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스크램블 에그
[1] 주먹밥
[2] 돼지고기 감자조림
[3] 라면
[4] 연어회
[5] 꽁치구이
[6] 캣 푸드
[7] 선박용 비스킷
[8] 미끼
[9] 돈가스 덮밥
[10] 별사탕
[11] 무화과 타르트
[후기]
2. 돼지고기 감자조림 (2)
“뭐 아무래도 좋을까나. 원일 군이 고생이 많았다는 건 손가락을 통해서 충분히 이해했어~.”
“어쩐지 그 ‘이해’라는 단어가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만?”
“그냥 넘어가아.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자고. 헤헤.”
카밀라 대교는 와인을 홀짝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누구에게 라고 할 것도 없이 혼잣말처럼 내가 한 말을 되새기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이야기에 개연성도 있는 편이고, 앞 뒤 정황도 딱 들어맞는데. 저 정도면 신원이 확실하다고 해도 좋겠지?”
나는 곧 그 말이 사관들을 향했음을 깨닫고 그 들을 다시 쳐다보았다. 사관들 대부분이 그말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단 한 사람― 엘레나 소교만큼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함장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저 자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응? 그럴 리가. 이 아이한테서 거짓말의 맛 같은 건 나지 않았다고?”
거짓말의 맛은 대체 뭡니까. 또 함장이 헛소리를 하나 싶었다. 엘레나 소교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함장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다시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저희와 최근 사이가 틀어진 연방 출신의 군인이라면 의심을 해 보아야 합니다. 게다가 저 사내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진급 호위함을 일격에 침몰시킬만한 어뢰라면 잠수함용 중어뢰 밖에 없습니다. 반동이 심해서 여간한 구축함에도 장착하기 힘든 것을 개조 해적선에 달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음… 경어뢰로는 안 될까?”
“경어뢰로는 무진급 호위함의 복각식 격벽을 관통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운 좋게 탄약고에 맞혀서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단 한발로 승부를 봐야 하는 해적선의 입장에서는 그런 모험을 택할 리가 없습니다.”
소교의 말은 논리적으로는 지극히 옳았다. 직접 그 해적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나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어뢰 공격을 받았을 뿐더러, 엘레나 소교의 말은 심히 공격적이었다.
“…어찌되었든 저는 저 동정남의 얼빠진 모험담을 들어주느니, 참치 먹이로 던져버리는 쪽이 유익하다가 봅니다.”
“잠깐, 잠깐만요. 엘레나 소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엘레나 소교의 말에 끼어들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아까 전부터 이어지는 욕설과 비방에 나도 적잖이 화가 난 터였다. 나는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엘레나 소교에게 일갈을 날렸다.
“딱 보아도 행정직이나 전자전 계열 사관 같은데, 무기는 제원이 같아도 사용자나 상황에 다르면 다른 결과가 나오는 법입니다. 최근에 개발된 20식 지향성 탄두를 이용하면 경어뢰로도 충분히 호위함을 침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쪽의 사관께서는 지향성 탄두가 뭔지는 아십니까?”
나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엘레나 소교가 심하게 골을 낼 거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비등점 낮아 보이는 사람에게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을 던졌으니 욕설이 아니라 주먹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엘레나 소교는 욕설이나 주먹을 날리는 대신 희미한 조소를 흘기며 나를 쳐다보았다.
“멍청한 놈. 여기 포술장이 나다. 반편이 새끼야.”
“네, 포술장이시라면… 엥? 포술장?”
나는 의외의 사실에 놀란 나머지 내 처지도 잊은 채 본심을 쏟아내고 말았다.
“소총도 못 들 것 같은 그 조그마한 체구로 포술장직을 수행한단 말입니까?”
포술장이라 함은 함 전반에 걸쳐 모든 병기와 사통체계를 관리하는 무장 계열 최고 사관을 의미한다. 아무리 장교라 해도 직접 포탄을 만져보고, 비상시에는 수동 조준까지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포술장은 함내에서 가장 억세고 강인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엘레나 소교의 외모는 포술장이라기 보다는… 인형놀이를 더 좋아할법한 어린 아이에 가깝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내 반응은 긍지 높은 포술장의 심기를 크게 거스른 모양이었다.
“이 자식이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야, 앙?”
엘레나는 입을 씰룩거리며 순식간에 요대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엘레나 포술장이 내게 총구를 겨누자 또 샤오지에 갑판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엘레나 소교.”
“우으….”
무언가 미적지근한 긴장감이 사관실 안에 가득 퍼졌다. 총을 든 소녀와 그 총구 앞에 선 거지꼴의 선원을 중재하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느긋했다. 심지어 샤오지에는 어린 아이를 타이르듯 엘레나 소교의 머리를 토닥이며 짐짓 엄하게 읊조렸다.
“착한 아이는 그러면 안 된답니다.”
유치원생에게도 먹히지 않을 성싶은 유치한 협박이었지만, 놀랍게도 엘레나 소교는 부르르 떨다가 요대에 권총을 거칠게 꽂아 넣었다.
“으으… 알겠어요. 안 죽이면 되잖아요!”
엘레나 소교는 제 분을 못 이겨 한동안 골골대다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를 질렀다.
“이 튀겨 먹어도 시원찮을 반편아, 잘 들어! 네 놈이 말한 지향성 탄두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어뢰 라이선스가 나한테 있으니까! 만약 20식 지향성 탄두를 장착한 어뢰가 특정 조직이나 국가에 판매되었다면 당연히 내가 제일 먼저 알아차렸을 테니까 지랄 마!”
지향성 탄두의 라이선스가 여기에 있다니? 지향성 탄두를 장착한 어뢰는 고가에 거래되는 최신식 무기이다. 그런 최신 무기의 라이선스를 갖고 있다는 말에, 당최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을 더듬었다.
“라, 라이선스가 당신에게 있다니, 대체 그게 무슨….”
그 때, 해인이 아까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본 함은 광명학회의 취사지원함인 잿빛 10월입니다.’
“…광명학회, 말입니까?”
“응, 그래. 이 배는 광명학회 소속의 군함이야. 경제 신문 같은데서 한번쯤은 들어봤지? 어뢰를 비롯한 광명학회의 모든 해상 무기는 대부분 여기 있는 엘레나 양의 주도로 개발된 거라고.”
카밀라 대교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가슴을 펴며 으스대 보였다. 물론 광명학회의 이름이야 신문에서 가끔 들어봤지만, 썩 좋은 의미로 언급된 적은 없었다.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광명학회는 최첨단의 무기나 군수품을 만들어 전쟁 중인 국가들에게 팔아치우는 기술 본위의 이상한 신념을 가진 천재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물론 연방군에서도 광명학회의 무기를 가끔 구매하긴 했지만, 국적 불명의 집단이 한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 할 정도의 강대한 재력과 기술, 군사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꽤 껄끄러운 일이었으므로 언론 이미지는 상당히 나쁜 편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약간 거리를 둔 채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럼 왜 광명학회가 이런 분쟁 수역에서 움직이고 있는 겁니까?”
“분쟁 수역?”
카밀라 대교는 작은 크래커 조각들을 입에 던져 놓고 한동안 우물거리더니 낮게 웃었다.
“아…. 역시 ‘민간인’들한테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나?”
멀쩡한 군인을 앞에 두고 민간인이라니. 나는 항의의 뜻으로 짐짓 얼굴을 찌푸려 보았지만, 함장은 어린 아이의 투정을 대하듯 천연덕스럽게 히죽거리며 물었다.
“원일 군. 연방이 왜 전체 해군력의 상당 분을 투사해가면서 동중국해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지 알아?”
“그야 해저 자원 때문 아닙니까? 그 근처 광구에서 액화 가스와 망간 등이 발견되었으니까요.”
“뭐,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네가 연방의 정치인이라면 매장량도 불확실한 심해의 해저 자원을 채굴하기 위해 온갖 불이익을 감내하고 전쟁을 하겠니?”
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한동안 벙 쪄있었다. 하기야 이 곳에 매장된 해저 자원을 개발하려면 막대한 채굴비용이 필요하다. 심지어 최근 대두되고 있는 대체 에너지 개발 붐으로 인해 석유 자원의 가치는 하락세에 있다. 석유가 탐난다 해도 인근 국가에게 지탄을 받고 국제 사회로부터 경제 제재를 받는다면 해군력을 물리는 편이 더 싸게 먹힌다.
하지만 연방은 해군을 물리기는커녕 점점 더 많은 군함과 병력을 해역 근처에 투입하고 있었다.
군인으로 살았던 지난 2년간 나는 그 점을 한 번도 의심치 않았다. 아니, 의심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충실한 종복처럼 국가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고, 국가가 적이라 지정한 상대와 맞서 싸워야 했으며 내게 주어진 정보 외에는 그 무엇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런 소릴 한다고 해도….
내 혼란을 알아챘는지 카밀라 대교는 눈웃음을 치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국민의 세금으로 움직이는 국가가 무언가 비효율적인 일을 하고 있다면 국민에게 공개하기 싫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지.”
함장은 학생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손가락을 가볍게 휘저어 보였다. 그렇게 말하는 카밀라 대교의 표정은 너무나도 천진하여 내가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바로 답해줄 듯했다. 하지만 내가 아직 군인 신분인 이상― 더군다나 포로인 이상 자국의 치부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도 문제가 된다.
…영리한 개는 호기심 때문에 죽는 법이랬다. 궁금증을 최대한 꾹 누르며 화제를 돌렸다.
“저, 그보다 다시 제 신병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재미없게 시리.”
내 반응에 실망했는지 카밀라 대교가 투덜거리며 입을 쑥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함장을 무시한 채 천천히 내 할 말을 시작했다.
“구조해 주신 것과 더불어 베풀어 주신 인도적인 처우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지만, 저는 연방의 군인입니다. 국제 법에 의거하여 저를 본국으로 인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퍽 정중하고 일리 있는 부탁이었다. 포로로 잡힌 군인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데에 다른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카밀라 대교가 어지간히 성격이 비뚤어진 사람이 아니라면 내 의견을 수용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카밀라 대교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응. 그건 안 돼.”
“왜, 왜 입니까?!”
이 여자, 성격이 어지간히 비뚤어졌나?
“…무슨 무례한 생각을 떠올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도 엘레나가 말했잖아? 연방은 우릴 싫어한다고.”
함장은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방 함정이 우릴 보자마자 포격을 날린 경우가 벌써 7번. 적의가 없음을 알렸음에도 계속 공격을 멈추지 않은 것은 3번…. 이 정도면 암묵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아?”
“그… 그런….”
연방과 광명학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적대 관계에 있다고 봐도 좋은 상황이었다. 불가침 협약을 맺기 전까지 포로 교환은 불가능하리라. 하기야 포로를 돌려준다는 이유로 비밀 결사 단체인 광명학회가 제 위치를 연방에 알려줄 리도 없지만.
“그럼 인도적 차원에서 부탁드리겠습니다만….”
나는 끙끙거리다가 마지막 묘수를 쥐어 짜냈다.
“제 3국의 영토에 놓아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무기나 호위, 식량 같은 것은 일절 요청하지는 않을 테니, 아무 항구나 해안에 저를 놓아 주십시오. 그럼 저 혼자서 가장 가까운 영사관을 찾아가 귀환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허락해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들은 연방과의 확전을 원하지도 않으니 나에게는 포로로써의 가치도 없고, 둬봐야 식량만 축내는 짐짝이 될 테니 과감하게 ‘나를 버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조차도 오산이었다.
“미안. 정말 미안하지만, 그것도 안 돼.”
“어, 어째서입니까!”
카밀라 대교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말했던 ‘연방의 꿍꿍이’ 말이야. 우리도 같은 목적을 갖고 이 해역에 나와 있는 거라서… 당분간 육지로 돌아갈 계획이 없거든?”
“그, 그래도 식량이나 청수를 보급하러 상륙은 해야 하잖습니까!”
“우리는 청수를 자체 담수화 장치로 보급하고, 식량은 근처의 섬에서 직접 현지 조달받아. 그래서 당분간 대륙과 이어진 육지에 상륙할 계획은 없는데…. 헤헤.”
나는 마지막 희망을 쥐어짜내듯 질문을 던졌다.
“그 당분간이란 얼마나….”
“한… 6개월?”
“망했다….”
나는 갑자기 절망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6개월간 항해를 계속할 배에 구조되었으니 다른 곳으로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물론 상륙 주정이나 구명정을 쓴다면 나 홀로라도 도망칠 수 있겠지만, 그런 비싼 장비를 나 하나 살리자고 줄 성싶진 않았다. 그럼 계속 이 배에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그럼 저는 어찌 되는 겁니까?”
나는 불안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쩐지 사관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한 것 같다. 그래, 안 그래도 식량과 공간이 늘 모자란 해군 함정에 6개월짜리 밥버러지가 들어왔으니 짜증이 날만도 하다. 게다가 여자만 가득한 배에 남자라니….
카밀라 대교도 어쩐지 냉소적인 투로 천천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글쎄. 우리 ‘잿빛 10월’도 신사적으로 손님을 배웅해드리고 싶지만, ‘손님 배웅’을 해드리기에는 우리도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말이지. 아무래도 지금은 국제 법보다는 이 배의 규칙을 우선시해야 할 것 같은데?”
“이 배의 규칙이라면….”
순간 주마등처럼 중세시대의 해상 처벌법이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물과 식량 없이 바다에 표류시키기, 선수상에 산채로 못 박아 죽이기, 함교에 매달아 바짝 말려 육포 만들기, 산채로 껍질 벗겨서 범포 만들기….
하지만 함장의 입에서 나온 ‘규칙’은 조금 의외였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네?”
의외의 상식적인 격언에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말 그대로야. 당분간 이 배에 머물 거라면 일손을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배라는 건 아무리 자동화를 시켜놔도 늘 사람 손이 모자라기 마련이거든. 앉아서 식량을 축내는 것 보다 일을 돕는 게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겠어?”
“그야 그렇지만….”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해인 일조가 눈에 쌍심지를 키며 함장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하, 함장님! 그럼 이 사내를 잿빛 10월의 승조원으로 착임시킨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함장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고개를 저으며 씩 웃었다.
“아니, 아니. 정식 승조원은 아니고… 일단은 비정규직이라고 해둘까? 그리고 원일 군은 전 함에서 의무관으로 근무했으니 이곳에서도 의무관으로 계속 일 해줬으면 좋겠어.”
“경의부의 직별장으로서 그건 곤란합니다! 아무리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계급도 무훈도 없는 민간인을 함내 부서에 마음대로 집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각 부서에는 계급 체계가 있고, 또 그에 따른 군기가 존재하…,”
함장은 이상하다는 투로 해인의 말을 도중에 자르며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야, 계급도 무훈도 없는 민간인이라니.”
함장은 테이블 위에 놓인 스크랩 철을 뒤적이더니 연방에서 발간한 영자 신문 한 부를 꺼내 보였다(해상에서 받는 보급품에는 신문과 잡지 등도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신문은 한 달 치씩 스크랩하여 사관실에 비치한다). 그 신문은 무진함이 침몰된 직후에 발간 된 일간지였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내 사진과 이름이 실려 있었다.
<동성 무공 훈장 추서(追敍) - 고(故) 이원일 하사>
“훈장…? 거기에 일 계급 특진?”
“이원일 ‘일등병조’는 ‘죽은 사람’이지만 엄연히 무공을 세운 현역이라고? 그런고로! 함 총원은 원일 군에게 해군 일등병조에 걸 맞는 대우를 해줬으면 좋겠어, 이상.”
“에에에에에?”
그 말 같지도 않은 선언에 사관실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해인이 가까스로 마지막 항변을 했지만,
“자,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이 사내는 잿빛 10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참인데!”
“그건 해인 양이 알려주면 되잖아? 하암. 난 이만 슬슬 자러갈게. 나 없다고 부장 너무 괴롭히지 말고. 바이바이.”
…결국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함장이 떠난 사관실은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난 함교 마냥 부산스럽기 그지없었다. 해인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있었고, 포술장은 입에 담기도 거북한 욕을 쉴 새 없이 쏟아 내었으며, 갑판장은 생글생글 웃으며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내 탓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함장을 향한 적의는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홀로 쭈뼛거리기만 했다. 나는 내게 쏟아지는 싸늘한 시선을 짐짓 모른척하며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어머니. 저, 어머니가 바라시던 판검사는 되지 못했지만 하사가 되었어요.
<선행연재는 여기까지 입니다. 뒷 내용은 단행본으로 확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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