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③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초조한 듯 카츠라가 발을 구르고 있었다.
“유키 쨩, 늦어―.”
“아하하, 미안 미안.”
“그런데, 무슨 일 있었니? 머리카락 흐트러졌어.”
“중간에 넘어져서. 얼빠지니까, 나.”
웃으며 얼버무린다.
“잠깐 기다려, 고쳐 줄테니까. 앞으로 좀 숙여 줄래?”
“이렇게?”
머리를 죽이자, 카츠라의 손이 유키의 머리칼을 빗는다. 상냥한 손놀림에, 마음이 놓인다. 그러고 보면, 앙리도 머리카락을 세트 해 줄 때의 손가락은 정말 부드러워서 자칫하면 잠이 들것만 같을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여자애로서 취급받게 되어, 이렇게 머리칼을 깨끗이 정돈하기 위해 만져주거나 하는 건 왠지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자, 이걸로 됐어. 음―유키 쨩 역시 귀엽네―.”
“아, 아냐. 카츠라 쨩 쪽이 더 귀여워.”
“와―, 유키 쨩한테 귀엽다고 칭찬받았다!”
볼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누르며, 기쁜 듯이 몸을 꼬는 카츠라. 정말 보기만 해도 귀여운 여자애라 느낀다.
계속 놀고 있을 수도 없어서, 이윽고 체육관을 향한다.
체육관 안에는 당연하지만 여자애 뿐이어서, 뭔지 모를 달콤한 향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물론 학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체육관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여자애가 잔뜩 들어와 있는 거다보니 밀도도 굉장히 높아, 다른 상황과는 비교도 안 됐다.
마음속으로 참아, 참아 하고 속삭이며, 1학년 소나무반의 줄에 선다. 서는 순서가 특별히 정해지진 않았기에, 카츠라의 근처에 설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여자 투성이의 공간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도 입학식은 진행되어 나간다. 조금 의외였던 건 출석하는 게 1학년과 그 부형, 교사들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재학생도 꽤 많은 수가 참가하고 있었다. 강제는 아닐테니, 그만큼 1학년을 생각해 주고 있는 건까.
식이 진행되어, 교장선생님의 인사 등 정해진 흐름을 지나, 이윽고 재학생 대표의 인사 차례가 되었다. 재학생 대표는 올해의 학생회장이라고 한다.
릴리안에선 홍장미님, 황장미님, 백장미님 세 사람의 학생회장이 있지만, 이번 인사에선 황장미님이 단상에 나타났다. 아무래도 셋 모두가 이야기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우와―, 역시 황장미님, 아름다워―.”
“확실히……어, 어라?”
“올해의 장미님들도 세분 다 굉장히 아름다워. 게다가 모두 타입이 다르니까, 인기도 삼분하고 있어. 덧붙여서 나는 황장미님파지만. 아, 이건 요코님께는 비밀이야.”
“에, 어째서?”
“그치만, 요코님은 홍장미님인걸.”
카츠라의 말을 듣고, 아아 그러고 보면 그랬지 하고 깨닫는다. 하지만 학생회장을 하면서 기숙사장도 하고 있다는 건, 굉장히 힘들 것 같다.
단상에는 황장미님의 인사가 이어지고 있다. 요코와는 다르게, 어딘지 포근한 인상에 목소리도 부드러운 느낌이다. 하지만 단상에서 조금 거리가 있어서 알아보긴 힘들지만, 저 머리띠와 예쁜 이마는 틀림없이 아까 계단에서 부딪친 여성인 것 같다.
그녀를 보고 떠오른 건, 계단에서 넘어졌다 깨어난 뒤의 신비한 현상. 만화같은데선 자주 볼 수 있는 설정이다. 넘어지거나 부딪치거나 한 순간에 서로의 정신이 뒤바뀌어 버리는 것 같은 상황. 하지만 설마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 걸까. 몇 달만 전이었어도 코웃음을 쳤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도 그럴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 덤으로 이전과 다른 세계에 와 버린 상황이니까.
고민만 한다고 해서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설령 정신이 뒤바뀌어 버렸다고 해도 일시적인 일이었고 지금은 원래대로 돌아가 있으니 신경 쓸 건 없다고 자신을 설득한다.
그러다 황장미님의 인사도 끝에 다다랐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갑자기 나쁜 예감이 느껴졌다.
왜냐고 물어봐도 이유는 모르는, 불길한 예감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 어느쪽이든 유키는 문득 불안을 느껴, 공연히 주위를 둘러본다.
“무슨 일이니, 유키 쨩?”
“아니……왠지…….”
술렁술렁하는, 피부가 얼얼한 듯한 느낌.
오른쪽을 보고, 왼쪽을 보고, 뒤는 볼 수 없으니 앞을 보고, 위를 본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삐걱거리며 뭔가 움직이는 듯한. 카츠라를 시작으로, 주위의 학생, 선생님, 그 누구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뭔가 있다.
그리고 다시금 문득 눈길을 위로 향한 유키는 공포를 느꼈다.
“――에, 유, 유키 쨩, 무슨 일이니??”
단상의 위에 입학식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간판이 약간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다. 눈길을 움직여 보자, 간판 아래선 황장미님이 인사를 계속하고 있다.
다음 순간, 유키는 달리기 시작했다.
위험하지 않나 생각한 순간엔 멋대로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마론 달리기 힘들고, 동아리에서 멀어진 뒤 좀 무뎌진 다리가 성가시고, 그런데도 다른 학생을 피하며 달려, 단상에 이어지는 계단을 두 계단씩 뛰어 올라가, 황장미님을 향해 다이브했다.
격렬한 소리와 충격이 관내를 덮쳤다. 간판이 떨어진 거다.
먼지가 이는 중, 유키는 일단 자신이 무사하다는 걸 감각적으로 이해한 뒤 팔 안의 소녀에게 눈을 향한다. 자신의 몸으로 감싸듯 끌어안긴 했지만, 제대로 막을 수 있었을까.
“괘, 괜찮으신가요?”
“에……아…….”
눈을 감고 있던 소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다치진 않았나요?”
“엣, 아, 에?! 다리가…….”
바라보자, 그녀의 오른 다리가 쓰러진 간판 아래에 깔려 있었다.
“아, 잠시, 기다려 주세요.”
간판에 손을 대고 들어올리려 했지만, 아무래도 무겁다.
“너, 그건 좀 무리야……으!”
유키에게 충고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황장미님. 간판이 완전히 다리 위에 실려 있어, 이대론 다리에 부담이 걸려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주위에 눈을 향해보지만, 아직 다들 급작스런 일에 얼이 나가 있어서 움직일 것 같지 않다.
유키는 다시 한 번 간판에 손을 받쳤다.
“그, 그러니까, 무리라니까…….”
확실히 여자 한 명의 가는 팔로는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유키는 남자인 거다. 근력이 떨어졌다곤 해도, 타고난 악력은 여자보다 위다.
“……잇차!”
기합을 주고 허리와 팔에 힘을 넣자, 약간 간판이 들려서 다리와 간판 사이에 틈이 생겼다.
“이 사이에!”
말할 것도 없이 황장미님은 끼어있던 다리를 빼냈다. 동시에 간판에서 손을 떼자, 떨어진 간판이 큰 소리를 내고 먼지가 날렸다.
손으로 먼지를 날려보내며 황장미님의 다리를 본다.
“아프신가요? 이건, 제대로 진찰받는 게 나을거예요.”
“아……잠깐, 너, 이마에서 피가.”
“피? 아아.”
말을 듣고, 이마에서 따뜻한 액체가 눈 옆, 뺨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걸 느끼곤, 일단 소매로 닦았다. 상처에 세균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 흐르는 피를 닦은 것뿐인데, 이 정도면 괜찮겠지.
다시금 주위를 둘러봤지만, 단상에는 그녀밖에 없었기에 부상을 입은 다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은 무대 옆쪽에 있었고, 학생들은 무대 아래에 있었기에 파편같은 걸 맞거나 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급히 진찰할 필요가 있는 건 그녀 뿐이다.
“설 수 있나요?”
“아, 미, 미안해요. 그게, 다리가 풀린 것 같아서……그보다 너야 말로.”
“그럼, 안고 갈테니까요.”
“저기, 그?”
“나중에 심해질 때도 많으니, 빨리 치료하는게 좋아요. 거기에, 나무조각이 박혀서 조금 피도 나와요. 빨리 소독해야죠.”
반쯤 억지로 황장미님을 안고 일어난다. 등에 가슴이 닿았지만,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어제의 세이보다 확실히 크지만, 그래도 신경 쓰면 안된다.
유키는 황장미님을 업곤, 얼이 나가있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서 빠른 걸음으로 양호실로 달렸다.
간판 추락은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 일어난 사고였다. 붙였던 건 업자였지만, 학교에선 엄중한 주의를 받았고 업자 쪽에서도 사과를 하러 찾아왔다. 황장미님이 부상을 입었었지만, 일단 일을 키우진 않고 합의로 사태를 정리하게 된 모양이다. 단지, 황장미님의 가족은 굉장히 분노했다든가 (당연하지만)
한편 유키 자신도 이마를 다쳐서 피가 났었지만, 뭐, 이 정도로 다치는 건 야구부에 있을 땐 잔뜩 있던 일이다 보니 별로 신경쓰이진 않는다.
황장미님, 그녀의 이름은 토리이 에리코라고 한다는 걸 양호실에서 들었지만, 그녀의 다리도 타박상으로 끝나 뼈에는 이상이 없었고, 나뭇조각이 박혔던 곳도 가벼운 찰과상으로 끝났다는 모양이다. 단지, 간판의 하중이 계속 걸렸었으면 좀 더 심각한 증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유키가 기합을 넣고 구하러 나선 보람은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간판이 쓰러지는 사고가 일어나서 중상자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다음날 학교는 임시 휴일이 되었다. 학생들은 자택 대기라는 모양이라, 유키는 하룻동안 기숙사 방에서 카츠라나 미나코 등과 수다를 하며 지내게 되었다. 사치코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와, 다치지 않았는지 굉장히 걱정하는 듯이 물어왔다. 아무래도 입학식에는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라 유키가 다친 건 모르는 모양이다. 걱정을 끼쳐봐야 의미도 없고 실제로 심하게 다치지도 않았으니 별 일 없다고 사치코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여자의 수다파워는 대단하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화제가 그렇게나 끊이지 않는게 굉장하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서도 얘깃거리를 만드는 건, 어찌보면 관찰력이 굉장하단 거겠지.
그렇게 하루가 지나, 다시금 학교가 다시 열리게 된 날 아침.
“이야―, 그래도 그 때 유키 쨩, 멋있었지―.”
“아, 하하,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거야, 굉장하다고!”
기운이 흘러넘치는 카츠라와 함께 등교중에, 카츠라는 입학식 때의 유키에 대해 흥분한 듯 이야기하고 있다. 어제도 근지러울 정도로 칭찬받았었는데.
“어, 어쨌든, 학교에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아 줘. 너무 눈에 띄면 힘드니까.”
“그래? 우웅―, 그래도 그거, 어떠려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츠라.
함께 지내게 되고 아직 그리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게 느껴진다. 절세 미소녀라거나 미친 듯이 귀엽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카츠라는 친해지기 쉬운 귀여움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그 부분은 유미랑도 조금 닮았을지도 모른다.
“입학식부터 감짝 놀랐지만, 평온한 학창생활을 보내고 싶어.”
그런 유키의 바람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박살났다.
“……왠지 굉장히 소란스럽지 않아?”
“진짜네―, 뭘까?”
릴리안 학생은 기본적으로 아가씨들이라 얌전한 아이가 많을텐데, 오늘은 굉장히 소란스러운 느낌이었다.
“자, ‘릴리안 학보’ 호외예요, 자아―.”
그 이유는 신문부의 학생에게서 건내받은 한 장의 교내신문으로 명확해졌다.
“――――뭐, 뭐, 뭐야 이거어어어어어――――?!!”
세세한 기사 내용을 살피기 전, 커다란 제목과 사진을 보고 유키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교내신문에는 큼지막하게 이렇게 쓰여있었다.
‘릴리안에 수호여신, 늠름하게 강림!!’
‘멋지게 등장해, 황장미님을 궁지에서 구해내다!’
‘새로운 헤로인의 극적인 탄생에 실신자 속출!!’
그런 호들갑스런 문장들과 함께, 에리코를 업고 달리고 있던 유키의 사진이 실려있다. 필사적인 표정으로 이마에서 한 줄기 피를 흘리는 그 사진은 굉장히 멋져서, 유키가 봐도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시금 기사에 눈을 향해보자 이런저런 것들이 쓰여 있다.
어쨌든 필사적으로 황장미님을 구하려고만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된다거나, 그런 건 그 상황에서 머리를 스치지도 않았다. 이마가 다친 건 별 것 아니고, 그보다도 다리를 다친 황장미님 쪽이 걱정이다.
어느샌 이런 정보를 얻었나 생각하고 있었다가, 기사 마지막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기자: 츠키야마 미나코’
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어제 쓸데없이 끈질기게 물어본다 싶었는데, 이런 거였나. 하지만 사람의 동의도 받지 않고 기사로 삼는 건 기사로서 어떤가 싶은데.
“우와아, 역시나 미나코 님. 멋진 기사를 쓰셨네요.”
“에, 카츠라 쨩, 이 기사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에? 응, 그치만 어제, 이야기 했었잖아. 유키 쨩도 기사로 써도 괜찮냐고 물었을 때 응, 이라고 대답했었어.”
“농담이지…….”
아무래도 유키가 수다에 지쳤을 무렵 물어봤던 모양이다. 유키는 기억에 없었지만, 카츠라라는 제 3자의 증언이 있으니 미나코에게 불만을 토할 수 있을 리 없겠지. 침울해져서 몸을 움츠린다.
“유키 쨩, 굉장한 인기네. 뭐, 이럴 줄은 알았지만.”
아까전부터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던 건 이 기사 탓일까. 유키는 원래 릴리안의 학생은 아니었고, 어제는 혼란스런 상황이라 얼굴같은 건 거의 보이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확실히 사진으로 남아버리면 어쩔 수단이 없다. 것보다, 그 혼란스런 상황에서 잘도 뭐, 훌륭한 사진을 찍은 사람이 있었구나.
“가, 가자, 카츠라 쨩.
카츠라의 손을 잡고 달아나듯이 학교 건물을 향한다.
하지만 간단히는 도망갈 수 없었다. 왜냐면 교사 입구 앞에도 왠지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으니까.
“무, 무슨 일……?”
“그, 글쎄.
겁이 나지만, 다른 갈 곳도 없으니 일단 갈 수 밖에 없다.
카츠라랑 함께 흠칫거리며 걷고 있자, 앞쪽에서 여학생 한 사람이 나왔다. 그 순간 주위 학생들이 환성같은 걸 지른다. 무슨 일인가 생각하는 사이, 그 학생은 유키와 카츠라의 눈 앞까지 천천히 걸어온다.
에리코였다.
“아……에, 그, 화, 황장미님?”
“펴, 펴, 평안하세요!”
당황하는 유키, 소리가 뒤집힌 카츠라. 둘을 보고 에리코는 엷게 미소짓는다.
“평안하세요. 후쿠자와 유키 양, 으로 괜찮지요? 에에, 그쪽의 사랑스런 아이는 친구분?”
“에, 녜! 카, 카, 카츠라라고 합니다, 예.”
동경하던 황장미님이 직접 말을 건 것만이 아니라 이름까지 불러서, 거기다 사랑스럽다는 이야기까지 들어서, 새빨개져서 폴짝거리는 카츠라.
“그래, 평안하세요, 카츠라 쨩.”
“하후우우우우~~!”
빛나는 듯한 미소까지 받아, 카츠라는 넋을 잃어버렸다.
“저, 저기, 황장미님, 다리 부상쪽은 괜찮으신가요?”
걷는 중에 약간 질질 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아,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았으니까. 그것도 유키 양, 네 덕이야.”
“아, 아니에요, 그런거.”
“겸손해하지 않아도 돼. 실제로 나는 네게 도움 받았고. 다시금 감사하고 싶어서 여기서 기다린 거야.”
“가, 감사같은 걸 받을만한 일이 아니에요. 우, 우연히 깨달은 것뿐이고, 정신없이 움직인 것 뿐이고.”
“너무 겸손스런 것도 나쁘다고 생각해? 우연이라곤 해도, 너 외에는 아무도 깨닫지 못했었으니까. 자칫했다간 나, 크게 다쳐서 심하면 생명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그래도 조금 놀랐어. 영웅처럼 멋지게 나타나 나를 구해주고, 덤으로 릴리안 역사상 최초로 입학시험에서 다섯과목 500점 만점을 맞은 수석인데다, 어떤 앤가 싶었더니 이런 사랑스런 애라니.”
에리코의 말에 주위 학생들에게서 놀란 소리가 들려온다.
“에에에에에엣?! 유, 유키 쨩, 만점?! 그, 그런 대단한 사람이었어?!”
“거짓말, 그런, 설마.”
확실히 대학 수험조차 경험한 유키 입장에선 릴리안 입학시험 내용은 간단한 거였고 문제 없이 합격할 수 있다곤 생각했지만, 전과목 만점 같은 건 간단히 받을 수 있는게 아니다. 단지 수험중에 유키는 어떠한 트랜스 상태에 빠져 있었으니, 그 도움으로 기적을 일으킨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키 쨩이 어떤 애라도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건 마찬가지야. 네가 없었으면 나는 이 세계에 남지 못했을지도 몰라.”
“아니에요, 과장스럽다니까요.”
“그렇지 않아. 그러니까, 이건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분…….”
그 말을 하며 에리코가 몸을 쭈그린다 싶었더니, 놀랍게도 땅에 무릎을 꿇곤 유키의 오른손을 정중히 잡아,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한 순간 정적에 둘러싸인 뒤, 폭발하듯 환성이 터진다.
“저, 저저, 저저저저저저기?!”
급작스런 일에 새빨개져서 허둥지둥거리며 에리코를 바라보자, 에리코는 살며시 입술을 때놓고 우아하게 일어났다.
“이건 내 감사의 마음이야.”
에리코는 그리 키가 크지 않다. 유키보다 한참 작아, 유키 입장에서는 내려다보는 꼴이 되지만, 그래도 압도당하는 듯한 오라를 느낀다.
“후후후, 입시에서 만점을 받는 지성, 위험을 사전에 느끼는 통찰력과 감,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을 돕고자 하는 위기판단과 용감함, 부상자를 돕기 위한 결단력, 자신의 부상보다 남의 부상을 걱정하는 배려, 나를 업고 양호실까지 달릴 수 있는 체력과 운동능력, 거기 더해 모델같이 낭창낭창한 몸인데 가련하고 사랑스런 외모, 그런데도 전혀 자신을 내보이려 하지 않는 겸허함.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느껴지는 친근함……후후, 올해는 즐거운 1년이 될 것 같아.”
“아뇨, 나……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몸을 움츠리며 말하지만 에리코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괴로운 눈길과 몸짓을 유키에게 향해온다. 뭐라고 할까, 굉장히 여성스럽다.
“저, 저기, 죄송합니다, 황장미님!”
거기서 이번엔, 학생을 갈라헤치듯 제일 뒷줄에서 갑자기 나온 소녀가 말을 걸었다. 무테 안경을 낀 카메라 소녀, 타케시마 츠타코였다.
“방금 그 장면, 사진으로 찍어버렸는데, 면목 없지만 한 가지 부탁을 더 드릴 수 없을까요. ‘릴리안 학보’에도 싣고 싶어요.”
“에엣―――?! 그그그, 그만둬 주세요.”
“어머, 재밌을 것 같잖아.”
달아나려는 유키와는 반대로, 후훗 하고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짓는 에리코. 것보다 츠타코는 같은 1학년으로 막 입학한 참일텐데 벌써 동아리를 시작했다니 얼마나 생명력 넘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할까~.”
“그, 그만”
“카츠라 쨩, 막아 줘!”
“예, 예에?!”
달아나려고 하는 참에 에리코의 명령을 받은 카츠라가 뒤에서 안겨붙어, 도망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카, 카츠라 쨩? 배신자~~!!”
“미, 미안해애! 그래도 황장미님의 명령에는 거스를 수 없고……나도 보고싶고.”
옴짝달싹 못하게 된 유키에게 먹이를 사냥하는 짐승의 눈, 아니 요염하게 먹이를 꾀는 서큐버스의 눈으로 다가오는 에리코.
그리고 에리코는.
유키의 등에 손을 얹고, 까치발로 서서 유키의 뺨에 입맞춤했다.
아련하고 차가운, 부풀어 오른 부드러운 무언가가 뺨을 누르는 걸 느끼는 순간에, 츠타코가 셔터를 누르고, 관중들에게서 새된 환성이 솟구쳐 오른다.
이윽고 천천히 에리코는 떨어져, 만족스럽게 끄덕인다.
“그럼, 평안하세요. 다시 만나요.”
인사를 하곤, 교사 안으로 떠나가는 에리코.
남겨진 유키는 멍하니 멈춰 서 있었지만, 문득 주위에서 찌르는 듯한 눈길에 정신을 차린다.
그건 방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보다 강렬한 존경과 선망의 시선. 그리고 일부, 질투와 분노도 섞여있나. 어쨌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마어마한 여학생들에게 그런 눈길을 받고 있다.
“카, 카카, 카츠라 쨩~!!”
저도 모르게 옆에 있던 카츠라에게 울며 달라붙는다.
“아하핫……유키 쨩, 눈에 안 띄겠다는 건 벌써 무리일지도.”
“그보다, 카츠라 쨩, 원망할 거야!”
“아하하, 미, 미안, 미안.”
유키의 머리를 통통 가볍게 두드리는 카츠라.
다시금 조심조심 주위ㄹ 둘러보자, 놀랄만큼 많은 여학생이 유키를 보고 있다. 앞으로는 에리코와 있었던 일도 더해서 소문이 퍼지겠지. 아니, 이미 퍼지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여자애의 네트워크의 넓이, 속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왠지 알고 있다.
“노, 농담이지―――――――――――?!”
여기는 릴리안 여학원.
어리고 숫된, 맑고 올바른 영애들이 다니는 아가씨의 화원.
이렇게 유키는, 릴리안 여학원에 화려히 내려앉은 거였다.
프롤로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