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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아직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
두렁길을 건너면서 뒤따라오는 그림자를 슬쩍 살피는데 씩씩거리는 콧소리가 어째 충분히 예상했던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하, 여기 냄새는 구려서 안 되겠다. 도시로 가자. 당장 짐을 싸.”
현재에 이르러서는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과거의 에르빈은 왕족가문이었다. 인간사회에 머물며 왕가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을 드래곤이 이런 볼품없는 촌구석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에게 있어 이 몸이 하인의 위치에 있다고는 하나 여기서 마냥 굽실거리기만 하다가 첫인상부터 입지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다면 앞으로 상당한 고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압감이 들었다.
“도시는 위험합니다. 카나토스님을 이런 오지에 모신 것도 암흑용의 부활을 왕정마법사 같은 이들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한 선대의 지혜를 조금만이라도 존중해 주시지요.”
줄여서 빨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순히 이곳 환경에 적응해달라는 부탁이다.
이렇게 목에 빳빳이 힘을 주고 딱 잘라 말하자 그는 입을 삐죽 내밀고선 빤히 나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말이 없다.
아무리 그가 파괴의 화신이라 불리던 절대자였을지라도 지금은 인간들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야만 하는 애처로운 신세.
인간의 탈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한 그는 의외로 냉혈한이 아니었다.
방금 전만해도 나체인 꼴로 다니지는 못하겠다며 내 옷가지들을 속옷만 남긴 채 모두 빼앗아 입었으니까.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인간미가 넘친다고나 할까.
“시끄럽고, 어서 짐 싸. 아니면 빈손으로 따라오던가.”
“예에?”
“먼저 간다.”
“자, 잠깐만요!”
두렁을 지나오면 거름냄새가 닿지 않는 언덕 위엔 내가 사는 저택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지내오던 이 집에는 한 남자가 살아온 일생의 추억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에와서는 다 부질없는 것들이다.
왕가의 가구들, 정착하지 않으면 짐만 뿐이다.
식기나 청소도구, 필요 없다.
“어이, 뭐냐 그 꼴은? 나랑 싸우잔 거야?”
“이건 단지 여행길에 마주칠 산적들을 대비해...”
좋은 왕가의 장비들은 모두 이 저택을 짓기 위해 팔아넘겨야만 했다. 지금 남아있는 것이라곤 아버지가 전시에 쓰셨던 보구와 검뿐이었는데, 가치가 없는 골동품이라 다락방에 먼지 쌓인 채로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이다.
“떠날 채비는 끝난 거지?”
“예, 예.”
평소 든든히 먹여둔 나귀에 짐을 싣고 그 위에 앉았다.
듬직하기로는 마을처녀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아랫동네의 대장장이 헥터가 과거 이 녀석에게 안장을 처음 달아주고 시험 삼아 올라탔을 땐 무겁다며 걷지도 못하고 골골대더니, 지금은 갑옷을 걸친 내가 올라탔는데도 아무 문제없다는 양 태연하게 달리기 시작한다.
“도시는 이쪽 방향인가?”
“제가 마을을 나간 적은 없지만... 젊은이들이 상인이 되겠다며 도시로 떠날 때도, 그리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올 때도, 항상 이 길을 통해서였으니까요.”
나는 마을 출구에 세워져있는 비석들을 돌아보았다.
긴 세월동안 대를 이어오던 촌장들의 묘비들, 저곳엔 그토록 주인님을 뵙고 싶어 하던 아버지도 묻혀 있다.
노망이 나서인지는 몰라도 마을 곳곳에서 아버지의 유령과 종종 마주치곤 했다. 아무 말도 없이 쭉 지켜보기만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를 감시하고 있는 듯 했는데,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자식 없이 늙어가는 것에, 하수인의 대가 끊어질까를 염려한 것일 테다.
아버지, 제가 에르빈가 마지막 후계자로서 당신 몫까지 다하여 카나토스님을 잘 보필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편히 잠드시지요.
돌다리를 건너면 이제부터 진짜 마을 밖이다.
하루아침에 마을촌장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주민들은 적잖이 놀라겠지만, 문제되진 않을 것이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연결로와는 한참 떨어져있다고 했으니 외부교류는 앞으로도 없을 테고, 규모가 작아서 지도자의 중요성이 애초에 별로 와 닿지 않는 곳이었다.
내 자리를 대신할 인물은 충분히 많고, 무엇보다 나이도 나이라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아, 카나토스님. 좀 전에, 저를 영원불사로 만들어 주시겠다던 말씀 말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응? 말하자면 긴데...,”
지상에 살아 숨을 쉬는 모든 것은 논리와 신비로 이루어져있으며, 논리는 우리 인간이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설명을 가능케 하는 이론이고, 신비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자연외적 현상이다.
그 둘의 관계는 아주 다르면서도 경계의 면이 얇기 때문에 신비의 존재가 흘린 피를 마시면 논리에 갇힌 인간도 그 벽을 허물고 신비의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
처음에는 진지하다가도 마지막의 억지스러운 끝맺음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앞서 말했잖아. 논리로는 통하지 않는 것이 바로 나다. 이유나 근거를 애써 알려고 하지 마.”
그의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가 이쪽을 향해 빛나자 나귀가 부들부들 떨면서 걷지를 앉는다.
나또한 식은땀을 흘리면서 가까스로 고개나 끄덕였으니, 시선만으로 압도적인 위압감. 이것이 바로 인간과는 다른 존재 드래곤이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너에게 피를 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어.”
“아..., 예...”
무성한 나무들 때문에 비좁던 앞길이 점차 넓어지면서 드디어 숲의 끝자락에 다다른다.
그늘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던 햇빛이 이제야 초원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빠져나와 미약하게나마 온기를 전한다.
드넓은 초원을 접하게 되니 막힌 숨이 탁 트이다가도 서서히 또렷해지는 양떼울음 소리에 속내는 불안해지고 있었다.
“엇, 촌장님! 어디 가십니까?”
마른침을 꼴딱 삼키며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변명거릴 짜내어본다.
지금 맞은편에서 우릴 가로막고 있는 그는 얼마 전에 귀향한 헨델이라는 마을청년이다.
초원에 양들을 풀어놓았다가 풀을 다 뜯기고 막 돌아가는 길인 것 같은데, 하필이면 이 시점에 마주치게 되다니 운이 없었다고 봐야겠다.
“크흠, 한동안 벼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외지로 여행을 다녀오려 한다네.”
“그럼 그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허, 자넨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를 거야. 산골 오두막에 지내시는 의원님이신데 약재를 구하신다며 트레이까지 가신다하셔서 겸사겸사 나와 동행하고 계신 거라네.”
순진무구한 헨델이 납득하는 눈빛으로 카나토스님을 보다가 밀짚모자를 벗고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는 헨델의 뒤편에서 아주 기가 막힌 광경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되새김질을 하며 태평하게 뛰어놀던 양들이 지금은 이쪽을 경계하며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하나같이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