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파 (5)
매년, 구기대회가 끝나면 호메이 고교는 바로 일주일간의 중간고사 준비 기간에 들어간다. 중간고사 준비 기간이란 시험 공부를 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부활동 종료 시간이 오후 5시로 제한되는 기간을 말했다.
속편한 학생들에게는 ‘힐링 위크’로 인식되고 있어 과연 이 기간이 시험 점수를 올리는 데 얼마나 공헌하는지는 의심스러웠지만, 그럼에도 학업을 우선시해 이 기간에는 활동 자체를 중단하는 부도 있었다. 사키와 토코의 여자 농구부도 그 중 하나였다.
원래라면 부활동이 없는 대신 시험공부에 힘써야 하는 사키와 토코였지만 오늘만은 그럴 수 없었다.
중요한 작전회의에 몰두하는 세 사람. 장소는 인적이 드물어진 2학년 A반 교실. 시간은 이제 곧 5시를 향하고 있었다.
“왠지, 좀…… 잘 될 것 같지 않은데…….”
“무슨 소리야! 내가 생각한 작전이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가즈히로의 마음 속 츳코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토코를 향해 허무하게 메아리쳤다.
토코가 생각한 작전이란 그 ‘무라노 사야카 퇴치’를 위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내용을 몇 번이나 들어도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느껴지는 건 절대 착각은 아니리라.
가즈히로가 역시 이 작전은 안 되겠어, 라고 토코에게 말하려 할 때 갑자기 교실 입구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갔어?”
셋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봤다. 거기에는 키 145센티의 아담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이름은 ‘쿠보 노도카’. 호메이 고교의 학생회장이었다.
노도카는 셋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까 방금 도서위원한테 들었는데 도서실에서 쫓겨났다며?”
노도카의 차분한 목소리가 역으로 화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셋은 엉겁결에 몸이 굳었다.
“그래서 시험공부 괜찮겠어?”
노도카는 팔짱을 끼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세 사람의 시험공부는 진전이 없었다. 그때 인적이 드물어진 교내에 오후 다섯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셋은 눈빛을 교환했다. 작전은 오후 다섯 시부터 준비개시였기 때문이다.
“이, 있잖아…… 노도카.”
“왜?”
“제대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한 ‘린’은 책상 위를 슬쩍 쳐다봤다. 최소한 작전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시험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책상 위에 흩어진 노트며 교과서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노도카가 한 수 위였다.
“그래? 별로 순조로워 보이지 않는데?”
노도카의 큰 눈망울이 ‘린’을 힐끗 쏘아봤다. 책상 위에 놓인 세 명의 노트는 하나같이 새하얗게 빈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공부하는 모습은 아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시험 준비 기간이니까 딴 짓 말고 공부해.”
노도카가 조금 어른스러운 말투로 ‘린’을 꾸짖었다.
“거, 걱정 말라니까! 진짜 할 거야!”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 말한 노도카는 또다시 ‘린’을 빤히 쳐다봤다. 가즈히로를 전혀 신용하지 않는 듯했다.
“그럼, 이쯤 해둘게. 나도 집에 가야 하니까.”
그렇게 말한 노도카는 교실을 뒤로했다. 학생회는 시험 준비 기간 중 교내 순찰도 겸하고 있었다. 꽤 고된 자리였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풀린 듯 사키와 토코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너, 쟤랑 어쩜 그렇게 말을 잘 해?!”
“응응! 나도 그 생각 했어! 빈틈도 없고 통 웃지도 않는 애랑!”
“아, 아니야! 진짜 다를 거 없는데!”
사키와 토코는 의심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즈히로도 조금 전 노도카의 표정에는 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혹시 사키와 토코가 옆에 있어서 그랬나? 그렇게 따지면 가즈히로를 대할 때는 평범하게 웃지만 가즈히로 이외의 누군가를 대할 때는 전혀 웃지 않는다……, 는 말이 된다.
가즈히로는 자문자답했다.
왜일까――?
마치 노도카가 타인과의 사이에 벽을 만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노도카에 한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이것만은 노도카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셋뿐이던 교실에 네 번째 인물이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
‘린’과 대조되는 굵은 목소리와 함께, 짧고 굵직한 체구를 흔들며 2학년 A반의 유일한 야구부원 오무라가 교실로 들어왔다.
야구부는 시험 준비 기간에 부활동을 쉬는 여자 농구부와는 달리 꾸준히 연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규칙대로 오후 5시에 연습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었다.
오무라의 표정은 확실히 긴장돼 있었다. 시합 중에도 본 적 없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린’은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고마운 협력자였다. 그런 실례는 피해야만 했다.
“수고했어. 그나저나 이상한 부탁을 해서 미안해…….”
“아, 아냐! 하나도 안 이상해! 괜찮아!”
평소에는 낮은 오무라의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이미 ‘들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수상했다. 사실은 ‘린’이 오늘 낮에
‘잠깐만 ‘남자친구’인 척 해주면 좋겠는데.’
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상태가 이상했다. 아무래도 ‘남자친구’라는 말에 과민반응하고 있는 듯했다.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이거늘.
‘하여튼 고지식함의 극치라니까…….’
그런 오무라의 뒤로 한 명이 더 나타났다. 162센티에 땅딸막한 오무라보다 키도 크고 훨씬 늘씬했다. 오무라처럼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얼굴이 눈에 띄지만 콧대도 오뚝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가즈히로는 눈에 익은 그 얼굴에 깜짝 놀랐다.
‘야, 야마자키……?!’
“여어!”
불쑥 얼굴을 내민 야마자키는 세 사람을 향해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여긴 2학년 A반 교실이었다. E반인 야마자키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야마자키를 쳐다보는 ‘린’과는 달리 사키는 태연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머, 야마자키가 어쩐 일이야? 별일이네.”
“아니~ 오무라한테 얘기 듣고 재미…… 아니, 걱정돼서 와 봤지.”
‘지금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고 말하려 했지……?’
뻔히 보이는 속셈에 ‘린’은 의심에 찬 눈빛을 보냈지만, 야마자키는 움찔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상큼하게 말을 걸어 왔다.
“그 ‘무라노 사야카’가 귀찮게 한다며? 가야사카, 내가 뒤에서 보고 있을 테니까 힘내.”
가벼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완전히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야구대회에서 대결했을 때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살기를 내뿜던 남자와 동일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그 모습을 보면 아마도 그게 진짜 성격이리라. 넉살도 참 좋다……, 고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불쾌하지 않은 천진난만함을 느꼈다.
“야마자키! 너 방해하면 안 돼!”
“알았어! 얌전히 구경만 할게!”
사키가 그렇게 재차 못을 박아도 야마자키는 여전히 가벼운 반응이었다. 다만, 둘의 대화를 듣던 가즈히로의 안에서는 또 다른 의문이 피어났다.
‘이 두 사람, 어떤 사이일까……?’
이 둘이 예전부터 아는 사이라는 점만은 대화 틈틈이 느낄 수 있었다. ‘무라노 사야카’를 아는 걸 보면 같은 중학교이기도 했으리라. 가능하면 더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린’은 복도로 나가 조심조심 창밖을 살폈다. 교정과 교문을 쭉 둘러보다 갑자기 꿀꺽 숨을 삼켰다. 바로 그 트윈테일 여고생…… 무라노 사야카가 문기둥에 기대어 누군가를…… 아니, ‘린’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대략 한 시간도 넘게 저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칭찬받아 마땅한 인내심이었다.
“어때? 아직도 있어?”
“있어…….”
아이들이 전부 복도 창문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다들 사야카의 모습을 확인한 뒤 얼굴이 굳어 갔다.
“자! 그럼 복습 들어갑니다~.”
‘린’, 사키, 토코, 오무라, 야마자키…… 불과 다섯 명뿐인 교실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작전회의가 시작됐다.
토코가 생각한 작전은 지극히 단순했다. ‘린’과 오무라가 같이 하교하는 모습을 보여 사야카에게 둘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걸 알면 이제 ‘린’을 귀찮게 하지는 않으리라……, 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토코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허점투성이 작전이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가즈히로는 그런 불안을 말해 봤지만,
“괜찮아♪ 결과야 어쨌든 재미있잖아♪”
“걱정할 필요 없어. 만약 실패해도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지진 않을 거야.”
“신경 쓰지 마! 어떤 결말이든 내가 끝까지 지켜봐 줄 테니까.”
라는 반 장난스러운 대답뿐이었다. 이러다 나만 옴팡 뒤집어쓰는 거 아냐……, 라는 가즈히로의 우려는 아랑곳없이 아이들은 점점 더 의기양양해져 갔다.
“결정됐으면 연습하자, 연습!”
“여, 연습……?”
사키의 묘한 외침에 ‘린’이 얼굴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뭘 물어! 팔짱 끼는 연습 말이야!”
“뭐어?”
‘린’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지만 ‘린’ 옆에 서있던 오무라는 순간온수기처럼 단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제부터 너희는 사귀는 사이로 보여야 해!”
“응응! 팔짱 끼는 연습 정도는 해 둬야지 않겠어?!”
사키와 토코의 알 듯 모를 듯한 억지에 ‘린’은 한 걸음 물러섰다. 오무라 쪽은 이미 극도의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자, 자! 오무라! 팔 내놔!”
사키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오무라는 팔을 내밀었다. 긴장한 탓인지 끼기긱……, 하고 녹슨 로봇이 움직이는 효과음이 들리는 듯했다.
‘린’은 오무라의 팔을 앞에 두고 고민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남자일 때 여자애가 팔짱을 껴 온 적은 있어도 여자의 몸으로 남자와 팔짱 끼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작전상 사귀는 연기는 필수였다. ‘린’은 머뭇머뭇 오른손으로 오무라의 팔을 잡았다.
“이, 이러면 돼?”
사키와 토코에게 마치 무슨 허가라도 받듯 자신 없는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만이 돌아왔다.
“둘 다 뭐야……. 진짜 이해가 안 되네.”
“그 정도로 사귀는 어필이 될 거라 생각하는 네가 더 이해 안 되거든!”
‘뭐어~?!’
“응응! 연인이면 하다못해…….”
그렇게 말하며 토코가 ‘린’의 몸을 오무라 쪽으로 밀었다.
“이 정도는 해야지♪”
갑자기 ‘린’의 몸이 오무라의 팔에 꼭 붙었다. 느닷없는 행운에 오무라는 숨이 멎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 감촉을 계속 맛보고 싶어……, 라는 생각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자의 슬픈 본능이었다.
“얘들아~ 이제 다른 애들 안 보여~”
창으로 밖을 살피던 야마자키가 현재 상황을 고했다. 쓸데없는 구경꾼들은 모두 빠지고 드디어 무대 준비 완료다.
“그럼, 연인 작전 개시!”
묘하게 적극적인 토코의 애니메이션 목소리를 신호로 다섯은 교문 앞으로 향했다.