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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꽃(수필 모음)


저주받은 비석의 비밀


저주받은(?) 비석의 비밀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노원구에서 살아왔습니다. 중계동과 상계동을 왔다갔다하며 살았기에, 동네의 어지간한 곳은 잘 알고 있습니다. 논밭뿐이었던 동네가 강북 제일의 교육중심지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을 직접 보아왔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어릴 때부터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 있었습니다. 은행사거리에서 하계동 쪽으로 나가다 보면 도로 한가운데 불쑥 튀어나와 있는 돌담이 있었고, 그 위로 올라가보면 비석과 무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뒤가 야산이었기 때문에 해가 질 무렵이면 으스스한 기운을 사방에 뿌리곤 했고, 그래서 전 거길 지나갈 때마다 전속력으로 뛰었야 했습니다.

그 막연한 공포감이 보다 구체적으로 변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즈음이었습니다. 저와 친했던 형과 거기를 지나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그거 알아? 저거, 귀신 붙은 비석이야. 저거 건드리면 죽는다고 써져 있대. 그래서 여태까지 저렇게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어도 손을 못 대는 거래.”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제 머릿속에서는 이 비석이 투탄카멘 왕의 저주만큼이나 섬뜩한 이미지로 각인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흉악한 물건이 있었을 줄이야!’

그 뒤로 전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간혹 간다고 한다면, 아직 거기를 모르는 친구를 돌담 아래로 데려가 저주 이야기를 꺼내며 겁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뉴스에서 ‘통행에 방해되는 문화재, 언제까지 이렇게 방치해야 하나’란 소식을 접했을 땐 빨리 좀 허물어 버렸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전 정릉에 있는 국민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평소 국어점수가 높고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착실하게 수업을 받던 어느 날, 수업과제로 ‘한글과 관련된 문화재 탐색해 조사하기’란 주제가 주어졌습니다. 전 집에 돌아와 먼저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최대한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기 위해 노원구 일대를 검색해보았는데, 그때 ‘한글고비’란 게 눈에 띄었습니다. 위치를 살펴보니 예전의 석비가 있던 곳. 한동안 그 근처로 지나갈 일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던 곳이 이제야 기억났습니다.

다시 찾은 그곳은 예전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습니다. 흉하게 돌출되어 있던 부분을 뒤로 밀어내고 석비를 약간 이전해 꾸몄으며, 무덤 근처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과거의 두려움이 사라져, 전 처음으로 비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비 근처에는 꼬마 두 명이 강아지풀을 뽑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쟤들은 저 비가 무엇인지 몰라서 저러나?’

전 속으로 의아해하며, 그 비에 새겨진 글을 보았습니다. 비의 앞뒤에는 한문이 적혀 있었지만, 제가 보고자 하는 건 비의 옆면에 새겨진 글씨. 순한글로 이루어진 그 비석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녕​​비​라​거​운​사​​​​ㅣ​화​​니​브​리​라​ ​이​​글​모​​사​​​려​알​위​노​라​’​

(영한 빗돌이라. 건드린 사람은 재앙을 입으리라. 이는 글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십수 년이 지나서야 정체를 알게 된 한글고비. 새롭게 단장한 팻말이 보충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이는 부모님의 묘를 모신 아들이 묘 앞에 비를 세운 후, 비의 훼손을 염려해 한글과 한문으로 경계하는 내용을 적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걸 몰라서 지금까지 비의 저주를 믿었다니,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습니다. 전 부끄러워하며 비석에 고개를 숙여 사과드리고 내려왔습니다. 저 뒤의 아이들은 저처럼 오해하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문화재는 그것의 가치를 알 때에야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글고비처럼 새롭게 단장해 제 모습을 찾는 문화재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문화재를 관리하지 않아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면, 저처럼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더 늘지도 모르니까요.

서울은 우리 역사의 중심지이고, 그런 만큼 여러 시대에 걸친 다양한 문화재를 갖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그 장점을 살려, 서울이야말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역사와 문화의 도시란 걸 어필할 수 있다면, 모두가 바라는 글로벌 서울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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