가볍게 문질렀다. 아직 쓰린지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기분좋은지 눈을 사르르 감았다. 혹시나 해서 몸을 살짝 일으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햐~ 하는 신음소리까지 낸다. 역시 이 녀석은 고양이과다, 라고 생각하며 손수건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반창고를 붙여준 후 치마를 내렸다. 그녀가 눈을 뜨더니 투덜거렸다.

“에에~ 모처럼 기분좋았는데 더 해줘.”

“안 돼. 슬슬 교수님 오실 시간이라. 일 하는 척 해야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웃차!”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가 폴짝 뛰어내렸다. 키가 작아 그런지 부드럽게 내려온다기보다는 점프에 가깝게 내려왔다. 책상 앞에 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차례 제자리에서 점프해 보더니 기쁨에 차 외쳤다.

“아이스크림의 힘으로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시아 완전 회복!”

“상아탑에서 일하며 그곳의 정기를 가득 받은 내 마법의 힘이라고 해 주지 않을래?”

그녀는 날 보더니 큰 인심 쓰는 것처럼 고개를 까딱이곤 문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어지러운 연구실 안에서 용케 한 번도 장애물에 부딪치지 않고 나가는 게 용하다. 똑같은 짓을 해서 연구실을 대혼돈의 장으로 만드는 것보다, 이 자리에 앉은 채로 배웅하는 게 낫겠다.

“그럼 잘 들어가, 시아. 심심하니까 종종 놀러와!”

“알았어. 질릴 때까지 놀러와줄게~”

시아는 언제나처럼 내게 손을 흔들어주고 활발한 걸음으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의 경쾌한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난 손수건을 다시 꺼냈다. 군데군데 피가 묻은 지저분한 손수건이었지만 내겐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해 주는 물건이다.
연구실에서 언데드들과 외롭게 격투를 벌이던 마법사의 고독한 등이 떠오른다. 고독하지 않다면, 다시 말해서 주변에 다친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물건을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손수건은 오늘 아주 적절한 최후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난 손수건을 집어넣고 조심조심 복도로 나갔다. 잠시 후 교수님이 오면 허락을 구해 책을 좀 본격적으로 정리해야겠다. 문을 열고 나가자 상아탑에서 설치해 준 반영구 램프의 흰 빛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예전에 교수님의 석관을 가져가는 대가로 약속했던 것들 중 하나가 제대로 지켜진 것이다. 하루 종일 불이 켜지는 녀석이라 처음엔 다들 신기해했지만 지금은 무심히 지나치고 있다. 저녁마다 초를 켜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하던 관리인들도 요샌 램프 위에 먼지가 쌓이는 것을 방치하고 있는 판이다. 매순간 현재만을 비추기 위해 램프 안에 고독하게 자리잡고 있는 발광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덮개를 씌웠다. 아직은 이 빛이 필요할 정도로 어두워지지 않았다.

아래층의 빈 강의실에서 활동 중인 선교 클럽의 기도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온다. 늘 들어왔던 것처럼 우리는 목숨 바쳐 그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리, 로 시작해서 우리의 죄를 다 가져가 주십사, 로 끝나는 내용이었다.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코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들은 저들끼리 알아서 놀라지. 내게는 나만의 기도가 있다. 이 세상의 어떤 기도보다도 내 기도가 오데사에게 가장 확실히 전달될 거라 믿는다. 사람들은 신의 발밑으로 굳이 기어들어가 바닥을 보며 신을 부르짖고, 그것으로 신에게 자신의 뜻이 전달되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들아, 제발, 기도는 신의 귀에 대고 하는 것이지, 신의 발 언저리에 내뱉는 게 아니다.

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바람을, 새파란 하늘을, 둥실 떠 가는 구름을, 아직 높이 떠 있는 태양을 보자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제는 나의 동반자가 된 내 안의 테르가 기분좋게 출렁거린다. 기도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날 사랑해주는 당신을, 항상 사랑할게.”

내 안에서, 내 곁에서 나와 항상 함께 하는 전능한 오데사를 향해 난 짧고 간결한 기도를 올렸다.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 완결입니다.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어디까지 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작가가 나서서 몽땅 해설해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제 나름으론 최대한 쉽게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시는 부분이 있다면 한번 처음부터 다시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건방진 ​소​리​.​.​.​일​까​요​?​)​
첫 화부터 지속적으로 뿌려놓은 떡밥이 많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소설 중에 모두 내놓았으니까요.

오데사의 정체에 대해 짐작하신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황금가지에 대해 그렇게 강조한 이유가, 그 책에서 '숲의 왕'과 '희생양', '예수 그리스도'파트가 연이어 나오는 부분을 읽어보신다면 오데사의 행위와 마지막의 승천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양을 최대한 신성하게 만든 후 없애는 고대의 관습이 예수 그리스도 신화를 탄생시켰다고 하는 내용에서 오데사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졌습니다. 참, 오데사를 소녀로 한 이유는 고대 모계사회의 여신을 베이스로 했기 때문입니다. 제 설정에선 '오데사의 현신이 여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튼 지금은 남신으로 숭배되고 있다'란 교수님의 연구자료도 있었는데 미처 등장시키지 못했습니다.
'테르'는 '데메테르'에서 따 왔습니다.(위의 여신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현대의 '업'과 '테르'를 구분한 이유는, 업은 그야말로 떼어내야 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물건이지만, 테르는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로 보아 주셨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은 희생양에게 자신들의 테르를 몰아주는 대신, 스스로 발전하여 테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 이쯤되면 제 종교관을 아실 수 있겠지요? 종교란 중언부언할 필요 없이 인류 보편의 진리를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다고 말한 강도에게 즉석에서 천국행을 보증해 주셨고(이 자리에 율법이 낄 틈이 있을까요?) 원효 대사는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에 간다고 설파했습니다. 이들의 본질은 신에 대한 사랑이고, 그것은 다시 말해서 신이 만든 인간에 대한 사랑, 신을 믿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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