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리포트를 쓰게 되었습니다(삽화)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따분하다.
난 몇 번째일지 모를 하품을 하며 등허리를 쭉 폈다. 군살없이 팽팽한 몸에 약간의 긴장을 불어넣자 기분 좋게 느낌이 왔다. 빳빳하게 선 수염을 몇 번 쓰다듬고, 앞발을 살짝 핥은 다음, 천천히 방 안을 거닐었다. 석양이 창 너머로 사라져 잿빛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방은, 이제 곧 캄캄해질 참이었다. 방 여기저기에 쌓인 먼지들과 너저분하게 내팽개쳐진 옷가지들, 구석에 굴러다니는 신발 등을 둘러보자 한숨이 나왔다.
내 동거인 녀석은 고양이인 내가 봐도 심각할 정도로 생활력이 없다. 다 큰 수컷이 변변찮은 암컷 하나 만나지 못하고 매일매일 책상에 앉아 뭔가 끄적대는 꼴은 차마 봐 줄 게 못된다. 저런다고 암컷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런 일에 매달리는 걸까. 수컷이라면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구애의 노래라도 부르며 돌아다니는 게 어울릴 텐데. 예전에 어느 현명한 고양이가 심각한 얼굴로 ‘인간은 늘 발정기란 말야. 굉장하지 않나? 우리들이 그랬다간 암컷한테 정기를 빨려 몸이 남아나지 않을걸’이라고 가르쳐 준 적이 있는데, 최소한 저 자에 한해서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오, 내가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동거인이 눈치를 챈 듯하다.
“뭘 쳐다보냐, 펠. 배고픈 게냐?”
그러고보니 배가 고프긴 하다. 녀석이 내게 밥을 주는 시간은 항상 일정하다. 그래서 내 신체 리듬도 녀석에게 맞춰져 있다. 밖에서 떠도는 녀석들과 달리, 난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으로 이런 튼튼한 몸을 만들었다. 그걸 선보일 암컷들이 근처에 없는 게 유감이지만.
‘고고학 교수’란 직함을 달고, ‘브릭’이란 이름을 가진 녀석은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초에 불을 붙였다. 기름으로 불을 붙이면 손도 덜 가고 밝을 텐데, 이 녀석은 가끔 괴상한 물건들을 집에 들여놓으며 ‘앞으로 석 달간 저녁은 못 먹겠군’ 따위의 말을 중얼거린다. 기름과 초를 맞바꾸기라도 했나? 아니면 저런 물건들과 저녁밥을 맞바꾼 건가? 동거인이 들여온 물건들은 대부분 사라지지 않고 좁은 집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내가 운신할 공간도 점점 줄어드는 중이다. 괴상한 관이나 가면, 돌덩어리 같은 것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냄새를 풍겨 딱 질색이다. 하지만 내가 그것들을 발로 차고 꼬리로 갈기는 게 동거인 눈에 띌 때마다 하루 종일 굶어야 하니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 이 좁은 집에서 얻는 유일한 낙이 밥인데, 그것마저 포기할 순 없으니. 그나마 동거인의 식단이 나날이 부실해진다 해도, 그게 내 식단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하다.
녀석이 가져온 밥을 천천히 먹으며, 난 빵을 우물거리는 녀석을 찬찬히 흝어보았다.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지저분한 수염 - 이 몸의 우아한 수염과 참으로 비교되는 한심한 모습이다 -, 누런 얼굴과 삐쩍 마른 몸을 가진 약한 모습.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쭉 지켜보았지만, 몇 번의 겨울이 지나도 여전하다. 책상 위에는 기묘하게 생긴 목줄이 놓여 있었는데, 오늘 녀석이 하루종일 뜯어보고 있던 물건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녀석이 만약 저 목줄을 내게 채우려 들었다간 그날로 우리의 좋은 관계는 돌변할 것이다. 난 어디에도 구속받는 걸 싫어하니까.
동거인과 내 생활에는 변화란 게 없다. 녀석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내게 밥을 주고 나갔다가, 해가 저물기 조금 전에 돌아와 책상에 앉아 뭔가를 끄적댄다. 그러다 불을 켤 시간이 되면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이후 계속 책상에 앉아 있다가 초가 꺼질 때쯤 잠자리에 든다. 녀석의 재미없는 삶을 내가 굳이 트집잡을 건 없겠지만, 가끔 산책 정도는 시켜줬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 내가 혼자 나가면 암컷이고 수컷이고 할 것 없이 놀라 자빠진단 말이다. 그게 이 몸의 위엄있는 풍채 때문이란 건 잘 알고 있지만, 두려움에 뒤로 자빠져 오줌을 지리는 인간을 몇 본 후론 흥이 떨어졌다. 그래서 지금은 동거인이 외출할 때마다 창을 열고 지붕 위로 올라가 느긋하게 햇볕을 쬐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빵을 다 먹은 녀석은 칠칠맞게 부스러기를 수염에 붙인 채 내게 다가왔다. 녀석은 날 빤히 바라보다가 내 턱을 붙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만큼, 이 정도의 무례는 허용범위다.
“요즘 내가 씻기질 않아서 좀 지저분하군. 하지만 상관없나. 그 아이가 씻겨주면 될 테니까.”
씻다니! 그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위이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동네의 모든 고양이들의 천성이다. 일단 씻으면 털이 마를 때까지 꾀죄죄한 용모가 될 뿐 아니라, 내가 풍기는 남자다운 향취가 날아가 버린다. 그뿐이랴, 물에 젖은 그 느낌 자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럽다. 게다가 인간들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가 왜 앞발로 세수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우린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청결함은 스스로 유지한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바득바득 날 씻기겠다는 이유를 도무지……
잠깐?
그 아이???
동거인은 평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봐, 펠. 내일부터 새로운 얼굴이 하나 보일 게다. 시아라고 하는 여자애인데……네 얘기를 듣자마자 자기가 돌보겠다고 난리를 치더구나. 그 아이한테 실수 저지르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았지?”
난데없는 이야기에 난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니까 이 작자가 내일부터 새로운 암컷을 들인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이건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덕분에 뒤에 뭐라고 말했는지 잘 듣지도 못했다. 짝짓기도 한번 못해본 작자가 암컷을 집에 들인다는 건, 드디어 이 인간에게도 발정기가 도래했단 뜻이렷다? 그렇다면 내일은 일찌감치 자리를 피해주는 게 좋겠군. 남의 짝짓기를 보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다음날, 동거인이 나가고 방 안에 나 혼자만 남았다. 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동거인이 오는 건 저녁 무렵일 테니, 그보다 약간 일찍 지붕 위에 올라가 있으면 되겠지. 쭉 규칙적인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그 정도의 시간 계산은 충분히 가능했다. 짝짓기가 끝난 후에야 들어가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불쾌했지만, 이정도 사정은 봐주기로 하자. 저 작자가 드디어 어엿한 수컷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여기서는 어른의 양보로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방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데, 갑자기 쿵쿵쿵 하는 발소리가 복도에서 들렸다. 이 시간에는 다른 방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는데, 발소리는 내 방 앞에서 뚝 그쳤다. 그리고 누군가가 부스럭거리다 쇳조각을 문구멍에 끼웠다. 철컥거리는 소리를 듣자니 동거인은 아닌 것 같다. 동거인은 언제나 일정한 발소리로 다가와 단 한 번에 문을 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자는 누구일까. 도둑? 아니, 도둑이라면 보통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일전에도 불운한(녀석 입장에서 볼 때) 도둑 한 마리가 창문으로 들어오려다 내게 두들겨맞고 그대로 1층까지 낙하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이 주택에는 악마가 산다는 괴소문이 나돈다는 얘길 들었다. 난 그 악마란 놈이 있으면 한번 붙어보고 싶었지만, 지금껏 만나지 못했다. 아무튼 도둑일 가능성을 제한다면, 그리고 아마 동거인에게 받았을, 문을 여는 도구인 쇳조각을 가지고 있다면……
끼익! 문이 경쾌하게 열리며 누군가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난 나보다 큰 존재는 아래에서 위로 흝어보는 버릇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상대의 발부터 보았다. 발에 신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암컷임이 틀림없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난 창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내가 이대로 어영부영 있으면 암컷이 내 풍채에 놀라 도망갈 우려가 있다. 그것은 불쌍한 동거인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암컷이 내뱉은 감탄사가 내 움직임을 그치게 했다.
“귀여워!”
……………………………………뭐?
난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귀엽다는 말은 극상의 암컷이나 듣는 말이다. 나처럼 용맹무쌍하게 생긴 고양이에게 그런 말을 지껄인 자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갓 태어난 날 본 어머니마저도 ‘넌 커서도 징그럽게 생길 것 같구나’라고 칭찬해주시지 않았던가. 그런 나에게 모욕을 안겨줄 줄이……야?
이, 이봐! 느닷없이 몸을 날리지 마라!
내 비명에 아랑곳없이, 문에서 내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점프한 암컷은 날 붙잡는 데 성공했다. 이 암컷의 기민한 몸놀림은 느리고 둔한 동거인과 심히 대비되었다. 이 정도의 탄력이라면 좋은 짝짓기 상대이려나. 하지만 그건 인간들 사이의 문제고, 내겐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내 몸통을 붙잡은 암컷은 내 털에 뺨을 부비부비하며 마구 날뛰었다.
“꺄아! 너무 좋아! 털도 부드러워! 이런 고양이 꼭 키워보고 싶었어!”
내 자랑인 부드러운 털부터 짚고 넘어가다니, 이 암컷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수컷을 홀리는 데 타고난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이 암컷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갔기 때문에, 난 조금 느슨해질 수 있었다. 내가 힘을 빼고 그녀에게 몸을 맡기자, 그녀는 더욱 꺄꺄거리며 날 힘들게 안아올렸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지만, 암컷은 전혀 힘들지 않다는 기색으로 날 껴안고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데 너, 냄새나. 교수님도 펠 목욕시킨 지 한참 지났다고 했으니, 지금 누나가 씻겨줄게. 알았지?”
뭐가 알았냐는 거냐! 목욕이란 말을 듣는 순간, 축 늘어졌던 몸이 다시 팽팽해졌다. 난 급히 암컷의 품 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내가 몸을 비틀려는 찰나, 무방비 상태였던 내 배에 암컷의 부드러운 손이 닿았다. 그 손이 섬세한 동작으로 내 배를 살살 긁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힘이 빠져나갔다.
큭, 암컷 주제에……! 여긴 어떤 생물에게도 허용한 적 없는 공간인데!
하지만 아무리 독기를 품으려 해도, 암컷의 손길 앞에선 무력해질 뿐이었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헤롱헤롱해진 채 욕탕 안에 들어간 나는 그대로 물세례를 받게 되었다.
“자, 참 잘했어요~ 이제 몸 말리고 쉬자. 얌전하게 있어줘서 금방 끝났네.”
암컷은 싱글벙글 웃으며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었다. 이 녀석은 굴욕감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건가…… 동거인 녀석의 암컷이란 위치만 아니었어도 지금 한 방 날리고 싶은데! 하지만 여기선 내가 참아야 한다. 참아야……
“그럼 깨끗해졌으니까 밖으로 나갈까? 너, 얘기 들어보니까 몇 달간 집 안에만 있었더라? 나랑 나가서 산책하자. 밖에 날씨 참 좋아.”
산책!!! 내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거리는 아수라장이 된다는 걸 이 암컷은 모르고 있다! 그래도 명색이 동거인과 짝짓기를 하려는 암컷인데, 이런 기본적인 사실도 모른다니! 기가 막혀 잠시 멈칫했던 난 곧 결단을 내렸다. 여기서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어차피 이 암컷에게 굳이 애교를 떨 입장도 아닌 만큼, 겁을 줘서 내게서 손을 떼게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게 하면 동거인을 버리고 도망칠지도 모르니, 힘조절을 할 필요는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발톱을 집어넣고, 힘을 가늠해 암컷에게 고양이 펀치를 날렸다.
퍽!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이건 제대로 들어갔다. 성인 암컷인 만큼 목이 휙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내가 때린 부위는 살짝 빨개졌다. 힘조절을 하고 누군가를 친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난 멍한 얼굴로 내가 때린 부위를 만지는 암컷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이제 암컷은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울까, 아니면 도망갈까? 부디 전자였으면……하는……데……
……암컷은 내 예상보다 훨씬 거물이었다.
“호오. 네가 이 누나를 쳤겠다? 목욕도 시켜 줬더니?”
암컷은 날 침대로 던지더니 그대로 자신도 몸을 날렸다. 기습에 놀라면서도 어찌어찌 착지에는 성공했지만, 뒤이은 암컷의 육탄공세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쿵, 하고 묵직한 감촉이 온몸에 느껴지자 난 캑 하고 한숨을 토해냈다. 이 동네의 전대 대장이었던 멍청한 개가 날 깔아뭉갰던 적은 있었지만, 그때와는 무게가 틀렸다.
“어머, 왜 움직이지 못하는 걸까? 설마 이 누나가 무거워서 그렇다는 건 아, 니, 겠, 지! 에잇, 에잇!”
그, 그만! 목 조르면서 엉덩이 때리지 마라! 거, 거, 거기는 느끼는 곳이란 말이다!!! 이 암컷은 악마냐! 거기, 그만…… 아니, 더……
정신이 잠시 휙 날아갔다 겨우 다시 돌아왔다. 고양이의 목숨은 9개라고들 하는데, 아마 지금 한 개가 날아갔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새 내 목에 묘한 장식이 달린 가죽 목줄이 달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이거 뭐야? 내게, 이 몸에게, 목줄?
“음! 좋아! 이걸로 봐주도록 하지!”
봐주긴 뭘 봐줘!
“교수님 물건들 중에 있던 거긴 하지만…… 설마 이런 목줄까지 연구대상은 아니겠지. 분명히 네게 해 주려고 가져왔다가 잊어버리셨던 거야. 정말 어울리네.”
그렇게 말하고 활짝 웃는 그 얼굴에, 차마 고양이 펀치를 날릴 순 없었다.
내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지, 암컷은 혼자서 발랄하게 중얼거렸다.
“날씨 참 좋다. 그치? 교수님도 참. 너처럼 멋진 고양이를 데리고 있으면 자랑도 할 겸 자주 밖에 데리고 나오셨어야지. 그래도 이제부턴 이 몸이 있으니 안심하도록 해.”
안심? 내 평온한 나날을 무참히 박살내고? 난 한층 더 우울해졌다. 그렇지만 이 암컷에게 대적할 방법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 넓은 나로서는, 동거인의 총각 딱지를 떼주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길가는 내 예상과 달리 아수라장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오, 신이여 맙소사! 저 괴물이 다시 태양 아래 나왔어!’ ‘저게 돌을 할퀴면 발톱자국이 깊게 패인다면서?’ ‘저 고양이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간 삼대가 재수없어질지도 몰라!’ ‘그런데 옆의 여자는 뭐야? 악마와 계약한 마녀인가?’ 같은 수군거림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암컷이라면 이런 소리들에 민감해야 할 텐데, 이 둔감한 여자는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가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게 내겐 의문스러운 점이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저 여자는 남들과 생각하는 게 꽤 차이나는 모양이다.
길가의 사람들이 숨죽이며 옆으로 피해 있었기에 우린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한 곳은 인간들이 ‘커피’라 부르는 쓰고 검은 물을 파는 집이었다. 그런 물을 내게 먹인다면 정말 미쳐 날뛸 생각이었지만, 좀더 그녀를 살펴보니 그녀는 그럴 생각으로 온 게 아닌 듯했다.
“모방 아저씨! 저 왔어요!”
듣기 좋은(내 개인적인 감정을 모두 제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목소리가 홀 안에 싱그럽게 퍼졌다. 칙칙했던 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하지만 바뀐 분위기 또한 어딘가 음침한 냄새를 담고 있다는 걸 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운터 너머에서 중년의 수컷이 흐느적거리며 기어나와 음침하게 인사했다.
“시아…… 왔구나. 어서 이리 들어와라.”
주인은 더 할 말이 있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지 뒤끝을 우물거렸다. 인상을 보니 원래 숫기없는 자였을 테지만, 이 정도의 반응은 정상적이라 보기 힘들다. 난 곧 그 원인을 찾아냈다. 그리 크지 않은 가게의 중앙을 차지하고 앉은 험악한 인상의 수컷놈이 가게의 분위기를 온통 망치고 있었다. 이런 곳은 보통 암컷, 혹은 암수 커플이 나란히 오는 곳이란 걸 현명한 고양이에게서 전해 듣고 있었는데, 저런 자가 있으면 그들이 이곳을 찾을 리 없다. 아니나다를까, 우리가 카운터 뒤로 돌아가자 주인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큰일이다. 저 진상 녀석이 음식을 마구 주문하면서 몇 시간째 앉아 있어. 오늘 장사 다 접게 생겼……”
“그보다, 아저씨! 부탁 하나 드릴게요. 이 고양이를 당분간 제가 일할 때마다 이곳에 놔두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고양이? 지금 그런 게, 으헉!”
내가 지긋이 그를 노려보자, 수컷은 깜짝 놀라 뒤로 자빠져 버렸다. 이게 바로 나를 보는 인간들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이 암컷만 빼고.
“저, 저, 저리 치워! 이거 고양이 맞아? 이건 새끼 호랑이라고 해도 믿겠어!”
“고양이 맞아요. 새끼 호랑이는 줄무늬가 났지, 삼색 얼룩이 있진 않지요.”
“그럼 삼색 얼룩이 난 새끼 호랑인가 보지! 어쨌든 어서 데려가! 저런 맹수랑 같이 일할 수 없어! 게다가 난 고양이를 싫어한단 말이야!”
“어머, 지금 고양이라고 인정하신 거죠? 에헤~”
암컷이 혀를 드러내며 비죽이 웃자, 수컷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했다.
“시아야. 난 여태까지 네가 저지른 민폐에 대해 그리 탓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 네가 데려온 건 지금까지의 민폐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강하단 말이다! 행여나 그 녀석이 날 할퀴기라도 하면, 이 가게는 누가 운영해야 하는 거냐?
……아니, ‘제가 할게요’ 같은 소리는 제발 하지 말고.”
“안심하세요. 펠은 아주 얌전한 고양이랍니다. 저어어얼대 아저씨를 해치지 않아요. 그 점은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아까 나랑 격렬하게 육체의 대화를 주고받았던 주제에, 천연덕스럽게도 이야기한다. 난 기가 막혀, 옥신각신하는 둘을 뒤로 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혼자 행보했다간 길거리가 또 수라장이 될 게 뻔하다. 어차피 저 나약한 수컷은 날 들여놓는 걸 허락하지 않을 테고, 그렇게 되면 암컷은 날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겠지. 난 그런 생각을 하며, 괜히 인상쓰고 있는 수컷을 유유히 지나쳐 느긋하게 햇볕이 비치는 곳을 찾아가 둥글게 몸을 웅크렸다. 아니, 웅크리려고 했다.
순간 몸이 붕 떴다.
……!
그것을 깨달은 순간, 복부에 극심한 충격이 느껴졌다.
난 낙법을 할 틈도 없이 벽에 거세게 부딪쳤다. 그 충격으로 창문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카운터 뒤의 둘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나왔다. 그런 둘을 향해 거친 목소리가 쏟아졌다.
“뭐야, 이 가게는! 음식을 파는 가게에서 고양이를 키우나? 고양이가 얼마나 털이 잘 날리는데, 고양이 털이 손님 목구멍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지?”
“죄, 죄송합니다!”
“아저씨! 지금 저 녀석이 펠을 멋대로 걷어찼잖아요!”
“시끄러! 얼른 사과드려!”
“사과? 지금 사과로 넘어가게 생겼어? 게다가 저 인상 더러운 고양이가 날 깨물 뻔했다구! 그것까지 포함해서 위자료 내놔!”
“거짓말하지 말아요! 제가 곁눈질로 보고 있었어요! 펠은 저기 창가로 가려던 것 뿐이었어요!”
아아, 이제 상황이 좀 정리가 된다. 충격 때문에 잠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는데, 친절하게 녀석이 정황 설명을 다 해주었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지금 날 걷어찼다?
이건 참 신선한 반응이라 눈물나올 만큼 반가울 지경이다. 이런 겁 없는 녀석을 몇 년 사이에, 아니 내 평생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고통보다도 짜릿짜릿한 흥분이 날 고양시킨다. 난 서서히 머리를 들어 그 빌어먹을 수컷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어느새 품에서 날카로운 쇳조각을 꺼내들고 있었다. 저 쇳조각은 내 발톱보다 예리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그때 암컷이 녀석의 품에 파고들어 허리를 감싸안고 뒤로 당겨댔다. 둘의 체격차이가 상당해서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은 꼴이었다. 하지만 암컷의 표정은 진지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칼 넣지 못해요? 가만히 있는 고양이를 걷어차 놓고, 이젠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에이, 귀찮아! 저런 거슬리는 고양이 한 마리 죽이는 게 뭐 어때서! 너희들은 내게 줄 위자료나 얼른 가져와!”
“닥치고 꺼져 버려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신고하겠어요!”
수컷의 눈이 서서히 붉게 충혈되었다. 이건 위험하다. 내가 아니라 저 암컷이. 저건 정신 제대로 간수할 줄 모르는 녀석이 극도로 화가 치밀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게다가 손에 쇳조각까지 들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설 차례이다.
뒷다리에 힘을 주며 공격할 타이밍을 찾던 내게, 녀석에게 휘둘리고 있는 암컷의 얼굴이 보였다. 그걸 보고 난 하마터면 눈을 비빌 뻔했다. 암컷의 얼굴에 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여 봤지만, 그 그림자는 여전히 존재했다. 저건 분명 아까까지 없었다. 그 때문에 멈칫하느라, 좋은 공격 타이밍을 날려버렸다.
“나보고 지금 꺼지라고 했겠다?”
수컷이 잔인한 웃음을 입가에 걸며 쇳조각을 서서히 치켜들었다. 그를 뒤로 끌어내려고 정신없이 바둥거리던 암컷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뒤에 있던 나약한 수컷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녀석은 암컷을 먼저 도륙낼 판이다.
이런, 제길! 매우 나쁜 타이밍이었지만 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돌진했다. 내 자랑인 발톱을 미처 꺼내지 못할 만큼 허겁지겁 행한 몸통박치기였다. 뒷다리에 힘을 주고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내 빠른 움직임에 당황한 녀석은 치켜들었던 쇳조각을 내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를 붙들고 있던 암컷의 무게 때문에 몸을 제대로 돌리지 못한 채 내 공격을 고스란히 허리께에 받았다.
“크악!”
내 단단한 이마가 얼얼한 만큼, 녀석의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는 암컷과 함께 날아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약한 수컷이 잽싸게 다가와 암컷을 끄집어 질질 끌고 갔다. 다행히 적은 거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쇳조각을 다시 불끈 쥐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런, 개새끼가……”
고양이다, 인간 새끼야!
그때 뒤에서 암컷의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펠! 해치워 버려!”
암컷의 외침이 내 몸을 움직였다. 뒷발이 힘차게 땅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녀석의 쇳조각이 번뜩였다. 녀석은 정면 승부를 예상하고 있었을 터. 하지만 난 그런 수준 낮은 싸움은 하지 않는다. 내 몸은 옆의 벽을 차고 한 번 더 도약해 녀석의 뒤를 차지했다. 잽싸게 왼발을 휘둘러 긴 발톱을 녀석의 목덜미 부근에 꽂고,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다시 한 번 띄운 후 오른발로 녀석의 머리를 길게 그었다. 여기까지가 내 한 동작이었다. 녀석은 아마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핏줄기가 길게 솟고, 잠시 후 녀석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이미 싸울 의사가 사라진 것 같다. 그래도 꼴에 근성을 보이겠다고 아직도 칼을 떨어뜨리지 않았기에, 슬슬 다가가 발톱으로 손목을 확 그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칼을 저만치 날려버리고 손목을 부여잡으며 끙끙거린다. 한심한 놈. 내가 피묻은 앞발을 할짝거리자, 나약한 수컷이 히이이이익 하고 신음을 흘린다. 아무래도 내 싸움에 홀렸나 보다. 이 정도면 저 암컷도 좀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까?
“펠, 잘했어! 이제 그만해도 돼!”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흥분해버린 암컷의 환호성을 듣고 난 한숨을 내쉬며 발톱을 접었다. 안 그래도 시시한 싸움을 더 지속할 생각은 없었다. 녀석이 쓸데없이 반항하지 않도록 그 자리에서 녀석을 감시하다, 문득 생각났다.
그런데 이러면 내가 네 명령을 듣는 것 같잖아!
현명한 고양이는 말했다. 인간이고 고양이고, 필요로 하는 놈은 언제나 늦게 온다고. 그 말대로, 이런 불한당을 상대해야 할 수컷들은 한참 뒤에나 왔다. 내가 저 녀석을 도륙냈단 걸 알고 상당히 거슬리는 반응을 보였지만, 쇳조각으로 인간을 위협했다는 게 참작되어 녀석에게만 죄를 묻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저 녀석이 위험하지 않은 거냐?”
“당연하죠! 평소엔 얼마나 귀엽고 활발한데요!”
봉 끝에 쇳조각을 단 무기를 손에 쥔 수컷이 어이없다는 듯 날 흘끔 보았다. 나도 그 시선에 동감하는 뜻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주었다.
그들이 모두 떠나자 나약한 수컷은 우리를 내보냈다. 오늘은 장사하기 틀렸으니 집에 가서 쉬라고 한 것이다. 여자는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밖에 나와보니 그 안에서 있었던 시간이 의외로 길었던 걸 알 수 있었다.
“펠, 너 모방 아저씨가 대단하다고 칭찬해 줬어. 아직 가게 데려와도 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조만간 승낙해 주실 거야. 그렇게 되면 내가 매일 이리로 산책시켜 줄게. 알았지?”
그놈이 그런 승낙을 할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만, 그녀는 진심인 듯했다. 그걸 기대하느니 차라리 날 그놈의 앞에 들이대며 협박하는 게 나을 텐데.
여자는 즐겁게 조잘거리다 주위를 흘끔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또 옆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까 내게 묻었던 피는 다 닦았지만, 막 투쟁을 해서 그런지 평소의 배나 되는 고양감이 내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길에는 나와 여자를 중심으로 진공의 원이 생겨나고 있었다.
여자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흐음, 하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이젠 그녀가 무슨 일을 벌일지 기대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어떤 예상을 하더라도 그녀의 범주를 다 집어넣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으랏차!”
내 커다란 몸이 붕 떠올랐다. 그녀는 아예 날 번쩍 들어 안아버렸다. 여전히 팔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주위를 둘러보며 선언했다.
“얘 안 무서워요!”
거리가 한순간 침묵했다. 뒤이은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날 내려놓았다. 정적은 금세 풀렸지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녀가 이런 행동을 취하자 나를 향한 적대적 시선이 조금은 누그러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날 보며 활짝 웃는 그녀를, 난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야겠다.
선택의 여지니, 좀더 생각해 봐야겠느니 하는 건 저리 치우도록 하자.
난 방관할 수 없는 것이다.
아까보다 더욱 짙어진, 그녀의 얼굴에만 존재하는 새까만 그림자를.
잠깐 동안이었지만 많이 그리웠던 내 보금자리에 도착하자, 그녀는 그대로 교수의 침대 위에 쓰러졌다. 애교 섞인 행동이 아니라, 거의 기절하듯 쓰러진 것이었다. 아까부터 내쉬던 거친 숨은 날 잠깐 들었다고 해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그녀가 가게를 나온 순간부터 조금씩 숨이 거칠어지고, 식은땀이 나고 있던 걸 난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저 그림자는? 길거리의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오직 그녀에게만 존재하는 저 그림자가 좋은 징조란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난 저 그림자가 처음 보이던 때를 생각해 보았다. 그림자는 불한당 녀석이 쇳조각을 막 치켜들었을 때부터 생겨나 있었다. 인간은 모르겠지만, 고양이는 이런 점에 아주 예민하다.
그래,
죽음의 냄새란 것에.
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발을 들어 그녀를 꾹꾹 눌렀다. 답답한 듯 찡그리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 편안하게 변했지만, 딱히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아직 이 상황에 대해 논리적 정리가 필요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대로 놔두면 곧 죽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건가?
-이봐, 고양이.
처음 듣는 목소리가 귓가에, 아니 마음 속에 울렸다. 목소리가 마음에 직접 진동하는 것은 매우 기묘한 느낌이라 난 당황했다. 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다시 목소리가 느껴졌다.
-뭐야. 사자(死者)의 증표를 목에 차고 있으면서 날 모르는 거야? 너 신참이냐?
다시 목소리를 듣자 대충 근원이 짐작이 갔다. 난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림자는 그녀의 얼굴 위에서 스르륵 흘러내려 가슴 위에서 멈추더니 뭉클거리며 뭉쳐졌다. 그것이 완성된 모습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낫을 들고 있는 작은 사이즈의 해골바가지. 사람들이 사신이라 부르는 존재였다. 처음으로 보았지만 의외로 난 침착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죽음의 냄새를 맡았을 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넌 사신인가. 얘기만 들었지 직접 본 건 처음이군. 목적은 저 여자냐?
내가 마음 속으로 묻자 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걸 보니 사자의 증표를 찬 건 우연인 듯하군. 네가 차고 있는 장신구는 고대로부터 전해진, 선택된 고양이가 사신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다. 사자의 혼이 편안히 몸을 빠져나와 사신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동거인 녀석, 터무니없는 걸 연구하고 있었군. 그 녀석은 자기가 뭘 연구하는지 알고 있었을까? 아무튼 이 재수없는 물건은 이 일이 끝나는대로 벗어야겠다.
사신은 말을 이었다.
-그 증표에는 고양이가 사신을 돕는 방법이 그려져 있다. 고대에는 고양이의 이런 직책을 깨닫고 있었기에 고양이를 숭배하기도 했지. 하지만 이렇게 설명해도 넌 그 방법을 잘 모를 테니, 이 작업은 나 혼자 하도록 하겠다.
-잠깐 기다려. 그렇다면 역시 그 여자가 곧 죽는다는 건가?
-그렇다. 이 여자는 원래 방금 칼에 맞아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지. 그런데 네가 나타나 운명이 조금 꼬였어. 넌 잘 모르겠지만, 사자의 증표를 찬 고양이는 사신을 돕는 대가로 운명에 조금이나마 간섭하는 게 허용되거든. 원래는 그런 행동을 하면 엄격히 추궁받아야 하지만, 넌 몰랐으니 이 부분은 넘어가겠다.
역시. 내가 느낀 게 맞았다. 이대로 놔두면 저 여자는 죽는다.
그래서 난 생애 처음으로 부탁이란 걸 하기로 했다.
-……이봐. 저 여자, 그냥 놔두면 안될까?
그 말을 들은 사신이 머리를 약간 숙여 날 바라보았다. 해골바가지라 눈동자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눈구멍 너머에서 악의와 조소가 끓어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 하, 후하하하하! 이봐, 농담은 자제하지? 목숨 아까우면 말이야. 난 너를 존중해주는 것 뿐이지, 네게 손댈 수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어디까지나 사자의 증표 때문에 예우해주는 거라구.
-그래서 부탁이라고 했잖나. 대가라면 몸으로 때울 생각이다만.
-그래? 그렇다면 네 남은 생명의 절반을 저 여자에게 몰아준다면 어떨까?
-그거 좋지.
사신은 농담조로 한 이야기가 분명할 터였지만, 난 진지하게 대답했다. 내가 너무 빨리 대답하자 녀석은 놀란 모양이었다.
-아니, 생각도 안 하고 대답할 정도인가? 난 오늘 내내 이 여자를 관찰하고 있었어. 이 여자가 너와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일 텐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는 건가?
-이유야 있지.
처음에야 어쨌든, 오늘은 재밌는 하루였으니까. 그 보답일 뿐이다.
사신은 침묵했다. 이제 녀석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만약 정말 내 생명의 반을 달라고 한다면 그대로 내줄 생각이었다. 인간은 어떨지 몰라도 동물은, 특히 고양이는 생에 대한 미련이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얘기도 있지 않은가. 고양이는 삶을 너무 초개처럼 버리려 하기에, 신이 특별히 고양이에게 목숨을 9개나 주었다고.
하지만 내가 생명을 내주려고 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준 존재였다. 내가 오늘 하루 다른 존재가 된 건 아니었다. 난 여전히 모두가 무서워하는 존재였고, 단지 그녀가 그 무서움을 이겨냈던 것이다. 내 어떤 점이 그녀를 사로잡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도, 그리고 그녀가 나를 다시 한 번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도……
에에이, 길게 말할 필요가 뭐 있나!
오늘, 단 하루 동안에, 그녀가 좋아져 버렸단 말이다!
-대답은?
-바보냐. 사신은 운명을 집행하는 존재. 네가 사정한다고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나?
역시 교섭은 결렬되었다. 어차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난 몸을 일으켜 허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사신을 눈앞에 두고도 내 자랑스러운 근육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톱 끝, 털 한가닥 한가닥까지, 순식간에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다. 온몸의 부분들에서 준비완료 신호를 받은 나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럼 하나만 더 묻자. 네 녀석, 사신이란 존재는, 죽음이란 운명에 간섭할 수 없는 존재냐?
-그렇다. 우리는 정해진 것을 집행하는 자.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뭐야, 그럼 부탁할 필요도 없었군. 나처럼 우월한 존재가 네놈에게 부탁 따윌 하는 게 애당초 잘못이었어.
그녀의 얼굴로 올라가던 사신이 움직임을 멈추고 머리만 뒤로 돌렸다. 부엉이처럼 머리만 반회전하는 모습은 꽤 흥미로웠다. 나를 향한 사신의 눈구멍에선 어느새 파란 불꽃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 저거 화난 표시겠지? 난 씩 웃으며 사신에게 말했다.
-방금 네 녀석이 자기 입으로 떠들어대지 않았냐. 이 사자의 증표를 지닌 고양이는 운명에 간섭할 수 있다고 말이야.
-뭐라……
-알아들었으면 이 자리에서 꺼져, 이 허수아비야!
사신의 낫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내 전력을 다한 고양이 펀치가 사신에게 작렬했다. 누군가에게 내 전력을 다한 건 처음이라는 점에서, 녀석은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이다. 비록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흩어져 소멸해 버렸지만.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겐 독이 되었다. 녀석이 소멸하면서 내 여력이 남은 펀치가 그대로 그녀에게 작렬해 버린 것이다.
“쿨럭!”
가슴께에 내 펀치를 맞은 그녀가 기침을 토해냈다. 난 주먹을 꽂은 채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거, 잘못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녀는 긴 한숨을 다시 토해냈고, 그와 더불어 쌕쌕거리던 거친 숨이 진정되어갔다. 이건 전화위복인가. 나도 모르게 안도했다.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전력으로 걱정하기도 처음이다.
그런데,
“후, 후후후. 페에엘……”
그녀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빈틈을 보이자마자 장난을 치고 있겠다아~?”
그녀는 자신의 가슴께에 꽂힌 내 정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앗차! 급히 팔을 치웠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팔이 내 앞발을 붙들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난 그녀가 끄는 대로 이끌려 갔다. 이대로 한 대 맞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이 내 몸을 그대로 껴안았고, 따스한 숨결이 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오늘 잘했어. 하지만 나랑 오랫동안 함께 있으려면 얌전한 모습도 보여야 해. 알았지?”
아직은 기운없는 목소리였다. 잘 보니 그녀의 눈은 여전히 반쯤 감긴 채였다. 죽다 살아났으니 몸이 멀쩡할 리는 없겠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사신이 목구멍 안쪽까지 낫을 밀어 넣었다고 해야 하려나.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보다 나를 챙기는 걸 우선하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난 대체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가. 동거인의 짝짓기 상대라는 단순한 입장이 아니다. 이 여자는 앞으로의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거란 느낌이 들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희미해져가는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둘 다 피곤했으니 한숨 자자. 그리고, 일어나면 누가 주인인지…… 가르쳐……주지……”
아까의 내 주먹을 잊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난 실룩이는 입가를 진정시킨 후 그 옆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잠을 청했다. 그녀가 깨어나는 게 기대된다. 과연 내게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가르쳐 줄지.
-후일담-
따분하다,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역시 내 안목은 대단해! 지난번 목줄보다 이게 훨씬 나은걸?”
……누가 이 여자의 파멸적인 안목을 좀 수정해줬으면 좋겠다. 내게 리본이라니! 리본이라니! 리본이라니!
“……지난번 목줄에 대한 연구가 끝났는데, 그걸 도로 매는 게 어떻겠나?”
지켜보고 있던 동거인이 침묵을 깨고 힘들게 제안했다.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든 자기 일에만 열중하던 동거인도 이것만은 두고 볼 수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단숨에 부정했다.
“그 칙칙한 물건보단 이게 훨씬 나아요. 어휴, 알아보고 줬어야 하는 건데, 그런 불길한 물건을 찼던 펠은 얼마나 기분나빴을까? 그래서 일부러 밝은 색상으로 고른 거라구요. 기분전환하라구요.”
곧이어 둘이 암묵적인 눈싸움을 시작했다. 난 그런 둘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만약 저 둘이 그날 짝짓기를 했더라면, 지금의 난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그날의 내 추측은 완벽한 오해였음이 밝혀진 바 있었다. 결국 동거인은 여전히 총각이고 그녀는 여전히 처녀(아마도)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전자에는 가벼운 동정을, 후자에는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각각 발했었지.
그나저나 기분전환이 된 건 맞는 말인데, 그 물건 때문에 자신이 목숨을 건졌다는 걸 알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럴 거면 차라리 그 목줄을 그대로 차고 있을 걸 그랬다. 뭐, 동거인이 대경실색해 내 목줄을 벗긴 후로도 그녀가 멀쩡한 걸 보면 사신이 다시 찾아올 염려는 없을 듯하지만. 아무튼 그녀가 목줄의 정체를 안 뒤로 그것에 손도 대지 않는 걸 보니 조금 귀엽기도 하다. 세상천지에 무서울 게 없는 것 같았는데 말이지.
“그럼 돌아갈게요, 교수님!”
“그래. 잘 가고, 목줄은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동거인에게 기대를 한 내가 바보지. 난 앞발을 움직여 리본의 매듭에 걸쳤다. 이제 이걸 잡아당기면……할 때, 난데없이 그녀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언제 쪼그려 앉았는지, 무릎을 모으고 주근깨를 발갛게 물들이며 그녀가 애처롭게 말했다.
“그거, 풀 거야?”
…………
난 조용히 앞발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활짝 웃더니 날 덥석 끌어안았다. 요새 계속 날 들어서 이젠 팔힘이 제법 붙은 것 같다. 덕분에 내 체공시간도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녀의 따뜻한 품 안에 밀착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수염이 꼿꼿이 일어나 그녀를 가리켰지만, 난 이를 깨닫자마자 황급히 앞발로 얼굴을 감쌌다. 이것만은 그녀에게 들킬 수 없다. 이미 코가 꿰였다고 해도,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켜야 한다.
날 안고 한 바퀴 빙글 돈 그녀는 날 내려놓고 힘차게 말했다.
“자! 그럼 일하러 가자!”
네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주인님.
난 야옹 하고 대답한 후, 아홉 개의 목숨에 아홉 개의 설렘을 담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