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그 여간부, 노브라
2화. 그 여간부, 성희롱
후기
1화 그 여간부, 노브라 (6)
예쁜 드레스 차림의 유윈은 안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외계 출신의 왕자로 지구서민생활에 익숙지 않은 인물이더라도 화사한 레이스와 리본이 한가득 달린 드레스를 입고 아파트 정문으로 나갈 정도로 사회상식이 일반화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아파트부터가 유윈을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윈과 그의 로봇 노스트라다를 숨기기 위해 세워진, 아파트 형태의 비밀기지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도시가. 이 인공도시부터가 노스트라다를 위해서. 노스트라다와 변태수 사이의 계속되는 전투를 위해 마련된 일종의 경기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방금…, 이 방에서 선생님이…’
그만 유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조금 전 이 방에 호란이 있었다.
조금 전 이 방에서 호란이 옷을 벗었다.
조금 전 이 방 어딘가에 호란의 그 큰 가슴을 감싸던 천 조각이 흘러내렸다.
따위의 생각을 하니 심장이 쿵쾅거리며 혈액순환이 빨라진다.
“공주님…무슨 고민이라도?”
“아, 아니에요!”
알고 보면 유윈의 교육담당에, 시종장이자 비서인. 그러나 알고 보지 않으면 그저 귀엽게 생긴 퍼그 강아지일 뿐인 아부젤라가 유윈을 걱정된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별나라 왕자님이라고는 해도 사춘기 소년은 사춘기 소년인 게다.
“으흠, 흠. 출격에 앞서 집중하느라요.”
유윈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구석에 놓인 옷장의 문을 열었다.
“으…흠.”
몇 벌 걸려있지 않은 옷장 안에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 놓여있다.
호란이 과외를 하기 전 입고 온 검은 정장.
‘선생님이…직장에 입고 다니시는 옷…’
호란이 급한 연락을 받고 돌아가는 와중 그만 벗어둔 옷을 까먹고 바로 돌아갔던 것이다.
‘크…다.’
그리고 옷걸이에는.
익숙한 물건은 아니지만.
한쪽으로도 어린아이의 얼굴이 담길 것 같은 크기의.
여성의 돌출된 흉부를 감싸는 것을 목적으로써 제작된 물건임이 분명한 디자인의 천 조각이 걸려있었다.
“칠칠치 못한 지구인 같으니. 옷가지를 두고 갔군요.”
“어, 응. 그렇네요. 옷을 두고 가셨네요.”
유윈은 말을 더듬지 않았나 되새겨보고는 조심스레, 호란의 옷이 구겨지지 않게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숨겨진 버튼을 누르자 옷장 뒤 비밀 문이 열린다.
지하기지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문.
유윈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유자재로 기지에 드나들 수 있도록 제작된 직통 엘리베이터이다.
아파트라기보다는 사원 기숙사에 가까운 건물이니.
아니, 이 인공섬 자체가 동북아시아 허브 항구를 핑계로 제작된 노스트라다의 비밀기지이니 이 정도의 비밀장치야 당연한 셈이다.
옅은 시트러스 향기.
호란의 옷에 남은 향수 때문이다.
달콤새콤한 향을 맡자 방금 그림을 고치는 것을 도와주느라 호란의 가슴이 등에 닿았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유윈은 긴장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랐다.
아니. 호란이 옷을 갈아입겠다며 이 방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니 아니. 호란이 초인종을 누른 순간부터 유윈의 머릿속은 눈앞의 캔버스보다도 더 하얀 백지가 되었었다.
그리고 여기에 브래지어가 있다는 사실은 조금 전까지 아니 지금 호란은 아마도 분명.
여기까지 오면 백지가 아예 뜨겁게 불타올라 재가 된다.
그렇다.
유윈도 호란을 좋아한다.
하지만 성숙한 어른인―물론 어디까지나 유윈이 보았을 경우에만 그렇게 보이는―호란에 비하면 자신은 어린 학생에 불과할 뿐.
“한숨만 나오네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배치된 거울이 유윈의 모습을 반사한다.
소녀답게 깜찍하고 앙증맞은 드레스 차림의.
어른답게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도 퇴근하고 나서는 어린 학생의 그림 공부까지 돌봐주는 호란에 비하면―그러니까 유윈은 호란에 대해 정말 톡톡히 착각하고 있는데―본인은 그저 여장변태외계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한숨이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공주님. 기운 내십시오!”
“다른 항성계의 별에 오면 남자 차림으로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애통하신 마음 이해하오나, 왕가의 의무이옵니다.”
유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호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신이지만.
여장변태인 자신에게도 호란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선생님이 태어나고 자란 이 푸른 별 지구를 지키는 것. 그것만이 유윈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자 유일한 도움이라면.
유윈은 지구를 몇백 번이라도 지켜낼 것이다.
‘못된 세그니아단…두고 보자. 호란 선생님과 인류의 평화는, 내가 지켜낼 테니까!’
유윈은 결연한 표정으로 세그니아단 타도를 다짐하고는 엘리베이터에 타 비밀기지로 내려갔다.
뭐 그 세그니아단의 세그니아가 사실은 유윈이 존경해마지 않는 호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깜찍한 소년이 홀로 전의를 다지는 사이 그 옆에서 소년의 비서이자 수행원인―퍼그 모습을 한 외계인 아부젤라는 이 모든 뻘짓의 시작을 떠올렸다.
♥
노스트 별의 왕궁 어딘가.
은하계를 양분하는 두 세력 중 하나인 노스트 왕가의 성임에도 이곳만큼은 화려한 의전도 장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약한 불빛이 좁은 돌길만을 비추고 있을 뿐.
왜냐하면, 이 장소는 노스트 왕궁에서도 계승순위 10권 이내의 주요인물과 시종장 급의 고위수행원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일급기밀장소이기 때문이다.
노스트 왕궁에 위험이 닥쳐왔을 때 적의 시선을 피해서 도주할 수 있도록 마련된 비밀입구이자 왕가의 비보로서 노스트 별의 수호신이기도 한 노스트라다의 격납고인 이곳.
유윈은 왕비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다며 어릴 적 이곳에 데려와 주었던 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함정장치가 발동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돌길을 밟아나갔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돌. 다음에는 왼쪽에서 네 번째 돌. 오른쪽과 왼쪽 발을 번갈아 디딜 때마다 노스트 왕국 국가에 나오는 단어 글자 수와 같은 수에 위치한 돌을 밟으면 되는 간단한 암호다.
“아름다운…넷. 노스트…셋. 밝게…둘. 빛나는…셋에다. 은하에…셋. 가장…둘. 그다음이…”
“영광되어라. 다섯입니다.”
앗?
유윈은 깜짝 놀라 발밑에 놓인 돌에서 시선을 떼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멍멍이.
아부젤라가 있었다.
“국가 정도는 외워두시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3대 전에 국가가 바뀐 이후로 행사 때에는 제창하지 않는 옛 버전의 국가마저 외우기란 어려워요.”
“전 전부 외웠습니다.”
아부젤라는 노스트 별의 인간이 아니다. 애초에 노스트 별 사람들은 지구 인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도그란 별 출신의 유명한 학자로, 특별히 노스트 왕가에 초빙되어 유윈의 비서이면서 교육담당 수행원으로 지내고 있었기에 이 비밀장소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공주님. 어서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아부젤라. 둘만 있을 때에는 왕자라고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왕자님. 이 앞으로는 가셔선 안 됩니다.”
이 까탈스러운 대신은 유윈의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유윈이 공주가 아니라 왕자라는 것. 죽을 때까지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기로 마음먹고 공주로서 행세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아부젤라. 보내주세요. 귀공도 바수라 황제가 보낸 서한을 보셨잖아요.”
유윈은 얼마 전 14살 생일을 맞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의 발신인은 바로 은하계의 절반 위에 철통과 같은 권력으로 군림하는 독재자, 바수라 제국의 황제였다.
그리고 이 편지가 모든 사건의 시초였다.
“바수라 황제와의 혼약을 피하고자 나는 14년 인생을 왕자가 아닌 공주로 살아왔어요. 하지만 그 편지가 당도한 이상 나는 왕자로도, 공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왕자님…”
유윈이 현 왕비의 뱃속에 잉태되었을 무렵. 선대 바수라 황제 또한 임신 중이었다. 은하계를 양분하는 바수라 제국과 노스트 왕가 두 가문의 회임은 우주적인 관심사였다.
그리고 바수라 제국은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하며 노스트 왕가에 새로 왕자가 태어날 경우에는 바수라 제국과 혼사를 맺는 것을 조건으로 강제 평화조약을 맺었다.
“바수라 제국과 노스트 왕가의 혼사는 결국, 은하계 정복을 위한 전초일 뿐이지요. 제국은 노스트 왕가의 정통성을 찬탈하기 위해 아주 훌륭한 계책을 떠올렸고요.”
“그래서, 왕자로 태어나신 유윈님께서 공주로 위장되어 살아오셨고 말입니다. 신(臣)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렇다. 유윈이 유윈 왕자가 아닌 유윈 공주로서 살게 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은하계에 일어날지 모를 커다란 전쟁과 그에 뒤따르는 피의 숙청을 지연시키기 위함이었다. 바수라 제국에 새로 즉위한 어린 여황제와의 결혼을 피함으로써 말이다.
바수라 제국은 피를 피로 씻으며 식민행성을 확대해온 전투민족. 그리고 그 폭력의 역사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즉위하자마자 선대 황제의 가신들을 모조리 목매달아버린 여황제가 바로 지금의 바수라 황제이다.
그나마 이들이 더는 확장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방어막이 되어주는 노스트 왕가마저 바수라 제국과의 혼사로 정치적 독립성을 잃게 될 경우, 이 은하는 또다시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포성으로 가득 메워질 것이다.
“하지만…이 서한을 보세요…!”
유윈은 공중에 얼마 전 자신의 생일, 바수라 제국에게서 받은 축하 서한의 이미지 화면을 띄웠다.
[열넷이면 좀 풋내는 나겠지만 대충 먹을 수 있을 만큼은 익었겠네. 당신네 후예가 남자든 여자든 잘 먹어줄 테니 빨리 포장해서 하나 보내라.]
아주 관대히 해석했을 때 이는 바수라 제국 특유의 청혼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청순한 러브레터 덕분에 노스트 왕가를 비롯하여 바수라 제국의 점령 하에 있지 않은 은하계의 절반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리고 유윈 역시.
바수라 제국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지내왔거늘. 이제까지의 고통이 전부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하기야. 남자든 여자든 맛있으면 그만이라는. 아니 대충 먹을 수 있기만 하더라도 됐다는 여황제님의 먹성 좋은 식생활을 어찌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아이? 뭐. 유전자 조작하자.]
심플하신 여황제님.
“…그러니, 도망칠 거예요.”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로 도망치신단 말씀이십니까?”
“아무 곳이나요. 바수라 제국과 노스트 왕가와 무관한 곳이라면 어디든 갈 거예요.”
유윈의 단호한 태도에 아부젤라는 고개를 숙이고는 곰곰이 고민해보았다.
유윈의 계획은 나름 명안이었다. 우선 지금 상황은 어딜 봐도 외통수다. 유윈이 결혼을 승낙하면 남성으로서 태어나 여성인 척 행세한 것이 빌미가 되어 전쟁이 날 것이고. 그 반대로 결혼을 거절하면 약혼을 파기했다는 이유로 전쟁이 날 것이다.
하지만 신부가 사라지면?
그다음에. 신부가 유괴되었다고 소문을 낸다면?
“보내주세요. 아부젤라. 노스트와 동맹행성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이에요.”
아부젤라는 그만 귀와 꼬리를 숙이고 말았다.
왕자의 책략은 나름 묘수였다.
“…좋습니다.”
“고마워요! 아부젤라!”
“하지만.”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아부젤라는 앞발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쿵 하고 내리쳤다.
“이 아부젤라도 왕자님을 따르겠습니다. 제가 왕자님을, 아니 공주님을 흠모한 나머지 유괴하여 도망쳤다고 소문을 내면 앞뒤가 완벽히 맞아 보이겠지요.”
“…별로?”
“…왕자님!”
유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은 아부젤라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 이상 이곳에서 지체하면 시종들이 유윈이 사라졌다면서 소란을 피울지도 모르거니와 이 작은 강아지의 고집을 꺾기란 무척 어려운 일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같이 도망치죠. 아부젤라도 함께 해줘요.”
“망극하옵니다, 왕자님.”
유윈은 한숨을 쉬고는 강아지와 함께 좁은 돌길을 달려 노스트의 수호자――육전기신 노스트라다의 격납고로 향했다.
♥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은하연방에 소속되지 않은 미개행성을 수색하고. 그중에서도 가능한 한 노스트 별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적당한 수준의 문명을 유지하고 있는 곳을 찾은 뒤. 동시에 기후나 환경에서 유윈과 아부젤라의 신체에 무리가 가지 않을 곳을 골라 망명을 신청했다.
지구는 그중에서 가장 괜찮은 선택지였다. 비록 은하연방의 중심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름의 문명권이 잘 발달한 곳이었으며 이미 외계에서 다양한 사유로 피난 온 난민들이 존재해 법제화가 잘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적합했던 조건은 바로 은하연방의 세력권에서 피난은 올 수 있어도 지구에서 은하연방으로 돌아가기에는 행성에 이렇다 할 자원과 기술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유윈이 유윈으로서 지내더라도 당분간은 바수라 제국에게 피난지의 위치가 알려지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는 말은…”
“그렇습니다. 왕자…아니. 공주님.”
유윈은 결국, 여장을 꾸준히 유지해야 했다. 다행히 유윈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은하연방 사람들이 알진 못하여도 이미 지구에서 살고 있던 은하연방 출신 외계인들은 알게 될 터였다.
“사실은 왕자였다고 말하면…”
“노스트 왕가에는 왕자가 없다고 외계난민들이 증언을 할 테니 지구정부 측에서 공주님을 불신하겠지요. 모든 것을 납득하더라도 저희의 비밀을 빌미로 약점을 잡고 싶어 할 수도 있고요.”
아닌 게 아니라 만약 제국이 추격해 올 경우, 유윈이 도망을 치는 일이야 어렵지 않더라도 유윈의 정체가 노스트의 공주가 아닌 왕자라며 퍼진 소문을 수습할 방법은 없다.
유윈의 여장 생활 연장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지구정부 역시 아리따운 공주가 망명을 요청하자 무척 호의적으로 대했다. 아부젤라는 지구정부에게 우주해적들이 자신들을 납치하는 바람에 외딴 은하계로 끌려오고 말았으며 왕가의 수호신이자 노스트 별의 육전기신인 노스트라다를 이용해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노스트로 돌아갈 부품이 고장 났다며 거짓말을 했다.
유윈이 우기고 우겨 공주인 자신의 신분 및 정체가 들통 나지 않도록 남장여자로서. 유은으로서 살겠다는 타협까지 이끌어내면서.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는 남자아이. 하지만 공식 석상에서는 여자아이. 그럼에도 진실은 남자아이. 남장여자를 연기하는 여장남자의 이중 삼중의 비밀 신분.
이것이 바로 유윈과 아부젤라. 노스트 별의 두 귀빈께서 한국에 친히 내방하시게 된 내막이다.
<선행공개는 여기까지 입니다. 이후의 내용은 단행본을 통해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