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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





1일차(2)


돈이란 참 무서운 것이죠. 우리가 그다지 유명세없고 그저 그런 중산층이었을 당시엔 거들떠보지조차 않았던 이들이, 비단 돈이 많아졌다는 이유만으로 꽃에, 옷에, 선물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문턱앞에서 줄을 서는 꼴을 보고있노라니, 어린 나이에도 실소가 나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최소한의 자금만을 주고 저희 아버지를 냉대하셨던 할아버지조차, 제가 네 살 즈음이 되었을때는 자연스럽게 집에 친인척들을 데리고 찾아와 자신의 아들이 가진 비범한 안목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마음에도 없는 억지웃음을 짓곤하셨습니다. 어린나이에 이해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 웃음의 용도와 필요성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파장인지, 제 입가에선 웃음이 끊였던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 조그만 아이가 받아들였던 유일한, 어떻게보면 일차원적이지만 가장 원론적인, 그 철학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배제하고, 억눌러야만 한다라는 것이었겠죠. 왜 그래야만 하는지를 생각할정도로 어른스럽지 못했던 아이의 눈에는 "해야한다"라는 의무성만이 머릿속에 남아있던걸수도 ​있​겠​었​습​니​다​만​-​.​.​ 그렇게본다면, 그때부터 진심이란건 이미 없어졌던게 아닐까합니다.

제 그런 경향은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졌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거리에 내몰릴 걱정이 없는 삶일지라도, 우리가족 사이에 흐르던 모종의 분위기는 저를 은연중에 압도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 중압감은 악몽으로 찾아오기도 했었더랬습니다. 인간은 우습게도 모종의 무언가에 받는 지배에는 전혀 반감이 없는 생물이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나약함은 결코 인정하기 싫어하는 모순되고 어리석은 족속들이라 결코 스스로가 무언가에 압도되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결국 마음 속 깊이 무의식적으로는 그 영향권에 지배받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있어서 상황을 부정하기위해 그 분위기, 그 사람, 그 집단등을 기피하고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양상은 "싫어한다", 깊게는 "증오한다"라는 표피적인, 동시에 극단적인 감정으로 드러나게됩니다. 저 역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고 볼 수 있지만, 제 경우엔 그 방법이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꺼려하던 그 분위기의 주체는 결국 부모님과 그 주변이었고, 타인, 혹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국 의존하고 수긍해야될 존재, 어떻게보면 생사와도 직결된 문제를 다루는 이들을 증오하고 기피한다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노라고 단언합니다. 그것이 애정에 기반하였든, 혹은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그 작고 앙큼한, 그렇기에 잔인한 아이가 선택한 방법은 그 분위기에 녹아드는 것이었습니다. 싫어하는 무언가를 피할수도, 부술수도, 역류시킬수도, 심지어는 제대로 된 영향력조차 가할 수 없다면 그것이 스스로에게 그나마 유리하게 작용하게끔 "녹아드는것"은, 사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무의미할만큼 동물적인 본능입니다. 사회를 만드는, 혹은 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된 대부분의 인류라면, 아니 굳이 인류가 아니더라도 사회를 이루는 모든 동물들이 사용하는 가장 영악하지만 효과적인 방법, 누구의 눈에도 나지않고 천천히 사회와 동화되어 이익도 피해도 최소화하고 눈과 귀를 닫는다.., 뭐 이야기가 잠시 와전된 것 같습니다만, 그럼 그 어린아이가 스스로가 갖는 감정따위는 완전히 배제한 채 그 압박감을 피하고 싶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렇게 영리하게 소심한 성격이 되는 방안을 선택했느냐? 물론 그렇진 않습니다. 제 어린시절의 성격이 그렇게 과묵하고 소심해졌던 것에는 단순히 중압감을 기피하고자한다는 맹목적인 이유만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도 그럴것이,
어린아이가 그것이 본능에 기반하던, 설령 사랑에 기반하던, 혹은 이성에 기반하던 어머니를 찾는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는 다시말해서 애정과 주변으로부터의 관심을 갈구하는것, 요컨대 그저 묻어가며 상황과 동화되는 것만으로는 얻기 힘든것들입니다. 제 유년기, 비록 그 가족 사이에 흐르던 딱딱하고 사무적인, 그로부터 비롯되는 중압감을 견딜 수는 없었어도 저에게도 애정에 대한 욕구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뜻대로 되어주지 않았죠. 물리적으론 풍요로웠지만, 심리적으론 전혀 그렇지못했습니다. 늘 얼굴에 씐 가면은 어느덧 스스로 자신과 동화되어 본인조차 가면을 벗을 수 없게되어버렸고, 그렇게 머리아픈 걸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걸 외면해버리는 어리석은 방법을 택해버린 소년은, 스스로의 마음에 낀 먹구름과 고독함의 이유를 눈치챌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눈치채기를 스스로 거부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소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모님은 얼굴한번 제대로 비추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가끔 볼 수 있었던 얼굴에는, 애석하게도 따스한 온정이나, 어머니나 아버지로서의 애정이 충만한 그런 형편좋은건 커녕, 감정자체가 제대로 ​실​려​있​지​않​았​습​니​다​.​ 그걸 보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자신을 돌이켜보면, 아마 제 자신도 똑같은 표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적어도 정상은 아니었겠죠.

바라는 바가 있다. 그것도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타인으로부터, 그 주체가 가장 가까워야할 부모로부터의 애정이다, 쉽사리 포기하기는 힘든 것이었겠죠. 그런 고독을 그 오랜시간동안 느끼고있었다면, 또 느껴야만한다면, 누구라도 버티기엔 힘들었을겁니다. 하지만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현실의 벽은, 때론 무척이나 빠르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제 경우엔 그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랐다는 점이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니 차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극도로 바라는 바가 있지만, 얻을 수는 없다. 노력을 해도, 염원을 해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얻고 싶은데 얻을 수 없다면, 손이 닿지 않아 결국엔 괴롭다면, 그걸 부정해버리면 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 마치 포도를 수일밤낮에 걸쳐 눈으로나마 좇던 여우의 그것처럼, 눈을 돌려버리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스스로에게 되뇌이고, 자기최면을 걸고, 결국엔 스스로가 꾸며놓은 거짓과 진실조차 구분할 수 없게되어버린다 해도 ─.

애정도, 타인으로부터의 관심도 필요하지 않아. 그렇기에 외로움을 느낄리도 없고, 혼자라는 사실에 슬퍼할 필요도 없어. ​괴​롭​지​않​으​니​까​.​그​렇​다​면​ 굳이 앞으로 나서있을 필요는 없잖아. 모난데없이, 눈에 띄는 데 없이, 그저 침묵과 미소, 이 둘만있으면 때로는 악몽을 수반하며 찾아오던 그 집안의 차가운 중압감에 시달릴필요조차 없다 ─, 어린 나이에 받아들였던 매정하고 삐걱거리는 철학은 그것의 옳고그름에 관계없이 어느덧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고있었고, 아마 제가 여태껏 해오면서 했던 무수한 선택들, 아마 지금 이순간에도 하고있는 그런 궁극의 이택을 가로지르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더이상, 그것이 옳거나, 혹은 그르다라는 애매모호한 잣대는 더이상 중요한게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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