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마 16권 네타를 보고 작성했던 글입니다.
역시나 본편 보니 여기 적을 때 상상했던 내용과는 다르더군요;
--------------------------------------------------------------------------------
"그러니까 대체 왜 내가 자기 발로 가출한... 아니, 아니야. 지금 건 듣지 않은 걸로 해 줘."
-쳇. 쪼잔해졌구먼, 파트너.
포프는 하마터면 신세 한탄을 할 뻔했다고 자책하며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해는 화창하게 떠 있고,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말의 등 위는 제법 앉기 편했다. 포프의 앞에서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몰고 있던 두두, 그리고 그 옆에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는 쟈넷 모두 방금 만났는데도 상당히 친근감이 느껴져 엉겁결에 쓸데없는 말을 할 뻔했다. 옆에서 델프가 핀잔하자 한층 부끄러워진다.
"왜? 재미있는데 좀 더 해 보지."
"아냐. 이건 됐어. 그보다, 아까 쟈넷이 뭔가 임무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자료를 잃어버렸다고 했던가?"
아까 쟈넷이 '이래서 임무를 할 땐 다른 오빠들과 와야 해'라고 했던 말이 언뜻 떠올라 그렇게 물었다. 두두는 아마빛 머리를 긁적이며 쟈넷을 한번 흘겨보곤 맥없이 말했다.
"자료라곤 해도 대충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아. 혹시 트리스테인의 포프라고 알아? 얼마 전 슈발리에 작위를 받았다던데. 지금 행방불명이라고 해서 한참 찾아다녀야 할 판이야."
"응? 난데. 무슨 용무로?"
자기를 찾는 사람들이야 어차피 더 윗대가리들일테고, 이렇게 현장에서 자기를 찾는 사람에겐 죄가 없을 터였다. 그리고 이들과는 잠깐 사이에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동행해달라는 부탁을 한다면 그때 거절한 후 돌려보내면 그뿐이었다. 소득 없이 방황하게 하는 건 양심에 찔린다.
두두와 쟈넷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에? 정말로?"
남매라 그런지 반응이 판에 박은 듯 똑같다.
포프는 시원스럽게 긍정했다.
"응. 정말."
"......정말?"
두두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독백하더니 말고삐를 한 번 들었다 내려치는 동작을 했다. '내려쳤다'고 하지 못한 건, 다음 순간 두두의 왼손이 자신의 등 뒤에 앉아있던 포프의 허벅지를 갑작스럽게 찔러왔기 때문이다. 워낙 빠른 동작이라 포프는 그의 손에서 튀어나온 침이 허벅지에 깊숙히 박힌 다음에야 그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파트너! 피해!
델프의 말이 포프에게 잔향처럼 들려온다. 피하다니, 어디로? 다리에서 느껴지는 이 통증은 대체?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고, 뿌옇게 변한 시야 저편에서 두두가 단검을 빼들고 공격해오는 게 어렴풋하게 보인다. 포프는 있는 힘껏 몸을 굴려 말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두두 역시 공격이 빗나가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려 공중에서 포프를 겨냥해 낙하해 왔다. 이대로는 단칼에 심장이 관통당할 터. 포프는 죽을 힘을 다해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단검이 막 옷자락에 닿을락말락 할 때, 그의 품 안에서 은색 빛이 뿜어져나오며 단검을 튕겨내었다.
"포프 님! 괜찮으세요?"
블랙과 연결될 수 있긴 해도, 기본적으론 최초의 마법 시전 전에 직접 접촉한 상태에서 약간의 의식을 치러야 제대로 된 연결과 구현화를 할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구현화에 성공한 휘즈가 급히 포프를 안아들고 몇 걸음 도약했다. 일단 나무 아래 포프를 기대 눕힌 후 바늘을 뽑았다. 피는 얼마 나오지 않았지만 포프의 몸은 거세게 요동쳤다.
"위... 위험해... 이거, 극독이랑 마취제가... 자보에라 못지않아..."
"일단 해독하고 계세요! 저 녀석들은 제가 해치울게요!"
휘즈는 포프의 허리춤에서 델프링거를 뽑아들고 두두에게 겨누었다.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일단 철수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신은 자꾸만 아득해져왔다. 자오릭을 쓸 수 있다면 당장 해독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키어리만 쓰기에도 벅찼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어가며 포프는 휘즈와 두두, 쟈넷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은빛의 사역마를 보니 확실히 본인이군."
"너, 잘도 주인님을...!"
"헥사곤 메이지가 회복하기 전에, 너부터 얼른 해치워야겠네. 블레이드(Blade)!"
두두가 기묘한 주문을 외우며 지팡이를 쳐들었다. 그러자 별 특징 없는 가느다란 지팡이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나오더니 곧 칼날 모양으로 고정화되었다. 문제는 칼날의 크기였다. 델프링거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굵은 칼날이었다. 굵다곤 하지만 절삭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즉 두두는 닿는 순간 베이는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보는 마법을 보고 델프링거가 숨을 들이켰다.
-잠깐! 휘즈, 일단 물러나! 저건 나도 모르는...
"싫어요! 포프 님을 저렇게 만든 녀석들이란 말이에요!"
휘즈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롱베르크의 검술과 델프링거, 그리고 룬의 보정이 더해진 강력한 일격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검사 중 가장 강했던 아니에스도 휘즈의 일격을 막아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일격은 곧 블레이드의 날에 막혔다. 검과 검이 맞붙는 금속음이 아닌,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작렬했다.
-커헉!
강도 면에 있어서는 오리하르콘 급인 델프링거가 신음을 토했다. 휘즈 역시 자신했던 일격이 튕겨나가면서 몸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아니,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육체적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그녀가 이 정도의 충격을 받을 정도라면, 저 마법의 위력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게다가 두두는 전혀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여유있게 지팡이를 반 바퀴 돌려 고쳐잡으며 외쳤다.
"이번엔 나다!"
거대한 검격이 휘즈를 향해 날아왔다. 검이 아니라 통나무가 날아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무식한 범위였다. 도저히 옆으로 피할 수 없었기에 휘즈는 검을 들어 그 검격을 내려친 후, 칼날에 반응이 오자마자 그 반동으로 뒤로 점프해 물러났다. 휘즈가 인간이었다면 아마 이 시점에서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있었을 것이다.
"뭐, 저런 녀석이..."
-휘즈, 잘 들어. 저건 내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마법이다. 계통마법인지 선주마법인지도 모르겠다고. 이 내가, 육천 년을 산 간달브의 검이 말야! 이 자리는 피해야 해!
"하지만 주인님이."
-안고 뛰어! 네 속도면 저 녀석 정돈 따돌릴 수 있어!
휘즈 단독으론 주문을 쓰지 못하지만, 포프를 안고 달리는 것 정돈 가능하다. 일단 블레이드란 마법에 대해 포프가 파악할 때까지 전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델프링거였다. 휘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후 뒤로 돌아서 뛰었다. 룬의 보정이 더해진 빠른 속도였다.
"놓칠 수 없지!"
두두는 블레이드를 들고 질주했다. 팔다리에서 묘한 빛이 흘러나오며 잔상처럼 그가 움직인 허공에 뿌려졌다. 그 속도는 놀랍게도 룬의 도움을 받은 휘즈와 비슷했다. 설마 인간이 그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델프와 휘즈 모두 반응이 약간 늦었다. 뒤늦게 등뒤에서 휘둘러지는 블레이드의 기척을 눈치채고 피했지만, 등이 깊숙히 베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아악!"
휘즈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쳐박혔다. 달려오던 속도 때문에 그녀의 몸은 몇 바퀴를 구른 후 포프의 발앞에 와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해독에 집중하던 포프는 힘겹게 휘즈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때, 그가 기대고 있던 나무 뒤에서 장검이 날아들어와 포프의 배와 등을 동시에 관통했다.
"으... 커헉."
자신의 배를 비집고 나온 검날을 보며 포프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곧이어 나무 뒤에서 쟈넷이 피묻은 검을 털며 소리없이 나타났다. 델프링거가 남매를 향해 분노에 차 떠들어댔다.
-네 녀석들, 선주마법을 쓸 수 있는 거냐! 그것도 몸 전체가 아니라 관절에다! 그딴 구질구질한 장난을 하다니!
"장난이라니. 이건 엘프도 못 하는 재주라고, 간달브의 검."
-하지만 이젠 파악했다! 휘즈!
쓰러져 있던 휘즈가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의 일격이었지만 두두는 허벅지에 아주 얇은 혈선이 그어지는 정도로 가볍게 피했다. 그 정도면 노 데미지라 불러도 좋을 테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이제까지의 여유있는 표정을 와락 구기며 그가 사납게 외쳤다.
"제길! 주문흡수냐? 네 녀석이야말로 잔재주를!"
-헹! 이제 넌 끝났어! 그 바보 같은 속도만 아니라면,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피할 수 있어!
"......그래?"
두두는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고 마개를 따더니 한모금에 꿀꺽 삼켰다.
"검 따위가."
블레이드의 날이 진동했다. 진동은 점점 커지며 자신과 사용자 모두를 뒤흔들었다. 검날이 점점 길어지고 굵어져 간다. 아까까지도 통나무만했던 크기가 이제는 아예 사용자 본인의 크기마저 넘어 버렸다. 이제 검은 과거 포프가 매드로아로 날려버렸던 요르문간트가 들어야 적당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크기로까지 성장해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비현실적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휘즈가 델프링거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것도 흡수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날 뭘로 보는 거냐! 육천 년을 폼으로 산 게 아니야!
잠시 침묵하다 델프링거는 호쾌하게 외쳤다. 어쩐지 불안하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휘즈는 등 뒤의 포프를 흘끔 노려보았다. 당장 포프를 구해야 하겠지만, 지금 저 일격을 피하면서 포프를 구해낼 자신이 없었다. 서둘러 저 마법을 흡수한 뒤 그 힘으로 둘을 물리쳐야 하리라. 거기까지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몇 초. 더이상 생각할 필요 없다고 다짐하며 델프링거를 고쳐잡을 때, 그녀의 발목에서 희미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자신의 발목을 잡은 채 쓰러져있는 포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인님...?"
"안 돼...... 하지 마, 델프......"
-캇! 파트너, 이럴 땐 좀 잠자코 기절한 채 있어!
"저걸 흡수하면, 너... 도..."
마력의 흐름에 정통한 포프는 어렴풋하게 블레이드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저것의 정체는 지팡이에 마력을 응축하여 초고속으로 진동시키는 주문. 델프링거가 마법을 흡수하기 위해선 한순간 물리적 방어력이 약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저 주문은 그 순간의 델프링거를 놓치지 않고 파괴하리라.
'해독은 이제 거의 끝났어.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이제 말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원래 입을 다물고 회복에만 열중해야 할 테지만, 지금의 포프는 그럴 수 없었다. 등뒤에서 쟈넷이 서서히 검을 치켜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포프는 오직 자신의 동료가 사지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버둥거렸다. 피바다 속에서 꿈틀대는 포프에게 평상시처럼 빈정대는 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육천 년을 헛산 게 아니야. 이런 자리에서, 너처럼 자기 목숨 돌볼 줄 모르는 머저리 파트너를 지키고 죽는다면 나름대로 멋있는 최후 아니겠어?
'데, 델프...'
-내 육천 년에 일 년을 더하는 것보단 너같은 병아리가 성장해가는 게 낫다구! 그러니까 살아! 살아남아! 너랑 꼭 같은 바보인 허무랑도 화해해서 바보짓해 가며 재밌게 살란 말이다! 휘즈!
"네, 넷!"
-날 휘두르지 않으면 포프가 죽는다! 지금! 저 검에 날 쑤셔박아! 어서!
"으, 아, 아... 으아아아아!"
거대한 바위가 낙하해오는 것처럼 육중한 기세로 떨어져내리는 블레이드를 향해 휘즈는 울부짖으며 델프링거를 휘둘렀다. 최초의 맞부딪침과 달리 델프의 온몸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그 빛은 삽시간에 블레이드의 날을 싸안으며 끝부분부터 서서히 소멸시켜갔다. 하지만 곧 그 빛이 약해지며 델프링거의 검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저씨!"
-지금 검을 거두면 너부터 죽일 테다! 끝까지 밀어붙여! 블레이드가 사라지는 마술을 보여주마!
균열이 점점 심해지며 무수한 거미줄이 델프링거의 몸에 새겨졌다. 그 속도는 델프링거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빨랐다. 블레이드의 소멸속도 역시 그의 예상보다 빠르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큭, 과거 회상 따위 할 여유도 없구만! 그렇지만 말이다! 이 몸은 짝퉁 검 따위에게 질 정도로 허약하진 않단 말이다!
거미줄의 틈에서 새로운 빛이 솟아났다. 그 빛은 아까보다 더한 속도로 거대한 블레이드의 전면을 타고 흐르며 그 기세를 순식간에 죽여나갔다. 스스로 분출한 빛을 견디다 못한 델프링거가 거세게 요동하자 마침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순간 그 안에서 폭발하듯 마지막 빛, 마지막 외침이 분출했다.
-캬캇! 안녕이다!
섬광의 폭풍이 사방을 거세게 휩쓸었다. 델프의 몸에서 쏟아진 빛은 블레이드를 기어이 지워냈지만, 막상 그것을 도로 회수할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두두도, 포프를 죽이기 직전이었던 쟈넷도 눈을 가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일격에 온 힘을 쏟아냈던 휘즈는 구현화할 힘마저 잃고 다시 지팡이가 되어 어디론가 날아갔다.
"제길, 검 주제에...! 쟈넷! 일단 포프를 죽여!"
"알았어!"
잠깐의 섬광으로 시야를 잃을 만큼 무르게 훈련받지 않았다. 그녀의 예리한 눈은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포프의 육체를 포착해냈다. 이미 죽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장 확실한 건 심장에 검을 꽂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걸린 선주마법을 이용해 가볍게 포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약 4미터 가량 점프해서 그대로 심장에 검을 내리꽂으려 했다.
그 순간,
그녀에게 오싹한 느낌이 달리고 -
"......잘도."
엎드린 채 포프가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아까까지 검이었던 날카로운 파편이 쥐어져 있었다.
"잘도, 했겠다."
검날을 으스러져라 쥐어대자 손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하지만 출혈의 속도는 순식간에 줄어들고, 마침내 그쳐 버린다. 칼날이 피부를 베는 속도를 능가하는, 물의 계통 마법의 회복속도는...
"4...5...6의 제곱......?"
"잘도, 했겠다아아아아!"
포프는 피바다 속에서 몸을 박차 튕겨 일어났다. 공중에 떠 있던 쟈넷의 몸이 세차게 낙하해 왔지만 포프는 그것을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만으로 회피한 후, 막 낙하한 쟈넷의 목을 잡고 등뒤에 있는 나무에 있는 힘껏 쳐박았다. 자오릭을 걸면서 각종 보조마법을 자신에게 건 터라 지금 그의 몸은 룬의 보정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무가 패일 정도로 쳐박힌 쟈넷은 희미하게 몸을 떨며 소매 아래에서 침을 꺼내 포프의 팔목에 꽂으려 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곧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빠! 사, 살려-"
다급하게 외치려던 그녀의 입이 벌려진 채로 얼어붙어갔다. 포프의 오른손에서 나온 무지막지한 냉기는 그녀의 목덜미를 시작으로, 그 몸을 얼리는 걸로도 모자라, 그녀가 기댄 나무 전체를 얼음덩이로 만들었다. 그 속도는 과거 레오나를 얼리던 프레이저드 이상이었다.
일단 얼려놓고 보자, 가 아니었다.
얼어죽든 말든 상관없다 -
항상 자신에게 걸어두던 제약을 스스로 깨부수자 오히려 홀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
포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두두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그의 왼손에는 한가운데 커다랗게 금이 간 블랙 로드가 들려있었다.
"흐, 흠. 역시 헥사곤이란 말이지. 하지만 이 몸도 지지 않는다고."
두두는 약간 머뭇거리며 물약을 꺼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까 보았을 터. 하지만 두두가 다시 물약을 마시고 블레이드를 거대화하는 동안 포프는 말없이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오만이라 생각했는지 두두는 바득 이를 갈았다.
"깔보지, 말란, 말이다!"
초거대 블레이드가 포프를 향해 내리쳐졌다. 마치 포격처럼 거대하고 압도적으로 날아오는 위력적인 검날을 보며 포프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좌우비대칭이 연상될 정도로 한쪽은 오만하게, 또 한쪽은 오싹하게 웃고 있었다.
"이따위 마법을 쓰면, 자랑스러워?"
포프의 손이 붉게 타올랐다. 메라조마 같은 평범한 마법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호적수였던 절대자의 최강의 필살기. 손에 맺힌 불꽃이 날개처럼 폭넓게 펼쳐지며 어마어마한 화염을 사방에 뿌렸다. 그는 그 손을 그대로 휘둘러 블레이드를 맞받아쳤다. 쾅! 델프링거와 격돌했을 때보다 더욱 큰 소리가 나며, 포프의 발밑이 움푹 패어들어갔다. 하지만 포프는 한 발도 물러나지 않은 채였다.
"빌려 쓰는 주문인 만큼, 천상에서 통곡하게 하진 않을게, 대마왕."
그렇게 중얼거리곤, 그대로 팔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주문을 튕겨내는 속성이 있는 피닉스 윙에 블레이드가 한순간 밀려나 허공에 떴다. 자랑하는 초고속 진동도 피닉스 윙을 꺾지 못한 것이다. 두두는 경악하며 지팡이를 바로잡았지만, 이미 그 사이 포프는 다음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막아봐, 개자식아!"
불꽃과 얼음, 결코 섞일 리 없는 두 계통이 적을 쳐부수기 위해 손을 잡았다. 포프의 앞에 거대한 빛의 화살이 생겨나고, 다음 순간 그것은 빛의 검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두 손을 합친 채 그는 손에 맺힌 검을 휘둘러 블레이드를 베어 갔다. 블레이드가 단 한순간도 버텨내지 못하고 매드로아의 빛에 반토막이 났다.
이건, 도망쳐야 한다 - 두두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덮쳐오는 압도적인 소멸의 기운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사치였다.
"이이익!"
선주마법을 극한까지 발동해 간신히 매드로아의 습격에서 몸을 빼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그 매드로아를 쏜 장본인이었다. 그가 피할 경로를 예측하고 도베루라로 뒤쫓은 것이다.
"넌 절대 안 놓쳐."
빠각! 사정없이 휘두른 주먹에 두두의 이가 몇 개 부러져나갔다. 훈련된 암살자답게 그는 그 충격에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부분에서 절망하고 있었다. 포프의 손이 닿은 순간, 주먹을 타고 전해져 온 포프의 마력이 두두의 몸에 걸려 있던 모든 선주마법을 흐트러뜨렸기 때문이다. 이제 지금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회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동료를! 없앴겠다!"
다시 한 번, 이번엔 턱이었다. 강화된 주먹에 턱을 맞자 두두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몇 바퀴 구른 후 꿈틀거렸지만 뇌가 흔들렸는지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린다. 하지만 상대의 그런 사정 따위 봐주지 않고, 포프는 두 손을 좌우로 쳐들고 힘을 가했다. 두 손에서 뻗어져나온 불기둥이 하나로 합쳐져 뱀처럼 허공에서 요동쳐댄다. 그렇지만 머리 위에서 춤추는 극한의 불꽃도 지금 포프의 머릿속보다, 그의 가슴 안에 비하면 장작개비나 마찬가지였다.
"델프는... 이곳에서 처음 생긴 내 동료였단 말이야!"
극한까지 위력을 올린 극대섬열주문이, 불꽃의 폭풍이 되어 목표를 휩쓸었다. 불꽃이 착탄하는 가운데 두두의 비명이 들린 것도 같지만 포프는 깔끔하게 무시한 채 돌아섰다. 이 정도라면 순식간에 숯도 남지 못하고 재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지만 별 감흥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막연한 두근거림이 되어 흥분을 한층 돋울 뿐이었다. 그는 실눈을 뜬 채 눈앞에 얼어붙어 있는 쟈넷을 관찰했다. 아직 희미하게 생기가 느껴졌다. 아직 죽지 않았던가? 쯧, 하고 그는 혀를 차며 주문을 해주했다. 얼음덩어리가 순식간에 녹고,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쟈넷이 바닥에 뒹굴었다. 포프는 그런 그녀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세운 후 잠시 뒤를 바라보았다. 대지에는 손잡이까지 박살나 이제 원형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금속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어 눈물을 참은 후 자신이 들고 있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각오해. 네게서 왜 이딴 짓을 벌였는지 모두 짜내겠어.
그리고, 너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루라를 시전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역시나 본편 보니 여기 적을 때 상상했던 내용과는 다르더군요;
--------------------------------------------------------------------------------
제로의 대모험 외전(2부 맛보기) 전우의 최후
"그러니까 대체 왜 내가 자기 발로 가출한... 아니, 아니야. 지금 건 듣지 않은 걸로 해 줘."
-쳇. 쪼잔해졌구먼, 파트너.
포프는 하마터면 신세 한탄을 할 뻔했다고 자책하며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해는 화창하게 떠 있고,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말의 등 위는 제법 앉기 편했다. 포프의 앞에서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몰고 있던 두두, 그리고 그 옆에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는 쟈넷 모두 방금 만났는데도 상당히 친근감이 느껴져 엉겁결에 쓸데없는 말을 할 뻔했다. 옆에서 델프가 핀잔하자 한층 부끄러워진다.
"왜? 재미있는데 좀 더 해 보지."
"아냐. 이건 됐어. 그보다, 아까 쟈넷이 뭔가 임무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자료를 잃어버렸다고 했던가?"
아까 쟈넷이 '이래서 임무를 할 땐 다른 오빠들과 와야 해'라고 했던 말이 언뜻 떠올라 그렇게 물었다. 두두는 아마빛 머리를 긁적이며 쟈넷을 한번 흘겨보곤 맥없이 말했다.
"자료라곤 해도 대충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아. 혹시 트리스테인의 포프라고 알아? 얼마 전 슈발리에 작위를 받았다던데. 지금 행방불명이라고 해서 한참 찾아다녀야 할 판이야."
"응? 난데. 무슨 용무로?"
자기를 찾는 사람들이야 어차피 더 윗대가리들일테고, 이렇게 현장에서 자기를 찾는 사람에겐 죄가 없을 터였다. 그리고 이들과는 잠깐 사이에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동행해달라는 부탁을 한다면 그때 거절한 후 돌려보내면 그뿐이었다. 소득 없이 방황하게 하는 건 양심에 찔린다.
두두와 쟈넷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에? 정말로?"
남매라 그런지 반응이 판에 박은 듯 똑같다.
포프는 시원스럽게 긍정했다.
"응. 정말."
"......정말?"
두두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독백하더니 말고삐를 한 번 들었다 내려치는 동작을 했다. '내려쳤다'고 하지 못한 건, 다음 순간 두두의 왼손이 자신의 등 뒤에 앉아있던 포프의 허벅지를 갑작스럽게 찔러왔기 때문이다. 워낙 빠른 동작이라 포프는 그의 손에서 튀어나온 침이 허벅지에 깊숙히 박힌 다음에야 그가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파트너! 피해!
델프의 말이 포프에게 잔향처럼 들려온다. 피하다니, 어디로? 다리에서 느껴지는 이 통증은 대체?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고, 뿌옇게 변한 시야 저편에서 두두가 단검을 빼들고 공격해오는 게 어렴풋하게 보인다. 포프는 있는 힘껏 몸을 굴려 말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두두 역시 공격이 빗나가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려 공중에서 포프를 겨냥해 낙하해 왔다. 이대로는 단칼에 심장이 관통당할 터. 포프는 죽을 힘을 다해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단검이 막 옷자락에 닿을락말락 할 때, 그의 품 안에서 은색 빛이 뿜어져나오며 단검을 튕겨내었다.
"포프 님! 괜찮으세요?"
블랙과 연결될 수 있긴 해도, 기본적으론 최초의 마법 시전 전에 직접 접촉한 상태에서 약간의 의식을 치러야 제대로 된 연결과 구현화를 할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구현화에 성공한 휘즈가 급히 포프를 안아들고 몇 걸음 도약했다. 일단 나무 아래 포프를 기대 눕힌 후 바늘을 뽑았다. 피는 얼마 나오지 않았지만 포프의 몸은 거세게 요동쳤다.
"위... 위험해... 이거, 극독이랑 마취제가... 자보에라 못지않아..."
"일단 해독하고 계세요! 저 녀석들은 제가 해치울게요!"
휘즈는 포프의 허리춤에서 델프링거를 뽑아들고 두두에게 겨누었다.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일단 철수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신은 자꾸만 아득해져왔다. 자오릭을 쓸 수 있다면 당장 해독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키어리만 쓰기에도 벅찼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어가며 포프는 휘즈와 두두, 쟈넷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은빛의 사역마를 보니 확실히 본인이군."
"너, 잘도 주인님을...!"
"헥사곤 메이지가 회복하기 전에, 너부터 얼른 해치워야겠네. 블레이드(Blade)!"
두두가 기묘한 주문을 외우며 지팡이를 쳐들었다. 그러자 별 특징 없는 가느다란 지팡이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나오더니 곧 칼날 모양으로 고정화되었다. 문제는 칼날의 크기였다. 델프링거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굵은 칼날이었다. 굵다곤 하지만 절삭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즉 두두는 닿는 순간 베이는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보는 마법을 보고 델프링거가 숨을 들이켰다.
-잠깐! 휘즈, 일단 물러나! 저건 나도 모르는...
"싫어요! 포프 님을 저렇게 만든 녀석들이란 말이에요!"
휘즈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롱베르크의 검술과 델프링거, 그리고 룬의 보정이 더해진 강력한 일격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검사 중 가장 강했던 아니에스도 휘즈의 일격을 막아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일격은 곧 블레이드의 날에 막혔다. 검과 검이 맞붙는 금속음이 아닌,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작렬했다.
-커헉!
강도 면에 있어서는 오리하르콘 급인 델프링거가 신음을 토했다. 휘즈 역시 자신했던 일격이 튕겨나가면서 몸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아니,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육체적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그녀가 이 정도의 충격을 받을 정도라면, 저 마법의 위력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게다가 두두는 전혀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여유있게 지팡이를 반 바퀴 돌려 고쳐잡으며 외쳤다.
"이번엔 나다!"
거대한 검격이 휘즈를 향해 날아왔다. 검이 아니라 통나무가 날아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무식한 범위였다. 도저히 옆으로 피할 수 없었기에 휘즈는 검을 들어 그 검격을 내려친 후, 칼날에 반응이 오자마자 그 반동으로 뒤로 점프해 물러났다. 휘즈가 인간이었다면 아마 이 시점에서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있었을 것이다.
"뭐, 저런 녀석이..."
-휘즈, 잘 들어. 저건 내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마법이다. 계통마법인지 선주마법인지도 모르겠다고. 이 내가, 육천 년을 산 간달브의 검이 말야! 이 자리는 피해야 해!
"하지만 주인님이."
-안고 뛰어! 네 속도면 저 녀석 정돈 따돌릴 수 있어!
휘즈 단독으론 주문을 쓰지 못하지만, 포프를 안고 달리는 것 정돈 가능하다. 일단 블레이드란 마법에 대해 포프가 파악할 때까지 전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델프링거였다. 휘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후 뒤로 돌아서 뛰었다. 룬의 보정이 더해진 빠른 속도였다.
"놓칠 수 없지!"
두두는 블레이드를 들고 질주했다. 팔다리에서 묘한 빛이 흘러나오며 잔상처럼 그가 움직인 허공에 뿌려졌다. 그 속도는 놀랍게도 룬의 도움을 받은 휘즈와 비슷했다. 설마 인간이 그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델프와 휘즈 모두 반응이 약간 늦었다. 뒤늦게 등뒤에서 휘둘러지는 블레이드의 기척을 눈치채고 피했지만, 등이 깊숙히 베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아악!"
휘즈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쳐박혔다. 달려오던 속도 때문에 그녀의 몸은 몇 바퀴를 구른 후 포프의 발앞에 와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해독에 집중하던 포프는 힘겹게 휘즈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때, 그가 기대고 있던 나무 뒤에서 장검이 날아들어와 포프의 배와 등을 동시에 관통했다.
"으... 커헉."
자신의 배를 비집고 나온 검날을 보며 포프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곧이어 나무 뒤에서 쟈넷이 피묻은 검을 털며 소리없이 나타났다. 델프링거가 남매를 향해 분노에 차 떠들어댔다.
-네 녀석들, 선주마법을 쓸 수 있는 거냐! 그것도 몸 전체가 아니라 관절에다! 그딴 구질구질한 장난을 하다니!
"장난이라니. 이건 엘프도 못 하는 재주라고, 간달브의 검."
-하지만 이젠 파악했다! 휘즈!
쓰러져 있던 휘즈가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의 일격이었지만 두두는 허벅지에 아주 얇은 혈선이 그어지는 정도로 가볍게 피했다. 그 정도면 노 데미지라 불러도 좋을 테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이제까지의 여유있는 표정을 와락 구기며 그가 사납게 외쳤다.
"제길! 주문흡수냐? 네 녀석이야말로 잔재주를!"
-헹! 이제 넌 끝났어! 그 바보 같은 속도만 아니라면,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피할 수 있어!
"......그래?"
두두는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고 마개를 따더니 한모금에 꿀꺽 삼켰다.
"검 따위가."
블레이드의 날이 진동했다. 진동은 점점 커지며 자신과 사용자 모두를 뒤흔들었다. 검날이 점점 길어지고 굵어져 간다. 아까까지도 통나무만했던 크기가 이제는 아예 사용자 본인의 크기마저 넘어 버렸다. 이제 검은 과거 포프가 매드로아로 날려버렸던 요르문간트가 들어야 적당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크기로까지 성장해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비현실적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휘즈가 델프링거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것도 흡수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날 뭘로 보는 거냐! 육천 년을 폼으로 산 게 아니야!
잠시 침묵하다 델프링거는 호쾌하게 외쳤다. 어쩐지 불안하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휘즈는 등 뒤의 포프를 흘끔 노려보았다. 당장 포프를 구해야 하겠지만, 지금 저 일격을 피하면서 포프를 구해낼 자신이 없었다. 서둘러 저 마법을 흡수한 뒤 그 힘으로 둘을 물리쳐야 하리라. 거기까지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몇 초. 더이상 생각할 필요 없다고 다짐하며 델프링거를 고쳐잡을 때, 그녀의 발목에서 희미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자신의 발목을 잡은 채 쓰러져있는 포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인님...?"
"안 돼...... 하지 마, 델프......"
-캇! 파트너, 이럴 땐 좀 잠자코 기절한 채 있어!
"저걸 흡수하면, 너... 도..."
마력의 흐름에 정통한 포프는 어렴풋하게 블레이드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저것의 정체는 지팡이에 마력을 응축하여 초고속으로 진동시키는 주문. 델프링거가 마법을 흡수하기 위해선 한순간 물리적 방어력이 약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저 주문은 그 순간의 델프링거를 놓치지 않고 파괴하리라.
'해독은 이제 거의 끝났어.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이제 말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원래 입을 다물고 회복에만 열중해야 할 테지만, 지금의 포프는 그럴 수 없었다. 등뒤에서 쟈넷이 서서히 검을 치켜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포프는 오직 자신의 동료가 사지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버둥거렸다. 피바다 속에서 꿈틀대는 포프에게 평상시처럼 빈정대는 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육천 년을 헛산 게 아니야. 이런 자리에서, 너처럼 자기 목숨 돌볼 줄 모르는 머저리 파트너를 지키고 죽는다면 나름대로 멋있는 최후 아니겠어?
'데, 델프...'
-내 육천 년에 일 년을 더하는 것보단 너같은 병아리가 성장해가는 게 낫다구! 그러니까 살아! 살아남아! 너랑 꼭 같은 바보인 허무랑도 화해해서 바보짓해 가며 재밌게 살란 말이다! 휘즈!
"네, 넷!"
-날 휘두르지 않으면 포프가 죽는다! 지금! 저 검에 날 쑤셔박아! 어서!
"으, 아, 아... 으아아아아!"
거대한 바위가 낙하해오는 것처럼 육중한 기세로 떨어져내리는 블레이드를 향해 휘즈는 울부짖으며 델프링거를 휘둘렀다. 최초의 맞부딪침과 달리 델프의 온몸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그 빛은 삽시간에 블레이드의 날을 싸안으며 끝부분부터 서서히 소멸시켜갔다. 하지만 곧 그 빛이 약해지며 델프링거의 검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저씨!"
-지금 검을 거두면 너부터 죽일 테다! 끝까지 밀어붙여! 블레이드가 사라지는 마술을 보여주마!
균열이 점점 심해지며 무수한 거미줄이 델프링거의 몸에 새겨졌다. 그 속도는 델프링거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빨랐다. 블레이드의 소멸속도 역시 그의 예상보다 빠르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큭, 과거 회상 따위 할 여유도 없구만! 그렇지만 말이다! 이 몸은 짝퉁 검 따위에게 질 정도로 허약하진 않단 말이다!
거미줄의 틈에서 새로운 빛이 솟아났다. 그 빛은 아까보다 더한 속도로 거대한 블레이드의 전면을 타고 흐르며 그 기세를 순식간에 죽여나갔다. 스스로 분출한 빛을 견디다 못한 델프링거가 거세게 요동하자 마침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순간 그 안에서 폭발하듯 마지막 빛, 마지막 외침이 분출했다.
-캬캇! 안녕이다!
섬광의 폭풍이 사방을 거세게 휩쓸었다. 델프의 몸에서 쏟아진 빛은 블레이드를 기어이 지워냈지만, 막상 그것을 도로 회수할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두두도, 포프를 죽이기 직전이었던 쟈넷도 눈을 가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일격에 온 힘을 쏟아냈던 휘즈는 구현화할 힘마저 잃고 다시 지팡이가 되어 어디론가 날아갔다.
"제길, 검 주제에...! 쟈넷! 일단 포프를 죽여!"
"알았어!"
잠깐의 섬광으로 시야를 잃을 만큼 무르게 훈련받지 않았다. 그녀의 예리한 눈은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포프의 육체를 포착해냈다. 이미 죽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장 확실한 건 심장에 검을 꽂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걸린 선주마법을 이용해 가볍게 포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약 4미터 가량 점프해서 그대로 심장에 검을 내리꽂으려 했다.
그 순간,
그녀에게 오싹한 느낌이 달리고 -
"......잘도."
엎드린 채 포프가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아까까지 검이었던 날카로운 파편이 쥐어져 있었다.
"잘도, 했겠다."
검날을 으스러져라 쥐어대자 손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하지만 출혈의 속도는 순식간에 줄어들고, 마침내 그쳐 버린다. 칼날이 피부를 베는 속도를 능가하는, 물의 계통 마법의 회복속도는...
"4...5...6의 제곱......?"
"잘도, 했겠다아아아아!"
포프는 피바다 속에서 몸을 박차 튕겨 일어났다. 공중에 떠 있던 쟈넷의 몸이 세차게 낙하해 왔지만 포프는 그것을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만으로 회피한 후, 막 낙하한 쟈넷의 목을 잡고 등뒤에 있는 나무에 있는 힘껏 쳐박았다. 자오릭을 걸면서 각종 보조마법을 자신에게 건 터라 지금 그의 몸은 룬의 보정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무가 패일 정도로 쳐박힌 쟈넷은 희미하게 몸을 떨며 소매 아래에서 침을 꺼내 포프의 팔목에 꽂으려 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곧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빠! 사, 살려-"
다급하게 외치려던 그녀의 입이 벌려진 채로 얼어붙어갔다. 포프의 오른손에서 나온 무지막지한 냉기는 그녀의 목덜미를 시작으로, 그 몸을 얼리는 걸로도 모자라, 그녀가 기댄 나무 전체를 얼음덩이로 만들었다. 그 속도는 과거 레오나를 얼리던 프레이저드 이상이었다.
일단 얼려놓고 보자, 가 아니었다.
얼어죽든 말든 상관없다 -
항상 자신에게 걸어두던 제약을 스스로 깨부수자 오히려 홀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
포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두두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그의 왼손에는 한가운데 커다랗게 금이 간 블랙 로드가 들려있었다.
"흐, 흠. 역시 헥사곤이란 말이지. 하지만 이 몸도 지지 않는다고."
두두는 약간 머뭇거리며 물약을 꺼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까 보았을 터. 하지만 두두가 다시 물약을 마시고 블레이드를 거대화하는 동안 포프는 말없이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오만이라 생각했는지 두두는 바득 이를 갈았다.
"깔보지, 말란, 말이다!"
초거대 블레이드가 포프를 향해 내리쳐졌다. 마치 포격처럼 거대하고 압도적으로 날아오는 위력적인 검날을 보며 포프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좌우비대칭이 연상될 정도로 한쪽은 오만하게, 또 한쪽은 오싹하게 웃고 있었다.
"이따위 마법을 쓰면, 자랑스러워?"
포프의 손이 붉게 타올랐다. 메라조마 같은 평범한 마법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호적수였던 절대자의 최강의 필살기. 손에 맺힌 불꽃이 날개처럼 폭넓게 펼쳐지며 어마어마한 화염을 사방에 뿌렸다. 그는 그 손을 그대로 휘둘러 블레이드를 맞받아쳤다. 쾅! 델프링거와 격돌했을 때보다 더욱 큰 소리가 나며, 포프의 발밑이 움푹 패어들어갔다. 하지만 포프는 한 발도 물러나지 않은 채였다.
"빌려 쓰는 주문인 만큼, 천상에서 통곡하게 하진 않을게, 대마왕."
그렇게 중얼거리곤, 그대로 팔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주문을 튕겨내는 속성이 있는 피닉스 윙에 블레이드가 한순간 밀려나 허공에 떴다. 자랑하는 초고속 진동도 피닉스 윙을 꺾지 못한 것이다. 두두는 경악하며 지팡이를 바로잡았지만, 이미 그 사이 포프는 다음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막아봐, 개자식아!"
불꽃과 얼음, 결코 섞일 리 없는 두 계통이 적을 쳐부수기 위해 손을 잡았다. 포프의 앞에 거대한 빛의 화살이 생겨나고, 다음 순간 그것은 빛의 검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두 손을 합친 채 그는 손에 맺힌 검을 휘둘러 블레이드를 베어 갔다. 블레이드가 단 한순간도 버텨내지 못하고 매드로아의 빛에 반토막이 났다.
이건, 도망쳐야 한다 - 두두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덮쳐오는 압도적인 소멸의 기운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사치였다.
"이이익!"
선주마법을 극한까지 발동해 간신히 매드로아의 습격에서 몸을 빼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그 매드로아를 쏜 장본인이었다. 그가 피할 경로를 예측하고 도베루라로 뒤쫓은 것이다.
"넌 절대 안 놓쳐."
빠각! 사정없이 휘두른 주먹에 두두의 이가 몇 개 부러져나갔다. 훈련된 암살자답게 그는 그 충격에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부분에서 절망하고 있었다. 포프의 손이 닿은 순간, 주먹을 타고 전해져 온 포프의 마력이 두두의 몸에 걸려 있던 모든 선주마법을 흐트러뜨렸기 때문이다. 이제 지금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회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동료를! 없앴겠다!"
다시 한 번, 이번엔 턱이었다. 강화된 주먹에 턱을 맞자 두두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몇 바퀴 구른 후 꿈틀거렸지만 뇌가 흔들렸는지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린다. 하지만 상대의 그런 사정 따위 봐주지 않고, 포프는 두 손을 좌우로 쳐들고 힘을 가했다. 두 손에서 뻗어져나온 불기둥이 하나로 합쳐져 뱀처럼 허공에서 요동쳐댄다. 그렇지만 머리 위에서 춤추는 극한의 불꽃도 지금 포프의 머릿속보다, 그의 가슴 안에 비하면 장작개비나 마찬가지였다.
"델프는... 이곳에서 처음 생긴 내 동료였단 말이야!"
극한까지 위력을 올린 극대섬열주문이, 불꽃의 폭풍이 되어 목표를 휩쓸었다. 불꽃이 착탄하는 가운데 두두의 비명이 들린 것도 같지만 포프는 깔끔하게 무시한 채 돌아섰다. 이 정도라면 순식간에 숯도 남지 못하고 재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지만 별 감흥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막연한 두근거림이 되어 흥분을 한층 돋울 뿐이었다. 그는 실눈을 뜬 채 눈앞에 얼어붙어 있는 쟈넷을 관찰했다. 아직 희미하게 생기가 느껴졌다. 아직 죽지 않았던가? 쯧, 하고 그는 혀를 차며 주문을 해주했다. 얼음덩어리가 순식간에 녹고,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쟈넷이 바닥에 뒹굴었다. 포프는 그런 그녀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세운 후 잠시 뒤를 바라보았다. 대지에는 손잡이까지 박살나 이제 원형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금속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어 눈물을 참은 후 자신이 들고 있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각오해. 네게서 왜 이딴 짓을 벌였는지 모두 짜내겠어.
그리고, 너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루라를 시전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